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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12월 3일이 시작인 일기.
이제는 좀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이제는 좀 나에 대한 걱정으로 옮겨왔고, 뉴스도 조금 덜 민감하게 보게 되었는데...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복기하는 글을 읽게 되니 아니라는 게 명확해졌다.
가슴이 뜨겁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분노의 감정이 되살아 났다.
"감히"라는 말에 같이 '너 따위 것들이 감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기에 언급된 국회 앞 탄핵 집회에서 물을 나눠주던 시민의 인터뷰는 나도 당시에 봤다. 그때도 같이 눈물이 났는데,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몇 번이고 눈물이 난다. 그런 마음이 너무 분하고 아팠다.
아껴서 읽으려다 불꽃처럼 화르륵 읽어버렸다.
잊지 마, 직시해. 분노해. 지나치지 마.
- 12월 3일 화요일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 10
- 대회가 끝나고 잔디 마당 곁을 지날 때 앞서 걷는 사람의 코트에 붙은 낙엽을 보았다. 작은 단풍잎들. 털어줘야 할까, 하지만 예뻐서 아까웠다. 망설이기만 했다. "털어드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예뻐서 아까워요." 다른 이가 그에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기뻤다 내게 예쁜 것이 그에게도 예뻤다는 게. 웃었다. 간밤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어졌다. - 13
- 매국과 내란의 얼굴들, 파렴치며 몰염치가 그네들 힘이다 꼴도 보기 싫다, 곱게 늙어서 더 징그러운 폭력들, 샹, 샹. '국가'와 '나라'를 주제로 열렬히 말하고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보수인가 싶었다. 이 계엄을 옹호하는 입장들을 '보수'라 칭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봉건, 내란, 위헌 중에 골라봐. - 25
- 표결을 기다렸다. 가결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크지 않았다. 불안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뭔지 모를 각오로 마음이 단단했다. 되어야 하는 일, 마땅한 일을 기다리며 도사리듯 앉아 있었다. 부결되기만 해봐. 그렇게 앉아 있다가 표결을 맞았다. - 33
- 2024년 12월 둘째 주, 지금으로선 이름도 붙이지 못할 이 기간의 불안과 울분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감히.
혼란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니 이 말만 입속에 줄곧 서있다. 감히. - 40
- "제가 자영업하고 있는데/계엄 났을 때/너무 무기력하더라고/그래서 (일)하다가 쉬고 나왔어요." 이 말과 얼굴이 생각나 걷다가 울었다. 내게도 그 얼굴이 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물을 나눠주며 말하다가 울음이 터진 그처럼 내게도, 불시에 그 밤이 떠오르면 생생하게 그렇게 갈라지는 얼굴이.
그와 내가 같은 날에 베였다.
우리뿐일까. - 45
- 12월 22일 오후 열한시 오십사분
남태령.
마중 나간 사람들.
배웅까지 완성한 사람들. - 56
-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으며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사람의 다면성을 이야기하며 악을 고민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내용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바로 곁 여백에 연필로 부기한다.
타고나는 걸 나는 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그건 자연.
그보다는 사람이, 사람들이 어쩌다 혹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
멍청하게.
그중에 악이 있다. - 66
- 2월 27일 목요일 오후 여덟시 오분
지난 2월 25일.
헌법 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재판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국회 측 대리인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내게 무척 아름다웠다. "오염"이라는 말로 내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의 오염. 바로 그것을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한 말이 건네는 위안을 받았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 112
-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목격'에 두고 산 지 꽤 되었다. 태어나 보고 듣고 겪는다. 이걸 하러 나는 여기에 왔다. 아주 작은 무수한 입자들로 흩어져 있다가 어느 날 인간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세상에 출현해, 기적적으로 출아해, 세상을 겪고 세상의 때가 묻은 채 다시 입자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관통한, 그리고 세상이 관통한 더러운 경험체로서. - 135
- 나오는 길에 정대만 깃발을 든 기수를 보았다. 깃대에 기대 선 듯한 모습으로 좀 지쳐 보였는데 무대에 오른 발언자가 "투쟁으로 인사하겠다"고 말하자 대답하듯 깃대를 흔들었다. 발을 딱 벌리고 서서 기를 버티는 모습이 늠름해 보였다. 다가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놀랄까 싶어 그만두었다. 12월부터 이어진 집회 내내 그에게 품은 고마움이 있다. 매번 광장에 갈 때마다 그의 깃발을 눈으로 찾곤 했고 거의 빠짐없이 그 깃발을 보았다. 광장에 나설 때마다 그걸 보고 방향을 '옳게' 찾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 순간이 여러번이었다. 다른 깃발도 많지만 내게는 이 시국 광장의 표지가 그였다. 열렬한 응원. - 163
-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ㅏ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 171
-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엄중함을 엄중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받은 상처로 사랑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남은 상처로 손상되었고
그 일부를 일기에 담았습니다. - 후기 중
2025. jul.
#작은일기 #황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