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숲은 계속된다 타이피스트 시인선 4
김다연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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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결정을 기다리며 읽었다.

이 시집의 시들에 왜 이리 공감이 되나... 싶었는데
후반에 실린 산문에서 '간병'과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공감의 이유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과 그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관계.
누구에게도 즐거운 일이 아닌 고통.
그 감정이 되살아 났다.

고요한 여름밤에 개인적으로 무척 와닿는 시들이었다.

- 잃었다고 하기엔 애초에 없었던 _____
없음으로 존재하는 _____
어떤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_____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 시인의 말

- 아무 일도 아닌 거잖아 - 엔딩의 서막

밤과 아침을 디졸브로 넘어가려 하지 말아 줘 섬광이 우리의 두 눈을 할퀴던 눈부신 발톱이었던 것처럼 거친 노이즈로 뒤 귀를 찢던 용기로 남아 있으려 하지 말고 먼저 일어서서 나가는 것이다 수없이 헛걸음치던 지도 속에서 펼쳐진 서막이 우리를 압도해서 우리의 발이 스스로 거기에 묶였던 것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아름다운 결말로 해석할 누군가를 위해 비극으로 파국으로 더 빨리 치닫게 내용은 건너뛰어 가는 것이다 단 하나의 정물로부터 단 하나의 형상을 단 하나의 형상에서 지울 수 없는 운율을 얻었지만 의미 없이 흐느끼고 의미 없이 웃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그저 말해 보는 것으로 쓸데없이 가득 채우고 텅 비어 가는 것이다 그토록 정교한 밤의 조각으로 조금씩 조심스럽게 쌓아 가던 대화가 표현할 수 없이 깊어지는 독백의 웅덩이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게
(전문)

- 나는 어떤 모종이었기에 어떤 흙에서도 자라지 못했을까? 허구의 잎. 그림자에 안겨 곤한, 몽상으로부터의 광합성.
빛을 받아 자라나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다 하나의 과오 - 고독은 나의 사여서-코타르 증후군 중

-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펼친다. "추상은 부재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나는 부재한다. 나를 애도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한 부고를 쓰면서 나는 나와 작별한다. - 불빛을 지송하다 중

- 눈물이 아닐 때까지 슬픔을 쓴다면 마침내 수증기에 도달하겠지 그러나 쓸 수 없음이 우리의 마지막이어서 그 여름은 너를 다시 시작하고 나는 다시 시작된 여름 속에 있어 - 그 여름의 빗물이 빈 밥그릇에 고여 가는 - 교환할 수 없는 교환 일기 중

- 몰락한 세계에서 나는 이미 몰락했으므로 완전하다 이미 고독함으로 적막은 황홀하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를 전환한다 여기를 지속한다 머무르는 만큼 저장된다 - Reality -니트 아일랜드 중

- 창백한 불빛을 지나간다 웅얼거리는 눈보라를 따라간다 닿지 못할 목소리가 서성이고 있을 어디로 이어진지 모를 다리를 건너간다 숲과 지나가다 뒤돌아보면
알 수 없다 모른다는 것을 알 뿐
일몰을 보다가 오늘을 잊는다 - 기억은 기억되지 않는다 - 일몰 증후군 중

- 살아 있는 게 슬픔인 줄 모르고 죽음을 슬퍼하다 울다 그친다 가로등 깜박이는 풀밭에 앉아 깜박거린다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있다가 없다 없다가 있다 - - 몇 방울의 물로 너의 강에 닿을 중

- 출처 없는 숲을 거닐다

어쩌면 내가 아니면 네가 걷고 있다

시작 없이 생겨나 끝없이 사라지던 나는
어디서 얽힌지 모른 채 밝아 오던 너는

이미 사라진 장소로부터 날아온 한 마리 새일지도 모른다
금목서 은목서의 향으로 번져 가는 9월의 마지막 바람일지도 모른다

무엇이었든 모두 어제의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는 얕은 바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버리자

단 한 줄만으로도 삶이 되기에 한 줄에 깃들 것

출처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찾기 위해 숲을 뒤적인다

이것이 너의 목소리라면 너의 목소리만으로 견딜 만하다

파생된 것으로부터 파생되고 파생된 것으로부터 파생된, 끝끝내 하나로 인식되지 않는 나 너는,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면서 같이인 줄 모르게 있는, 결국 혼잣말일지도 모를 나 너는

앞선 문장에서 떨어져 나온 밀알을 주워 먹으며 오늘을 버티는 문장의 유령들. 삭아 내린 페이지를 복원하기 위해 떠도는 거친 입자들.

(전문)

- 너의 몸이 무너질수록 나는 오로지 네 몸의 수행자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의 몸이 삶과 죽음을 놓고 내리는 강력한 명령으로, 나를 처절하게 굴복시킨다. 그것이 나의 삶이라면 나는 이미 포기했을 것이다. 너의 몸을 움직이기 위해 내 몸을 움직인다. 한때 너의 것이었던 몸이 누구의 몸이 아닌 채로 너를 짓누르고 나를 짓누른다. - 106

-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추억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살아나 현재를 떠받친다. 추억 속에서 어린 날의 내가 얾은 너의 품속에 안겨 웃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기나긴 고통의 끝, 네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만은 추억의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네 눈앞에 펼쳐질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삶은 더 잃을 것 없는 우리에게 그 추억마저도 남겨 두질 않는다. - 108

-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을 때마다 더욱 처참히 부서질 뿐이었던 날들...... 더는 무너질 것이 없을 때까지 무너져야 도달할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죽음으로써 잃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찾아온 죽음이었다. - 109

2025. jul.

#나의숲은계속된다 #김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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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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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고 쓰라린 시선이 돋보인다.

체념의 정서가 진한데 아마도 이민자의 삶이라는 점이 그런 느낌을 강화해 주는 듯.

생활의 기반이 되는 사회 속에서 타자로 규정되는 이들이 겪는 심리적 불안정감과 자존감의 결여 같은..

- 아이는 아빠에게 나이프의 k는 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장실에 불려갔었다고, 규칙들과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 하나일 뿐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글자 하나, 맨 앞에 놓인 단 한 글자 때문에 아이는 교장실에 불려갔다. 아이는 k가 묵음이 아니라고 우겼다고 말하지 않는다. 묵음일 수 없다고 아이는 우기고 또 우겼다. "맨 앞에 있는걸요! 첫 글자잖아요! 소리가 있어야죠!" 그러고서 아이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양 괴성을 질러댔다. 아이는 아빠가 말해준 것. 그 첫음을 단념하지 않았다. 평생 읽고 교육받아온 선생님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아빠가 저녁을 먹는 걸 보면서 아이는 그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을지 생각해본다.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또 뭐가 있을지. 아이는 아빠에게 어떤 글자는, 비록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대신 아이는 아빠에게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 17,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 레드가 아는 유일한 사랑은 하루의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자신에 대해 느끼는, 단순하며 복잡하지 않고 외로운 사랑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속에, 주말마다 들르는 식료품점 통로에, 그 자리에 한결같이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매일 밤 어둠 속 같은 자리에서, 고요함 속에서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었다. - 35, 파리

- 때때로 사람은 죽는다. 그 죽음에 반드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 71, 랜디 트래비스

- 아빠는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난민이 되었을 때 이 삶의 모든 비통함을 소진해버렸다. 사랑을 잃는 것, 아내로부터 버림받는 것조차 사치였다 - 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 - 130, 세상의 가장자리

- 고국에 있을 때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학교에 가려면 돈이 필요했고, 설사 집에 돈이 있더라도 남자 형제에게만 돈을 썼다. "그 돈도 다 낭비한 셈이었지만." 그녀가 말했다. 엄마는 마당에 앉아 닭을 돌보며 흰색 셔츠에 진청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풀어놓은 닭을 모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족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 206, 지렁이 잡기

2025. jun.

#나이프를발음하는법 #수반캄탐마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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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 교양 100그램 5
하지현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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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창비 가입할 때 고른 책 중 하나.

다른 출판사의 북클럽보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는 단점이 두드러진다.

인문서 시리즈로 기획된 책 세 권을 골라야 하는데 선택지는 5권이었다는 점.

그중 한 권이고, 교양 인문서라는 것이 워낙 좀 뻔하고 피상적이라는 것.

가볍게 읽을거리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책은 예쁘다.

- 불안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안전은 언제든 위협을 받습니다. 그럴 때는 나를 지켜주기 위한 경보 신호가 울리기도 하고, 그 후유증이 남아 오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나의 생명이 걸린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것,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도 하죠. 그게 사람이란 존재의 특성입니다. - 7

- 요즘 사람들이 더 많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불편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낮아진 것에서 찾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참을 만하던 것들이 고통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 위험을 제거하려고 하니 위험에 취약한 개체가 늘어난 것이죠. 불안 역시 면역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편리해지고 쾌적해질수록 작은 불편이 고통의 대상이 되면서 이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 하고, 그러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하면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적당한 불편 적당한 수준의 더러움, 적당한 수준의 모자람은 감수하고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더 나은 것이고 최소한 불안의 문턱을 높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26

- 내향성과 외향성은 두 가지 가장 큰 성격 카테고리로 나눌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향성은 주로 세로토닌(serotonin)이란 신경전달 물질과 높은 연관성을 갖는 경향이 있고, 외향성은 도파민(dopamin)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로토닌이 충분히 분비되지 않는 경우 우울, 불안 수치가 높아지는데요, 이러한 세로토닌에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민감, 예민하고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두드러집니다. 위에서 설명한 매우 민감한 사람은 극내향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에 반해 도파민은 보상, 호기심, 중독과 더 큰 관련성을 갖습니다. 도파민은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에 의해 분비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도전을 즐기는 성향이어야 하겠죠. 어떤 행동으로 말미암은 보상을 내향적인 사랑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외부 자극이 없는 상태를 지루해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38

2025. jul.

#나는왜이유없이불안할까 #하지현 #클럽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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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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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게 굳어져 있던 기억과 감정들이 허물어지는 글.

오랜 세월이 지나 서먹한 재회를 한 형제가 두 점의 그림자로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이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멀리 어디선가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과연 위안이 될 수 있을까?

- 검진이 있는 날이면 재하는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졌고 더 크게 웃었다. 겁이 아는 걸 감추려 안간힘 쓰는 게 빤히 보였다. 내가 모르는 재하의 표정. 그런 것이 언뜻 비칠 때마다 그 애를 향한 묵은 오해나 염오가 한층 누그러졌다. 면을 건져 먹는 재하를 보며 저 애가 내 친동생이라면 어땠을까, 잠시 가정해 보기도 했다. 투박하고 거침없이 속엣말을 쏟아내며 보다 친밀해질 수 있었다면. 서로에게 시큰둥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끈끈한 우애 같은 것을 우리가 처음부터 나눌 수 있었다면. 
나는 내 몫의 땅콩 소스를 그 애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면을 두 볼 가득 문채 재하는 가만히 웃었다. - 26

- 능을 완전히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푸른 기운을 띄던 숲이 자줏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 38

-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 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 58

- 제게 등을 진 채 어머니는 한참 울었습니다. 고여 있던 것을 흘려보내듯 잠잠히.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 74

- 제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지,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 131

- 한때는 내 곁에 있었지만 떠나간 이들을, 깨끗이 털어내지 못해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 소설을 썼다. - 작가의 말 중

2025. jul.

#두고온여름 #성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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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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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이 시작인 일기.

이제는 좀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이제는 좀 나에 대한 걱정으로 옮겨왔고, 뉴스도 조금 덜 민감하게 보게 되었는데...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복기하는 글을 읽게 되니 아니라는 게 명확해졌다.

가슴이 뜨겁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분노의 감정이 되살아 났다.

"감히"라는 말에 같이 '너 따위 것들이 감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기에 언급된 국회 앞 탄핵 집회에서 물을 나눠주던 시민의 인터뷰는 나도 당시에 봤다. 그때도 같이 눈물이 났는데,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몇 번이고 눈물이 난다. 그런 마음이 너무 분하고 아팠다.

아껴서 읽으려다 불꽃처럼 화르륵 읽어버렸다.

잊지 마, 직시해. 분노해. 지나치지 마.

- 12월 3일 화요일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 10

- 대회가 끝나고 잔디 마당 곁을 지날 때 앞서 걷는 사람의 코트에 붙은 낙엽을 보았다. 작은 단풍잎들. 털어줘야 할까, 하지만 예뻐서 아까웠다. 망설이기만 했다. "털어드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예뻐서 아까워요." 다른 이가 그에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기뻤다 내게 예쁜 것이 그에게도 예뻤다는 게. 웃었다. 간밤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어졌다. - 13

- 매국과 내란의 얼굴들, 파렴치며 몰염치가 그네들 힘이다 꼴도 보기 싫다, 곱게 늙어서 더 징그러운 폭력들, 샹, 샹. '국가'와 '나라'를 주제로 열렬히 말하고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보수인가 싶었다. 이 계엄을 옹호하는 입장들을 '보수'라 칭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봉건, 내란, 위헌 중에 골라봐. - 25

- 표결을 기다렸다. 가결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크지 않았다. 불안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뭔지 모를 각오로 마음이 단단했다. 되어야 하는 일, 마땅한 일을 기다리며 도사리듯 앉아 있었다. 부결되기만 해봐. 그렇게 앉아 있다가 표결을 맞았다. - 33

- 2024년 12월 둘째 주, 지금으로선 이름도 붙이지 못할 이 기간의 불안과 울분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감히.
혼란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니 이 말만 입속에 줄곧 서있다. 감히. - 40

- "제가 자영업하고 있는데/계엄 났을 때/너무 무기력하더라고/그래서 (일)하다가 쉬고 나왔어요." 이 말과 얼굴이 생각나 걷다가 울었다. 내게도 그 얼굴이 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물을 나눠주며 말하다가 울음이 터진 그처럼 내게도, 불시에 그 밤이 떠오르면 생생하게 그렇게 갈라지는 얼굴이.
그와 내가 같은 날에 베였다.
우리뿐일까. - 45

- 12월 22일 오후 열한시 오십사분
남태령.
마중 나간 사람들.
배웅까지 완성한 사람들. - 56

-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으며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사람의 다면성을 이야기하며 악을 고민하는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내용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바로 곁 여백에 연필로 부기한다.
타고나는 걸 나는 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그건 자연.
그보다는 사람이, 사람들이 어쩌다 혹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
멍청하게.
그중에 악이 있다. - 66

- 2월 27일 목요일 오후 여덟시 오분
지난 2월 25일.
헌법 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재판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국회 측 대리인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내게 무척 아름다웠다. "오염"이라는 말로 내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의 오염. 바로 그것을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한 말이 건네는 위안을 받았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 112

-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목격'에 두고 산 지 꽤 되었다. 태어나 보고 듣고 겪는다. 이걸 하러 나는 여기에 왔다. 아주 작은 무수한 입자들로 흩어져 있다가 어느 날 인간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세상에 출현해, 기적적으로 출아해, 세상을 겪고 세상의 때가 묻은 채 다시 입자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관통한, 그리고 세상이 관통한 더러운 경험체로서. - 135

- 나오는 길에 정대만 깃발을 든 기수를 보았다. 깃대에 기대 선 듯한 모습으로 좀 지쳐 보였는데 무대에 오른 발언자가 "투쟁으로 인사하겠다"고 말하자 대답하듯 깃대를 흔들었다. 발을 딱 벌리고 서서 기를 버티는 모습이 늠름해 보였다. 다가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놀랄까 싶어 그만두었다. 12월부터 이어진 집회 내내 그에게 품은 고마움이 있다. 매번 광장에 갈 때마다 그의 깃발을 눈으로 찾곤 했고 거의 빠짐없이 그 깃발을 보았다. 광장에 나설 때마다 그걸 보고 방향을 '옳게' 찾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낀 순간이 여러번이었다. 다른 깃발도 많지만 내게는 이 시국 광장의 표지가 그였다. 열렬한 응원. - 163

-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ㅏ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 171

-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엄중함을 엄중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받은 상처로 사랑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남은 상처로 손상되었고
그 일부를 일기에 담았습니다. - 후기 중

2025. jul.

#작은일기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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