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 - 평범한 사람들의 기이한 심리 상담집
타냐 바이런 지음, 황금진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타냐 바이런(Tanya Byron: 1967 - )은 자신의 할머니가 임신한 젊은 헤로인 중독자가 휘두른 강철봉에 머리를 강타당해 목숨을 빼앗긴 사건을 겪고 인간의 (병리적) 전두엽에 관심을 가지고 임상 심리학자가 된 영국의 저자이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저자가 임상심리사가 되는 과정에서 치른 실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가 만난 환자들은 공황 발작 환자,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인 열두 살 소녀, 생모를 거부하는 여자 등등이다.


첫 환자는 뜻 밖에도 소시오패스였다. 저자의 말에 환자가 눈물을 흘리는 등 성공적인 듯 보였던 첫 만남은 소시오패스로 밝혀진 그 공황발작 환자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한 저자가 구출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전개 양상을 보인다. 저자가 이렇듯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건을 당하고서 자기 탓을 하자 그의 진로를 결정할 책임자인 정신과 전문의는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과, 자기 자신에게 덤터기 씌우는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물론 책은 소설처럼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해석, 무의식, 투사, 전이, 역전이 등 추상적이고 심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용어들을 핵심 용어로 채택하는 정신분석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여성혐오적인 이론(85, 86 페이지)이라는 저자의 말은 어디서든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두 번째 사례에서도 이 같은 진지한 통찰이 제기된다.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인 열두 살 소녀 환자가 자신의 양쪽 허벅지 등을 상처 입힌 것과 강박적으로 줄넘기를 한 것을 병리적인 행동으로 간주한 기존의 관례에 이의를 제기하며 저자는 그것을 병적 불안을 조절하는 전략,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 설명한다.(100, 101 페이지)


그런데 병원은 줄넘기를 소녀가 자살을 할 도구로 여겨 금한다. 저자는 죽고 싶어 헸으나 이제 살고 싶어 하게 된 아이를, 그런 행동을 유발한 원인을 규명하지도 않고 그를 애초에 죽으려는 마음을 갖게 만든 이 거지 같은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려는 병원을 보며 불안감과 불편감을 느낀다. 저자는 정신분석을 싫어하지만 정신분석가의 견해를 듣는 데다가 더 나아가 한 정신분석가와 많이 친해지기까지 한다.


책 제목의 그 소녀(열두 살)는 다섯 살이 된 여동생이 익사하는 걸 거들었다. 다섯 살은 열두 살 소녀가 새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기 시작한 나이였다. 열두 살 소녀는 새 아버지의 성적 대상이 자신에게서 어린 동생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단위로 다른 현장에 배치되는 임상 실습은 너무 잔인하기에 환자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 다짐한다.


소설 같은 형식을 취한 것은 더 있다. 지도 교수가 개인적인 일로 며칠간 자리를 비우자 고립무원감을 느낀 저자는 이 일로 그와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갈등은 환자와의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저자는 심리에 초점을 맞춘 섹스 요법을 시행하는데 그 부부 환자로부터 선생님은 너무 어리고 아직 정식 의사도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다. 남자는 저자에게 당신은 사기꾼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한다. 저자는 외로움은 정신이상, 나아가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확신 하에 관련 자료를 찾는다. 외로움은 몸과 마음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장은 외로움으로 인해 이상 심리를 보이는 사람들을 다룬 장이다. 저자는 극적인 요소가 좀 덜해 보이는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네 번째 장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할머니 이야기가 담겼다.(이 책의 원서 출간 년도는 2014년이지만 저자가 경험한 시간대는 저자 나이 스물세 살 무렵인 지난 90년 초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69세의 남편과 치매에 걸린 아내의 이야기이다. 뇌 이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정신적으로) 다시 겪는 할머니는 측두엽 활동 정지로 변연계에 의존해 사는 탓에 영원히 불안에 시달리고 외부에 대한 과잉 경계로 투쟁과 도주(fight or flight)라는 생존 모드에 돌입할 태세를 보이는 분이다.


할아버지는 자신 역시 미쳐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미 아내가 미쳐가는 걸 보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너무도 잘 아는 난감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실습생 신분이기에 또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구원이라는 망상, 구조 판타지(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는 모습도 곧잘 연출한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의 끔찍하고 잔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이라면 할머니를 죽인 살인범을 죽일 거야?란 질문을 받는다.


저자가 자신에게 기회가 생겼다면 정말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그렇다면 선생은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고 (살해당한) 할머니를 아직 보내드리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식이 장애 병동을 무대로 펼쳐진다. 그곳에서 저자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굶어 죽고 싶어 하는 소녀를 만난다. 저자는 그 아이의 자기 통제 욕구와 능력이 그 아이를 낫게 도와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클까봐 두려워 한다.


저자는 그 소녀의 거식증은 사이가 벌어진 부모님을 뭉치게 해준 접착제였던 것일까?란 말을 한다. 그 소녀에게 거식증은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는 걸 미루게 하는 방편이었다. 그 소녀의 엄마는 빈둥지 증후군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다. 소녀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가족 모두의 기대와 달리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소녀는 자신이 떠나면 엄마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는 말을 털어놓는다. 저자는 소녀의 거식증에 관해 가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을 소녀의 엄마에게 한다. 소녀는 결국 그 말은 자신의 가족 중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냐며 반발한다.


저자는 소녀에게 엄마를 못 떠날 것 같은 네 감정이 어쩌면 네가 아프게 된 이유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한다. 소녀는 어째서요?라 되묻는다. 소녀는 결국 저자에게 선생님 말씀이 모두 옳은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소녀의 거식증을, 절망에 빠진 엄마가 활짝 열어놓은 품 안으로 퇴행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덧에 걸린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는 교통 사고로 숨진다. 인지적 도전도 체계적 해석도 시의적절한 개입도 소용없는 순간이다. 물론 소녀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은 얄궂게도 소녀로 하여금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여지를 주었다.(352 페이지)


전편(全篇)에서 그렇지만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과 소설적 구성력 그리고 흥미를 자극하는 능력은 마지막 장인 약물중독 병동과 HIV 보균자 및 에이즈 환자를 연구하고 치료하기 위해 신설된 시설인 말기 환자 병동에서 유감 없이 발휘된다. 저자는 임상심리사들은 어떤 증상을 보고 알아내고 고친다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포착해내는 인본주의적 접근 방식을 쓰는 사람들이라 말한다.(375 페이지) 똑똑하고 논리적인 완벽주의자인 여자 증권 중개인의 내러티브가 눈길을 끈다. 경쟁이 치열하고 성과(成果) 중심적인 증권 중개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초인(超人)이 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최고를 달성할 수도, 최고가 될 수도 없는 지경에서 그녀는 코카인을 만났다.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절로 갖게 하는 것은 속도감 있는 대화이다. 가령 커밍아웃하게 된 이유는 뭐였어요?, 난 커밍아웃 같은 거 안 했어. 그냥 나로 살았을 뿐이야., 그렇다면 지금도 자신으로 살면 되잖아요? 왜 자살을 하려고 해요?같은 대화를 보라. 저자는 자격증을 딴 지 25년이 되었고 책을 내겠다고 생각하면서 12년을 보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회고록이 아닌 허구라고 설명한다.


정신 건강 분야 종사자들이 자신들이 직접 다룬 사례라며 내놓은 책을 수없이 읽었다는 저자는 25년간 얼마나 불안했고 또 얼마나 오만했고, 얼마나 순진무구했는지 잊고 있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치료해야 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머릿 속이 더 뒤죽박죽인 적도 많았다는 저자는 그들이 있었기에 자신이 노련한 상담사, 아니 어쩌면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의 압권은 재미이지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 저자의 인본주의적 정신이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자신이 책을 집필한 동기는 정신 건강 치료를 둘러싼 수많은 복잡하고 부당한 사건들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 나름의 이유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는 말을 한다.(435, 436 페이지) 감동적이고 재미 있고 의미로 넘치는 책을 읽은 기쁨이 크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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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自殺)에 관한 책을 빌리고 싶다는 아이한테 사서(司書)가 “꺼져버려. 책 반납 안 할 거잖아.”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임상심리사(정신과의사) 타냐 바이런의 책입니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바이런의 임상 실험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은 바이런이 치료한 환자들보다 바이런에 주목하게 하는 책입니다. 다른 과정이지만 저자가 임상 심리 교육 과정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주눅들어하고 정신과는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는 말을 듣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최근 두 분에게서 문화유산해설(文化遺産解說)이란 판단하는 것이 아닌 중립을 지키는 일이란 가르침과 역사학(歷史學) 강의가 아닌 일상 어휘로 쉽게 유물(遺物)들을 설명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감사드립니다.) 첫 순서부터 바이런은 소시오패스의 공격을 받는 예상 못한 상황에 처하는가 하면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인 열두 살 소녀를 만납니다. 바이런은 열두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아동을 위한 정신과 입원 병동에서 실습을 진행하라는 말을 듣고 동의하는 한편 떨떠름해 합니다. 공감이 갑니다. 앞으로 어떤 다른 공감 거리들을 만나게 될지 흥미진진합니다. 소설 같은 방식으로 여섯 환자에 대한 기록을 펼쳐보이는 이 책은 왠만한 소설 이상의 재미까지 주는 착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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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만난 사람을 오후에 또 만나게 되다니...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만난 것이다. 자하子夏라는 인물로 공자시대 사람이다. 오전에는 가지 노부유키의 ‘유교란 무엇인가’에서 공자가 자하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에서 자하를 만났는데 오후에는 신명호 교수의 ‘조선왕조 스캔들’의 선정릉(宣靖陵) 도굴 사건 부분에서 자하를 만났다. 저자는 조상(선왕)의 묘를 도굴한 불구대천의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하며 자하가 부모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자에게 묻는 장면을 인용한다. 이런 우연은 흥미롭다.

 

선정릉이 파헤쳐진 시기는 선조가 파천(播薦: 임금이 난을 피해 먼 곳에 가 있는 것) 중인 때였다. 선정릉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가 묻힌 선릉(宣陵)과 중종이 묻힌 정릉(靖陵)을 합해 부르는 말이다.(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비(妃)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곳이다.) 선조는 늘 문제적인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조선의 군주이다... 언제 치적을 논하는 부분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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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가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제자들에게 평생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가르친 것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를 퇴계 자신 정통(正統)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아끼는 차원에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라 설명하며 그것이 진정한 학문의 시작이 아닐까 결론짓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평생 가르친 스승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퇴계는 그릇된 견해를 가르쳤다고 했지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부족하다는 말은 글쓴이의 해석이다. 퇴계의 저 말은 겸손 차원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퇴계의 저런 어법은 바람직하지 않다. 글쓴이가 든 다른 예 즉 자신만이 정통이며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학문은 거짓되고 삿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과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두 경우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회퇴변척(晦退辨斥)이란 말이 있다. 회는 회재(晦齋) 이언적, 퇴는 퇴계(退溪) 이황을 말한다. 이언적, 이황 등이 문묘에 신주가 모셔진 것(종사從祀)을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비판한 사건을 말한다. 조식은 종사(從祀)되지 않았다. 광해군 때 5현(賢: 이황,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이 전제 정권에 저항한 조선의 대표 지식인으로 선정되어 문묘(文廟)에 종사된 이래 지식인들은 지식권력의 결집을 용납하지 않는 왕권과 맞서며 지식인 권력 시대를 만들어 갔다.(최연식 지음 ‘조선의 지식 계보학’ 23 페이지)


하지만 조선 성리학은 의료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문제적이었다. 어의(御醫)들이 진맥(診脈) 외의 방법으로는 임금의 몸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것이나 의사가 아닌 성리학자들이 임금의 몸과 관련된 책임자를 자처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조선은 대신들도 어의들과 함께 왕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에 참여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어의를 비롯한 의관들이 맡지만 진료와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유학자 출신의 삼제조(三提調)가 맡았다. 삼제조란 정1품(도都제조), 정2품(제조), 정3품(부副제조)을 말한다. 문제는 삼제조가 감시하는 경직된 분위기는 오진을 낳은 주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이상곤 한의사 지음 ‘왕의 한의학’ 참고) 오진이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재란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의 앞 글자인 회에 집을 뜻하는 재(齋)를 조합해 만든 말로 주희의 집이란 뜻의 말이다. 살아 있는 제 나라의 임금보다 죽고 없는 주희를 더 받들었다는 조선의 성리학 실상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퇴계는 남명(南冥) 조식과 의미있는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주자학 내부의 논쟁으로 남명 조식의 문묘 종사 좌절, 북인정권의 붕괴, 남명학파의 몰락은 조선의 주자학적 도학화를 재촉했다.(김용헌 지음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211, 212페이지)


조식은 제자 정인홍이 "혼주(昏主)"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에 가담한 역적으로 지목되면서 오명을 썼다. 조식은 실천을 강조했다. 특기할 만하지만 그는 정주(程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래 보탤 것은 하나도 없다며 저술도 하지 않았다. 율곡과 퇴계의 이론 논쟁이 철저한 주자학 내부의 논쟁이듯 실천을 강조한 조식도 퇴계와 차별점을 보이지 않는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로 유명한 분으로 “순임금이 사흉(四凶)을 제거하던 것과 같이,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베던 것과 같이 하시면 능히 지극히 악을 미워하는 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크게 두려워 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란 권고를 임금에게 했다.(한형조 지음 ‘조선유학의 거장들’ 148, 149 페이지) 그런데 그런 그가 앞에서 언급한 성리학자 지식인들의 완고(頑固)와 독선(獨善), 전횡(專橫)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무지(無知)하다’는 의미이다.)


정주 이래 보탤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조식은 철저한 주자학 내부의 인물이었다. 사문난적(詐文亂賊; 주자의 유교를 다르게 해석한 사람을 정죄하는 말)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조선의 숨막히는 성리학 중심주의 아래에서 개인적 겸양(이라 해도)은 큰 의미가 없다.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지만 이런 폐쇄성(도그마성)을 보면 유교는 종교라 할 수 있다.


가지 노부유키(加地伸行)는 종교를 죽음과 죽음 후에 대해 설명하는 체계로 보며 유교는 그런 점에서 종교라 말한다.('유교란 무엇인가' 참고) 공자는 자하(子夏)라는 청년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는 말을 했다. 공자 자신 스스로를 유자(儒者)라 불렀다. 유자란 무축(巫祝: 무당, 박수 따위의 주술사)을 말한다. 주술적 의례(儀禮)나 상례(喪禮) 등의 일에 종사하던 하층민들이다. 군자유는 사유(師儒: 도道를 가르치는 선비)를 말한다.


가지 노부유키는 샤머니즘에서 정치이론, 우주론, 형이상학을 두루 포괄하는 것은 전세계에서 유교 뿐일 것이라 말한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이 점서와 철학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만 해도 노부유키의 말에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를 죽음과 죽음 후에 대해 설명하는 체계로 보는 노부유키의 말은 베르그손의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베르그손은 종교는 지능에 의한 죽음의 불가피성의 표상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반작용이라는 말을 했다.(‘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베르그손은 종교를 부정적인 정태(靜態)종교와 긍정적인 동태(動態) 종교로 나누었다. 베르그손은 정태 종교를 사회 질서의 보존이라는 사회성 차원에서 보았다. 또한 죽음의 확실성으로 인한 공포와 사후생명의 연장이라는 허구가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정태 종교는 주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베르그손은 주술(呪術)이 끝나고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주술과 과학이 언제나 함께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동태종교는 생명에 대한 애착에서 생명으로부터의 초탈과 사회생활에서의 충성에서 사회생활을 초월하는 정신의 보다 자유로운 부름을 겨냥한다. 베르그손은 정태종교와 동태종교는 전혀 별개이지만 동태종교는 정태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비극(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삶의 고통과 무의미를 견디게 하는 예술)이 탄생하려면 둘이 만나야 한다고 본 니체와 비교하게 하는 부분이다.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에서는 신(神)을 존재이면서 생성이라 정의했고, ’창조적 진화‘에서는 용솟음치는 용광로처럼 생명이 넘쳐흐르는 우주의 근원으로 보았고,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에서는 생명의 근원이자 사랑 그 자체이며 사랑을 통해 인류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존재라 생각했다. 존재이자 생성, 생명력 넘치는 우주의 근원, 사랑 그 자체를 두루 포괄하는 이런 멋진 생각은 정와 동태종교를 상호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 뿌리가 같다.


베르그손의 생각에 무언가를 덧붙이자면 동태종교가 정태종교를 필요로 한다면 정태종교는 동태종교를 모델로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나는 베르그손의 종교 및 신관(神觀)으로 유교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당연히 가지 노부유키가 한 말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유교는 샤머니즘에서 정치이론, 우주론, 형이상학을 두루 포괄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말이 그것이다. 개인적인 토로이지만 ‘성부(聖父) 베르그손, 성자 스피노자, 성령 니체‘(토드 메이의 표현)에서 매력적이지만 아직도 버성기는 니체를 베르그손과 함께 읽으면 조금 나아질지? 이것이 이 가을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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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가디언이 스웨덴 아카데미측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밥 딜런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밥 딜런의 수상 거부를 염두에 두고 'Nobel panel gives up knockin’ on Dylan’s door'란 글을 실었네요.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란 곡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참 신선한 제목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저는 knocking on haven's door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heaven과 haven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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