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트렌드 2014
커넥팅랩 엮음 / 미래의창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저는 모바일이 PC 환경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그렇습니다, 결국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모바일 퍼스트"까지는 몰라도, "모바일 온리"라는 이 책의 취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인데요.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유익했습니다. 책을 통해 얻는 것은 저자(들)이 주장하는 최종의 대의일 수도 있지만, 그 저자들이 주장을 펴는 방식, 상세한 각론으로부터 얻는 주변 지식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습니다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의 기본 패러다임을 결정하는 중대 요소 하나를, 여러 각도에서 상세히 풀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도 감사한 책이었어요.


(이하의 설명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제 해석과 표현에 의해 전개된 것이므로, 혹시 내용이 부정확하더라도 책의 잘못이 아닌 저의 책임입니다. 물론 내용의 정확성에는 자신 있으므로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는 보시는 바대로, 2013년의 리뷰입니다. 트렌드가 아무리 순간을 단위로 바뀌는 변덕스러운 녀석이라고 하나, 만약 그 시계열상의 연속성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트렌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흐름, 유행을 두고 특별히 "트렌드"라는 의미를 부여할 때에는, 어떤 지속적인 맥락이나 최소 한도의 "역사성, 인과 관계" 같은 걸 상정한 후의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 해의 트렌드를 전망함에, 올해의 반성이 빠져서는 그 기초를 신뢰할 수 없음은 당연하죠. 1부에는 총 5장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중 1장과 4장은 서로 연결시켜 읽어야 유기적인 파악이 용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장을 보시면, all-IP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C-N-P-T의 각 영역을 지금과 같은 업체간의 할거가 아닌, 단일 업체가 통합적으로 장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어떤 독과점이나 시장 지배적 사업자의 탐식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산업별 경계로 나뉘어져 있던 네 개 영역의 구분이 무너지고, 단일 산업으로 통합되어 보다 편하게, 보다 저렴하게 소비자에게 효용을 제공하겠다는 거죠.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C란 콘텐츠, N은 네트워크, P는 플랫폼, T는 단말기라고들 합니다(저자의 설명입니다). 저 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네 가지 중 두 개 이상의 영역을 장악하고 있던 주체는 통신사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가정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선 갑자기 "...오히려 다른 영역에 있는 사업자들이 실질적인 all-IP를 구현하고 있는 형국이다."며 다소 모호한 설명을 합니다. 앞뒤의 내용이 서로 배치되는 느낌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현 단계에서 all- IP의 주도권을 잡는 데에는 통신사가 가장 유리한 입장이나, 시장의 특성과 잠재력을 영리하게 간파하고 이슈를 선점하며 구체적인 개별 단계를 밟아 나가는 데에는 다른 기업들이 더 두각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네요. 쉽게 말해서, 현재 땅을 가장 넓게 차지한 건 통신사이지만, 전투를 위해 자신들의 좁은 땅에나마 야무지게 전투 시설을 구비하고 개별 전투의 승리를 다짐하는 쪽은 다른 중소규모의 도전자들이라는 거죠. PCS가 도입되어 소비자(가입자)들을 대대적인 마케팅을 통해 끌어 모을 때만 해도, 016, 018 등의 통신 사업자(N)가 게임이나 영화 등의 콘텐츠(C)를 "생산(제작)"한다, 혹은 검색 사이트(P)를 운영한다, 이런 건 대단히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폰을 직접 만드는(T) 일도 어색했죠(011 SKT의 "스카이폰" 브랜드는 예외겠습니다만). 쉽게 말헤서, 드라마, 영화, 게임을 만들고, 망을 관리하고, 포털을 운영하고, 단말기를 만들고, 이 모든 걸 한 회사가 다 맡아하는 게 all-IP죠.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KT가 싸이더스를 소유하고 있다든가 하는 게 다 그 예라는데, 이 외에도 구 하나로통신을 SKT가 SK브로드밴드로 흡수 합병한 일, 파워콤을 LGT가 인수한 일 따위가 더 실감나는 사례이겠습니다(같은 N 안에서의 흡수융합).


제 생각에는 all-IP란, 그저 패기있게 각 사업자들이 외치는 구호일 뿐, 가 까운 시일 안에 실현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어떤 단일, 소수 사업자의 지배적 대두를 허용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 점은 이 저자도, 위의 저 모호한 서술로 어느 정도는 자인하고 있는 셈이죠. 대표적인 컨텐츠 기업인 카카오가 과연 통신사의 위상을 넘볼 수 있을까요? 이 책의 p73(제 2부 1장)을 보시면, "이통사는 컨텐츠 기업의 덤프 파이프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라는 화두가 던져져 있는데, 이는 이 1부 1장에서 논하는 all-IP 이슈와는 상당한 모순을 빚는 주장입니다. 또, 거대 통신사가 과연 네이버 등의 플랫폼 영역을 넘볼 수 있겠으며, 애플의 앱스토어 역시 그 기능을 어느 정도나 더 유의미하게 유지할 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이 중에서 그나마 가장 만만한 건 단말 제조 영역[T]입니다. 물론 애플이나 삼성 역시 거대한 자본력을 갖췄으니만치 이 볼만한 전쟁에서 종속 변수로 머물려 하진 않겠죠) 여러 필진이 관여한 기획이고, 다양한 시각들을 엿보고 공부하는 재미가 있는 책이니만큼 서로 모순되는 주장도 각각 음미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여튼 산업으로서의 all-IP 대두는 특히 소비자들에게 흥미로운 새 방향을 제시하지만(기존의 경계 소멸), 단일 기업이 패권자로 나설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엔 각 영역에서의 컨텐더들의 저력이 다들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요.


페 이스북이나 트위터 모두, 본성상 반드시 모바일 친화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소통의 대의가 유저들의 동선과 보다 밀착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대체 모바일을 버리고 유선에 집착할 수는 없는 일이죠. 실제로 모바일 트렌드를 가장 선도적으로 구체화하는 기업은 페이스북이며, 이 점에서 과연 21세기의 총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페이스북의 각종 약진상은 놀라우며, 이익 창출과 생존을 사명으로 하는 기업의 발빠른 행보와 비전은 여타 누구의 상상력이라도 따라갈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빌 게이츠가 "생각의 속도"라는 개념을 말했지만, 모두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단계를 지금 여기서 현실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잘나가는 기업, 증시에서 한결 같은 기대와 낙관의 대상이 되는 기업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번 저자들이 자꾸 강조하는, "최후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질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최후의 승자"가 과연 존재해야만 할까요? 또, 그 후보들은 여기 제시된 기라성 같은 기업 중의 어느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지요. 실제로 이 책 2장 2절을 보시면, 프라이빗 SNS를 비롯해서, 심지어 안티 소셜 서비스까지 등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모바일 생태계에서 어느 한 서비스만으로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다양한 서비스의 컨셉, 기능이 존재하는 게 자연스럽죠. 그런데 이 장에도 나와 있듯, 페이스북은 이 점을 간파하여 틈새 시장을 별도 서비스로 벌써 공략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의 네이버가 "밴드"를 통해 벌써 국내 시장을 선도적으로 창출하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죠. 과거 유선 시대를 돌이켜 보면, 야후, 라이코스, 알타비스타, 그 외 각종 특성화 검색 엔진이 각각의 영역에서 자기 장기를 뽐내며 할거하는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구글 하나로 판도가 거의 통일된 형국이죠. 서비스는 다양화하되, 비용과 공급 구조의 합리화를 위해 패권자는 하나, 혹은 소수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습니다.


유료화의 이슈도 IT 업계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과 거 프리챌이나 싸이월드의 몰락은 이 문제의 소프트랜딩이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님을 잘 알려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카오톡의 성공은 정말 놀라운 일이고, 이제 겨우 흑자로 돌아섰다곤 하나 본디 안정적인 수익 구조의 설계, 안착이 지난(至難)한 게 이 바닥의 사정임을 고려하면 뭐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동전화 초창기 시절부터 문자메시지가 무료였던 일본(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은 우리나 미국처럼 sms 기반이 아닌, e메일로 펀더멘틀을 잡았기 때문이죠. 번호와 번호 간의 통신이 아니라, 메일 계정 둘을 통신사가 연결해 주는 구조입니다. e메일이 무료니 당연히 문자메시지도 무료였죠)에서, 우리처럼 "무료 문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네이버의 라인 메신저가 일본에서 대거 약진한 건, 동일본 대진재가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책을 직접 읽고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이 가장 흥미있어할 만한 내용으로는 음성 매시업을 다룬 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요. 영화 <설국열차>에서처럼 기계 하나로 통역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면 정말 신기한 일이겠죠. 어떤 마술 같은 게 아니라, 최근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빅데이터, 그리고 음성 인식 기술이 융합되어 가능한 기술일 수 있습니다(책에서는 음성 인식 기술과 데이터 속도만 강조하는데, 그 이전에 방대하게 축적된 번역의 선례 데이터의 양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을 읽으면서 못내 미심쩍은 게, 뭔가 저자분께서 "매시업"의 개념을 잘못 이해, 제시하신 것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매시업이란 두 개의 오리지널 소스를 연결해서, 유용한 제 3의 서비스를 창출해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통역을 도와 줄 기술로는 1) 음성 인식, 2) 기존의 텍스트 번역기, 이 둘은 종래 전혀 별개의 영역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제 3) 즉시 통역 서비스를 창출하는 데에 이 둘이 매시업 될 수 있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영화 <설국열차>의 그 통역기는 매시업과는 무관할 가능성이 크죠(그 통역기가 중앙망에서 다른 db를 연결해서 관리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또, 퀄컴의 "스냅드래곤 보이스 액티베이션" 역시 자체 CPU에서 독립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데, 이 역시 매시업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겠구요(배추장수 소형 전자계산기가 매시업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죠). 통합된 기기(단말기가 아닌 고립된 기기)에서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건 이미 매시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오리지널입니다. 음성 통역이 자유자재로 되는 단계까지 갔다면 이미 그건 매시업 단계를 멀찌감치 초월한 거죠. 매시업은 지금 같은 초창기에서나 방법론으로 거론되는 거구요. 그리고 저는 근본적으로,통번역은 논리연산의 문제가 아닌 휴리스틱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빅데이터나 연산 처리 속도, 망의 차원이 아무리 확대, 진화되어도, 질적으로 해결 못 할 문제가 남아 있는 겁니다.


고도로 통신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더 이상 모바일과 유선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큰 그림만 얻어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동전화를 쓰면서, 이게 SK다 KT다 하는 구별, 또 게임을 하면서 이게 카카오톡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혹은 PC 상에서 이게 넥슨의 서비스다 NC의 작품이다 하는 인식이 있습니다만, 장 래에는 그런 개념 없이 그저 편하게, 중간 경로를 인식하지 않고 즐겁게 소비하는 선에서 다 끝낼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래미안에 입주해 살면서, 그 벽지와 마감재, 콘크리트의 제조사가 어디인지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모바일이 일상 생활에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그 주도권을 가진다는 의미지, 다른 기기(예컨대 PC나 TV)를 모조리 대체한다는 건 아니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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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동물복지의 모든 것 - 돼지도 장난감이 필요해
박하재홍 지음, 김성라 그림 / 슬로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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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만 보고 어린이 동화인 줄 알았는데요, 내용은 아주 심각한 주장과 사실을 담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고 중요한 깨달음을 요구하는 내용이지만, 내러티브는 쉽고 재미있게, 공감을 유발하는 식이라서 금세 읽어낼 수 있었네요.


제목의 "돼지도 장난감이 필요해"는 무슨 뜻일까요? 말 그대로입니다. 돼지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지능이 높고(여기까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시죠?), 깔끔하며(고개가 갸웃거려질 수 있습니다), 탐욕스럽지 않고, 지루한 걸 못 참는 부지런한 동물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소나 다른 가축들은 훈련을 통해 행동 양식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돼지는, 반복된 행동을 통해 기본적인 학습이 가능하다고 하네요(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에 보면, 가이아의 말로 원숭이와 돼지가 교접하여 탄생한 게 인간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죠. 돼지를 동원한 건 그 지능을 따오기 위해서랍니다). 게다가, 배설을 언제나 거주 환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해 놓고 행한다는 점에서 깔끔합니다. 그럼 왜, "돼지우리"란 말이 더러운 거처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 책의 취지에 한 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본능에 맡겨 두면 얼마든지 깨끗하고 "모범적으로" 살 돼지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마련한 가혹한 환경에 갇혀 살다 보니 그처럼 열악한 환경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다시피 바뀌게 되었다는 거죠. 문제는 인간이지 돼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단조롭고 지루한 걸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 돼지이며, 우리 인간을 위해 육질을 공급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한 만큼, 이 동물에게 장난감 공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부에서는 이 돼지 외에 닭과 소가 나오는데, 특히 도축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일이 벌어짐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흔 히 우리가 전근대를 야만적이라고 범주적으로 비난하지만, 소위 "백정"들은 동물을 도살하면서 가장 인도적인 배려를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물질만능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축의 대접과 운명이 더 나빠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가혹하게 다루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진 인간마저도 그 도덕성의 퇴화를 겪었다는 점이 심각하죠. 우리가 동물을 학대하는 일은, 동물 학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 자신이, 생명을 경시하고 영혼을 타락시켜, 우리 자신을 전보다 더 못한 존재로 추락시키는 거죠. 동물을 위하는 건 동물만을 위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돼 지 등의 가축에 항생제를 먹이면 성장이 무척 빠르고 뚜렷하다는 이유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이 항생제 주입을 많이 하는 게 우리나라라는데요. 문제는 이 항생제가 그것을 먹는 우리들의 몸에도 축적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병원 안 가고 주사 안 맞고 약품을 남오용하지 않아도, 돼지고기를 무분별하게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 몸은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네요! 이제 삼겹살 요리 애호 습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기로에 선 습관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2부는 더 볼만합니다. 시베리아 호랑이 크레인을 아십니까? 이 호랑이는 어려서 장애로 태어났는데, 송곳니가 뻐드렁니라 턱이 잘 다물어지질 않았습니다. 만약 자연에서 이런 개체가 태어나면, 그 동물은 온전한 맹수 성체, 포식자로 자라지 못하고 도태할 가능성이 많다는군요. 좀 충격적인 것은, 이런 불구의 자식이 나오자 그 어미 호랑이가 아기를 버리고 돌보질 않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모정이다, 혈육의 정이다 하는 문제는 자연의 본성으로만 알았는데, 그것도 DNA가 온전히 전파될 정상아의 생육에만 해당되는 문제고, 이런 장애개체의 경우는 해당이 없나 봅니다. 무정한 어미 호랑이 때문에 결국 아이의 보호 양육은 사육사들이 전담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어려선 개성 있는 외모로 동물원을 찾은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 크고 보니, 그 장애의 훙한 모습이 영 두드러져 입장객들의 항의가 잇따랐다고 하네요. 결국 이 아이는 동물원에서 내쫓겨, 민간 업자에게 팔리게 되었는데 그 이후의 사연은 더 기구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한 녀석이 바로 개입니다. 개처럼 인간에 의존하고 순종적인 동물은 없죠. 어떤 이가 늑대 어린 것을 어려서부터 무리와 격리시키고 가정에서 길러 봤는데, 개처럼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지는 못하더라는 겁니다. 오랜 시간 (거의 몇 천 년 단위죠)에 걸쳐 본성 자체가 바뀔 만큼 길들여져 온 터라, 아예 유전 정보 자체가 바뀌어 버린 거죠. 게다가 개는 한 마디로 개라 통칭할 뿐, 얼마나 크기와 모양이 다양합니까? 이 역시 교배와 개량 작업이 빚은 마법이죠. 그런데 그런 개라고 해서, 인간이 그 처분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장난감으로 여기면 그건 아주 곤란한 이야깁니다. 그래서 뜻있는 분들은 "애완견,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반려견,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거죠, 정말 지당한 일입니다.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고려와 고찰을 통해, 과연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본성과 실체는 무엇인지, 다소 엄숙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해 주는 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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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부터 청춘
야마사키 다케야 지음, 김형주 옮김 / 지식여행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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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 이 책을 고르게 된 동기는, "육십이 청춘이면 난 그럼 태아인가?" 같은 상대적 안도감을 느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선착순 긴 줄 앞자리에서,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으쓱해지지 않습니까? 어르신들께는 좀 죄송하지만, 아직 젊다는 상대적 유리함을 수시로 확인하면, 각박하고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에서 한창 현장을 누비는 입장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은 순전히 그런 이기적인 의도에서 고른 책입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득가득 채워진 당부와 가르침(단순히 명언, 금언이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을 읽으니, 아직 60이 되려면 까마득한 나이이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공감으로 다가오는 이 느낌은 뭘까요? 올 바른 말, 진리는 사실 알고 보면 어느 원전을 바탕으로, 다소의 변형을 거쳐 비슷비슷한 모습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가르침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말들,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요, 비록 낯선 표현이고 가르침이지만, 살면서 느낀 바를 잘 반영하고 있어서 실감 나는 교훈으로 마음에 다가왔어요.


저자는 일본 분입니다. 야마사키 다케야라는 성함인데, 1935년생이십니다. 우선 책을 읽다가 저자가 일본 분이라는 점에 조금 놀랐습니다. "외국인 저자의 느낌과 생각을 담은 저술인데, 이처럼 공감이 넓게 이뤄지나?" 그것은 일본과 우리가 비록 앙숙으로 지낼지언정, 같은 동아시아 유-불 문화권으로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서일 수 있고, 특히 이 저자분이 살아 온 고속 번영, 개발 시대가 우리의 그것과 많은 공통점을 지녀서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저자의 깨우침, 내공, 살아 온 인생의 밀도가 남달라서일 수도 있죠. 이 책이 유독 저에게 많은 교훈을 안긴 데에는, 이 세 가지 이유가 다 나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이분입니다. 이 연세에 동경대 법대 출신이면 그 연배에선 최고 엘리트겠죠.

책에서는 "인터내셔널 아이"의 최고경영자라고 하고, 이 사진의 출처인 재팬타임즈에서는 "차나유 인터내셔널"의 CEO라고 합니다. 어느 편이 맞는지, 둘 다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말이 많지만 하나만 인용하면요.

회춘이라고 해도 겉모습이 다소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장 기관의 건강이다.
염색, 화장 등의 겉치레만으로 사람들 눈을 착각하게 할 수는 있으나, 자신은 그것이 참된 모습이 아님을 알므로,
"이것은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자책 때문에 위축되는 태도가 어느 한 구석에건 드러나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상당한 미인이다 싶은 여성인데 이상하게 어딘가 주눅든 모습을 보이는 때, "아 이분은 성형을 하셨구나," 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너무 짖궂은 해석, 혹은 내용의 왜곡이 될는지요. 하지만 저는 이책에 실린 여러 가르침들이, 주어와 상황을 조금만 바꾸면 젊은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고 여겨졌습니다. 가령, "어떤 젊은이들은 고의적으로 나를 '영감님!'이라 부르며 거친 언사를 보인다. 그 이면에는 먹은 나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존경 없이 위력으로 대등하게 승부를 보겠다는 무례함이 깔려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들을 개의치 않는다. 젊은 나이에 걸맞은 패기와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실무 현장에서 기싸움의 일환으로, 고의적으로 거친 매너를 보이는 일은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은 결국 행위자의 지각 없음과 무능을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게 저자의 결론인데, 저 역시 사람 상대하면서 자주 실감하는 대목입니다.


노후 설계 같은 장은 역시 주로 노인분들을 위한 정보와 조언이겠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결론은 그렇네요. 상인들이란 결국 호시탐탐 고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모사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자신이 주체적으로 큰 얼개와 방향을 잡아야 하며, 기술적인 세부 사항에서나 외부의 도움을 받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이 역시, 60 아니라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도 지침과 원칙으로 삼을 수 있는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자 식과 손주와 거리를 두는 법. 이 대목은 얼핏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도 주지만, 매우 현실적인 면을 충언해 주는 서술입니다."자식은 삼계의 멍에이다" 같은 말도 있다는군요. 결국 장성하여 독립적인 인격과 이해를 갖게 되면, 아무리 부모라도 예전처럼 사랑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 자식이 손주를 낳게 되면, 조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예전 어린 자식을 키우던 시절이 생각나서 귀여워할 수밖에 없는 거겠구요. 이런 자식, 그리고 손주들에게 잘하는 하나의 방법은, 교육비나 여행비 등을 지원해 주는 게 있다고 하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는 증여세나 상속세 부담을 덜어 좋다고도 합니다. 한국 세제상으로도 그리 해석되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동작이 예전같이 민첩하지 않고, 몸매가 망가지기 쉬우므로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조언도 있습니다. 이는 무분별한 사치나 낭비와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결국 행복한 노후는 건전하고 흔들림 없는 인생관이 어느 정도 성숙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노화와 죽음으로 수렴해 가는 인생이므로, 인생의 대선배가 될 이런 가르침을 잘 새기고 갑작스런 충격에 조금씩은 면역을 들이는 것도 현명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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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둑할망 돔박수월 우리 땅, 우리 마을 이름에 얽힌 역사창작동화 시리즈 1
최정원 지음, 이승주 그림 / 푸른영토주니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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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 정말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내려 놓았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우리 땅, 우리 마을 이름에 얽힌 역사 창작 동화 시리즈"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역사 의식이 부족한(정말 부족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네요) 저 같은 성인(成人)이 읽어도 충분한, 아니 그 이상의, 배울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었어요. 뭐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에다가, 백범 선생의 모친이신 곽낙원 여사의 성(聖)스러움을 더한 그런 캐릭터였다고 할까요, 이 "창작 동화"의 주인공인 현맹춘 할머니의 삶은, 현대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뜻깊은 사연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을, 제주도에 흔하다는 모진 바람을 능가할 폭풍처럼 독자에게 밀려 오게 하더군요. 이승주 님의 그림도 아름답고 격조 높았거니와, 실존 인물 현맹춘님의 삶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하고, 각 요소의 낭비 없는 구 성으로 문학적 완성도를 높였으며, <토지>나 <혼불>의 미니어처를 연상케 하는 제주 방언, 나아가 순우리말의 향긋하고 다채로운 향연에, 독자는 넋을 놓고 페이지를 넘기고,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 끝내기 아쉬운 독서를 먹먹한 마음으로 마쳤습니다. 


현맹춘은, 현재 기준으로 제주도 올레길 5코스에 위치한 방대한 동백숲을 혼자 힘으로 조성한 업적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17세 때 가난한 오씨 집안에 둘째 며느리로 시집 와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던 방법으로 시가의 가산을 늘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을 꾸릴 기대에 가득합니다. 관습과 고루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과 가족의 활로를 모색하는 인생은, 주변의 사소한 것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개척 정신이 그 깊숙한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가 많죠. "아무리 제주도에 바람이 잦다지만, 어떻게 이처럼 쉬이 지붕이 날아갈 수 있을까? 집도 튼튼히 지어야겠지만, 바람을 막아 줄 숲(이것의 방언이 "수월"이라는군요)을 조성하는 게 근본의 방책 아닐까?" , "지척에 보이는 게 바닷물인데, 어째서 돈을 주고 따로 소금을 사 먹어야 할까? 버둑(황무지라는 뜻입니다)과 벵듸(허허벌판)에 염전(소금빌레)을 조성하여, 흔한 자원으로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가난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려는 생기 있고 진취적인 정신이 내린 결론이고, 그녀는 이를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숲(수월) 조성 과정에서 해충인 송충이의 가시에 찔려 며칠 동안 드러누워야 했던 맹춘은(저는 송충이가 흉한 꼴에 나무를 상하게 하는 줄만 알았지, 가시까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낙엽을 치울 걱정도 없고 해충이 번식할 우려도 없는 수종(樹種)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동백(돔박)나무를 떠올립니다. 이 선구자적인 개척 사업으로 인해, 거주민들은 근 백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죠.


그녀는 친정에서 얻어온 산귤 씨를 뿌려, 요즘 말로 농가 부업을 시도하여 별도의 수익원을 모색합니다. 친정 어머니가 특별히 이 산귤씨를 구해 준 것은, 시집 간 후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온 딸에게 "출가외인은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며, 물질 도구를 대여하는 일을 금했기 때문입니다(동네 사람들의 압력력이 더 결정적이었지만). 이처럼 이 동화는 마치 성인용 본격 소설처럼, 앞서 무심히 제공된 화소(話素)가 반드시 뒤에서 요긴하게 재활용되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던데요. 이런 예가 여럿 있으니 글을 이어나가면서 수시로 지적하겠습니다. 아무튼, 애써 가꾼 귤밭이 그 소출을 거둘 시기가 되자, 어떻게 알았는지 관청의 아전이 와서 부부를 호되게 추궁하며 매질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득 탈루를 시도(과실이라고 해도 위법은 위법이죠)한 셈이니 전혀 명분 없는 처사는 아니겠으나, 문 제는 그 "세율"에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정한 생산량의 100%를 책정하니, 만약 재해로 그 분량에 미달하면 부족분은 맹춘 부부가 다 채워 넣어야 합니다. 땀 흘려 노동한 대가의 일부도 못 챙기고, 오히려 추가의 착취까지 당하니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야밤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밭에 뜨거운 물을 뿌려 애써 가꾼 작물을 다 고사시키고 말죠. 이 에피소드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비트는 어리석은 과세 정책을 밀고 나간 당시 "조정(책의 표현입니다)"의 무지함을 폭로하는 구실을 하는데요. 앞부분에 나온 증언, "잠녀는 가혹한 조세 부담이 지워졋으니 차라리 일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았으나, 이미 관청에 등록이 된 터라 물질을 포기할 자유도 없었다."는 부분과 연관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멸적 수탈 구조의 부조리가, 국가와 지배층, 기층 민중의 삶을 모두 파멸로 치닫게 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맹춘은 생산 구조, 계층 질서의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 일생을 보냈던 근대사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됩니다. 앞서 말한 산귤밭의 존재를 관아에 고변한 자가 따로 있었던 걸로 암시되는데요, 바로 맹춘의 어린 시절부터 사사건건 훼방과 질시를 일삼았던 악녀, 왕생이라는 캐릭터가 그것입니다. 본디 얼굴 예쁘고 마음씨까지 착한 여주인공에게는, 이처럼 저주 받은 성품의 안타고니스트가 양념처럼 끼게 마련이죠. 이상하게도 인물이 더 나았던 맹춘은 가난한 남성에게 시집오고, 봐 줄 구석이 없었던 왕생은 여유 있는 집안과 연을 맺어 이후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걸로 나옵니다. 맹춘은 이후 모진 고생으로, 누구에게나 가난한 아주머니 취급을 받는 행색으로 전락하지만, 왕생은 허여멀건한 모습으로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장면에서까지) 노동과는 거리가 먼 유한 계급의 이미지를 유지하는가 봅니다.(물론 이는 극적인 변전을 이후에 맞이하는데요, 스포일러가 되므로 자세히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자기 백성을 가장 못난 방법으로 괴롭히던 나라, 나랏님은, 물밀 듯 밀려오는 외세의 위력 앞에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제주도에는 느닷 천주교의 위세를 빙자하여 새로운 수탈의 마수를 뻗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일종의 권력 진공 상태에서, 우리가 잘 아는 이재수의 난, 유명한 민란이 발생하게 되죠. 이 소설에서는. 비록 민중의 한을 대변하는 존재로 이 맹춘이 설정되고는 있으나, 민란 한가운데에서 자칫 "폭도들"에게 자신과 피붙이가 큰 화를 입을 뻔했다는 설정을 둠으로써, 이재수의 난에 대해서 그리 긍정 일변의 평가를 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를 빙자한 악한들이... " 같은 서술을 통해, 민감한 문제에 대한 균형 있는 접근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은 현지에서 어느 정도 합의된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점도 무시 못 하기에, 작가는 책 후기에서 아동 독자를 위해 표준적인 역사 평가를 상세히 제시하고도 있습니다. 참 여러 각도에서 세심한 배려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처럼 무거운 역사 이야기만 가득하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서, 맹춘은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남편과의 사이에 일찍 수태를 하게 됩니다, 꿈에 진주를 움켜 쥐고 내 것으로 하려 들자, 어느 할머니가 나타나, "그렇게 네 것으로만 취하려 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떠납니다. 꿈의 뜻이 궁금해서 손윗동서에게 물어보니, "태몽이긴 한데 계집아이 꿈이라 대를 잇진 못하겠군!" 이라는군요. 하지만 달을 채우고 낳은 아기는 사내애였습니다. 아마 자신이 아들을 보지 못하니 저런 경망한 소리를 제 바람을 담아 떠드나보다 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뒷부분에서 이 손윗동서가 소박 맞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다른 부인을 들이고도 끝까지 아들이 없었는지, 맹춘의 첫아들은 결국 시아주버니에게 양자로 가고 맙니다. 새로 들인 부인도 나중에 어느 대목에 등장해서 의미있는 대사 한 마디를 하는데요, 이처럼 이야기가 재미있게 이어지면서도 뭐 하나 낭비되는 요소 없이, 마치 맹춘의 야무진 살림솜씨마냥 스토리가 찰지고 밀도 있게 꾸려집니다.


제주도에서 일제 강점기 연간에 그처럼 활기 있는 저항 운동이 일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새 노령에 접어든 현맹춘에게, 이 독립 운동은 다른 각도에서 그의 인생을 다시금 시험합니다.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현맹춘이 이 과정에서 보이는 자세와 태도는, 참으로 신중하면서도 현명합니다. 젊은이들의 의기는 이해하지만,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도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니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무지몽매하던 이전 장의 아낙 캐릭터들은 다 퇴장하고, 신식 문물과 계몽 교육에 그 영혼이 눈 뜬 젊은 여성상이 보기 좋게 이야기를 채워 나갑니다. 현맹춘은 무기력하고 암담했던 과거와, 활기와 의지로 가득하지만 불안정한 미래를 가교하는 제주의 혼으로 구실합니다. 이 과정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마치 <자이언트>같은 서양 고전 연대기 영화를 보듯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있더군요. 저항을 소재로 삼고 한과 고발을 짙게 투영하면서도, 결론을 화해와 평화로 끌고 나가는 건 참 보기 드문 일입니다. 현맹춘의 삶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건, 마지막에 울창하게 이뤄진 동백 숲이 못마땅해서 일부러 침입하여 수목을 망가뜨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땅을 물정 모르는 신혼 부부에게 팔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자가, 이제 부동산 가치의 급격한 상승을 보고 그 개발자의 노고는 잊은 채, 부당거래라도 한 듯 불평을 제 자손에게 털어 놓는 모습, 얼마나 못나고 사악합니까. 그러런데 현맹춘은 그리 여기지 않습니다. 언젠가 젊은 시절 자기 꿈에 나타났던 그 할머니처럼, 나눔을 모르고 협소한 소유욕만 챙기는 태도를 나무라려, 하늘이 내린 경고로 받아들이는 거죠. 바로 이 대목에서 맹춘은 스칼렛 오하라나 <토지>의 서희를 넘어, 동양식 성녀상에 접근하는 거죠.


표현이야 제주 방언의 아름다운 성찬이 펼쳐지니 읽고 새기는 맛은 기대해 마땅하지만, 작가의 솜씨는 대단히 섬세합니다. 예를 들면 이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아마 제주 일각에는, "먹을 것을 구한다"를 일종의 대유법(제유법)으로 삼아, "쌀을 구한다."라고도 하나 봅니다. 이런 사소한 표현에까지 신경을 써서, 문장 하나하나에 기술적 의미 이상의 특별함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출가"라고 하면 보통 "시집간다" 정도로 이해하는데, 웬 후주 표시가 되어 있나 해서 넘겨 보았더니 저런 각별한 의미가 따로 있었네요. 참고로 제주도는, 아직도 아래 아 음가가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자분이 얼마나 이 책에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능력 범위 안에서, 저는 이 책에서 단 하나의 오탈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조카에게 주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현맹춘 님이 동백꽃 사랑하던 마음마냥 이 책을 제 서가에 고이고이 모셔두기로 했습니다. 아, 참, 현맹춘 님의 위대함은 "나눔"의 정신에도 있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타협책으로, 책 주인인 제가 이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잘 소화한 정수(精髓)를, 제 조카에게 저의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좋은 책은 그 교훈과 향취를 주변에 어떻게 해서건 전파를 해야지, 아끼면 똥 된다는 말처럼 저혼자 꿍쳐서(이 책 p75 참조)는 안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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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안희정의 진심
안희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충 남도지사 안희정은 여태 여러 권의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흔히들 그를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사, 브레인으로만 인식하지만, 나름의 확고한 정치철학, 커리어, 그리고 학문적 기반이 있는 분이고 수백만 도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도백으로 선출된 인사이므로, 그런 시선은 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진솔한 서술 속에서 그의 진정성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의 서두에는 그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지난 2008년 당시 집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루키 오바마(고작 04년 중간선거에 처음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이 되었을 뿐이었죠)를 두고 그 미들네임 "후세인"을 거론하며,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중상 모략을 하는 극우파 청중들을 향해, "내가 보증하건대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며 일갈했던 일 말입니다. 이 일화를 거론하며 그는 "일국의 지도자가 될 인물은 저 정도의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며 상기할 때마다 콧잔등이 시큰해졌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일국 아니라 한 고을의 대표가 될 사람이라도, 최소한 팩트를 팩트로 인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식 능력, 거짓을 참으로 강변할 때 자신의 자존이 일부라도 손상된다는 문명인으로서의 최소 양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매캐인의 그 행동은 포용력까지 불러줄 일도 아닙니다. 사람인 이상 기본으로 유지해야 할 품성이며, 이런 일로 감동까지 해야 할 우리의 형편이 아직 갈길 멀고 척박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기초적인 정의감이나 현실 인식도 되지못한 우중을 다독이고 계도해야 할 일이지, 그들을 부추기고 선동하여 온당치 못한 이익을 챙길 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죠.


안희정은 이 책에서 그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풀어 주고 있습니다,. 독자로서는 참 고마운 일입니다. 노 대통령(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은, 당시 모 정당(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네요)을 결성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정몽준씨와 야권 단일화 담판에 나셨습니다. 신생 정당은 국회의원도 몇 안 되는, 비중이 떨어지는 실체였기에, 이런 당의 후보와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에 나선다는 건나름 기득권을 내려놓는 결단이었습니다. 단일화 방식에 합의한 후, 노 후보(당시)는 안희정에게 "내가 차라리 패배하는 편이, 패배한 측이 어떤 방법으로 모범을 보이는 선례를 만든다는 점에서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사실, 후보로 선출되고 나서 여론 조사 지지율이 급락하자, 심지어 자 당 내에서도 후보 교체론이 비등하여 노 후보가 공개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등 형편은 대단히 좋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초연하게, "패배한들 어떠하겠는가." 같은 의향을 측근에게 비친 것이죠. 이 점은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으로도 핵석된다는 점에서 한 인간으로서 대단히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대선 직전에도 이와 비슷하게,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고, 당선 직후에도 마찬기지였습니다. 안희정은 그런 "주군"의 모습을 이 책에서 술회하고 있는 거죠.


포 용력까지도 핋요 없습니다. 그저 최소한의 공정함만 지켜져도, 대한민국은 훨씬 만족도가 높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 패배 후 스스로를 "폐족"이라고 규정한 안희정의 불편부당한 배포는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아랫사람 보는 체면 때문에라도 그런 진솔한 자아비판을 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실정입니다. 이것은 용기의 산물이고, 이런 용기가 바탕이 되어야 공정함도 포용력도 진정성 있게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에 "그들은 스스로를 폐족이라고 자인한 이들인데, 더 이상 말해서 뭐하겠는가." 같은 발언을 하신 걸 신문으로 알았습니다. 반대 진영을 비판하시는 건 정치인으로서 본연의 영역에 속하겠으나, 최소한 적장 중 핵심인사의 자아비판을 두고 매몰찬 공격을 가하는 건, 쓰러진 자에 발길질을 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적에게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 줘야, 그게 국가지도자로서의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안희정 도지사가 지금보다 더 큰 권한과 권위를 지닌 자리에 오른다면, 지금만큼의 초심이라도 유지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지방자치제도의 역사에 관해, 오늘날의 지방자치제가 당초 무산될 뻔했으나, 김대중 총재(당시)의 단식 투쟁에 힘입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개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느닷 신년 기자회견장에서 단체장 선거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지방의회 선거만 일정대로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정면으로 법을 어긴 행위이고, 이에 김대중 총재가 단식 투쟁에 나섰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단체장 선거는 이때로부터 한참을 경과하여, 더 이상 연기의 명분이 없어진 1995년 들어서야 가까스로 실시되었고, 이때도 서울시를 4개 권역으로 분할한다 뭐다 해서 잡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저자가 착각을 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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