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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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상징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멜빌이 포경선 선원이었던 경험담으로부터 나왔을 이 작품은 모험담으로 읽기에는 단어, 문장, 장면들의 상징 때문에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문장 “Call me Ishmael.”을 이 책에서는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번역했다. 여러 다른 책에서는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다.”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라라고도 되어있다. 이 번역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중요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자의 이름이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 즉 이스마엘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추방되는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지 못했을 시기 대를 잇기 위해 여종 하갈에게서 나은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고 이삭을 보호하기 위해 하갈과 함께 떠나보낸다. 이슈메일의 정체성을 읽게 된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 스스로 자신을 떠도는 자, 추방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때로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포경선을 탄다. “권총과 총알 대신(31p)”이라고 말하고 있듯 죽음의 충동을 느끼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심기증이 심해질 때 바다로 나간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도착한 뉴베드퍼드와 낸터컷에서 그의 눈에 띄고 심상에 새겨지는 이미지와 단어는 관(,coffin)이나 형틀, 비문과 같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들이다. 피쿼드 호에 타기 전 만난 선원 일라이저(엘리야)의 예언과 같은 말들도 이 항해가 어떻게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면 이런 암시와 전조가 가득함에도 이슈메일은 왜 배를 타는가? 사람이 그렇다. 모든 전조를 무시할 만큼 지금 당장 배를 타야한다는 욕구가 그 어두운 암시를 이긴다. 그리고 이슈메일에게는 이런 것들이 상관없는 문제들이다. 죽을 것 같아서, 계속 머뭇대다간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아서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장 에이허브(아합)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신도 비참하게 죽은 왕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선장이 항해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짙은 암시를 드리우고 있다. 암시라기에는 노골적인 이름이어서 정해진 결말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독자는 그 마지막을 향해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나아간다. 페이지의 양이 마치 정해진 때를 향한 시간의 분량인 듯이!

 

표면적으로 에이허브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모비 딕에 복수하기 위해 항해를 한다. 선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자신의 사람을 몰래 승선시킨다. 의혹을 제기하거나 공포에 휩싸인 선원들에게 아주 작은 과학적 트릭으로 그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에게 문제의식을 제기하던 스타벅마저도 그를 따르게 된다. 죽을게 분명한 모비 딕과의 결전에 나서는 선장을 만류하는 그의 간청에서 그를 영웅이나 우상처럼 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이허브가 선원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은 정치행위와도 유사하다. 작가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당시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멜빌이 모비딕을 대폭 수정하던 1950-51년 시기 미국은 노예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국가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영미문학의 길잡이2) 그에 따라 피커드 호는 모험담을 위한 포경선의 의미를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 혹은 그와 유사한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국가의 지도자나 전체를 이끌어 가는 정신이 지향하는 지점이 공동체의 일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실제로 에이해브가 현란한 기교로 선원들을 굴복하게 한 후 경멸감과 승리감으로 불타는 에이해브의 두 눈에는 그의 파멸적인 오만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문장은 그런 지도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선원들은 저마다 이 포경선을 탄 이유가 있다. 이슈메일과 키퀘그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업을 위한 것이다. 모두에게 배를 탄 저마다의 사연과 목적이 있지만 결국 이 배가 나아가는 방향은 모비 딕을 향한 길이다. 그것이 국가가 아닐까? 국가의 방향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욕망이나 지향을 다 수장시킬 수도, 그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보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신이 한 개인의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향유고래에서 기름을 퍼 올리거나 부패한 고래에서 용연향을 건져 올리는 장면은 위험하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그들의 이런 노동은 자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 배도 돈, 자본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래 떼를 쫓다가 배들이 겁에 질린 그 무리 안으로 끌려 들어가 고래들이 만든 원형 안에 갇히고, 평화롭게 어미가 새끼에게 수유하는 장면들을 목격한다. 선원들은 전쟁 같은 바깥과는 다르게 놀랍고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경이롭고 신비하고 두려움마저 느끼는 이 풍경에서 나는 제국주의가 파괴하고 있는 식민지의 전통과 풍속들, 생명의 이어짐을 보게 된다. 전쟁이 벌어지는 외부의 안쪽에서는 여전히 생명을 지키는 고요함이 유지되고 있지만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고요함이다. 이것은 식민지 뿐 아니라 대륙 안에서 자행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와 학살을 떠올리게도 한다

 

배 우현에 향유고래 머리를 달고, 별 가치가 없는 참고래이지만 잡아서 좌현에 그 머리를 달면 뒤집힐 일이 없다는 한 메시지를 얻는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식이다.

당신이 한쪽에 로크의 머리를 들면 그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반대쪽에 칸트의 머리를 들면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다(405p)”

그러나 그렇게 평형을 유지하다가도 곧 곤경에 빠지게 된다. 어쨌든 균형과 불균형은 번갈아 가면 오게 되어있으니! 그렇다고 화자가 말하든 이것들을 다 바다에 집어던질까? 고래머리는 그럴 수 있어도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사상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커지고 소멸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법이란 생각이다.

 

피쿼드 호는 하나의 국가를 상징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승선한 32명의 선원은 당시 미국의 32주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선원들 사이에는 위계와 역할이 존재한다. 에이해브(선장스타벅(일등항해사스터브(이등항해사플래스크(삼등항해사), 작살잡이들(퀴퀘그, 타슈테고, 다구) . 한편 에이해브가 비밀리에 태운 선원들 중 페달라(배화교도)의 역할은 오로지 모비 딕을 추격하고 사냥하기 위해 돕는 사람이다. 페달라가 배화교도로 불리는 것에서 그리고 그와 에이해브가 서로 눈빛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는 에이해브가 이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지지와 영적 교감을 하는 관계로 보인다. 한 국가에서 보여지는 모습이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다.

 

선원들 모두가 이 배는 모비 딕을 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모비딕에 대한 인식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배에 탄 이상 이 추적과 사냥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을 국가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면 많은 의미들을 얻게 된다.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싸워야 할 어떤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그가 이 배의 선장으로 있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비 딕의 흰색은 저마다 다른 느낌이다. 대표적으로 스타벅에게는 신성으로 다가온다.

 

삶은 시간의 베틀 위에서 필연과 우연과 자유의지로 짜여진다는 말이 다가왔다. 이슈메일과 선원들이 이 배에 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마치 한 국가에 태어나는 것이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 항해 중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이고 그들의 대응방식은 선택에 의한 것이다. 배라는 공간 안에서 어떤 우연과 자유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파선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과 그 위험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도자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것, 개인의 자유 의지가 아닐까? 그 자유 의지가 힘을 발휘하는 것, 멜빌이 고민했던 민주주의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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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이끈 정풍운동은 '학풍'(學風), '당풍'(黨風), '문풍'(文風)의 삼풍정돈(三風整頓)을 말한다. 이 중 문풍, 문예정풍은 작가들의 글쓰기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9425옌안 문예좌담회문예활동에 가이드를 마련한다. 문화대혁명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194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있기 전까지 있었던 문예정풍에 딩링을 비롯한 옌안의 작가들은 저항했다.

 

…… 루쉰은 죽었다. 우리는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습관적으로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파헤치는 그의 용기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우리가 진리에 의연히 대처하는 루쉰의 자세와 대담성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는 저버릴 수 없는 무기인 잡문을 원한다. 일으켜 세우자. 잡문은 결코 죽지 않았다.”(천안문조너선 D. 스펜스, 309p)

 

그들은 땅속에 묻혀 녹슬고 있는 루쉰의 보도(寶刀)’를 파내 다시 예리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아사람아』에서 허 징푸의 책 마르크스 주의와 휴머니즘 출판을 막으려는 C대학 당위원회에서 한 교수는 “42년 옌안의 정풍을 이래라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는 공석에서 항상 이 말 옌안의 정풍으로 말을 시작한다. 그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교수들 모두에게 문예정풍에서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시절은 각인되어 있는 역경과 고통의 기억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있었던 전쟁과 독재와 탄압이 많은 사람들의 공적인 연설이나 글의 서두가 되는 것과 같은 결이다.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4인방이 숙청된 후에 대학으로 돌아온 쑤웨와 허징푸의 삶을 중심으로 그 시절을 보낸 지식인들의 깨어진 삶과 관계와 신념을 상실한 혼돈을 그리고 있다. 허 징푸가 말하듯 마르크시즘은 휴머니즘을 품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시작된 혁명은 그들에게서 그것을 앗아갔다. 쑤웨는 혁명의 과정에서 일기장이 공개되는 수모를 겪고 지방으로 추방되었고, 그 와중에 남편에게 배신당했었다. 주변인의 배신과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은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은 자신이 이제까지 믿어왔던 사상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녀는 정신적인 지주, 대들보를 뽑혀 버리고 만 것 같아고통스러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허징푸는 맹목적인 것과 확고하다는 것을 혼동하지 말 것과 회의와 신념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사람아, ! 사람아』「2장 마음이 머물 곳을 찾아서허 징푸 편)

 

허 징푸는 지극히 평범하고 작은 존재였던 그의 아버지가 치른 거대한 희생을 기억하며 그 희생은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그의 아버지는 ‘인민 대중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 인민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휴머니즘적인 희생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기근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양식을 포기한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야말로 기려야 할 인민의 희생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기념하고 추도한다. 추도사는 그의 원고,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이다.

 

허 징푸의 출판을 막기 위한 시류와 C대학 위원회의 교수들을 보며 쑨웨는 습관의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습관보다도 무섭고 권위가 있는 것이 있을까하고, 위를 보고 사람의 지위에 따라 말의 경중을 재는 습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허징푸 역시 자신의 책 출판을 막는 내막과 공명정대하지 못함에 대해 생각한다.

 

내막이 있을 수 없는 일에 내막이 생기는 것은 자기의 행위가 공명정대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내막이 생기면 곧 이유도 없이 갖가지 마찰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 중국인의 정력은 모두 내막의 제조와 내막의 탐색에 낭비되게 된다.”(사람아, ! 사람아』「4장 동녘은 해, 서녘은 비허 징푸 편)


작가 다이 허우잉은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은 서로 통하거나 또는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중요한 사상적 전환은 마르크스의 인간 소외에 대한 이론 인식에 서 일어났다고 한다.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물건과 자본으로부터 인간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혁명은 인간을 대상화하는 자본주의와 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사상 혹은 철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인간은 소외된다. 그것은 도구이고,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어야 한다.

 

허징푸는 조용히 쑤웨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쑤웨는 그런 허징푸에게 결국 마음을 연다. 당원으로 정치에 몸담았던 쑤웨는 공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부상을 입었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가정과 관계가 깨지고 무너졌다. 혁명이후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성 회복 없이 불가능하다. 여전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처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간다.

 

허징푸와 쑤웨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고 쑤웨와 그녀의 전남편 자오 전환이 서로 편지로 사과하고 용서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결말은 단지 사랑과 가정의 회복이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당시 중국인들이 혁명이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메시지다. 문화대혁명 당시 있었던 반인륜적 잘못들에 대해 민중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다. 옳고 그름을 밝히고 사과와 뉘우침이 있어야 함에도 사람들은 모진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태도를 보인다. 여전히 권력 다툼과 복수에 몰두하는 부류도 있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사단 중 사단四端(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 중 옳고 그름을 가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휴머니즘의 출발은 이 시비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비를 가린 후에야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고,은 부끄럽게 여기고,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이 빛이 나고 진실된 것이 된다. 잘못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사죄하는 것이 그 시대 필요한 정신이었다. 사죄가 없고 용서가 없기에 불의는 반복되는 것이다.

 

작가는 예술 창작의 최고 임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예술가의 현실에 대한 인식, 태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형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이 추구하는 최고의 진실은 생활의 정확한 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생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태도 및 그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어야만 한다“(작가의 말)고 말한다.

 

작가는 문화대혁명의 당시 시인 원제를 조사하고 심사하는 그룹의 일원이었던 그녀가 1년 후 그를 다시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결혼을 당에서 허락하지 않자 그로인해 상심한 원제는 자살한다.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 시인의 죽음이다. 인간, 인간성, 휴머니즘이 빠진 혁명에 대한 회의를 읽게 된다. 작가는 리얼리즘적 소설을 썼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 의문,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도입하여 쓴 것이 사람아, ! 사람아이다. 계급투쟁만 남고 인간은 황폐화된 상황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담겨있다. 어떤 사상이든 철학이든 인간을 위하지 않으면, 허공을 칠 뿐이다. 쑤웨가 괴로워하는 것도, 허징푸가 글을 쓰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이다.


루쉰은 신해혁명과 그 이후의 실패를 겪고 있는 중국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애를 놓치지 않는다. 신랄한 잡문에서도 역시 그 정신을 읽게 된다. 루쉰에 이어 다이 호우잉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심지어 시인의 죽음은 읽었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이 허우잉의 3부작을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근현대사와 인물들에 대한 독서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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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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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문학사 전체를 통해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없다고 봐요. 서사도 물론 좋지만, 나는 이게 교육적인 책이라 생각해요. 도스토옙스키 씨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라고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1899년 출판된 부활에서 재판과 유형지의 모습은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서로를 배제하는 통찰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영혼과 육체라는 관념을 상호일체감 속에서 풍요롭게 호흡하고 있었다”(러시아의 문학과 혁명71-73p)고 이케타 사다요시는 말한다. 죄와 벌, 백치,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에 자신의 유형지 경험을 담았던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작가인 톨스토이 역시 유형지가 서사를 퍼 올릴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원천임에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남편 없는 하녀의 딸로 축사에서 태어난 마슬로바의 애칭들은 태생과 삶을 시사하고 있다. 지주인 마님들은 그녀의 대모가 되어주고 이 아이를 구원받은 아이라는 뜻의 스파숀나야라고 불렀다. 반은 하녀, 반은 양딸이 된 그녀는 낮춰 부르는 카티카도, 사랑스럽게 부르는 카텐카도 아닌 그 중간인 카튜샤로 불렸다. 이 이름들에서 어떤 자의식이 생겨날지는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골 영지에 잠시 들른 귀족 청년이 하녀와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리는 이야기는 흔한 사건이었던 듯하다.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푸쉬킨, 체호프, 부닌 등 많은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 지주 마님들의 조카 네흘류도프와 사랑하고 버림받은 마슬로바는 이 사건으로 삶이 나락에 빠진다. 그녀는 그 집을 나와 다른 주인들을 거치고 결국은 유곽을 향한다. “천한 하녀라는 굴욕적 처지에서 달라붙는 남자들과 은밀하고 일시적인 간음을 할지, 아니면 생계가 보장되고 정당한 처지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벌이가 좋은 일상적인 간음을 할지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첫 남자와 다른 모든 남자들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의 불행을 본다.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재판정에서 살인죄로 기소된 마슬로바를 만나고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죄의식을 느낀다. 재판의 부조리를 목격한 그는 그녀의 무죄 판결과 석방을 위해 힘을 쓴다. 그녀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결심을 하고 유형지를 향하는 그녀를 따라 간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에게 속죄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스스로에게서 다른 모순, 죄악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을 해결하기로 생각은 확장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차츰 그의 시선은 타인을 향한다. 정직한 자기성찰이 불러온 파장이다. 마치 둑의 한 부분이 무너지자 그 주변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삶의 전 영역에서 전복과 회복이 이루어진다. 신념을 되찾고 삶이 변화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 과정이 너무 쉽게 보여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과하는 것조차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게 인간인데! 자신의 깊은 내면 안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죄의식을 마주하고 잘못을 정직하게 바로잡는 것은 삶을 전적으로 뒤바꿀 동력이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윤리와 사회정의라는 과제의 실현에 있어 둘 사이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현재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에 사회 개혁에 참여하려 한다면 비록 도덕적 완성에 직접 반하는 수단이라도 모든 수단을 써야 한다는 위험한 유혹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이 선의 원리에 등을 돌리게 한다면 그것은 허위이다.”(인생이란 무엇인가톨스토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그가 한 자기 개혁 중 하나가 자신의 영지와 관련된 일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젊은 시절 헨리 조지의 사상에 품었던 열정을 깡그리 잊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토지는 사유의 대산이 될 수 없고, 물이나 공기나 햇빛처럼 사고 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이 인간에게 베푸는 모든 혜택을 인간은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는 급기야 자신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개혁은 소작인들의 삶을 목격하는 충격을 통과하면서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영지와 관련된 결정을 하자 모든 것이 단순해져서 놀란다. 우리는 복잡하고 망설여지던 일들을 한 단계 실행하자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삶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머뭇거림과 실천이 없기 때문 아닐까?

 

유형지를 향한 여정에서 네흘류도프는 죄수들의 비참한 행렬을 본다. 그들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열차에서 농부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네흘류도프에게서 자유로움과 기쁨을 느낀다. 마슬로바 역시 네흘류도프의 도움으로 정치범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여정과 유형지에서의 생활 동안 그녀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들에게 동화된다. 사면이 된 후에 유형지를 떠나 도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제목 부활(Воскресение)’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뜻한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남을 의미한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유형지를 향하는 여정을 통과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삶의 새로운 조건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그때 이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의 그의 삶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부활2, 338p)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의 철학과 실천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이케타 사다요시가 말했듯 작가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과 육체가 포함된 온전한 인간 존재로서 살아가라, 고뇌하고 고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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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납함(吶喊)과 두 번째 소설집 방황(彷徨)이 담겨 있다. ‘납함(吶喊)’적진을 향하여 돌진할 때 군사가 일제히 고함을 지름을 뜻한다. 그는 이 소설집 자서(自序)에서 젊은 시절 자신이 가졌던 적막한 비애를 잊을 수가 없고 그 적막함을 젊은이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기에 몇 마디 더듬거리는 고함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소설집을 펴내는 이유다.

 

신해혁명의 실패는 루쉰에게 대단히 깊은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광인일기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슴 속에 타오르던 열정은 혁명의 실패와 냉랭한 현실 속에서 식어가고 혁명을 이끌 동력을 찾지 못한 채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불안에 잠식당한다. 일찍이 신해혁명의 실패와 환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즉위, 장쉰(張勛)의 복귀 등을 목격한 작가 자신이 경험한 심리 상태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식인(食人)의 위협을 느끼는 청년의 정신증은 그만큼 시대가 야만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두 번째 소설집 방황(彷徨)의 소설들도 담겨있다. 납함의 소설들처럼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 방황에 담겨있는 Q정전에서는 혁명으로 밤사이 세상이 바뀌어 버리고, 혁명의 대상이었던 자들이 야합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혁명을 일으킨 자들의 본질은 도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생존을 위해 굽실거리는 군중들의 무지함, 사형제도의 잔인함 등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Q’뿐 아니라 많은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시선에 포획된다.

 

현실주의 작가 루쉰이 묘사한 인물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여 부각시킨 근로 민중들의 형상은 대단히 진실하다. 그들의 고통과 수난, 염원 등 이 모든 것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루쉰전魯迅傳왕스징 150p)

 

인상적인 내용은 작가 자신의 단발과 관련된 경험인 듯 보이는 서술이다. 단발을 비난했던 자들이 변발을 틀어 올리고 혁명에 앞장서는 것이다. 차마 변발을 자르지 못하고 틀어올리는 위선과 비겁함을 비판하고 있다. 여러 계층과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을 다각적 방향에서 여러 가지 주제로 바라보고 문제를 인식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잡문이 있다. 죽는 순간까지 공포와 고통을 오랜 시간 동안 느끼게 하는 참형을 총살과 비교하는 글에는 루쉰의 인권 감수성을 볼 수 있다.

 

두 소설집에 담겨 있는 쿵이지, , 고향, 복을 비는 제사, 장명등, 조리돌리기, 까오 선생등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개혁을 실패한 채 비관에 빠져 비판만 일삼는 중국을 개탄하고 있다. 구습에 갇힌 구경꾼으로만 존재하는 군중의 냉혹함, 신분과 재산의 차이가 만들어낸 삶의 격차 등 봉건 제도의 부조리와 민중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군중을 그리고 있다.

 

고향은 서정적이고 조리돌리기는 현실적이고, 복을 비는 제사는 깊은 교훈을 전한다. 매년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절기와 샹린댁의 죽음이 대비된다. 그녀의 불행한 삶은 그 시대 여성의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복을 비는 입으로 불행한 여성을 향해서는 연민이 없는 냉정한 말과 태도를 보인다. 주지하고 있듯 타자를 향한 말은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

 

그의 소설에 담겨 있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그가 당시 중국에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 루쉰전과 루쉰전집에 담겨있는 일기와 평론 등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는 소설뿐 아니라 잡문에 날카로운 비판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잘 담고 있다.


“‘무엇 때문에소설을 쓰게 되었는가를 말하라면 나는 여전히 10여 년 전의 계몽주의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인생을 위하여야 하고 또 그 인생을 개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소설을 소일거리라고 하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소일거리의 병적인 신식별명으로 부르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병적인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서 제재를 많이 취하였는데 그 목적은 병의 원인을 드러내어 치료에 주의하도록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南腔北調集』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나)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

1925북경여자사범대학투쟁에서 교육당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더 이상 물에 빠진 개를 때릴 필요가 없다는 저우쭈오런(周作人) 주장에 대해 한 말이다. 페어플레이는 뒤로 미루어야 한다라는 글에서 그는 사람들은 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참여했던 신해혁명의 실패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개의 성질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 오늘날의 관료들과 지방신사나 외국신사들은 저희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적화니 공산이니 하여 매도한다. 민국원년 이전에는 다소 달랐지만 처음에는 캉여우웨이(康有爲) 당이라고 하였고 후에는 혁명당이라고 하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관청에 밀고까지 하였다.……그러나 마침내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에 대하여)


혁명과 함께 새로운 풍조가 나타나고 새롭게 되는 과정 중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고 그것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오도록 내버려두었기에”, 민국2년 하반기 위엔스카이(遠世凱)를 도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고 루쉰은 말한다.


신해혁명을 실패에 이르게 한 군벌 위안스카이의 칭제(稱帝)와 같은 반혁명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자신이 고백하듯 날카롭고 사정이 없다하지만 공정한 도리와 정의라는 미명으로, 도덕군자의 간판으로, 부드럽고 후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공론을 무기로, 어물어물하면서 빙빙 돌리는 글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세력도 문필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하는사람들이 있기에 붓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신해혁명과 이후 혁명들의 실패로부터 얻은 이러한 깨달음들을 그의 일기와 잡문집, 소설에서 전한다. 미신과 구습의 노예가 되어 변하지 않는 군중, 사욕에 사로잡혀 추락하는 혁명가들, 허무와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분열을 일으키는 지식인들을 상징과 비유의 언어에 담아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작가의 좌절감과 분노, 그럼에도 굽히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의 소설과 평론들은 이런 답답함과 분노의 감정이 짙다.

 

사람들이 과거의 오래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변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혁명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고 민중을 깨울 것이라는 꿈은 곧 사위어 버린다. 루쉰은 그 원인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구습, 적폐, 사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그는 물에 빠진 개로 비유하고 있다.


대선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루쉰의 글들은 새삼 많은 메시지로 다가왔다. 조금의 관대함도 없이 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으로 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래된 노신소설전집, 루쉰전, 노신문집』2,4권을 갖고 있다. 한겨레 출판 노신소설전집』인데 을유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을유의 노신소설전집』은 같은 번역자이지만, 말을 조금 더 부드럽게 다듬었다. 그런데 나에겐 거칠고 강한 표현들이 더 다가온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내가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때문인가 싶다. 루쉰전』은 공동번역자인 신영복의 글체가 보인다.


루쉰 전집1-20권은 로망이다.

더구나 전집을 다 읽는다는 것은 꿈일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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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31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좋아하고 아파하는 소설인물..아Q..루쉰이여

그레이스 2025-05-31 22:29   좋아요 0 | URL
네, 아Q 마음아픈 인물이예요
루쉰의 삶을 읽고, 그의 일기나 시론을 읽으면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해요. 그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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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가 떨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던 나의 마음속에서 철커덕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소설은 이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듯하다. 형기를 마치고 유형지를 떠나던 날 그의 다리와 손을 연결해 묶고 있던 사슬을 푸는 장면!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10년 동안 항상 몸에 붙어 있던 것이었음에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물건은 그에게 생경한 외형과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족쇄 자체의 무게만이 아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읽혀진다.

족쇄를 풀고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바라보는 이 행위는 유형 생활의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화자의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인간의 자유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퍼포먼스다. 독자로서 이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일원이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이후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더구나 사형장에서 벌인 황제의 반인륜적 처형놀이는 그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군사재판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지 4년 징역과 사병복무 형을 언도받는다.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용소 병원의 원장과 초소 위병들의 배려로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작가의 일기중 이 시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직접 경험한 많은 사건들과 감정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부 서론으로 시작한다. 서론에서 기록자(전달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이주민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 고랸치코프의 수용소 일기를 선별하여 옮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서론은 소설의 형식인 것이다. 다음 11장부터 화자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다. 그는 살인죄로 10년 형을 살고 나와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화자(주인공)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에서 작가 자신살인범에서 정치범으로 바뀐 듯 보인다. 이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경험한 4년의 수용소 기억이 그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서 주인공을 타인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스트예프의 삶에서 이 경험이 그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품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가 불안정하고 불안한 심리, 특정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같은 부정적 심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용소의 풍경을 그리며,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반복하는 화자의 말은 인간 존재의 진실이라는 동의와 동시에 비참한 수용소 환경에 대한 역설로 다가온다. 부친 살해범, 아내를 죽이고도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죄수, 쾌락을 위해 살인하는 사람, 굶어죽지 않으려고 살인한 죄수, 태어날 때부터 산적질이 생업이었던 공동체와 가족의 일원이었던 타타르족 소년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같은 감옥에 갇혔다. 농노, 평민, 귀족 계급도 상관없다. 수용소는 그들의 변수와 차이를 없애버린다. 기결수와 미결수, 형기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미결수란 아직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죄수를 말하는데 이때 형은 체형을 말한다. 몇 천대의 태형을 받은 죄수의 경우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나누어 받는 동안 그는 형장과 수용소 병원을 오간다. 그 기간 동안 그 죄수가 겪게 될 불안과 공포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형 집행 전날 자해나 폭력행위로 시간을 벌려는 시도에서 그 극단적 공포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가 죄수로서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분명한 가시적 이미지가 바로 족쇄다.

거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철선 네 가닥을 서로 세 개의 고리로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그것들은 바지 밑에 차게 되어 있었다. 혁대는 중간의 고리에 매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거꾸로 그것을 루바쉬까 셔츠 위에 직접 입는 허리 혁대에 고정시켜야 했다.”

처음 그것이 채워졌을 때의 무게, 소리, 불편함이 묘사된다.

 

그는 감옥 생활의 첫날부터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봄이 오는 4월 노역을 나간 죄수들이 먼 들녘을 바라보며 어떤 초조함이나 충동적인 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쉬는 한숨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초원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족쇄에 갇혀 있는, 시들어 가는 영혼을 달래 보려는 한숨이다.

 

목욕장에서 족쇄를 한 채로 옷을 벗는 화자의 어설픈 동작, 벗은 몸에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목욕하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들, 병원에서 폐병으로 죽어가는 죄수들의 깡마른 몸에도 족쇄에 채워져 있는 모습, 족쇄가 채워진 채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라고! 족쇄는 단지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족쇄란 하나의 수치심이며 굴욕이고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자에게도 과연 형벌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수용소에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중은 한 치도 고려되지 않는다.

 

대재기(大齋期, 러시아 정교에서 부활절 전 6주 동안의 근행기)가 끝날 무렵 죄수들이 조별로 교회에서 하는 재계(齋戒, 고백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러시아 정교 의례)의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경험이 그의 삶에 일으킨 변화의 심리적 근원을 보게 된다. 죄의식!

 

사제가 두 손에 성배를 들고 < ……그러나 우리를 강도들처럼 여기소서>라고 기도서의 한 구절을 읽자, 모든 죄수들은 이것을 말 그대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며,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도, 살인죄로 이 곳에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엎드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들이 죄수임을 각인시키는 시청각 효과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갑자기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곤 갑자기 마치 어떤 기적에 의해 내 가슴 속에서 모든 미움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걸으며 내 눈에 들어오는 얼굴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작가의 일기도스토옙스키 75p)”

 

작가는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죄수들에게서 유년시절 그에게 친절을 베풀던 농부 마레이를 떠올린다. 사형선고와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및 강제복무 이후 그는 심리· 철학·윤리·종교적 관점에서 인간과 민중의 문제에 천착하고 죄와 벌·악령·백치·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역작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비인간적 경험을 겪은 그의 삶에,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감정에 연민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형기를 마치는 날, 익숙해지고, 어찌할 수 없는 신체의 일부쯤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던 족쇄가 풀어지고 낯선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죄수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했던 제도, 관습, 프레임으로서의 관념들을 벗어나 그 억압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진부한 질문인 듯 느껴지지만 내 인생의 족쇄는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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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8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코의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가 이 작품을 각색해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 <죽은 자의 집에서>를 작곡합니다. 저도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읽었는데 많이 다르더라고요. 자기도 한 문장 한다, 생각하는 작곡가들이 대개 이렇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5-04-18 21:01   좋아요 2 | URL
아!
이걸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많이 다르다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레삭매냐 2025-04-18 2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도끼샘의 <카라마조프> 읽고
나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1:04   좋아요 2 | URL
그 소설이 제일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종교적 내용이 많아서!
제겐 아직까지 <죄와 벌>이 최고입니다.
다시 읽어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5-04-30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익숙해지는 것 맞는 것 같습니다. 시체 바로 옆에서도 밥을 맛있게 먹더군요. (실제 경험을 쓴 책인데 요즘 제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 책 제목은 언급하지 않겠음ㅋ)

그레이스 2025-04-30 12:25   좋아요 0 | URL
네 그런듯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