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나 물 걷기에서 갔던 길 되돌아오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눈 덮인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온 도봉산 회룡(回龍) 계곡, 능선 가까운 구간에 사실상 길이 없어 위험하다며 내려오던 사람들이 혼자 오르는 나를 극구 말려 되돌아선 북한산 숨은 계곡을 빼고는 그런 적이 없다. 같은 일을 되풀이할 때 느끼는 진부함과 아뜩함을 싫어하는 탓이리라.

 

오늘 도봉산 무수골에서는 가던 길을 기어이 되돌아오고야 만다. 물소리 들으며 어느 만큼 골짜기를 걸은 뒤 비스듬히 능선으로 올라가 내려오는 길을 지도로 확인했으나 실제에서는 골짜기에서 능선으로 진입하는 길을 찾을 수 없다. 물론 이런 일 한두 번 겪지 않았고 그때마다 길을 만들며 나아갔지만, 오늘은 그만둔다. 돌길 걸을 때 자꾸 균형을 잃는 몸이 문득 감지돼서다. 나이 듦은 이렇듯 우연히 별안간 몸 느낌으로 들이닥치는가보다. 덜컥 겁나고, 더럭 서럽다.

 

짐짓 늙다리 걸음을 지으며 허든허든 무수천을 따라 되돌아온다. 몇 걸음도 채 걷지 않아 갈 때 미처 보지 못한 작디작은 생명 풍경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생각이 급전복한다. “가는 길과 되돌아오는 길은 같은 길이 아니구나.” 내가 풍경을 맞는 시선과 풍경이 나를 맞는 시선이 다 다른데 어찌 같겠나. 되돌아오기, 마다할 일 아니다. 풍경이 되풍기는 냄새를 경청해야겠다.


경청이라는 말은 풍경이 나를 다시 불렀다는 뜻을 담는다내가 보았으나 보지 못했고들었으나 듣지 못했던 세미한 풍경이 나를 돌려세우는 길은 냄새뿐이다물론 냄새 또한 맡지 못한 채 지나쳤으나저 원초 감각으로 이끄는 신성한 힘이 다름 아닌 경청이다우리 선조가 일찍이 냄새를 듣는다즉 문향(聞香)이라는 표현을 창안한 곡절이 여기 있다냄새를 경청하는 일에는 마음 모심과 몸 기울임이 함께 작동한다그저 이 곱고 촘촘함만으로도 세계를 뒤집는다.


되돌아오는 길에서야 만난 손톱보다 작은 버섯

 

손톱보다 작은 버섯이 장엄을 두르고 있는 비경에 살 떨며, 숲을 살짝 벗어난다. 자연 그대로인 잔치국수 파는 밤나무집으로 향한다. 국수 나오기 전 들이켠 막걸리 한 잔에 내 영혼이 짜르르해진다. 주인장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잔을 연거푸 비우는 사이 잔치국수는 국물만 남는다. 햇빛이 설핏해지자 일어나 남은 숲길을 간다. 무수골 잔향이 바람만바람만 따라온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들마에 급히 들어오신 환자분을 치료하느라 늦게 도착한 광장은 열기가 사뭇 고조되어 있다. 사회자가 외치는 고주파 음이 일대를 멀리까지 뒤흔든다. 민주주의 최후 보루라던 사법부가 내란 세력 최후 보루가 돼버린 상황이라 시민 경각심은 다시없이 날카롭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시민들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욕설 같은 외마디 소리를 뱉어내곤 한다. 나도 이전보다 더 큰 목청을 낸다. 게다가 최근 집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 경찰이 드러내는 긴장도도 다르다.

 

명신이 바지 서방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지 벌써 일 년이 다 돼 간다. 그사이 엄청난 진실이 드러나 명신이 뜻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민이 계몽되는 중이다. 식민지 특권층 부역 집단인 지배 세력 주류가 방대한 카르텔을 형성해 사회 모든 분야를 깨알같이 지배해왔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전선은 한껏 확대되고 있다. 싸우기도 어렵지만 지기는 더욱 어려운 전쟁임을 뼈에 새기는 단군 이래 최고 각성 국면이다. 그만큼 이번이 최후 기회일 공산이 크다.

 

사실 명신이 바지 서방이 검찰총장으로 일차 내란을 일으킬 때만 해도 대다수 시민이 검사=정의의 사도, 판사=현자로 굳게 믿었다.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이 왜놈들이 만든 식민지 유제, 이를 더욱 공고히 한 이승만-박정희 도당 음모라는 준엄한 사실을 놓쳐서기도 하지만, 판검사 꿈꾸며 사시에 매달리던 부류 대다수가 조희대지 문형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몰라서다. ··고 법전 학생 80%가량이 강남 부유층이라는 사실이 그 결과다. 저들 혈관에는 피 아닌 돈이 흐른다.

 

저들 혈관에 흐르는 돈은 단순히 노동자를 착취해 긁어모은 자본주의 결과물이 아니다; 민족과 나라를 팔아서 그러모은 제국주의 부역 떡고물이다. 저들이 거만한 자본가 철면 아닌 비열한 야차 귀면을 쓰고 있는 까닭이다. 정색하고 확인해 보라, 목하 준동하는 찐윤 판검새와 그 출신 정치 모리배 상판대기가 과연 사람 얼굴인지. 사악한 돈은 그 귀성(鬼性)을 빙의된 종자 면상에 꼭 드러낸다. 귀면 종자 식별해 박멸할 수 있어야 목숨 바쳐 나라 지킨 조상에 체면이 선다.

 

광장 인근에서 저녁 먹을 곳을 찾는다. 뜨르르한 어떤 개독교 초대형 교회 건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자 조용한 음식점이 나온다. 내가 들어갈 땐 텅 비었더니 차츰 사람들이 들어온다. 느낌이 싸해진다. 아까 지나온 그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다. 저들이 쓰는 일상 용어를 들으면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친다. 표정 못 챙기고 계산대 앞에 선다. 아뿔싸,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 인생 도처(到處)에 유귀면(有鬼面)이로구나. 그렇다면 과연 내 얼굴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여명>

 

1

 

202399일 오전 330

 

엄마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무한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중략)

 


5

 

엄마가 떠나자 엄마가 많아졌다

 

어느 날은 동트는 아침 구름에게

어느 날은 저녁의 흰 새에게

어느 날은 정오의 개망초 군락 앞에서

어느 날은 제 그림자를 껴안은 붉은 작약 곁에서

어느 날은 오후의 너른 산그림자를 보며

중얼거린다

 

엄마, 좋아?

 

엄마, 힘내!

 

나도 힘낼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기어이 발길을 돌린다, 함성이 울려 퍼질 서리풀(瑞草)에서 절규가 메아리칠 솔고개(松峴). 송현동 갤러리 57th에는 <‘황무지, 유령의 벌판>을 연 오십 년 지기 칡뫼 김구 화백이 있다. 전시회 이름에 이미 드러나거니와 내가 발길을 돌릴 구실은 충분하다.

 

그림은 말이다.” 칡뫼가 견지하는 회화관이다. 말은 서사를 지시한다. 서사로서 그림은 보이는 풍경을 그리지 않고 우리가 처한 상황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우리라는 말이 그가 지닌 언어 습관을 무심코 따른 표현인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강조로 읽힌다. 그가 현실 정치를 겨누는 까닭과 분단을 과녁 삼는 며리가 거기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 하나 건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목전에 둔 김포 갈산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호만 칡뫼(葛山)로 지은 게 아니라 현실 삶에서도 분단과 전쟁, 그 후유증을 옹골차게 부여잡고 있다. 그 삶 자리(Sitz im Leben)에서 세상을 읽고 그 독해로서 그림을 그린다.

 

칡뫼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강한 어기(語氣)는 여기서 발원한다. 그 어기는 때때로 범람하는 직설 산문으로 드러난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그는 수필집을 낸 엄연한 문학가기도 하다. 화가도 문학가도 아닌 상담의로서 그 그림과 수필에 사부랑삽작 건너가기 어려운 나는 그냥 내가 편한 운문 방식으로 읽는다. 그가 시인이기까지를 바라지 못한다.


 

이번에 새로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크다. 모름지기 그 절규가 커서일 테다. 사도와 현자 탈을 쓴 법 버러지, 언론 탈을 쓴 기레기, 영성 탈을 쓴 개독 주술사, 엘리트 탈을 쓴 부역 지식인 카르텔 총체를 드러내어 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향방을 준열히 묻는다.

 

나는 순수예술을 표방하고 표백된 고담준론을 드높이는 예술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본성상 예술은 공존 행위로서 생태 실천이다. 근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투명하게 통과한 예술갑질은 학예회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은 없다.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그 보편 추구에 예술가가 발 담그는 짓은 다시없는 자기기만이다.

 

예술에 치유력이 있다는 말은 예술에는 영성이 있다는 뜻이다. 예술에 영성이 있다는 말은 예술이 공생 네트워킹이라는 뜻이다. 예술에서 고립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립 개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각 개체를 극한 고양하는 역설 사건, 그 서사가 예술이다.

 

그림을 둘러보고 작가와 대화하던 중 들마가 되어 문 닫고 나가 저녁을 같이 먹는다. 막걸리 한 잔 한 잔에 더불어 곰삭아가던 어둠이 시간을 높이 쟁여놓자 우리는 허우룩해서 또 홀가분하게 인사를 나눈다. 광장을 대신한 화랑, 함성을 대신한 절규가 함께 익어가는 밤을 걸어 우리는 각자 삶으로 돌아간다. 더 밝은 우리 내일을 꿈꾸기로 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이현궁(梨峴宮)이 부쩍 궁금해졌다. 지난 일요일 뜻밖으로 청계천을 걸었을 때, 그 출발점인 배오개다리 이름에서 이현궁을 떠올리고 나서부터다. 이현궁은 당연히 소령원(昭寧園)-최숙빈 묘소-으로 이어지고 소령원은 육상궁-최숙빈 사당-으로 이어진다. 소령원은 학술 목적으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일반인이 드나들 수 없으니, 이현궁 터를 확인하고 육상궁까지 걸어서 최숙빈 서사를 일단 마무리하기로 한다.

 

신설동역 9번 출구에서 나와 하정로로 접어들자마자 반갑고 정겨운 풍경과 맞닥뜨린다. 지난해 <두물머리 두름대로>(6. 25.) 이야기할 때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풍물시장 가는 골목에서 본 바로 그 풍경이다. 그때는 이야기에 담지 못했지만, 온갖 중고품을 파는 노점 행렬이 거리를 아련하고 구성지게 만들고 있어 그 나름 순례객을 부른다.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기억들이 새 상상을 불러 오늘을 구성한다.


 

과거와 미래는 허구고 현재만이 실재라고 강조하지만 따지고 보면 현재란 과거 기억과 미래 상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움트는 찰나 사건, 더 엄밀히 말하자면 서사가 아니던가. 내가 오늘 청계천 따라가 이현궁 거쳐 육상궁으로 가는 행로가 전형이고, 그런 맥락에서라면 이 하정로 노점상들과 마주쳐 일어나는 서사 또한 돈독한 실재다. 옛 도량형기만 모아놓고 파는 아낙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허사일 순 없다.

 

平平세계를 섭새김하며 비우당교 아래서 출발해 폴짝폴짝배오개다리로 향한다. 가을장마 끝난 뒤라 그런지 어디에서든 은은히 풍기는 청계천 하수 내음이 사뭇 옅다. 다양한 얼굴들을 지나치며 오간수교 자리에 다다른다. 흥인지문 정남방에 자리한 한양도성 일부이기도 하고 배수 요처라 중요한 시설이었던 듯하다. 어정뜬 복원은 아쉽되, 오늘 서사 구성에 더없이 소중한 역사와 만나니 해낙낙하다.


 

오간수교 아래 벽면에는 영조 대왕 어필이 조형되어 있다. 개천(開川) 준설에 공 있는 신하들을 치하하는 내용이다. 개천이 얼마나 큰 일이었던지 영조는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새로 만들어 치수 공사를 일으켰으며, 이를 재위 3대 치적 중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그토록 중대사였다면 영조가 현장에 직접 나와 봤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가까운 길목에 어머니 최숙빈의 이현궁이 있다. 그냥 지나쳤을까.

 

나는 그 여정을 거슬러 간다. 종묘와 창경궁이 있는 언덕과 현재 서울대병원이 있는 언덕 사이로 흘렀던 옥류천을 왼쪽에 끼고 올라간다. 그 오른쪽이 배오개며 거기 어디에 이현궁이 있었다. 검색한 기록에 따라 대중하고 어떤 골목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은행나무 한 분이 우뚝 서 계신다. 바로 저기다, 하고 달려간다. 그 나무 아래 이현궁 터라고 적혀 있다. 그 나무는 분명 최숙빈을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나는 내 고유한 물 의례 올리고 사연을 고한다. 은행잎 두 장 거두어 종묘-창경궁-창덕궁을 거쳐 육상궁으로 간다. 인사 하고 은행잎 한 장을 삼가 묻어드린다. 나머지 한 장은 원릉(元陵) 영조 몫이다. 육상궁 나올 때 아연 떠오른 얼굴은 역겹게도 김명신이다. 종묘까지 능멸한 저 왜년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순례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다. 내 반제 주술 끝날 날은 과연 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