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통시적 얼개 김춘추의 저주 이야기에 이어서 누락시킬 수 없는 통시적 서사가 두 가지 더 있다: (1) 미군정 이야기 (2) 식민지 시대 준동했던 특권층 부역자들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 어떻게 가족, 친인척, 나아가 더 큰 패거리로 번성해 갔으며, 그 인맥 간 합종연횡, 그리고 일본 지원으로 사회 각 분야를 어떻게 석권했는가, 하는 역사 이야기. 후자는 어렵다.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직 이 문제에 관한 종합적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전문 연구자도 아닌 나로서는 우선 전자에 집중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여러 출판사가 거절해 원고 상태로 있는 중용 416<34-29: 군자는 명예를 백성의 가슴 속에 둔다> 내용 일부를 그대로 가져옴.)

 

일제가 항복한 직후 미군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점령하였습니다. 194597미 육군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1는 점령지 내의 입법, 행정, 사법에 걸친 모든 권력을 점령군이 장악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 점령군 사령관이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우리는 그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대한민국을 구원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점령군 수장으로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왜곡한 장본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점령군은 군정 실시를 위해 군정청을 설치하였습니다. 군정청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통치 기조를 짰습니다. 한국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방침을 바꾸어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 소장을 초대 군정장관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의 종전 기구를 그대로 유지하였음은 물론입니다. 당연히 일본인 고위 관료들을 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남한 상황 및 행정 각 분야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군정청에 제공함으로써 군정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군정의 이런 기조는 해방 이후 식민 유제와 부역자 청산을 통해 새로운 독립 국가가 수립되기를 기대하던 한국인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군정의 법률체계였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의 명령(포고, 명령, 지령)과 군정청 법령은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군정이 명시적으로 폐기하지 않은 식민지 법률 모두를 그대로 살려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군정법령 21는 지방의 모든 법규와 관례와 식민지 행정조직의 유지를 명하였고, 조선 총독이 행하던 모든 권한을 군정장관이 행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임시보안령, 보안법, 집회취체령, 조선불온문서임시취체령등 대표적인 악법을 그대로 존속시켰습니다.

 

19463월부터는 군정에 한국인을 본격적으로 참여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식민지 관료와 우익세력에게 행정 실권을 이양해가는 절차였습니다.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이른바 신식민지 통치는 이렇게 철저히 일제 식민지 체제와 부역 세력을 근간으로 하여 기조를 잡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독립 국가의 물리적 토대가 되는 군대와 경찰 창설 문제입니다. 미군정은 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 설치령을 공포하면서 좌익 성향이 강한 국군준비대 해체를 명령했습니다. 이후 자발적으로 생겨났던 군대 조직을 통폐합하면서 만주군·일본군 사관·부사관 출신과 우익을 중심으로 국군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경찰은 창설이 아니라 식민지 경찰 복원이었습니다. 조직에서도 식민지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인력에서도 식민지 경찰 관료를 핵심에 채워 넣었습니다. 경위 이상 고위직의 경우 식민지 경찰 경력자 비율이 80%를 넘었습니다.

 

결국 이런 기반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부도덕하고 불의한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을 팔아먹었던 왕족·노론과 식민지 신흥 부역 세력은 그 어떤 단죄도 받지 않고 승승장구했습니다. 여론에 떠밀려 만들어진 반민특위도 사실상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식민지 35년 동안 일제의 마름 노릇을 하며 호의호식했던 자들 가운데 오직 2명만이 공식적으로 처벌받았다고 합니다. 5년의 나치 점령 기간을 겪은 프랑스와 비교해보십시오. 드골 정부는 99만여 명의 나치 협력자를 투옥하고 이들 중 5,700여 명은 사형, 2,700여 명은 종신 강제노동, 22,800명은 징역, 1만여 명에게는 유기한 강제노동이 선고하였습니다. 또한 95,000명에게는 부역죄 형을 선고하고 7만여 명의 공민권을 박탈했습니다. 언론에 대한 단죄는 특히 가혹했습니다. 900여 개의 신문 잡지 가운데 649곳을 폐간하거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로 살아남은 매판 세력은 북한 정권과 체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반공을 등에 업고 식민지 체제와 본질이 같은 독재체제를 자연스럽게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에는 개발독재의 전선에 섬으로써 국가 경제의 역군이라는 영예까지 얻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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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에서 원효 사상을 논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경주김씨 신라가 일으켜, 삼국의 대립을 끝내고 민족의 대통합을 이룬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전승되고 기억되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저 삼국 전쟁은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내면 진실을 지닙니다. 648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밀약을 맺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데 성공하면 대동강 이북의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내용입니다. 민족사 전체를 왜곡한 매판의 길은 이렇게 열렸습니다. 그래 놓고 삼한통일로 상징조작을 한 것입니다. 광활한 고구려 영토 대부분과 그 백성은 물론 수많은 백제 백성까지 팔아넘기고 당의 연호 아래 그 체제를 국가 경영의 근간으로 삼은 일을 두고 어찌 삼한통일이라 할 것입니까. 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일까요.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은 흉노 수장으로 한건국에 공을 세워 투후가 된 김일제가 자기 조상이라 천명했습니다. 김일제 후손은 왕망의 난이 일어나 입지가 흔들리자 한반도 동남부로 이동해 왔습니다. 거기서 내세운 시조가 바로 김알지입니다사실이면 사실일수록 아니면 아닐수록 이 주장은 김일제 집단과 김춘추 집단의 매판적 본질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니 절묘할 따름입니다. 만일 흉노가 동이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라면 김춘추 집단의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모순입니다. 당과 야합해 동이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치면서 삼한통일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 경우,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매판 행위를 은폐하려는 술수일 따름입니다. 만일 흉노가 동이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라면 김춘추 집단의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기만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와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은 민족통일이 아니라, 이민족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침략전쟁을 은폐하려는 술수일 따름입니다.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網羅四方? 실로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덕업德業은 전쟁입니다. 일신日新은 당나라 좇는 것입니다. 한반도 허리 아래 땅에 웅크리고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방四方을 망라網羅하는 게 아닙니다. 사방을 망보는 것입니다. 거창한 이름 자체가 모순이고 기만입니다.

 

삼국 전쟁이 끝난 뒤 짧은 세월의 번영기를 빼고 신라는 급격히 쇠락과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잠재력을 흡수하지 못한 사이비 통일임을 증명하는 결과입니다. 흥융興戎의 피해가 흥륭興隆을 심각하게 잠식해버린 것입니다. 신라 그 매판의 역사는 동이 정체성을 지닌 왕건 집단, 고려의 건국으로 외막이 내려집니다. 왕건 집단은 동이의 가치, 고구려 재현을 기치로 세웁니다. 그러나 신라의 내막을 온존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김부식으로 상징되는 신라 집단이 도리어 흉노의 꿈을 재현합니다. 고려를 송에 조아리게 하고, 원에 무릎꿇림으로써 고구려를 당에 팔아넘긴 그 매판적 조상의 길로 회귀합니다. 고려는 얼마간의 회복국토와 KOREA 이름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고려 그 아쉬운 동이 재건의 역사는 이성계 집단, 조선의 건국으로 외막이 내려집니다. 이성계 집단은 동이의 가치, 고조선의 재현을 기치로 세웁니다. 그러나 고려와 같이, 신라의 내막을 뿌리 뽑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송시열로 상징되는 서인 노론 신라 집단이 도리어 흉노의 꿈을 재현합니다. 조선을 명에 조아리게 하고, 왜에 갖다 바침으로써 고구려를 당에 팔아넘긴 그 매판적 조상의 길로 회귀합니다. 조선은 압록·두만 경계와 한글을 남기고 사라집니다.”(75~77)

 

특권층 부역 집단을 통시적 축으로 삼아 구성해본 경주김씨 신라에서 조선까지 얼개 서사다. 동의할 사람은 드물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신라 집단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인류-인류학을 만들면서 서구인이 말한 그 인류-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대뜸 공감할 일이다. 신라 집단 실재는 상상력 공동체 인류아닌 분석 집단 서구인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이 대목을 읽었던 독자 가운데 김일제 후손 이야기에 관해 묻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실제 <문무왕릉비>에 위 내용이 실려 있으며, 같은 내용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있다. 제 가계를 신성하게 보이기 위해 날조했다 하더라도 그런 의식을 지녔으며 훗날을 위해 명문화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이 무의식으로 침윤되어 오늘날 영남인 정치적 정체성을 강고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서사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김춘추의 저주.

 

김춘추가 이세민(태자 시절 당 태종)과 맺은 늑약은 단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를 거듭하며 특권층 부역 집단은 송----미로 이어지는 제국과 유·무명 늑약을 수없이 맺어왔다. 마침내 가쓰라 태프트 늑약을 제물 삼아 을사년(1905) 보호 늑약, 경술년(1910) 합방 늑약으로 조선 숨통을 끊기까지 저주는 계속됐다. 국권 회복 이후에도 이승만이 국군통수권을 헌납한 대전 늑약(1950), 박정희가 일제를 면죄한 한일 늑약(1965), 박정희 딸 근혜와 뉴라이트 윤기중 아들 석열이 맺은 일군 성노예 늑약(2015, 2023)으로까지 이어지며 유구한 저주로 작동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지금 하는 짓은 이완용 집단이 경술년에 했던 짓을 떠올리게 한다. 김춘추의 저주는 힘이 이토록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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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과 반역에 대한 내 통절한 각성은 고백이 아니다. 내면을 성찰하고 표현하는 인간 정신 작용은 더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네트워킹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정치경제를 종식하고 공동체 선물 세계를 여는 존재론이자 윤리학이다.

 

그 세계 존재론은 살해당한 생명을 되불러내며, 그 윤리학은 수탈당한 풍경을 되돌려놓는다. 누가 어떻게 죽음으로 내몰렸는지, 무엇이 어떻게 소유물로 뒤바뀌었는지 알아야만 존재는 복원되고 윤리는 완성된다. 존재도 윤리도 각각 알맞은 고유 맥락을 구성한다.

 

우리는 우리 맥락에서 공동체 선물 세계를 열어간다. 조선 반도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그 마름 이야기를 옹골차게 해야만 그럴 수 있다. 이제 그 남다른 이야기를 구성해야만 한다. 남다른 이야기라서 남과 더불어 펼치면 모든 이야기가 한 이야기로 어우러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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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숲을 연속해서 두 번 들어가기는 처음이지 싶다. 검단 숲, 이번에는 서쪽 사면 계곡으로 들어가 능선 거쳐 옆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 아닌 길을 만들어서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 나왔다. 지난주 나올 때 남은 아쉬움을 덜기 위해서였으니 역시 소식을 전했고 돌귀를 남겼다.

 

산곡천을 거슬러 따라가며 남한산을 향한다. 천변 길은 물론 가재울 골짜기로 들어가 점점이 박힌 농가·전원주택·별장을 지나는 동안 사람은 거의 없고 풍경은 어수선했다. 생각 않고 버린 폐기물로 할퀴어진 물, 길섶, 자투리땅들을 보는 내내 아리고 쓰린 통증이 구시렁거린다.

 

모름지기 그 통증은 풍경이 내게 건네는 하소연과 신음에서 비롯했으리라. 심사가 편치 않으니 어쩌다 마주치는 농부에게도 눈길 보내지 못한 채, 남한산 동쪽 계곡으로 스며든다. 숲 깊이 들어가 500고지에 닿을 때까지 인적이 전혀 없다. 인적 없으니 그제야 마음이 눅는다.



고요한 숲에서 만난 작은 습지가 도롱뇽과 개구리알을 품고 있다. 낙엽이 덮여서 보이지 않는 작은 도랑물 소리가 들려온다. 연달래꽃 가족이 우꾼우꾼 마지막 천명을 피워올린다. 능선, 그리고 그 너머 인간 훤요만이 지나친 욕망, 넘치는 술수로 자신과 자연을 오염시킬 뿐이다.

 

산성에 올라 둘러본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522m), 위치상 특히 서울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일이 확인하다가 문득, 거대한 아파트 바다가 산들을 섬으로 가두고 있는 광경을 목도한다. 5천 년 역사를 지닌 나라, 6백 년 고도는 어디 가고 식민지 살풍경만 가득하다.



예정에 없던 청량산 길을 걸어 내려오다 청량한 약수로 목을 축인다. 맑은 기분으로 물길 따라 숲 밖으로 향하는데 느닷없는 굴착기 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무슨 터널 공사 같은 작업을 하는 모양이다. 식민지 토건은 영일 없구나. 6시간 산행한 다리보다 가슴이 더 무겁다.


지하철 안에서 생각한다. 왜 산 가장자리 마을은 모두 궁상맞고 너저분한 모습일까? 산처럼 푸근하지도 도심처럼 깔끔하지도 않고 어리숙한 욕망만 맨몸으로 나뒹굴까? 분명히 둘 다일 수도 있는데, 왜 둘 다가 아닐까? 스스로 내팽개치는 식민지 변방인 심성이 투영돼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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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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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1일 어느 특권층 부역자가 주인인 신문에 올라온 글 일부다.


20세가 되면서 대학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 몇 해 머무는 동안에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기에 게으른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살았구나, 하는 죄책감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너무 나태했다. 놀고먹는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고 노랫가락에도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는 흥겨움이 깔려있었다. 양반들은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이쑤시개는 물고 다녔다. 배불리 먹고 나서는 모습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내 아내 얘기도 그랬다. 어려서 친구들과 놀면서, 출가하게 되면 우편배달부한테 가야지 농사꾼에게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본인들과 같이 열심히 일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었다.”(<김형석의 100년 산책>)

 

참담하다. 104세 철학자 사유에서 나온 글이라니. 그가 평생 공부하고 가르친 철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스무 살 이전 특권층 부역자 소년이 본 식민지 풍경에 100세가 넘은 지금도 변함없는 해석을 가하는 철학자, 그 정신적 neoteny가 너무나 애잔하다. 설혹 그 해석이 옳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국민은 게으른 민족을 지배하는 권리를 지닌다는 식으로 전형적 제국주의 발상을 하면서도 전혀 각성이 없다. 아니. 다 차치하고라도 전체적인 글 수준과 기본 어휘 선택조차 중고생 백일장과 방불한데 100년 관록 자랑할 지면을 내주다니. 심지어 그 신문 인기 검색어 1위란다. 누구는 노망 아니냐 한다. 아니다. 정확히 특권층 부역자 심리 상태를 반영한 글이다. 누구는 무슨 언론이 이러냐 한다. 아니다. 정확히 이런 짓 하는 집단이 바로 이 나라, 그러니까 중첩 식민지 부역 언론이다. 참담하다는 말도 물색없다.

 

예순여덟 나이에 제국주의를 공부하고 부역 서사를 쓰겠다고 나선 내 자신이 심히 늦되다 탄식했는데, 마흔 살 가까이나 더 많은 철학자, 아니 철학가 아직도, 아니 끝내 이런 말이나 한다니 적잖이 안심이다 싶어서 씁쓸하기 짝이 없다. 지식이든 지성이든 지혜든 패거리 우물에 빠지면 그야말로 한심한 bullshit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철학처럼 오래 살 확률은 매우 낮을 터이므로 여생이 그리 길지 않다. 여태까지 살아온 삶 돌이키려 지금이라도 이 글을 쓰는 만큼 헛된 짓거리가 되지 않도록 각고해야겠다.


각고를 벼린다. 도봉 숲이 내게 들려준 말은 부역자 각성이었다.(2023.2.14. <부역 생태 서사>) 검단 숲이 내게 들려준 말은 반역자 각성이었다. 검단 숲을 다녀온 뒤 소식을 기다리던 그제(2023.4.19.) 새벽 홀연 잠에서 깨는 순간 내 삶에 똬리 튼 개체/미시 제국주의를 통렬히 깨달았다. human-biont로서 내가 나와 공생하고 있는 nonhuman-biom에게 말살 전쟁을 벌여왔다고 검단 숲이 말해주어서다. 메모하려 스마트폰을 열자 처음 내 눈으로 날아든 짱돌이 바로 앞에 인용한 그 글이다. 설마 타산지석일 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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