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교보에 들렀을 때 점심 식사하러 가곤 하는 음식점이 있다. 그리 탐탁지는 않으나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서다. 일요일은 등산객이나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다. 그런 음식점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그렇다. 오늘은 특별해서 특별하지 않은 두 사람이 내 옆에 앉아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대화를 나눈다.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아도 고주파 음성에 실려 전해지는 내용들이 여간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가까운 데에 있는 대형 개신교인 모 교회 성가대원이다. 교회가 워낙 커서 주일 낮에는 5부 예배까지 있다. 필경 그 큰 성가대 중 하나에 속한 중견 인물들일 테다. 어디든 그러하듯 교회 역시 “정치”가 무성하게 판치는 곳이다. 신앙과 봉사로 포장하지만 실로 잔혹한 파쟁들이 신을 내세워 일어난다. 다른 어떤 집단보다 고결해서 야비한 싸움꾼들이 득실거린다. 이 두 사람 또한 그 복마전 한가운데에 있다.
30분가량 대화하는 동안 열 마디 중 아홉 마디는 다른 교인 ‘정죄’다. 나머지 한 마디는 자기 정당성 주장이다. 두 사람 중 하나에게 주도권이 있음은 물론이다. 시종 그가 대화 주제와 흐름을 관장한다. 와중에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며 어떻게 감사한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 둘 얼굴에 “은혜받은” 빛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저들에게 과연 신앙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일까.
개신교 신앙과 구원 개념은 본원 오류를 지닌다. 신앙과 구원은 영성에 근거하고, 영성은 사유(私有)할 수 없는 네트워킹-우리말로는 팡이실이- 사건임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온 치명 실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교회 더구나 성가대 구성원을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신앙으로 도달한 구원 확신은 확실히 망상이다. 망상이 치루는 대가는 의외로 싸다; 결과를 모를 뿐이다. 그 맛에 숱한 사람들이 망상에 올라탄다.
식사를 마치고 사직단으로 향한다. 6번 국도 큰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구간 길 이름이 유래한 거대한 교회 건물이 나타난다. 아까 그 두 사람이 소속된 곳이다. 건물 외형은 그 교회가 표방하는 신학과 비전을 상징하겠지만 외부자인 내 눈에는 위압으로 다가온다. 이 차이에서 한국 보수 개신교 오늘날 위상이 정해진 듯하다. 내란 사건에 다양한 형태로 깊숙이 연루되었으나 괴괴하기만 한 풍경이 야속하게 기이하다.
사직단에 예를 올리고 인왕산 숲으로 들어간다. 자락길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마을로 나와 청와대와 경복궁 사잇길을 걷는다. 북촌을 거쳐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까지 걸으니 오후 네 시 반이다. 가을은 잔향으로 남고 맹동(孟冬) 본향이 깔린 역사-자연에 깃들었던 긴 시간이 마침내 회두리에 이른다. 자연에 예를 다한 문명, 그 장엄한 겸허에 허리 접고 돌아선다. 부디 “종묘사직” 길이 지켜낼 수 있기를···.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