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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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쓰기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여러 소설들을 빌어 말하는 창작, 인간의 생에 대한 고찰.

신성과 경이에 대해서도 여러 번 말하지만, 그런 경험이 그다지 없었기에 그 점은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물은 젖었다. 같은 말 같기도 하지만,
신중하게 써 내려간 작가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일면 고요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 어떤 책을 읽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무언가가 불러일으켜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으기', 즉 생각하기입니다. - 6

-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 71

- 말의 변질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한 시기에 존중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던 단어가 다른 시기에는 무시하기 위해 쓰인다. 한곳에서 존중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 다른 곳에서는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다. 말은 자율적이지 않다. 말의 운명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니까 말의 타락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은 타락할 줄 모른다. 스스로 숭고해질 줄 모르는 것처럼 타락할 줄도 모른다. 타락한 사람들이 말을 더럽힐 뿐이다. 이렇게 쓰이던 말을 저렇게 쓰면 그 말은 더 이상 이런 말이 아니게 된다. 적어도 그런 뜻으로는 쓰지 못하게 된다. - 102

- 불합리한 충동의 에너지가 항상 더 크다. 사랑은 오랫동안 쌓아온 견고한 합리의 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혐오와 차별은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그 안에, 주로 궤변의 방식으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어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적에 대한 혐오나 조롱의 말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사기를 북돋울지언정 허물로 지적되지 않는다. 장려될지언정 제어되지 않는다. 반성과 성찰은 그 논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는데, 합리적 설득을 통해 그 튼튼한 논리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불합리한 충동이며 부조리한 일격인 사랑밖에 없다. - 105

-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 - 251

2025. jan.

#고요한읽기 #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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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사람과의 통화 창비시선 509
김민지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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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이고 후각적인 이미지들이 많았다.

한 권을 천천히 잔잔하게 읽었다.

- 죽음을 오랜 잠이라 여기는
깨어나지 못한 슬픔으로 산다 - 염소가 열리는 나무 중

- 유익하죠 인간은
모든 이야기 끝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기 고독의 최전선에도
간간이 인간만 죽으려 하니까 - 외따로이 중

- 태어난 걸 축하해. 아무도 없을 때 홀로 어느 방바닥과 천장을 쓸고 돌아다니던 냉장고 소리가 너의 전생이었단다. 믿기 싫다면 믿지 않아도 돼. 민지 않아도 너는 계속돼. 이 생에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원한다면 인간이 될 수도 있어. 인간이 되면 가장 먼저 터널에 가봐. 어려운 시기를 통과한 이에게 긴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대. 요즘 터널은 그때보다 밝은데. 밝아도 여전히 무너질까 두려운 인간들이 그 속에 남아 있다. 그 광경을 보면 너도 조금은 안심하지 않을까. 같은 인간이 만든 것을 전부 믿지 않는 마음. 다 뺏기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 덤불을 이룰 때. 조금 더 함께 하려고 뿌리째 힘껏 주먹을 쥔 나무와 서로 손을 뻗고 까지를 낀 채 자라난 나무들 사이에서 숲의 손등 위를 거니는 기분을 느껴보는 거야. 마침내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구의 기분을 - 깍두기공책 전문.

- 제 방향으로 틀어지다가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에 도착해
아무 일이나 만드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스톰 체이서 중

- 다정하고 시끄럽게 바람 흉내를 냈다. 낙하하는 게 어떤 방향의 바람을 몇 번 맞았는지 알 수 없어. 죽음만 조용하고 무성하게 사람들을 돌보는 중이다. - 시간을 재는 시간 중

2024. nov.

#잠든사람과의통화 #김민지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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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들이 쏟아진다 창비시선 376
정재학 지음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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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에서 단 1편의 시만 건져도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표제의 싯구가 들어가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공전' 이 두 편이 특히 좋았다.

소개되어 있는 진도 씻김굿을 읽는 내내 유튜브 영상으로 찾아보았는데 며칠을 푹 빠져 보았다.
김대례 선생의 '진도 씻김굿', '초혼지악'.
이것까지 알게 해준 고마운 시집.

- 항구의 여름, 반도네온이 파란 바람을 흘리고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간 길을 찾는다 길이 있던 곳에는 버드나무 하나 푸른 선율에 흔들리며 서 있었다 버들을 안자 가늘고 어여쁜 가지들이 나를 감싼다 그녀의 이빨들이 출렁이다가 내 두 눈에 녹아 흐른다 내 몸에서 가장 하얗게 빛나는 그곳에 모음들이 쏟아진다 어린 버드나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은 바다였다니... 나는 그녀의 어디쯤 잠기고 있는 것일까 깊이를 알 수 없이 짙은 코발트블루, 수많은 글자들이 가득한 바다, 나는 한 번에 모든 자음이 될 순 없었다 부끄러웠다 죽어서도 그녀의 밑바닥에 다다르지 못한 채 유랑할 것이다 -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중

- 아무 증명도 필요 없었다
비에 젖은 우산처럼 - 모노포니 중

- 나무 둘레에 나이테를 그리며 돌고 있던 나는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늙은 성벽이 되었다 - 공전 전문.

2024. oct.

#모음들이쏟아진다 #정재학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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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루 GD 시리즈
티아구 호드리게스 지음, 신유진 옮김, Nyhavn 사진 / 알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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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 프롬프터.

암흑 속에 숨죽여 무대의 빈틈을 감쪽같이 지워주는 역할의 프롬프터.
반전되는 역할 분담에 무대의 추억들이 서서히 환기되는 이 극을 조금 가만가만 읽게 된다.

정적이며 조용한 대화들이 문득 격정에 휘몰아칠 때 몰아치는 감동이 있다.

극으로 본다면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꼭 보고 싶어졌다.

2. 폭풍처럼 쏟아내는 독백. 그게 가장 큰 매력
잊고 있던 감각인데, 새로운 언어로 문장을 말하고 읽을 때는 조금 더 감상적이거나 로맨틱하다고 느끼는 감각이 있다.
프랑스어로 읽는 안나 카레니나.. 좀 에로틱한 분위기까지 괜히 느껴진다.

- 나는 1978년 2월 24일부터 줄곧 극장에서 일했지만 무대 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했습니다. 지금 나를 처음 본 당신들은 내가 얼마나 창백한지 분명히 눈치챘을 겁니다. 나의 피부는 빛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의 몸, 얼굴, 걸음걸이는 빛 속에 사는 사람의 몸과 얼굴과 걸음걸이가 아닙니다. 나의 시커먼 옷은 어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복장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도록 옷을 입습니다. 나는 보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무대 위 조명이 비치는 곳에 서 있습니다. 오늘 나는 나의 소중한 창백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 9

- 경계에 살기. 잠시 머무는 곳에 살기. 무대와 무대 뒤 그 사이에서 살기. 현실의 둑과 허구의 둑을 잇는 다리에서 살기. 그 두 강둑 사이로 흐르는 큰 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법을 알기. 세상과 무대를 가르는 말의 유수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알기. 기다리기, 지켜보기, 듣기. 살면서 좋은 날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고 강물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여기는 누군가를 위해 구조 대원이 되기. 사고를 기다리기, 극장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실수를 기다리기. 배우가 망각의 불안에 사로잡힐 때, 예기치 않게 기억이 꼬일 때, 현실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고,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 잠시 빌려온 연약한 육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 그를 단어로 구하기, 그의 귀에 속삭이기, 그를 소생시키기, 그에게 대본을 조용히 일러주기, 그에게 생각과 의미와 몸짓을 되돌려주기.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해야 할 이야기이자, 우리가 보여줘야 하는 것들입니다. 구조 대원이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강물에 빠졌고, 삶이 허구의 둑을 범람하기 때문입니다. 프롬프터, 당신을 말하고 싶어요.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프롬프터인 당신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고 그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거죠. 사고가 났을 때의 구조 대원 이야기요. 나는 당신을 위한 연극을 쓸 거예요. - 11

- 어느 순간에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렸고, 그러자 프롬프터가 속삭였습니다.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프롬프터가 속삭일 때,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라는 문장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건 문장이 아니라 그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길게 속삭이는 말일 뿐이었어요.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헨리 왕을 연기하는 배우가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라는 대사를 말했을 때, 그 문장은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파멸이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손가락 끝에서 무대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 18

- 죽지 않기. 무엇보다 죽지 않기. 살아가기. 비극의 도입부에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처럼 신중하고 상냥하게 진단을 내리는 의사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기.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알기.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의심했을 때조차도 옳았다. 우리는 늘 우리가 말하는 것들을 의심하고, 또 말 사이에 둔 침묵을 침묵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그것에 의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의심 속에서도 살아가기.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직면할 때, 우리가 삶에 속해야 하는 이유인 미래의 신비를 다시 확인하기.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합류할 것이라고 희망하며 주저앉아 있을 곳을 알려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지지 말고 무력한 패배자가 되어 임종의 시간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죽음의 상냥한 초대장을 거절할 줄 알기. 죽음을 밀어내고 세상을 보러 떠나기. 방랑자가 되어 산 너머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밤의 끝을 향해 여행하기. 어쩌면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을 변화시킬 때까지, 아니 절대 해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삶에 의해 패배자가 되기. 무엇보다 죽지 않을 것. 좁은 진료실에서 테이레시아스가 공포를 예언할 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죽음의 팔꿈치가 우리의 팔꿈치를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살아 있기. 살아 있는 자만이 죽음의 배회를 상상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옮길 수 있으니까. 그렇다. 우리의 적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우리를 사로잡는 죽음의 형태를 다루는 연극을 만들고 보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치명적인 순응주의의 대열을 늘려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게 양심을 달래거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막연히 시적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나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살아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어느 여름날 매미가 우는 소리만큼이나 구체적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죽지 않기. 늘 그래왔듯이 힘든 시간 속에서 살아남는 일의 달콤한 괴로움을 음미하기. 그러나 편안한 시간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편안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 우리에게 오직 이 세계만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죽음이고, 우리는 죽음과 싸우는 타자들임을 알기.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공장소들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은밀한 장소를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는 신비한 것에 자신을 바치는 순간을, 우리가 우리를 만나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쩌면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살아남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을 지켜내야만 한다. 고함을 치는 대신 속삭이기. 세상의 소란을 거부하기.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을 때도 늘 그곳에 있었던, 침묵 사이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듣기. 바람의 소리를, 생각의 호흡을 장소의 정신을,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마주한, 하나뿐인 그 짤은 순간을 지켜내기. 무엇보다 죽지 않을 것. - 84

2024. oct.

#소프루 #티아구호드리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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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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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세헤라자데의 천일 간 이야기처럼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이야기, 어디엔가 모티브가 있을 법한 이야기들.

9개의 이야기들이 전하는 각양각색의 원석들 같은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 중 <다크 레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만 독서 컨디션에 조금 좌우되는 집중도. 그것만 극복하면...

- "아, 어쩌죠. 갑자기 다 나가 버렸어요. 다들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말은 콘스턴스 당신은 대비하지 못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사실이 그렇기는 했다. 평생에 걸쳐 반복된 실패. 콘스턴스는 결코 대비라는 걸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매사에 대비하고 산다고 치면 대체 어떻게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지? 일몰에 대비하다니. 월출에 대비하다니. 얼음 폭풍에 대비하다니. 그래 버리면 너무 밋밋한 삶이 되지 않겠나. - 21, 알핀랜드 중

2024. nov.

#스톤매트리스 #마거릿애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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