* 김대호(작가/콘설턴트)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가난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린다. 나는 내 책<춤추는 인간>에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10층에서 태어나 20층까지 올라간 사람이 있고, 지하 1층에서 태어나 지상 1층까지 올라간 사람 중에 누가 더 능력자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부의 속성은 가속이 붙고 가난의 속성은 역가속이 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기회비용을 얻는다. 기회비용의 크기는 부모가 가진 부에 비례한다.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매몰비용을 얻는다. 부모가 가진 가난에 비례한다. 전자의 삶은 가만히 있어도 플러스가 되는 삶이라면 후자의 삶은 열심히 노력해도 마이너스가 되는 삶이다. 가난의 역가속이 노력의 에너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즉 10층에서 태어난 아이는 가진 10층의 자원으로 단번에 엘리베이터 공사를 해 20층까지 갈 수 있지만, 0층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무리 달려간다 해도 가난의 역가속으로 지하로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보겠다. 가난한 집에서 능력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치자. 그런데 가족이 진 빚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는 극적인 변수가 없다면 그가 가진 능력으로 평생 가족의 빚을 갚을 확률이 90% 이상이다. 단순히 노력의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이럴 경우 아무리 능력 있어도 평생 단 한 번의 기회비용을 얻을 확률은 5% 미만이다. 이걸 누군가 뚫고 나온다면 그는 초인에 가깝다. 무덤에서 기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더 능력자인가? 능력은 그에게 주어진 상황의 상대성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기회비용을 타고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트랙을 달린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기는 그저 100미터 트랙을 달리고 있을 뿐이지만, 옆 가난한 집 아이는 허들 트랙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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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보에 들렀을 때 점심 식사하러 가곤 하는 음식점이 있다. 그리 탐탁지는 않으나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서다. 일요일은 등산객이나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다. 그런 음식점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그렇다. 오늘은 특별해서 특별하지 않은 두 사람이 내 옆에 앉아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대화를 나눈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고주파 음성에 실려 전해지는 내용들이 여간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가까운 데에 있는 대형 개신교인 모 교회 성가대원이다. 교회가 워낙 커서 주일 낮에는 5부 예배까지 있다. 필경 그 큰 성가대 중 하나에 속한 중견 인물들일 테다. 어디든 그러하듯 교회 역시 정치가 무성하게 판치는 곳이다. 신앙과 봉사로 포장하지만 실로 잔혹한 파쟁들이 신을 내세워 일어난다. 다른 어떤 집단보다 고결해서 야비한 싸움꾼들이 득실거린다. 이 두 사람 또한 그 복마전 한가운데에 있다.

 

30분가량 대화하는 동안 열 마디 중 아홉 마디는 다른 교인 정죄. 나머지 한 마디는 자기 정당성 주장이다. 두 사람 중 하나에게 주도권이 있음은 물론이다. 시종 그가 대화 주제와 흐름을 관장한다. 와중에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며 어떻게 감사한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 둘 얼굴에 은혜받은빛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저들에게 과연 신앙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일까.

 

개신교 신앙과 구원 개념은 본원 오류를 지닌다. 신앙과 구원은 영성에 근거하고, 영성은 사유(私有)할 수 없는 네트워킹-우리말로는 팡이실이- 사건임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온 치명 실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교회 더구나 성가대 구성원을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신앙으로 도달한 구원 확신은 확실히 망상이다. 망상이 치루는 대가는 의외로 싸다; 결과를 모를 뿐이다. 그 맛에 숱한 사람들이 망상에 올라탄다.

 

식사를 마치고 사직단으로 향한다. 6번 국도 큰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구간 길 이름이 유래한 거대한 교회 건물이 나타난다. 아까 그 두 사람이 소속된 곳이다. 건물 외형은 그 교회가 표방하는 신학과 비전을 상징하겠지만 외부자인 내 눈에는 위압으로 다가온다. 이 차이에서 한국 보수 개신교 오늘날 위상이 정해진 듯하다. 내란 사건에 다양한 형태로 깊숙이 연루되었으나 괴괴하기만 한 풍경이 야속하게 기이하다.

 

사직단에 예를 올리고 인왕산 숲으로 들어간다. 자락길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마을로 나와 청와대와 경복궁 사잇길을 걷는다. 북촌을 거쳐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까지 걸으니 오후 네 시 반이다. 가을은 잔향으로 남고 맹동(孟冬) 본향이 깔린 역사-자연에 깃들었던 긴 시간이 마침내 회두리에 이른다. 자연에 예를 다한 문명, 그 장엄한 겸허에 허리 접고 돌아선다. 부디 종묘사직길이 지켜낼 수 있기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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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간 식당에서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자리를 잡는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난간을 두르고 높인 좌석이 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를 내려다보며 밥을 먹는 구조다. 이상하다 싶어 둘러보니 공간 전체가 둘로 나뉘고 내 쪽 좌석은 모두 저쪽보다 낮았다. 하필 내가 그 마주 가장자리에 앉은 거다. 아직은 내 옆자리에 손님이 없지만 언제라도 나는 아랫것처럼 밥을 먹어야 할 판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세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오고 직원은 바로 그 자리로 그들을 안내한다. 별생각 없이 편의에 따라 한 행동일 테지만 식당이 거의 빈 상태인지라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세 사람이 좌정한다. 바로 다음 순간 그중 한 사람이 말한다. “저쪽 자리로 옮기겠습니다. 옆자리 앉으신 분이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자리 많은데 구태여···.” 쉽지만 쉽지 않은 배려다. 귀가 쩍 열린다.

 

아주 특이한 목소리를 지닌 남자 사람이다. 명노민 배우 톤에 파스텔 음색이 깊게 깔린 매혹을 지녔다. 듣자마자 심사가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일부러 목소리를 작게 하지는 않아서 일행 이외 사람들에게도 그 말이 들리는데 여낙낙히 열리는 미닫이문처럼 지나간다. 어머니와 옆지기로 보이는 다른 두 여자 사람 음성은 상대적으로 쟁쟁한데, 그 둘을 다독이듯 대화 소리를 알맞게 수렴시키고 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거의 쉴 틈 없이 조곤조곤 이어간다. 남자 사람 목소리보다 더 경이로운 사건에 내가 빠져들고 있음을 어느 순간 알아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대화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개는 한 사람이 음성·어투, 발언 시간·분량, 제스처 따위로 꼭대기 올라앉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에 민감한 나는 그 여하를 누구보다 정확히 감지한다. 대단히 드문 경우다. 아름답고 귀하다. 감사하다.

 

저 가족 구성상으로 흔히 그려낼 수 있는 풍경이 전혀 아니다. 나는 소주 한 잔 가득히 따라 마시며 생각에 젖는다. 아무리 크고 잘난 담론으로 떠들어도 결국 민주정치는 이 소담한 풍경을 밑절미 삼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가 살풍경이면 정치는 민주를 떠난다. 떠난 민주를 되돌리려 광장은 여태 함성중이다. 함성은 이 세 사람 목소리를 품어 번지게 한다. 나는 광장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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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쿠데타를 저지하고 공화국 되찾기에 나선 지 1년이 지난 오늘 다시 똑같은 광장으로 나간다. 이럴 줄 몰랐던 사람이 어찌 나뿐이겠나. 국회의사당역은 일찌거니 북새판이 돼버렸다. 나쁜 일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때처럼 절박한 표정은 아닌 시민들이 조희대 사법부가 일으킨 쿠데타를 마지막 정리하려고 절실한 눈길 주고받으며 산과 바다로 되어가고 있다. 어렵사리 그들 사이를 흐르며 나도 지난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아뜩함과 섬뜩함에 자맥질한다.

 

이 헌걸찬 함성 뒤 후미진 모퉁이에서 한 줌 매국 떼거리가 턱없이 야기부린다. 멀쩡하게 생긴 20대 남자 사람 하나가 한동훈이 목숨 걸고 계엄 막았다는 현수막을 들고 길가에 생뚱맞게 서 있다. 저들에게서 거두어진 눈길은 다시 만난 민주 시민에게 어묵 쏘는학교 급식 노동자들로 향한다. 모락모락 김 나는 따뜻한 연대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다. 이 줄은 자주민주 공화국으로 더불어 가는 새벽길이다. 이 길엔 지루함도 초조함도 없다.

 

내 하루 생활 주기에 맞추어 조금 일찍 광장을 떠나며 쿠데타 세력 처단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해 본다. 저들이 하는 궤란쩍은 짓거리, 특히 법정에서 자행하는 협잡질을 보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게 내가 불길하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다. 내 기도가 명신이 형량에 단 하룬들 보태겠나만, 끝난 뒤에라도 소원 빌기를 멈추지 않을 테다. 오늘 광장 역시 그 기도 도량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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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제국주의를 공부한 지난 3년 동안 시종일관 느꼈던 자괴와 절망은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 대부분이 제국주의자, 그리고 그 부역자가 철저하고도 처절하게 은폐·조작·왜곡한 결과였음을 깨달은 데서 흘러나왔다. 어떻게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을까? 이렇게까지 전방위·전천후로 망가뜨렸는데 과연 전복은 가능할까? 이 통절함은 무디어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어 심란하기 그지없다.

 

매번 그 심란함을 안고 광장으로 간다. 광장에 서면 공부할 때 느낀 자괴와 절망이 생생한 현실 앞에서 육체성을 드러내며 폭발하곤 했던 기억으로 찰나마다 다시 부서진다. 그 찰나마다 나는 폭발로 찢겨나간 내 영혼을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다만 점 하나 되어 적요에 묻힌다. 구호를 따라 외치지도 못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못한다. 검푸른 왜소 의식으로 빨려 들어가 숨이 멎는다. 광장은 나를 살그머니 떠민다.

 

오늘따라 이 증후군을 일찍 감지한다. 발언자 가운데 누군가가 우리 세대에서는 세상 바뀌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해 광장을 채우고 또 채워야 한다.’라고 해서인지도 모른다.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추위를 탄다고 생각했는지 중년 여자 사람 하나가 핫팩을 건넨다. 다정함에 이끌려 한참이나 더 대열 속에 머문다. 쌓이는 시간 무게에 눌려 고개가 깊이 떨어지자 나는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선다. 유령처럼 떠서 흐른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웃음소리 같은 무엇이 일렁거린다. 내란 재판을 희화해서 말아먹으려는 법비(法匪) 해득거림인 듯도 하고, 내 알량함을 비웃는 토왜(土倭) 키들거림인 듯도 하다. 유령으로 듣자 하니 주술이로구나. 나는 화들짝 깨어나 정면으로 응시한다. 저들을 녹여 없애는 앙글거림으로 환생한다. 자괴와 절망 속에서 다시 태어나 아기 영혼으로 발맘발맘 걸어간다. 자괴와 절망이 끝내 걸터먹지 못하는 생명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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