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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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 속에서 까발려지는 내면의 누추한 감정들...
달갑다고 선뜻 받아들이기 쉽진 않지만, 정곡을 푹푹 찌르고 있으니 허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날카로움이 담긴 단편들.

우리 시대의 안녕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저 나 홀로 잘 살아나간다는 것으로는 부족한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된다.

김애란의 통찰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 거기 있는 걸 없는 척하고 없는 걸 있는 셈 치는 건 연극의 중요한 약속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가식이나 위선과는 다른 거였다. - 홈 파티, 18

-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 홈 파티, 38

- 이연은 이 밤이, 그리고 또 이 계절이 낯선 듯 익숙해 마치 보이체크가 마리를 죽이기 전 한 말처럼 '몸이 차가우면 더이상 얼어붙지 않으므로' 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처럼 느껴졌다. - 홈 파티, 42

- 지호에게는 뭐랄까,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귀족적 천진함이 있었다. 남으면 버리고, 없으면 사고, 늦으면 택시 타는 식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진 무심한 순진함이. 학부 땐 그게 귀엽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당해 보여 끌렸는데, 결혼 후 같이 살다보니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내가 예산을 맞추려 전전긍긍할 때도 지호는 "그냥 대충대충 해. 별 차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별 차이'에 대한 감각이 지호와 나의 큰 차이였다. - 숲속 작은 집, 58

-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 좋은 이웃, 142

-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 이물감, 175

- 순간 "나도"라고 답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큰 교훈 없는 상실. 삶은 그런 것의 연속이라고. 그걸 아는 사람을 만나 정말 반갑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무튼 별거 없었어. 우리 아버지 부고 안에는. 그 사람이 그렇게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는 거. 전혀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이미 알고 있던 걸 한번 더 확인한 것뿐인데, 그런데도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
이런 걸로도 뭔가 배우는 게 인생일까?
......
하긴 뭘 꼭 배우지 않으면 또 어때. - 안녕이라 그랬어, 246

- 앞으로도 저는 여전히 삶이 무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오니까요. - 작가의 말 중

2025. jul.

#안녕이라그랬어 #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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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숲은 계속된다 타이피스트 시인선 4
김다연 지음 / 타이피스트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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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결정을 기다리며 읽었다.

이 시집의 시들에 왜 이리 공감이 되나... 싶었는데
후반에 실린 산문에서 '간병'과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공감의 이유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과 그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관계.
누구에게도 즐거운 일이 아닌 고통.
그 감정이 되살아 났다.

고요한 여름밤에 개인적으로 무척 와닿는 시들이었다.

- 잃었다고 하기엔 애초에 없었던 _____
없음으로 존재하는 _____
어떤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_____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 시인의 말

- 아무 일도 아닌 거잖아 - 엔딩의 서막

밤과 아침을 디졸브로 넘어가려 하지 말아 줘 섬광이 우리의 두 눈을 할퀴던 눈부신 발톱이었던 것처럼 거친 노이즈로 뒤 귀를 찢던 용기로 남아 있으려 하지 말고 먼저 일어서서 나가는 것이다 수없이 헛걸음치던 지도 속에서 펼쳐진 서막이 우리를 압도해서 우리의 발이 스스로 거기에 묶였던 것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도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아름다운 결말로 해석할 누군가를 위해 비극으로 파국으로 더 빨리 치닫게 내용은 건너뛰어 가는 것이다 단 하나의 정물로부터 단 하나의 형상을 단 하나의 형상에서 지울 수 없는 운율을 얻었지만 의미 없이 흐느끼고 의미 없이 웃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그저 말해 보는 것으로 쓸데없이 가득 채우고 텅 비어 가는 것이다 그토록 정교한 밤의 조각으로 조금씩 조심스럽게 쌓아 가던 대화가 표현할 수 없이 깊어지는 독백의 웅덩이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게
(전문)

- 나는 어떤 모종이었기에 어떤 흙에서도 자라지 못했을까? 허구의 잎. 그림자에 안겨 곤한, 몽상으로부터의 광합성.
빛을 받아 자라나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다 하나의 과오 - 고독은 나의 사여서-코타르 증후군 중

-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펼친다. "추상은 부재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나는 부재한다. 나를 애도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한 부고를 쓰면서 나는 나와 작별한다. - 불빛을 지송하다 중

- 눈물이 아닐 때까지 슬픔을 쓴다면 마침내 수증기에 도달하겠지 그러나 쓸 수 없음이 우리의 마지막이어서 그 여름은 너를 다시 시작하고 나는 다시 시작된 여름 속에 있어 - 그 여름의 빗물이 빈 밥그릇에 고여 가는 - 교환할 수 없는 교환 일기 중

- 몰락한 세계에서 나는 이미 몰락했으므로 완전하다 이미 고독함으로 적막은 황홀하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를 전환한다 여기를 지속한다 머무르는 만큼 저장된다 - Reality -니트 아일랜드 중

- 창백한 불빛을 지나간다 웅얼거리는 눈보라를 따라간다 닿지 못할 목소리가 서성이고 있을 어디로 이어진지 모를 다리를 건너간다 숲과 지나가다 뒤돌아보면
알 수 없다 모른다는 것을 알 뿐
일몰을 보다가 오늘을 잊는다 - 기억은 기억되지 않는다 - 일몰 증후군 중

- 살아 있는 게 슬픔인 줄 모르고 죽음을 슬퍼하다 울다 그친다 가로등 깜박이는 풀밭에 앉아 깜박거린다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있다가 없다 없다가 있다 - - 몇 방울의 물로 너의 강에 닿을 중

- 출처 없는 숲을 거닐다

어쩌면 내가 아니면 네가 걷고 있다

시작 없이 생겨나 끝없이 사라지던 나는
어디서 얽힌지 모른 채 밝아 오던 너는

이미 사라진 장소로부터 날아온 한 마리 새일지도 모른다
금목서 은목서의 향으로 번져 가는 9월의 마지막 바람일지도 모른다

무엇이었든 모두 어제의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는 얕은 바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버리자

단 한 줄만으로도 삶이 되기에 한 줄에 깃들 것

출처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찾기 위해 숲을 뒤적인다

이것이 너의 목소리라면 너의 목소리만으로 견딜 만하다

파생된 것으로부터 파생되고 파생된 것으로부터 파생된, 끝끝내 하나로 인식되지 않는 나 너는,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면서 같이인 줄 모르게 있는, 결국 혼잣말일지도 모를 나 너는

앞선 문장에서 떨어져 나온 밀알을 주워 먹으며 오늘을 버티는 문장의 유령들. 삭아 내린 페이지를 복원하기 위해 떠도는 거친 입자들.

(전문)

- 너의 몸이 무너질수록 나는 오로지 네 몸의 수행자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의 몸이 삶과 죽음을 놓고 내리는 강력한 명령으로, 나를 처절하게 굴복시킨다. 그것이 나의 삶이라면 나는 이미 포기했을 것이다. 너의 몸을 움직이기 위해 내 몸을 움직인다. 한때 너의 것이었던 몸이 누구의 몸이 아닌 채로 너를 짓누르고 나를 짓누른다. - 106

-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추억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살아나 현재를 떠받친다. 추억 속에서 어린 날의 내가 얾은 너의 품속에 안겨 웃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기나긴 고통의 끝, 네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만은 추억의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네 눈앞에 펼쳐질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삶은 더 잃을 것 없는 우리에게 그 추억마저도 남겨 두질 않는다. - 108

-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을 때마다 더욱 처참히 부서질 뿐이었던 날들...... 더는 무너질 것이 없을 때까지 무너져야 도달할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죽음으로써 잃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찾아온 죽음이었다. - 109

2025. jul.

#나의숲은계속된다 #김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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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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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고 쓰라린 시선이 돋보인다.

체념의 정서가 진한데 아마도 이민자의 삶이라는 점이 그런 느낌을 강화해 주는 듯.

생활의 기반이 되는 사회 속에서 타자로 규정되는 이들이 겪는 심리적 불안정감과 자존감의 결여 같은..

- 아이는 아빠에게 나이프의 k는 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장실에 불려갔었다고, 규칙들과 원래 그런 것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 하나일 뿐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글자 하나, 맨 앞에 놓인 단 한 글자 때문에 아이는 교장실에 불려갔다. 아이는 k가 묵음이 아니라고 우겼다고 말하지 않는다. 묵음일 수 없다고 아이는 우기고 또 우겼다. "맨 앞에 있는걸요! 첫 글자잖아요! 소리가 있어야죠!" 그러고서 아이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양 괴성을 질러댔다. 아이는 아빠가 말해준 것. 그 첫음을 단념하지 않았다. 평생 읽고 교육받아온 선생님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아빠가 저녁을 먹는 걸 보면서 아이는 그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을지 생각해본다.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또 뭐가 있을지. 아이는 아빠에게 어떤 글자는, 비록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대신 아이는 아빠에게 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 17,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 레드가 아는 유일한 사랑은 하루의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자신에 대해 느끼는, 단순하며 복잡하지 않고 외로운 사랑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속에, 주말마다 들르는 식료품점 통로에, 그 자리에 한결같이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매일 밤 어둠 속 같은 자리에서, 고요함 속에서 눈부시게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었다. - 35, 파리

- 때때로 사람은 죽는다. 그 죽음에 반드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 71, 랜디 트래비스

- 아빠는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난민이 되었을 때 이 삶의 모든 비통함을 소진해버렸다. 사랑을 잃는 것, 아내로부터 버림받는 것조차 사치였다 - 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 - 130, 세상의 가장자리

- 고국에 있을 때 엄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학교에 가려면 돈이 필요했고, 설사 집에 돈이 있더라도 남자 형제에게만 돈을 썼다. "그 돈도 다 낭비한 셈이었지만." 그녀가 말했다. 엄마는 마당에 앉아 닭을 돌보며 흰색 셔츠에 진청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풀어놓은 닭을 모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족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 206, 지렁이 잡기

2025. jun.

#나이프를발음하는법 #수반캄탐마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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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 교양 100그램 5
하지현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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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창비 가입할 때 고른 책 중 하나.

다른 출판사의 북클럽보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는 단점이 두드러진다.

인문서 시리즈로 기획된 책 세 권을 골라야 하는데 선택지는 5권이었다는 점.

그중 한 권이고, 교양 인문서라는 것이 워낙 좀 뻔하고 피상적이라는 것.

가볍게 읽을거리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책은 예쁘다.

- 불안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안전은 언제든 위협을 받습니다. 그럴 때는 나를 지켜주기 위한 경보 신호가 울리기도 하고, 그 후유증이 남아 오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나의 생명이 걸린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것,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도 하죠. 그게 사람이란 존재의 특성입니다. - 7

- 요즘 사람들이 더 많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불편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낮아진 것에서 찾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참을 만하던 것들이 고통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 위험을 제거하려고 하니 위험에 취약한 개체가 늘어난 것이죠. 불안 역시 면역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편리해지고 쾌적해질수록 작은 불편이 고통의 대상이 되면서 이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 하고, 그러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하면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적당한 불편 적당한 수준의 더러움, 적당한 수준의 모자람은 감수하고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더 나은 것이고 최소한 불안의 문턱을 높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26

- 내향성과 외향성은 두 가지 가장 큰 성격 카테고리로 나눌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향성은 주로 세로토닌(serotonin)이란 신경전달 물질과 높은 연관성을 갖는 경향이 있고, 외향성은 도파민(dopamin)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로토닌이 충분히 분비되지 않는 경우 우울, 불안 수치가 높아지는데요, 이러한 세로토닌에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민감, 예민하고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두드러집니다. 위에서 설명한 매우 민감한 사람은 극내향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에 반해 도파민은 보상, 호기심, 중독과 더 큰 관련성을 갖습니다. 도파민은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에 의해 분비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도전을 즐기는 성향이어야 하겠죠. 어떤 행동으로 말미암은 보상을 내향적인 사랑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외부 자극이 없는 상태를 지루해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38

2025. jul.

#나는왜이유없이불안할까 #하지현 #클럽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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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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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게 굳어져 있던 기억과 감정들이 허물어지는 글.

오랜 세월이 지나 서먹한 재회를 한 형제가 두 점의 그림자로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이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멀리 어디선가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과연 위안이 될 수 있을까?

- 검진이 있는 날이면 재하는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졌고 더 크게 웃었다. 겁이 아는 걸 감추려 안간힘 쓰는 게 빤히 보였다. 내가 모르는 재하의 표정. 그런 것이 언뜻 비칠 때마다 그 애를 향한 묵은 오해나 염오가 한층 누그러졌다. 면을 건져 먹는 재하를 보며 저 애가 내 친동생이라면 어땠을까, 잠시 가정해 보기도 했다. 투박하고 거침없이 속엣말을 쏟아내며 보다 친밀해질 수 있었다면. 서로에게 시큰둥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끈끈한 우애 같은 것을 우리가 처음부터 나눌 수 있었다면. 
나는 내 몫의 땅콩 소스를 그 애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면을 두 볼 가득 문채 재하는 가만히 웃었다. - 26

- 능을 완전히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푸른 기운을 띄던 숲이 자줏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 38

-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 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 58

- 제게 등을 진 채 어머니는 한참 울었습니다. 고여 있던 것을 흘려보내듯 잠잠히.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 74

- 제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지,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 131

- 한때는 내 곁에 있었지만 떠나간 이들을, 깨끗이 털어내지 못해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 소설을 썼다. - 작가의 말 중

2025. jul.

#두고온여름 #성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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