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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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읽은 책.
플래그 붙인 부분을 다시 읽으니 모든 이야기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난다.

이 세계의 주변에 대한 시선들이 돋보이는 이야기들.

조해진 작가의 신간을 사두고 뒤늦게 읽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얼른 신간 읽어야지.

- 오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날에도 고모는 저런 자세로 병원 출입문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구르는 걸 멈추지 않는 한 조금씩 실이 풀려나갈 수밖에 없는 실타래 같은 게 아닐까. 그때 고모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했다. 병원 문을 열고 나가면 실타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갈 것이고, 실타래에서 풀려나간 실은 밟히고 쓸리고 상하면서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친밀했던 사람, 아끼던 사물, 익숙한 냄새를 잃게 될 것이고 세상도 그 속도로 고모를 잊어갈 터였다. 어느날은 거울 속 늙고 병든 여자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리라. 하나의 실존은 그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절연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따뜻한 작별의 입맞춤과 헌사의 문장도 없이...... 오후가 저녁이 되고 저녁이 밤이 될 때까지, 실제로 고모는 그 문을 열지 못했다. - 사물과의 작별, 82

- 독일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종종 동료 작가들과 철거지역이나 노동자들의 집회 같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 피켓을 들기도 했고 낭독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분연했지만 집으로 돌아올 땐 쓸쓸했다. 무력하게 지켜볼 땐 갑갑했는데 거리에 서 있을 땐 내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고 있는 듯 어색했다. 작가가 작품 이외의 다른 채널로 말을 거는 게 합당한 건지 알 수 없었고,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작품활동도 하지 않는 내가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도, 심지어 뛰어들어간 뒤 적당한 자세를 잡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것도, 모조리 가식 같기만 했다.
최근에 내가 택한 방법은 나의 자격을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대단할 것도 없고 떳떳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대변하며 잿빛 거리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자격을 되묻는 반복은 발터, 법도 정의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이 세상 한곳에 나만의 의식적 함몰구역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작은 웅덩이 같은 그곳은 안온하고 평화롭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웅크려앉아 있어도 되는 것이다. 권장량의 탄수화물과 지방을 섭취하면서, 소화하고 배설하는 내장뿐인 몸으로, 시계의 초침 간격이 과연 정직한가와 같은 부질없는 의혹과 다투며...... - 동쪽 백의 숲, 97

- 독일의 러시아 침공 당시, 고작 열여섯살에 간호병으로 입대한 큰언니가 종전과 함께 일년 만에 귀가한다는 통지서를 받고 온 가족이 마중을 나갔는데 아무도,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요. 플랫폼에는 열일곱살의 싱그러운 처녀가 아니라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신산스러운 분위기의 여인이 서 있었으니까요. 훗날 백발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이른 할머니의 큰언니는 다행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해요. 늙어서, 잊어가고 있어서, 곧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애가 기다란 원통 모양이라면 그녀에게 다행이라는 말은 시간의 그물망을 통과하여 그 밑바닥에 쌓인, 정제되고 또 정제된 결정체 같은 것이겠지요. 전쟁은 그런 것일 테지요. - 산책자의 행복, 126

- 실은 늘 이번 소설집을 기다렸다.
나와 나의 세계를 넘어선 인물들, 그들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소통했고 유대를 맺었다. 그들은 나보다 큰 사람들이었고 더 인간적이었다.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 말

2025. jan.

#빛의호위 #조해진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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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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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도였었고 가장 재미있었던 과목이 식물학, 동물학이었고,
지금은 약간 초록손재질의 식집사이기도 해서
식물학에 관련된 책에 꽤 관심이 많다.
점묘로 몇 시간을 그리던 식물 그림들의 추억도 있고 식물 삽화는 언제나 즐기기도 하기에 표지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고른 책이다.

미국 메릴랜드의 스미스소니언 환경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지낸 기간 동안의 소회를 다룬 에세이.
챕터는 계절별로 구성되어 있고, 저자는 난을 연구하고 있는데.
모든 식물은 야생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는 부분이 많았다.
너무 당연한데, 실내에서 식물을 키우는 환경에 익숙해진 탓에 이런 자각이 생길 때마다 좀 웃기기도 하고...

그러나 책 전체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냐 묻는다면... 글쎄다. 싶은 정도의 감상이 남았다.

- 야생 난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발되는 품종과 사람들의 열렬한 난초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꽃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 45

- 목초지에 있던 커다란 말이 한순간 죽듯, 오랫동안 내게 기쁨을 선사하던 난초가 사슴에게 먹혀버리듯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갑자기 발생한다.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버리는 것. 행복하다가도 갑자기 슬픈 일이 일어나는 것. 슬프다가도 갑자기 기쁜 일이 일어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자연의 순리이고 이미 정해진 일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흐름 속을 열심히 헤엄치는 듯하지만 사실 함께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167

2025. apr.

#식물학자의숲속일기 #신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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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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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동경과 불안을 자주 하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
지나간 일의 후회나 미련이 아닌 전혀 상관없는 세계에 존재했을지 모를 나를 생각하는 일. 아니 그러나 딱히 동경이랄 수는 없는 건 그 삶이 딱히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
단 한 번 주어진 삶에 좀 맥이 빠져 있는 요즘이라서인지 에세이를 읽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상념에 빠지게 된다.

신간을 꼭 읽는 작가라 오랜만의 산문이 반가웠다. 

- 소설이나 게임이 제공하는 매력적인 대안적 삶들에도 불구하고 진짜 인생이 일회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문득문득 엄습하는 불쾌는, 외면하며 살아온 타세 더 지독하고, 부당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 10

- 내가 좋아하는 언어는 문학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회계가 그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 48

-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중

2025.

#단한번의삶 #김영하 #에세이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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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등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2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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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전망뿐인 미래의 어느 시절.
파괴된 환경 때문에 새로운 세대들의 면역이 무너지고, 오히려 노년의 세대들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설정.

할아버지와 증손자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상황인데,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희망은 놓치고 있지 않아 우울감이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리고 일단 이 디스토피아의 진짜 비극은 방사능 오염, 인간 생체시계의 혼돈이 전면에 있지만,
사실 정부의 민영화, 정보의 폐쇄성에서 두드러진다.
믿을 수 있는 정보의 부재로 지역사회의 관계 속에서 눈치껏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미래의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연령대의 역할이 반전되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나니, 애잔한 어린 세대들은 오히려 철이 들게 되는 걸까.
그들의 죽음이 대수롭지 않게 된 비극의 세상이지만 그다지 살풍경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긍정이 반영된 것일지 모르겠다.

가치가 역전된 오키나와. 이야기 밖 현실의 오키나와는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가진 지역인데,
디스토피아가 된 세상에서는 선망하는 지역이 된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빨리 달려 끝없이>의 언어유희는, 일본어 사용자가 아니므로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점이 있어 흥미가 떨어지지만,
<피안>에 등장하는 극우 정치인의 묘사는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싶은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 요시로는 무메이의 장래에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발밑에 있는 현재라는 시간이 무너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 36, 헌등사

- 물론 아픔을 느끼지만 요시로가 아는, "왜 나만 이리 괴로워야 하지."같은 우는소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고통이었다. 그것이 무메이 세대가 부여받은 보물일지도 몰랐다. 무메이는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기분을 모른다. - 41, 헌등사

- "왜 증조할아버지는 마시지 않아요?" 하고 무메이가 물어서 "한 개밖에 사지 못했다. 어린이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하니 뭐든지 어린이 우선 아니겠느냐."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른은 어린이가 죽어도 살 수 있는데, 어른이 죽으면 아이는 못 살아요." 하고 노래하듯이 무메이가 말하자 요시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죽은 뒤에 무메이가 살아갈 시간을 상상하면 늘 벽에 부딪친다. 자기가 죽은 뒤의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을 수 없는 몸을 부여받은 우리 노인들은 증손자를 앞세워야 하는 무서운 운명을 짊어졌다.
어쩌면 무메이 같은 이들이 새 문명을 지어서 후세에 남겨줄지도 모른다. 무메이는 태어날 때부터 기묘한 지혜를 가진 듯 보였다. 지금까지 보아 온 어린이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지혜다. - 44, 헌등사

- 호모 사피엔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은 편이 낫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 확실히 인간은 지구에게 암세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인간이 그립다.
두 발의 독재가 끝나서 모두 숨을 돌렸는데. 과거를 미화할 작정이야? 동물 윤리는 어디로 갔어?
윤리도 인간, 즉 독재자가 생각해 낸 거야. 포유류의 감정은 윤리로 관리할 수 없어. - 209, 동물들의 바벨

2025. mar.

#다와다요코 #헌등사
#민음사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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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듣는 소설 1
김금희 지음 / 무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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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냉혹함에 심신이 지친 주인공 손열매.
이런저런 사연으로 찾아간 완주에서 힐링한다...는 좀 뻔한 스토리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속 시끄러운 사연들의 이야기가 있다.

완주의 주민들이 겪는 사건들은 그다지 유쾌할 것 없는 종류의 것이고, 닳고 닳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삶이, 일상이 치러지는 과정은 '시간이 흐른다'라는 말을 그대로 그려내는 듯.

수미를 찾아 도달한 완주에서 그 목적을 잊은 채 한 계절을 완주하는 열매의 이야기는,
죽음과 생의 교차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세상의 이야기다.
해피, 새드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엔딩'이라는 사실.
그 모든 이야기 속에 작가의 다정함이 그득해서 읽는 내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김금희 작가, 거부할 수없이 좋은 작가. 이런 편애의 기분을 또 한 번 느낀다.

출판사 무제의 Rec. 시리즈는 앞으로도 무척 기대가 된다.
오디오 북도 들어보고 싶은데 윌라?인지 사용을 안 하니.. 조금 귀찮네. 큐알코드라도 링크했으면 좋았겠다.
여러 배우들의 참여가 궁금하다.

- 그런데 이상하지. 서울로 오고 나서는 여름이랑 비를 기다린다. 비가 처마에서 떨어질 때, 우드드 우드드 우산을 뜯듯이 빗방울이 쏟아질 때, 그럴 때 나는 겨우 숨을 쉬어. 여기도 별다른 곳이 아니구나, 여기도 비 오는 곳이구나, 여기도 별 수 없구나 생각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안도감인지 다른 사람들은 알까? - 29

- 그 말을 들은 손열매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열매도 태풍으로 집 벽이 날아가 버린 동화 속 돼지 삼 형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한동안 요양 병원에서 지내느라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도 '어딘가에' 할아버지가 있는 것과 '어디를 가도' 없는 것은 너무 달랐다. 항상 허전했다. - 57

- 진실은 누가 판단 내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역시 흑담즙 철학자답네. 그럼요?
그냥 그 순간 경험하는 거지. - 151

- 이런 말 무력하게 느껴져서 그렇지만 힘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몫을 또 완주해야 하니까요. - 169

- 거짓 없는 사실, 완전한 올바름, 그것은 때로 삶을 수렴하기에 너무 옹색하다. 그보다는 더 수용적이고 오래고 성긴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서로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여름의 방문 같은 것. - 작가의 말 중

2025. may.

#첫여름완주 #김금희 #듣는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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