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 세계에 유례없이 국립대학교(인 서울대학교)가 원톱으로 부동 군림하는 고등교육 지정학이야말로 대한민국 상징적인 부역 풍경이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사학 가운데 실팍한 부역 서사를 지니는 몇몇 대학교 이야기를 해본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지닌 홍익대학교부터 시작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학교는 대종교 단군 신앙에 근원을 둔 민족주의 이념-홍익인간 이화세계-으로 해방 직후 세워졌다. 해방 직후 정치 공간은 민족주의 진영 주축이었던 홍익대학교가 반공주의·공산주의 모두에게 소외당하는 상황을 낳았고, 학교와 재단 소유는 물론 교육 이념마저 흔들리고 왜곡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은 민족주의 진영에게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를 반민족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진영에 가한 쿠데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대종교 총전교였으며, 홍익대학교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흥수의 손자 이주혁). 이어서 1950년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 부역 정권은 홍익대 주요 인물들을 빨갱이로 몰아 축출했다. 한국동란이 발발하고 이들이 입북하거나 납북되면서 홍익대는 거점을 거의 다 상실했다. 전후 학교 상황이 더 어려워지자 그 틈새를 자유당 이도영과 그 세력이 파고들어서 학교를 접수하고 본디 대종교와 이흥수를 역사에서마저 도려내기 시작했다. 박정희 집권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저들이 조선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었던 특권층 부역자 엄상섭을 이사로 밀어 넣으면서 학교는 민족 자주에서 친일 부역으로 본성을 바꿔버리고 말았다.(이상 내용 출처: 프레시안) 한참 뒤 홍대 재학생 김승구에게서 우연히 촉발한 역사 되찾기 투쟁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기는 했지만, 여전히 홍익대학교는 특권층 부역자 손아귀에 있다. 저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여태껏 저질러 온 짓이 있는 한,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경희대학교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이 학교는 본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모체로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3,900명 졸업생을 키워내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도 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해방 후 6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 성재 이시영이 신흥전문학원으로 계승하고 나중에 신흥대학까지 나아갔다. 한국전쟁으로 운영이 어려운 틈을 타서 자유당 쪽 인물인 조영식이 접수하면서 재단과 학교 이름 모두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영식은 물론 그 아들 조정원도 경희대학교 역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여러 노력에 계속 묵묵부답이다. 이유를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 주장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민족사학고려대학교. 그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본디 이용익(대한제국 탁지부 대신)이 설립했다. 보성이라는 이름을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하고 황실 내탕금을 지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민족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설립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용익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천도교 손병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김성수가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김성수가 시작하고부터는 그 후손이 대를 이어가며 고려대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학교 이사장은 그대로 동아일보 회장이다. 말하자면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하나다. 김성수가 특권층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상황에서 동아일보 사주가 점하는 사회정치적 위상을 보면 고려대학교를 어떻게 경영할지, 그렇게 경영되는 학교를 단칼에 민족사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꼭 물어봐야 알 일은 아니다.

 

국민대학교 이야기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 전형에 해당한다. 아래 내용은 뉴스타파(2019.7.25.) 박중석 <족벌 사학과 세습>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대학 역사에서 국민대학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건립을 주도했다. 국민대학교 설립 기성회가 결성됐는데, 고문에는 백범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은 조소앙, 회장에는 신익희가 선임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11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학 설립을 미군정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해방 조국에서 임시정부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키울 교육기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배움을 주지 못해 한으로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함도 담겨 있었다.

 

교사 터와 시설을 불하받지 못하는 등 당시 미군정청의 비협조에도 국민대학교는 19469월 문을 열었다. 신익희가 초대 학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익희가 물러나고,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민대는 이승만의 비호 속에 친일 세력이 득세하면서 서서히 변질하기 시작했다. 총독부 관료 등 친일 인사들이 잇달아 학장 자리를 차지했다.

 

초대 학장 신익희가 물러난 국민대에는 친일 전력을 지닌 이들이 총장과 이사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대 학장, 박이순은 일제강점기 군수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는 국방헌금,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385월 박이순은 황국신민으로서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썼다.

 

4대 학장 최문경도 일제 강점기 군수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 최연국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최문경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잘나갔다. 외무부 차관과 대사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중형을 내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일제 판사 김세완도 국민대 학장과 이사장이 됐다.

 

독재에 부역했던 이들도 국민대 총장과 이사장을 꿰찼다. 1984년부터 4년 동안 국민대 3대 총장을 지낸 정일영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유신정우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보위 위원에 참여한 정범석은 그 이듬해 국민대 초대 총장에 올랐다. 박정희 정권 때 장관과 부총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는 등 줄곧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신현확도 4년 동안 국민대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국민대 이사장은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의 손자다.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국민대학을 친일 반민족 행위자와 독재 부역자들이 지배하다가, 이제는 재벌 후손이 쥐고 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전문위원)는 말한다,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대학을 만들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사립대학 부역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접는다. 그야말로 빙산 일각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립대학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면 먹을 만한 과일이 아니라 통째로 버려야 할 썩은 과일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는지 나로서는 아득하다. 끝내 해결은 되지 않고 적정한 해소만이 답일까.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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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과 그 연장선인 서울대학교 인맥이 말글 부역에서 근본적 장악력을 행사한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서사를 교육기관, 교육자, 그 이전 교육 문제로 소급해가며 전개하도록 안내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문 다음에 기본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교육이므로 여기가 이야기할 바른 자리다. 교육기관 문제는 서울대학교를 필두로, 사립대학교, 중고등학교,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사학 집단을 이야기한다. 교육자 문제는 그 교육기관을 형성하고 소유하며 교육행위를 하는 부역자를 이야기한다. 교육 문제는 식민지 시절과 그 이후 부역자가 받은 제국 교육, 그리고 그들이 주도하는 현재 대한민국 교육 내용을 이야기한다.

 

1. 경성제국대학은 태생부터 음모였다. 큰 취지는 물론 세부 구성까지 식민지 교육에 적합하도록 기획한 교육 조직이다.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으로 출범하고 조선인 입학을 제한한 사실이 그 증거다. 전쟁에 유용하다고 판단해 뒤늦게 이공학부를 개설했으나 조선인 입학은 더욱 엄격히 제한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이 이양해 경성대학으로 바꿨다가 1946년 서울대학교를 설립하면서 통합했다. 바로 이 대목이 결정적 문제다. 일제 부역자를 청산하기는커녕 그대로 흡수해 오늘날 서울대학교를 이 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가 명실상부한 국립대학교이기 위해서는 경성제국대학교와 연을 끊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이런 논쟁이 일어나듯, 경성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부역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험한 시절 대체 누가 무슨 능력-재력, 일본어 입시에 합격할 학습력-으로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실한 부역자 자녀 아니면 입학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어야 한다. 20년 남짓 시간에 배출한 810여 명 졸업자가 고급 엘리트로서 그 뒤 어떤 지위를 누리며 살았고, 그 후손은 현재 어떠한지,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역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저들 대부분을 부역 서사에서 제외할 이유란 없다고 본다.

 

오늘 여기서 서울대학교를 생각해본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이 나라를 통치할 무렵 육서당이란 말이 널리 떠돌았다.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출신들이 나라를 쥐고 흔든다는 일차적 의미 뒤에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지금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없이 서울대학교, 특히 법대 출신만으로 두 의미 모두를 충족하고도 남는다. 저들은 경성제국대학 나와 부역하던 부조 또는 선배와 똑같은 의식 속에 있다. 저들은 정치적 보수 또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그냥 단세포적 부역 세력일 뿐이다. 단세포적 지식분자는 미망이다. 서울대학교 세계 순위(56)가 싱가포르국립대학(19)에도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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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회 각 분야 이야기로 넘어간다. 사실 이 이야기만큼 중요한 무엇은 없다. 우리가 선 땅을 온전히 한 바퀴 돌면서 지평선을 응시해 눈앞에 어떻게 부역 온 풍경이 낱낱이 그 얼굴을 드러내는지 봐야만 한다. 여기에 관한 연구 또한 기대만큼 잘돼 있지 않다. 역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특권층 부역자들이 많은 진실을 은폐했고, 그 증거를 인멸했기 때문이다. 분야마다 공부 질이나 양이 다르기도 하고, 내가 모르기도 하니 그 한계 안에서 체계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최소한 기본적인 손대기나마 진행한다.

 

말글(어문) 분야 이야기로 시작한다. 말글 분야는 국어학이라는 학문 문제를 다룰 때 하면 되지만, 그 어떤 분야보다도 우선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가장 먼저 입 댄다. 말글 부역 풍경이야말로 모든 부역 풍경의 출발이다. 인간은 결국 말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진실을 간파한 제국주의는 식민지 토착어를 말살하는 전략부터 구사했다. 일제라고 어찌 예외였겠는가. 특권층 부역자도 여기부터 첨병 노릇을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까지 저들은 그 짓을 지속·강화하고 있다. 그 속살을 살펴본다.

 

우리는 이미 오랜 세월 한자 식민지로 살아왔다. 우리 글이 없었던 탓으로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니, 식민지라 표현하는 일은 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에도 5백 년 동안 한자가 공식 문자였다는 사실과 마주하면 유구한 특권층 부역 세력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 시스템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이 공식 문자인 현재도 여전히 한자-어는 한글-말과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다. 이 바탕 위에 한자 의존도가 훨씬 높은 일본어가 들어와 식민 그늘은 더 어두워졌다.

 

일본어 식 말하기와 글쓰기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일본식 한자어가 우리식 한자어를 대체했으며, 일본 어휘를 우리 어휘인 양 쓴다. 일반 대중이 이런 오류에 휩싸여 있는 일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국어학자, 교육자, 전문적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 문학인, 언론·방송인 입에서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실로 참담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도리어 언어 대중을 호도하니 말이다. 설상가상 미군정 이후 영어가 또 다른 지배 언어로 등극했다. 영어식 훼손은 더욱 큰 위력으로 우리 말글 목을 조른다.

 

말글 부역 본진은 물론 특권층 부역 집단이다. 저들 내부 공식 언어는 당연히 일본어와 미국식 영어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저들 종주국, 아니 조국 언어는 의당 다른 근본 없는” “들 언어와 결별해야 했다. 그리고 근본 없는 것들은, 일본어·영어식 한국어쓰게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여겨 만든 조직이 다름 아닌 국립국어원이다.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적과 일반인이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국립국어원은 어지러운 국어 상태를 고의로 방치 심지어 유도하고 있다. 그 결정적 증거가 표준국어대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큰사전이 널리 쓰이는 길을 원천 봉쇄해버렸다. 이는 조만식을 위시한 자주 인사들이 민립대학 운동을 벌이자 이를 무력화하려고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던 사건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그 경성제국대학 부역 인맥이 국립국어원을 장악했고, 지금까지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 철밥통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아베 노부유키가 말한 전형적인 좋은 정책이다. 좋은 정책을 통해 식민지 말글살이는 제국 입맛에 맞게 발전하리라 굳게 믿는다.

 

221은 국제 모국어의 날이다. 개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이자, 공동체 생명·문화 구성을 담당하는 언어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다양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정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약 6,000종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으며, 실제로 2주마다 1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영어 지배 구도가 굳어지고 있어서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이에 맞서 프랑스·독일·러시아는 자국어 보호를 천명하고 나섰는데 우리는 이 지경이다. 아베의 축원은 과연 영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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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제일봉은 백운(白雲)이다. 높이로만 따지면 가섭(1157m)이지만 자태나 전망을 고려해서 이렇게 평하는 다산 선생 이외 여러 사람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2023430일 나는 사나사(舍那寺) 계곡으로 들어가 백운봉 아미(蛾眉)을 스치고 연수리 계곡으로 나와 그 으뜸 생태에 극적으로 휘감겨보았다.



경의·중앙선 오빈역에서 내려 마을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고 작은 재를 두 개 넘어 크게 헤매지 않고 사나사에 도착한다. 스마트폰 지도에 그려진 길이 정확하지 않아 계곡 길로 진입하는 입구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여러 번 그랬듯 방향만을 정확히 잡고 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여러 번 되풀이해온 행동이지만 사실 그때마다 무섭다. 아무리 낮아도 산은 언제 어디서나 치명적일 수 있다. 아득함과 싸우며 헤매는 와중에도 스마트폰 보고 방향 확인하는 일을 수시로 해 큰 동선을 만들어가던 한 순간, 계곡 물소리 낭자한 어느 지점 건너편에 길처럼 보이는 풍경이 와락 다가든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개울을 건너니, ! 본디 가려던 그 길. 한 시간 이상 가파르고 험한 산비탈을 헤매고야 만나다니. 그다음, 길 따라 올라가는 일이지만 여간 어렵지 않다. 경사가 심한데다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인적 전혀 없는 산을 오르자니 더욱 위험하게 느껴진다. 마침내 도달한 능선 구름재. 거기서 다시 백운봉을 향한다. 능선길 또한 무섭다. 발 디디는 곳 너비가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 수두룩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절벽 수준인 좌우 골짜기로 굴러떨어질 판이다. 숙의 치료할 때 내담자에게 해주는 말, 그러니까 감정 상태를 평가 없이 그대로 인정해 소리 내어 말해주라는 말을 그대로 내게 한다: “무섭다.” 연수리 계곡과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러 겨우 물 한 모금 마신다. 정상을 밟지 않는다는 내 식 예절에 따라 이내 내려가기 시작한다. 어렵긴 마찬가지다. 밧줄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간이 제법 된다. 길 잃을 위험은 없지만, 바닥에 온갖 모양으로 나뒹구는 돌덩어리가 잠시도 방심하지 못하게 한다. 너무나 배가 고파 뭘 좀 먹어야겠다 싶은데 아연 길이 편해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시원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고요히 숲을 나온다. 길게 이어지는 연수리 마을 길을 따라 걷고 걸어 용문역에 도착하니, 출발한 지 꼬박 여섯 시간이 지난 오후 440분이다.

 

용문산은 높이에 비해 품이 너른 큰 산이다. 골골이 뭇 인간이 깃들어 살아간다.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인간이 어떻게 그 관대함을 악용해 깃듦 너머 파고듦으로까지 나아갔는지 아프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도처에 전원주택, 웰빙 또는 테마 빌리지, 별장이 어떻게 숲에 쌩 까는살풍경을 그려내며 번져가는지 숲은 인간 귀로는 듣지 못하는 신음과 울음소리로 토해내고 있었다.



여느 때는 숲에 들어가기 전과 숲에서 나올 때 감정 상태가 사뭇 달랐다. 용문산 백운봉 숲은 그렇지 않았다. 앞뒤로 기나긴 테라포밍, 저 악명 높은 자국 정착형 식민주의 행진을 똑같이 목격했기 때문일 테다. 어떻게 이리 속살까지 파고들며 자기 나라를 스스로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을까? 그 장애 상태 정신과 역동은 어디서 왔을까?

 

문재인 정부 초반, 전 일본 총리대신 아베 신조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무역 침략을 도발한 적이 있다. 이 무렵 다시 온라인을 떠돌던 <아베 총독의 저주>라는 짤막한 글이 있었다. 심지어 일본어 원문까지 인용했다. 물론 이 글은 가짜다. 이 아베가 그 아베의 외조부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친일파가 여전히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와중에 일본 총리대신이 벌인 악의적 도발이라 비분강개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어떤 시민이 과장되게 부연하고 새로이 만들어서 유포했으리라.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일은 물론 옳지 않다. 그러나 <아베 총독의 저주>는 마냥 날조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맥아더 사령부가 194512월 도쿄에서 행한 심문에서 일본이 점령한 35년 동안 한국은 상당히 발전했다.”, “일본은 한국에 아주 좋은 정책을 취했다.”라고 답변했다. (영문 <아베 노부유키 심문서>)

 

식민지를 다스린 제국 관료와 부역자가 지닌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발언이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아베 노부유키 발언은 식민 정책이 과거에는 축복이었고 미래에는 축원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앞으로도 일제가 취한 아주 좋은 정책대로 하면 계속 발전하리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제 패망과 더불어 등장한 미군정이 체계는 물론 인물까지 식민지 관료와 부역자로 채운 대한민국 기초 구조가 아베 노부유키 정책 연장선에 있었다고 판단하는 데 무리는 전혀 없다. 그렇다. 내가 용문산 백운봉을 드나들며 목격한 저 참담한 테라포밍은 다름 아닌 일제 좋은 정책”, 그러니까 아베의 축원에서 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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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답은 2009년 신학림이란 분이 <프레시안>에 실은 글을 부분(발췌) 인용함으로써 갈음한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가공할 혼맥 속을 들여다보자. 이른바 '수구반동복합체(守舊反動複合體)'. 결속력, 영향력, 지배력 등에서···미국의 군산복합체나 5대 미디어 재벌, 그리고 일본의 의회 세습 권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可恐)스럽다.

 

이미 입법, 행정, 사법권, 언론(4) 등으로부터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재벌과 그 대주주들, 족벌언론 사주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승수 국무총리, 여당의 핵심 관계자를 포함하는 정치가와 정치권력자 등으로 구성돼있는 복합체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친일 부역 세력,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독재정권 세력이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1. 이명박 혼맥

 

(1) 이명박 대통령의 3녀인 이수연 씨의 남편이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22녀 중 차남). 조현범 부사장의 큰 누나인 조희경 씨의 남편이 노정호 연세대 법대 교수로 노재원 전 중국 주재 대사의 아들.

 

(2) 이상득 의원의 장녀 이성은 씨의 남편은 구본천 씨(구자두 LG벤처투자 회장의 아들).

 

(3) 이상득 의원의 차녀 이지은 씨의 남편이 오정석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처장관과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오명씨의 아들). 오정석은 최근 현대제철의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으로 알려짐.

 

  2. 송인상 혼맥

 

(1) 장녀 송원자 씨 남편이 이봉서 전 동자부장관. 이봉서의 3(이혜영)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큰며느리(장남 이정연씨의 부인).

 

(2) 2녀 송길자 씨와 남편 신명수 전 동방유량 회장의 장녀(신정화)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며느리 (노재헌 씨의 부인).

 

(3) 3녀 송광자 씨는 조석래 전경련 회장의 부인.

 

(4) 4녀 송진주 씨 남편이 주관엽 씨(로우전자 실소유주).

 

  3. 한승수 혼맥

 

(1) 한승수 국무총리(전 김앤장의 고문, S&T 모터스의 사외이사)의 사위는 김세연 한나라당 국회의원(부산 금정구. 고 김진재 전 한나라당 부총재의 아들. 동일고무벨트 대주주이자 대표이사).

 

(2) 한승수 총리의 며느리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인 이수영 동양제철화학(최근 회사 이름을 OCI로 바꿈) 회장의 조카 딸(이수영 회장의 둘째 동생인 이화영씨의 딸).

 

  4. 이맹희 혼맥

 

이맹희 씨의 아들이자 CJ 그룹의 회장인 이재현 씨의 어머니인 손복남 씨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최근 연임)이자 CJ 그룹의 대외담당 회장인 손경식 씨의 누나.

 

  5. 중앙일보 홍석현 혼맥

 

(1) 일제 때 법관을 지내다가 이승만 정부 때 법무부 장관, 내무장관을 차례로 역임한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가 이건희 회장의 부인.

 

(2) 장남 홍석현 회장의 부인(신연균)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역임)의 딸.

 

(3) 차남 홍석조(현 보광훼밀리마트 회장)의 부인은 양경희 씨로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조카딸(양택식의 동생인 양기식씨의 딸).

 

(4) 2녀이자 막내딸인 홍라영씨의 남편이 노신영 전 국무총리(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의 둘째 아들인 노철수 씨. 노신영 국무총리의 장남 노경수(서울대 교수) 씨의 부인(정숙영)이 고 정주영 회장의 동생이자 '포니 정'으로 더 잘 알려진 현대자동차 회장이었던 고 정세영 씨의 장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3남 노동수 씨는 재벌 3세들의 주가조작 혐의와 관련 검찰의 수사를 받은 바 있음. 노신영 전 총리의 외동딸은 방위산업체인 풍산그룹 류진 회장의 부인임.

 

  ​6. 조선일보 방상훈 혼맥

(1) 방상훈 사장의 장남은 방준오 씨로 조선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한 뒤 현재는 방송 진출 등을 모색하는 전략기획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그의 부인이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장녀인 허유정 씨. 허광수 회장의 아들이 홍석현 회장의 외동딸인 홍정현 씨의 남편. 방상훈과 홍석현은 허광수의 아들, 딸을 매개로 직접 사돈이 됨.

 

(2) 방상훈 사장의 작은 아버지인 방우영(1928- )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첫째 사위가 서영배 태평양 그룹 회장(서성환 창업주의 장남), 셋째 사위가 정재문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국회 외무위원장 역임)의 아들 정연욱 씨임. 정재문 전 의원의 부친은 구 신민당 최고위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 정해영 최고위원.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31남 중 외동아들인 방성훈은 현재 스포츠조선의 대표이사 부사장임.

 

  7. 동아일보 김재호 혼맥

 

(1)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의 장인은 이한동 전 국무총리.

 

(2) 김재호 씨의 동생 김재열씨는 이건희 회장의 둘째 사위(이서현씨의 남편)로 삼성 계열사인 제일모직 상무로 일하고 있음.

 

  8. 정몽준 혼맥

 

(1)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2녀 김영숙 씨의 남편이 손명원 씨(스카이웍스솔루션코리아 고문으로 현대미포 사장, 쌍용자동차 사장 등을 역임. 부친이 손원일 전 국방부 장관. 차녀 손정희의 남편이 홍정욱 의원.)

 

(2) 3녀 김영자의 남편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이 부부 장녀 허유정 씨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장남 방준오씨의 부인. 허광수의 부친은 허정구 전 삼양통상 회장. 홍정욱 의원과 방준오씨는 4촌 동서인 셈.

 

(3) 4녀 김영명씨의 남편이 정몽준 의원. 따라서 홍정욱 의원과 조선일보 방준오씨에게는 정몽준 의원이 처 이모부가 되는 셈.

 

  9. 이임룡 혼맥

 

(1) 태광그룹 창업주인 고 이임룡 회장의 부인이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약칭 평통)의 수석부의장의 큰 누나. 이기택 부의장(전 민주당 총재)의 형인 이기하씨는 태광그룹 회장을 지내기도 했음.

 

(2)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큰 매형이 허승조 GS리테일 대표이고, 둘째 매형이 양원용 경희대 의대 교수로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장남.”

 

이 글을 인용하고 <그들만의 세계, 정재계 '혼맥' 대한민국 장악>이란 글을 쓴 자유기고가 Edward Lee 씨는 그 글 부제를 이렇게 달았다: 혼맥으로 얽히고설킨 특권 계급은 친일 부역 세력에서 시작됐다. 그렇다. 그렇게 우리 현대사 100년은 부역 세력의, 부역 세력에 의한, 부역 세력을 위한 여정이었다. 독립 국가라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식민지에 불과한 허울 대한민국을 깔고 앉아서 김춘추 이래 최고 호황기를 맞은 부역 세력 면모를 빙산 일각밖에 들여다보지 못하고도 가슴 치며 우는 내 꼬락서니가 한심 무쌍하다. 여기 명단에 오르지도 못한 부역 권력자가 제국에 130조 퍼주고 8조 받았다고 자랑하는 판에 말이다.


이즈음에서 통시적 얼개 이야기-김춘추의 저주 이야기를 접는다. 물론 이 이야기를 다 풀면 대하소설이다. 그 내막을 모조리 아는 일이 중하지 않다. 전복할 기운을 얻는 일이 중하다. 악을 이기는 기운은 더 큰 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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