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평점 :
부커상 작품들은 이제껏 대부분 취향을 저격하는 편이었기에, 이번에도 작년도 수상작인 이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했다.
띠지의 '시적 언어', '질문과 탐구의 글쓰기', '장대한 우주 목가'라는 문구가 불안감을 건드렸으나, 무시하고 읽기 시작.
50여 페이지까지 읽은 무렵 나도 모르게 '그래서 언제부터 사건이 시작되는 거야', '언제쯤 내용이 전개되는 거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곧 이 책은 그런 류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그리고 책 소개를 1도 읽어보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ㅋㅋㅋ
그래서 책이 별로냐 하면 그건 아니다.
진짜 정적과 암흑의 우주 공간에 도달한 듯, 내용에 집중되는 면이 있다.
6명의 우주인의 각자의 서사와 삶의 의미가 번갈아 서술되고
그 서사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해준다.
세상사의 모든 사소하거나 중차대한 사건들이 거대한 우주 속에 감금? 되어 있는 우주인들에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는 나에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되겠나... 싶은 허무함도 있다.
너무나 거대해서 헤아릴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우주라는 존재가 그 허무를 강하게 견인한다.
우주의 존재를 생각하면 너무 아득해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그런 측면의 허무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가끔은 좀 새로운 생각을 하자고 스스로 되뇐다. 궤도에서는 너무 거창하고 오래된 생각만 붙들게 된다. 새로운 생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참신한 생각을 하자. 하지만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그저 새로운 순간에 태어난 오래된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저 지구가 없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라는 거다. 지구의 은총 없이 우리는 단 1초도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는 헤엄쳐 건널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바다 위 배에 탄 선원들이다. - 19
- 별안간 지구가 초조하게 곤두선 듯 보인다. 이 부근에 걸핏하면 들이닥치는 일반 태풍과 수준이 다르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지만 처음 예상보다 크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영상과 위도, 경도 좌표를 전송한다. 말하자면 선원들은 점쟁이다. 미래를 보고 말해 줄 수는 있지만, 바꾸거나 멈출 수는 없다. 곧 있으면 궤도는 동쪽과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러고 나면 관측창에서 아무리 목을 쭉 내밀고 뒤를 살펴도 태풍은 시야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렇게 이들의 감시도 끝이 나고, 급속도로 어둠이 엄습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 위력을 키우는 태풍을 초조하게 지켜볼 수 있는 특별한 자리와 카메라뿐이다. 이들은 태풍이 오는 것을 지켜본다. - 44
- 애초에 이들은 힘을 얻으려고 우주에 온 게 아니다. 모든 걸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알고 더 겸허해지려고 왔다. 속도와 정지. 거리와 친밀. 덜해지고 더해지는 것. 이들은 자신들이 작은 존재임을, 아니,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체외 세포들을 왕창 키우는 이들은, 이 순간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이 빈약하게 뛰는 심장 속 이런 세포들에 달려있음을 안다. - 49
- 어찌 보면 인간 문명도 하나의 인생 같다. 우리는 어린 시절 특별하게 키워져 더없이 평범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특별하지 않음을 깨닫고 순진한 마음에 벌컥 기뻐한다. 특별하지 않다면, 적어도 혼자는 아닐 테니까. 우리 세상과 같은 태양계가 아주 많이 존재하고 아주 많은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면 적어도 한 곳에는 틀림없이 생명체가 살 것이다. 함께하는 느낌이 하찮은 우리 존재를 위로한다. 그렇게 인류는 외로움과 호기심과 희망에 끌려 바깥으로 시선을 보내고, 혹시 화성에 다른 생명체가 살지 않을까 싶어 무인 탐사선을 보낸다. 하지만 화성은 틈새와 분화구가 뚫린 얼음 사막인 듯하니, 아마 있다면 이웃 태양계나 이웃 은하계 또는 그 옆 은하계에 있을 것이다. - 53
-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 숀은 절대 알 길이 없다. 이 기묘하고 뜨거운 열망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까 아니면 바보로 만들까. 딱히 어느 쪽에도 못 미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 89
- 지구를 떠나기 전 10대 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진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럼, 아름답지, 그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고말고. 그러면 원자폭탄은요, 기업 로고 모양으로 빛나게 우주에 쏘아 올리겠다는 위성은요, 프린팅 기술로 달의 먼지 표면에 세우겠다는 건물은요? 꼭 달에 건물을 세워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지금 이대로의 달이 좋은데. 그래, 그래, 그는 대답했다. 아빠도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름다워. 왜냐면 아름다움은 선함에서 오지 않거든. 너는 진보가 선하냐고 물은 게 아니었지.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지는 상관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 92
- 진보에 대한 딸의 질문이 옳다. 그때 그렇게 단언하며 궤변으로 질문을 종결짓지 말 걸 그랬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질문이니 똑같이 순수한 대답을 해 줘야 했는데.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나도 모르겠다, 얘야. 그게 진실이기도 했다. 신경질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인류를 어떻게 아름답게 봐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오만함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그에 필적할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뿐이다. - 96
- 그러다 엇갈리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훈련 때 불일치하는 감각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이음매 없는 지구를 계속 보다 보면 벌어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충만한 지구를, 땅과 바다 사이 말고는 어떤 경계도 없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들은 지워지고, 쪼개질 수 없으며 전쟁은커녕 그 어떤 분리도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한꺼번에 두 방향으로 당겨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기쁨과 불안, 황홀과 우울, 애정과 분노, 희망과 절망을 느낀다. (...) 그러면 뭘 하지? 어떤 실천을 해야 하지? 말해 봤자 소용 있을까? 이들은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 127
- 모든 게 돌고 지나간다.
이렇게 생각하며 엽서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는 숀은 문득 질문이 우습게 느껴진다.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써 내려가고 있냐니? 우리는 아무것도 써 내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써 내려지고 있다. 우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다.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냥 잎사귀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으로서 하는 모든 행동이 도리어 우리를 확실히 동물로 만든다는 것이. 영원히 스스로를 응시하며 무엇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지 알아내려 애쓰는 걸 보면 우리는 얼마나 불안정한 종족인지. - 186
- 우리 존재의 의미는 크지만 동시에 무의미하다. 인류 위업의 정점에 도달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미미한가를 깨닫게 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가 이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위업임을 비로소 이해한다. 우리를 공허와 갈라놓는 금속 물체 안에서 죽음은 너무나도 가까이 있다. 모든 곳에 생명이 있다. 모든 곳에. - 212
2025. jul.
#궤도 #서맨사하비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