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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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어사전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 원래 진리인식(眞理認識)의 학문 일반을 가리켰으나, 중세에는 종교가, 근세에는 과학이 독립하였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의 하위 부문이 있다.” 라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설명하고, “자기 자신의 경험 등에서 얻어진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철학>이라는 접근하기 어려운 난해한 학문이라는 인식보다는 우리의 일상의 삶 자체가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쉽게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개똥철학’이라는 우스개 말도 나온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는 전혀 철학 같아 보이지 않는 일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는 철학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철학에 대한 짧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알만한 위대한 철학자들의 철학적 경구는 한 구절도 볼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소한 계기들을 일상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꼬아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서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낯설게’ 보게 하거나, 전혀 생소한 질문에 답을 강요하고 있어 새로운 철학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과제는 다르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동일합니다. 즉 소요시간을 두고 있고, 작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제시되며 과제수행에 따르는 예상효과를 요약하여 모두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교의 진리를 수행하는 분들이 공부하는 방식으로 101가지의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미 경험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선뜻 실행에 옮기겠다고 나서기가 쑥스러운 것들도 있습니다. 오래 전 경험하면서 그때는 당혹스러웠는데 여기에서는 거꾸로 해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싶은 경우를 소개하려 합니다. ‘낯섦의 틈새로 전화걸기(49쪽)’입니다. 무작정 전화번호를 누르고 상대와 통화하기인데 “인간 세상이 얼마나 ‘두꺼운지’,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를 느껴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낯섦, 꽉짜인 일상 속에 느닷없이 끼어든 균열, 낯섦이라는 작은 틈새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를 경험해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지낼 때 늦은 밤에 전화를 건 중국여성이 대화를 요청하는 상황이 영 불편하였던 까닭에 다시 전화를 걸지 말아달라 간청했던 경험이 생각나서인지 제가 선뜻 이 과제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기호학의 개념을 연상하게 하는 과제가 몇 개 눈에 띄었습니다. 예를 들면 ‘44번째 리듬타며 글씨 써보기’의 경우 “우리가 평소에 쓰는 글자들은 단어가 갖는 의미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사상이나 정보, 감정 따위를 다루는 텍스트가 전해주는 것들과도 글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글자는 글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154쪽)” 즉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가 담고 있는 기호학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고 글자를 객체화하는 상황을 경험해보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상상하기’라는 과제에서는 전쟁터가 아니면 실제로 볼 수 없어 상상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상상하기도 역겨울 것 같습니다. 판타지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 3; 불을 다루는 도깨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16111>편에서 두억시니족의 신전에서 제각각인 신체조각들이 모여들어 폭포를 따라 흐르면서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연상하면서 끔찍한 기분을 느꼈는데, 이 과제에서 우리는 전쟁의 끔찍함 등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간혹 의학적 사실과 다소 다르다 싶은 점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당신 몸속 세포 중에서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6쪽)”는 인용같은 경우 뇌신경세포를 뇌조직이 만들어지는 순간 출현하여 내외부로부터의 위해요인이 작용하여 죽을 때까지 존재하며 세포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영구세포라는 점에서 정확하지 않은 인용으로 보입니다. 하지에서 허벅지 위쪽이 무엇에 부딪히면 제일 아프다는 것도 옳은 것인지 한참 생각을 했습니다. 허벅지 위쪽에는 근육이 넉넉하여 부딪히더라도 통증이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고, 오히려 정강이뼈나 무릎관절을 덮고 있는 슬개골 부분이 호되게 부딪히면 심한 통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이라는 부제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 행위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우리에게 의외의 놀라움을 안겨주고 이 놀라움으로부터 철학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의 바램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어디를 읽어도 무방하고 두세 쪽에 불과한 과제를 수행하다보면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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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샴 법칙의 나라 - 빼앗긴 이명박 5년의 기록
오홍근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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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이 퍼렇던 군사독재시절 동양방송 보도국기자로 언론에 투신하여, 동양방송이 강제 통폐합되고서 중앙일보로 옮겨 활동하던 오홍근 기자님이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동명의 칼럼들 가운데 골라 엮은 책입니다. 중앙경제사회부장시절 월간중앙에 기고한 ‘청산해야할 군사문화’라는 제목의 칼럼이 계기가 되어 군부가 주도한 테러를 당하기도 했던 저자는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홍보처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아무래도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새로 들어선 정권이 하는 정책들이 미덥지 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어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입니다. 특히 글을 써오던 언론인의 입장에서는 그 강도가 높은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샴의 법칙의 나라>에는 ‘빼앗긴 이명박 5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모두 48개의 칼럼을 이슈에 따라서 다섯으로 나누어 싣고 있습니다. 검찰과 법원이 권력과 유착되어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1부 아 아, 헌법 제1조, 이명박 대통령의 폐쇄적인 인사정책이 타겟이 되는 2부 사설 공화국의 비극,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3부 최시중씨는 이랬다,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4부 “망가뜨려라, 파괴하라” 그리고 여야 정치의 헛발질을 싸잡아 비판하는 5부 얼치기들의 비틀 걸음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칼럼은 대체적으로 2010년 여름 무렵부터 시작해서 2012년 4월 총선 무렵의 글까지 2년이 채 안되는 시기에 쓰인 것들이고, 이명박 대통령의 재임기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시점에 출간하면서도 ‘빼앗긴 이명박 5년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 2007년 대선을 통하여 국민의 선출한 정권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보면 ‘아 아, 헌법 제1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첫 번째 칼럼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1조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마도 2008년 촛불시위 군중이 즐겨 인용했던 구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시위에 나선 군중이 스스로 주권을 내세워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생각을 했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즉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대다수의 국민의 주권이 더욱 존중받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선거를 통하여 세운 정부를 일부 시위군중이 나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현정권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분들에게는 날선 저자의 비판이 속시원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비판의 논거가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고 각각을 비판하고 수용하는데서 나왔다기 보다는 비판의 대상을 코너로 몰기 쉬운 자료만을 인용하는 편향된 시각에서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생긴 문제점이 과거 정부에서는 없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차별점이 있어 현 정부에서 일어난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방식으로 접근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에서도 있었던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하고 이명박 정부들이 처음 드러난 문제로 심각하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내용도 있어 보입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과 관련된 특채방식은 과거 정부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고, 국정감사 등에서 지적받았음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갔던 투명하지 못한 인사처리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2008년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단정한 PD수첩의 제작진이 관련된 소송에서도 무죄로 판명되었다는 점만 강조하고 제작 상에 문제점은 거론하지 않고 넘어간 것도 그리 적절하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4대강사업이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는 주장은 공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는 마당에 다음 정권이 4대강사업을 이어받아 대운하를 건설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 오랜 가뭄으로 녹조가 발생한 것을두고 4대강사업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늦장마가 들면서 녹조는 사라지고 말았었지요. 임기가 남은 대통령더러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주장도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비판의 소리를 외면하는 정권에 지쳐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일부 저자의 글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만, 분명 타당한 주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달콤한 말에 일단 쉽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습니다만,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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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묻는다 역사가 답한다 - 위대한 역사가 일러주는 천하 경영으로의 길
김동욱 지음 / 알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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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는 역사의 공과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인문학을 내세운 <독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061426>라는 책을 통하여 만나 본 김동욱기자는 새로 낸 책 <사람이 묻는다 역사가 답한다>에서 “역사는 헛소리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다.”라고 한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일갈을 인용하여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열고 있습니다.

 

포드로 대표할 수 있는 역사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은 과거와 현재는 시점만 상이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논리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록되어 전승되고 있는 역사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 또한 역사해석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렇다면 ‘역사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역사가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의 기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이 속한 집단과 집단이 접촉하면서 만들어지는 결과에 대한 기록이 역사라고 한다면 그 역사를 지금 시점의 메시지로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역사인문학의 목표가 될 수 있겠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독사>에서 “복답다단한 역사를 다각도로 살펴 사물을 꿰뚫는 통찰을 얻고 현상의 이면을 제대로 바라보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블로그를 통하여 당시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이슈에 대한 동서양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재해석하여 비교하는 글쓰기를 해온 저자는 그가 써온 글들을 <독사>를 통하여 하나로 묶어 소개한 바 있습니다. 두 번째 작업이 되는 <사람이 묻는다 역사가 답한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도출해낸 이슈를 경영과 연관지어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경영이라는 의미에는 개인의 삶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인 집단, 혹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 더 나아가서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경영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27꼭지의 글을 기회, 도전, 기술개발, 리더십 그리고 도약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모든 글이 쉽게 읽히고 흥미롭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더 가는 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부제를 달고 있는 “코드인사, 약일까 독일까”라는 글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실 ‘코드인사’라는 단어를 언제부터 써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참여정부시절부터 익숙해진 것 아닐까 싶습니다. 조직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눈빛 하나로도 교감이 될 수 있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효율적인 조직운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틀에 갇힐 수 있다는 문제가 있겠고, 그들만의 이너서클에 들어가지 못한 인재가 사장되는 것 또한 사회적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드인사에 매달리는 지휘관의 경우 제한된 인재풀만으로 인사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회전문인사’라는 비아냥을 들어가면서 쓴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포스트로 이동시키는 짓을 할 수밖에 없게 되죠.

 

저자는 역사 속에서 코드인사가 자칫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엽관제’를 끌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엽관제도의 폐해를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든 굳이 앤드류 대통령 시절의 미국사회에 만연하였던 엽관제의 실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겪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제4장의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를 끌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소개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참여하고 있는 국제학회의 집행부가 바뀌는 시기에 일어나고 있는 회원국 사이의 견제가 조직을 와해시키고 있어 더욱 안타까운데, 특히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않아서 걱정입니다. 조직 안에서는 물론이고 상호 협력이 전제되는 집단간의 접촉에서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될 수 없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어 어떻게 신뢰를 키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사례 해석들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파워블로거의 글을 엮어 나온 <착각의 심리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99785>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입니다만, 블로그글은 일단 독자들의 반응을 통하여 저자의 글솜씨가 검증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묻는다 역사가 답한다> 역시 블로그를 통하여 검증된 저자의 글솜씨를 즐길 수 있는데, 특히 편집의 묘를 잘 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주제에 관한 현상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글머리를 열고 역사적 사례를 인용하여 대비시키고, 끝으로 역사를 재해석하여 주제와 연관을 짓는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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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 유의열전
김남일 지음 / 들녘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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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 의료기기를 한방진료에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천연물신약이 한방의료영역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의료계의 반발이 고조되는 등, 최근 의료계와 한의계의 갈등의 골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한의학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천연물신약이 이슈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제가 식약청에서 근무할 때 주관했던 독성물질국가관리사업에서 하던 생약제의 독성기준을 정하는 프로그램이 생각났습니다. 생약제는 자연에서 얻을뿐더러 독성이 있더라도 법제라고 하는 가공단계를 거쳐 독성을 순화시키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전문가들마저 생각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성을 평가하는 방법마저도 막연한 것도 현실입니다.

 

독성물질국가관리사업은 미국정부가 주관하고 있는 National Toxicologic Program을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든 것입니다. 미국의 제도가 일반 화학물질의 독성을 규명하여 국민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반면, 독성물질국가관리사업에서는 생약제의 독성관련 정보를 표준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출발한 것이기도 합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아직 인프라가 구축되어있지 않아서, 선진국에서는 관심대상이 아니라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생약제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스템을 구축하던 초기단계를 넘어 이제는 연간 시험대상 항목을 확대하여 우리나라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생약재의 독성관련 정보 데이터 구축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방향을 잃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처음 사업을 주도한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의료계와 한의계가 첨예하게 부딪히기 시작할 무렵, 해결방안을 찾기 위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 읽기도 하였습니다. 출발은 역시 뿌리를 찾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일본의 과학사가인 야마다 게이지씨의 <중국의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4849711>로 시작하여 김두종교수님의 <한국의학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5153094> 등을 거쳤습니다. 특히 의료계와 한의계를 아우를 수 있는 방안모색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에 의료계와 한의계가 신문지상을 통하여 붙었던 논전의 경과를 담은 <한의학은 부흥할 것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5036214>를 비롯하여 해방 이후에 진행되었던 의료일원화 움직임에 관한 다수의 서적을 찾아 읽었습니다.

 

제가 한의학을 전공하지 않아 한의학의 본질에 이르는 것은 어려웠습니다만, 현대의학의 주요 방법론이라고 할 과학적 방법론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 의학과 한의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비교하는 것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서양의학이 발전해온 역사를 기록한 자료들이 풍부한 반면 한의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남일교수님의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이 반갑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유의열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학자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있어 한의학의 역사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생경한 유의(儒醫)가 무엇을 한 사람인지 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유의란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 즉 학문적으로 유학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한의사집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들을 세분하여 환자를 진료한 유의, 의서를 편찬한 지식인 유의, 의학적 식견으로 질병을 토론한 유의 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9쪽). 저자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이 관직에 들어오는 경로를 보면 내의원이나 혜민서와 같이 환자진료를 담당하는 사람을 뽑는 의과를 통하거나,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들어온 다음 의학을 공부하여 내의원에서 일하게 된 경우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유의라는 분들이 실제로 한의사로서 진료업무를 하기보다는 의학(물론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학을 접한 실학자가 서양의학을 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전통의학에 해당될 것입니다)에 관한 서적을 읽고 의학의 이론을 공부한 분으로 ‘한의사’라기보다는 ‘한의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지방관직 혹은 지방관직을 수행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그들이 환자진료를 행하였다기보다는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건행정을 펼쳤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 중앙 의료기관으로는 내약방(內藥房)·전의감(全醫監)·혜민국(惠民局)·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 또는 동서대비원)·제생원(濟生院)·종약색(種藥色)·의학(醫學) 등이 있었고, 지방 의료기관으로는 의원(醫院)·의학교수원(醫學敎授院)·의학교유(醫學敎諭)·의학원(醫學院)·의학승(醫學丞)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의학(醫學)은 병(兵)·율(律)·자(字)·역(譯)·산학(算學) 등과 더불어 6학의 하나로 설치된 의학교육기관이었으며,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제생원·혜민서 등에서도 각각 의생방을 설치하여 의원을 양성했다고 하는데 이는 의료기관에 의사양성소를 병설한 독특한 제도라 하겠습니다. 지방에서는 의원·의학교수관·의학교유에서 의원을 양성했다고 합니다. (다음백과사전에서 인용)

 

이와 같은 의학교육기관에서 양성한 의원들은 실제로 환자진료를 업으로 하는 자로 신분은 중인에 속하였을 것이나 특히 의술이 뛰어나 내의원에 발탁되어 왕족 혹은 중앙관료의 치료를 담당하게 되면서 고위관직에 오르는 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내의원을 책임지는 위치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의원의 책임을 맡는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특히 의학에 밝은 정부고관들 가운데서 뽑아 임명하여 의관들을 관리감독하고, 특히 왕실 사람들을 진료할 때 진단과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는 논의를 주관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착각의 심리학>의 저자 데이비드 맥레이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과 성취 등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해버리는 ‘자기위주편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인용하는 이유는 저자가 적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기도 합니다. “조선 전 시대를 통틀어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에 속하는 의학연구에 몰두 하였고, 심지어 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있었다. 유학적 자연관을 밑바탕에 깔고 의학 연구에 미진한 이들의 수준은 매우 높아서 한의학을 연구하는 계층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면서 학문 발전을 선도하였다.(10쪽)”

 

필자가 보기에는 조선시대 유의가 공부한 의학은 자연과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서지학적 접근이라고 해석함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를 응용과학에 속하는 현대의학의 개념을 차용하여 전통의학에 자연과학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의복을 입히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서양의학 역시 과거에는 경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환자진료가 이루어지던 시절이 있었지만, 동양의학에서는 외면하였던 사후부검을 통하여 얻은 자료들을 통계적 분석을 통하여 공통점을 찾고 이들을 환자의 병증과 연관시킴으로서 병인을 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온 반면, 동양의학은 환자의 병증을 음양오행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어, 이런 방식을 과학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한의계가 자랑하고 있는 <동의보감>의 바탕에 깔려있다는 도교적 논리를 과학적이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간혹 해석이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자가 인용한 김우선의 <유의소변술(儒醫笑變術)>의 한 구절입니다. “유학자가 변신하여 의사가 되니 이는 정말로 웃음살 일이로다. 비록 그러하지만 유학자는 도(道)를 다스리는 사람이고, 의사는 병을 다스리는 사람이니, 그 치료하는 기술은 서로 비슷하다. 그러므로 의사를 병공(病工)이라 하였으니 병을 치료하여 낫게 하여 그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근심을 변화시켜 웃는 얼굴로 만드니 이것은 웃을 일이다.(51쪽)”는 구절의 뒷부분, 의술을 통하여 환자의 근심을 덜어준다는 의미해석보다 앞부분의 유학자가 의원이 된 것이 왜 웃음살 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의술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중인출신 의관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며,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었을 유학자들이 의술을 행하는 경우 대부분 치료비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즈음도 간혹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말이 무료진료를 한 유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유의가 중인이나 하는 치료비를 받는 의술을 행한다면 아무래도 남들에게 웃음을 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의를 바라보는 조선사회의 시각이 이럴진대 유의들이 문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이 의술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었기 때문(170쪽)이라는 저자의 판단이 타당한가 싶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사족을 붙이자면, <동의보감>에 관한 저자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면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도 <동의보감>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유명한 의서였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은 대단하고도 당연한 일이라는 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한국에서 대단한 공신력이 있다(32쪽)하면서도 <의문보감><방약합편> 등 <동의보감>의 업그레이판 서적들이 출판되었다고 하였을 뿐더러(103쪽), “강명길은 1799년 왕명에 따라 <제중신편>이라는 의서를 간행하는데, 이 책은 <동의보감>의 단점을 극복하고 활용도가 높은 의서를 만들고자 하는 정조대왕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에서 ‘산번보루’라 하여 번잡한 것은 베어내고 빠진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잘못 인용하고 있는 문장을 바로 잡았다고 적고 있습니다.(196쪽) <동의보감>이 완성도 높은 의서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으려면 편찬 이후에 드러난 문제점을 반영하여 보완하는 작업, 즉 개정판을 내는 작업이 이어졌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1525년 간행되었다는 전염병 관련 의서인 <간이벽온방(簡易辟溫方)>에 서문을 보면 조선시대 의학의 수준을 알 듯도 합니다. “갑신년(甲申年, 1524년) 가을에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이들이 많았는데, 을유년(乙酉年, 1525년) 봄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았다. 임금님(중종)께서 이를 일찍부터 근심스러워하며 제사까지도 거행하셨다. 또한 의관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약이(藥餌)를 가지고 와서 구제하도록 하셨지만 두루 효과가 나타나지 않음을 염려하셨다. 이에 특별히 행부호군(行副護軍) 김순몽,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 유영정, 전내의원정(前內醫院正) 박세거 등에게 명령하셔서 모든 처방 가운데 온병(溫病)을 치료하는 법들을 모아서 일편(一篇)으로 하여 <간이벽온방)이라 이름하도록 하셨다.(248쪽)”

 

가을에 시작한 전염병을 겨울을 지나 봄까지 제압할 수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당시 알고 있던 모든 처방가운데 온병치료법을 모아 골라낸 치료법을 묶어 만든 의서를 배포한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은 아니었을까요? 특히 내용을 보면, “학술적인 내용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의 증상을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 치료법을 상세하면서도 요점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 처방 내용에 있어서도 전염병의 예방법, 예방 처방, 치료법, 치료 처방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처방 약물에 있어서도 한두개의 약물로 구성되어 있는 처방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어서 궁벽한 시골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49쪽)” 한 두 개의 약물로 구성된 처방으로 예방 혹은 치료될 전염병 같았으면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기승을 부렸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궁벽한 시골에서 구하기 쉬운 약제를 알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나름대로는 무언가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아닐까요?

 

“한의학이 백성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든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활용이 간편한 의학지식들이 실생활 속에 널리 보급되었고, 더불어 이것들을 생활의학서의 형태로 간행했다.(258쪽)”는 저자의 설명은 양생(養生)에 주안점을 두었던 한의학을 치료의학으로 발전시키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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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9-0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7506
 
착각의 심리학 - 당신의 감정, 판단, 행동을 지배하는
데이비드 맥레이니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심리학 분야가 주목받게 되면서 다양한 심리학 관련 서적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심리학을 전공하시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결과 혹은 임상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심리현상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은 분명 심리학전문가들과는 달리 쉽게 읽힌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심리학 블로그’를 표방한 자신의 블로그(http://www.youarenotsosmart.com; 사진)를 통하여 소개한 글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반인이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즉 검증된 글발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짧지 않은 세월동안 블로그를 운영해온 저로서도 부럽기도 하고,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고, 역시 책읽기를 마치고서는 확실한 무엇을 손에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인간의 망상을 기념함(A Celebration of self delusion)’이라는 문패를 걸어두고서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오해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을 올리는데 당연히 심리학 혹은 뇌과학에 관한 전문가들의 연구논문을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상식과 관습에 시시콜콜 딴지를 거는 내용이 방문객들의 폭발적 반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블로그에 담은 그의 글들은 출판쪽의 주목을 받게 되고, <착각의 심리학>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블로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대부분 느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블로그 글은 지나치게 길면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데 실패하기 쉽습니다. 저의 경험에서는 A4 용지 한 장 정도의 분량, 아니 그보다도 화면을 이동하지 않아도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면 딱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글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요약하는 글쓰기 솜씨가 필요한 것입니다.

 

<착각의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문제 제기에 이어 주제에 관한 관련분야의 논문 혹은 텍스트를 요약하는데, 이 부분 역시 두 세 개 정도의 대표적 논문을 인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실은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만, 주제에 관한 저자의 생각 혹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반 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는 특히 이 부분을 붉은 글씨로 강조하는 특별한 기획으로 독자의 눈을 붙들고 있습니다.

 

‘인지적 편견’, ‘발견적 학습’ 그리고 ‘논리적 오류’의 주제에 속하는 모두 서른아홉 꼭지의 이야기를 1. 착각하는 자아, 2. 억측에 가까운 예측, 3. 어설픈 경험, 4. 허점투성이 논리, 5. 관성화된 습관 등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를 펼치고 읽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새로운 주제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곧 자신이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인지적 편견과 불완전한 발견적 학습, 그리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논리적 오류 덕분에 시시각각 자신을 속이며 현실과 타협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18쪽)” 정말 그런가?

 

금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으니 “도대체 왜 사람들은 정치인의 빤한 거짓말에 속는거야?”라는 제목으로 된 ‘제3자 효과’편을 보면 세상의 관찰자이면서도 자신은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당신을 ‘나는 대중이 아니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세뇌시키기 위하여 어떤 감언이설로 속이고 있는지 냉정하게 검토해보라는 저의 해석을 덧붙여 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예측한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첫 단계가 늘 현재 상황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시작되지만 그래도 이어지는 행동은 상황이 진짜인양 행동하다 보면 예측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재미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읽어보시고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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