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스투디움 총서 9
윤미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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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벼르다 읽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집 마주보기에서 사촌의 구석 창문이라는 시의 주석을 따라가다가 도시산책자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미래교수의 <발터 벤야민의 도시산책자와 사유>를 읽게 된 이유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벤야민의 산책자의 사유를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대부분 글이 도시관상학의 범주에 속하지만 일방통행로,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파사젠베르크등이 산책자의 사유 모델에 따른 작업이었다고 했습니다.


벤야민은 프란츠 헤셀과 지크프리트 크라카워로부터 도시 산책의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했습니다. 프란츠 헤셀은 베를린 산책을 통하여 산책이 도시의 현재에 대한 관찰을 넘어 도시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불러오는지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크라카워는 도시의 문화사보다는 도시의 현재가 제공하는 공간상에 더 집중하고, 그러한 공간상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역사철학적 의미를 해독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벤야민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산책자는 시적 영감의 원천을 파리의 산책에서 얻은 샤를 보들레르였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와 브르통의 나자도 파리 산책에서 얻은 도취의 힘을 증거하는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로부터 파사젠베르크에 이르기까지 여섯 장을 통하여 도시산책하면서 얻은 사유의 결과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적었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헤셀의 베를린 산책과 크라카워의 도시 몽타주에 관하여 설명했습니다. , “산책자의 사유라는 관점에서 벤야민의 사상적 특징을 주요 텍스트를 중심으로 조명하는 동시에 보충설명이 필요한 지점에서 벤야민의 핵심적인 이론 및 범주를 설명하는 구성방식을 취한다.(13)”고 했습니다.


벤야민은 거리에서 마주친 간판, 벽보 등을 통해 자신이 꾸었던 꿈을 연상하여 멕시코 대사관등의 작품에 담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수집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벤야민의 글은, 한편으로는 수집의 역사적 행태에 대한 서술을,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수집가에 대한 성찰을 포함한다.(67)”고 했습니다.


보들레르에 관한 글에서는 표면적으로 보들레르 시는 대도시나 군중과 그다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지 않는다. 물론 악의 꽃2부는 파리 풍경이라는 제목 아래 파리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시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카루젤광장이 언급되는 백조, 파리 거리를 가로질러가는 노파를 묘사한 가여운 노파들등이 있다. 또한 군중 속에서 등장해서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여인을 묘사한 지나가는 여인에게라는 시도 있다.(82)”라고 했습니다. 보들레르가 산책을 통하여 파리의 거리를 관찰한 것은 일시성과 우연성에 지배되는 현대 대도시의 변화를 시적 영감을 주는 새로운 체험으로 받아들였다.(86)”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통하여 거리산책자가 탐닉하는 도취, 그것은 고객의 물결에 부딪히는 상품의 그것이다.(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91)”, 그래서 새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사람은 거리산책자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벤야민은 모스크바, 파리, 나폴리, 리가, 마르세유, 피렌체 등 크고 작은 도시를 많이 여행했는데, 이는 세계여행을 자주했던 외할머니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사진엽서를 통하여 여행벽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를 여행지가 원본이라면 여행지 사진은 복제품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가본 여행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습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일방통행로에 적었습니다.


영화가 등장하면서 기차와 자동차를 타고 도시에 진입하는 경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차역에서 내리는 승객에게는 낯선 도시 풍경이 갑자기 나타난다. 반면 도시의 입구, 즉 도시의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자동차 운전자에게 도시 풍경은 파노라마처럼 서서히 펼쳐진다.(181)”라고 했습니다. 벤야민이 최근에 등장한 드론이 찍은 도시의 영상을 보면 어떻게 이야기할까 궁금해집니다.


헤셀은 베를린산책에서 거리산책은 도시가 어떻게 집단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매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거리산책자가 종종 의도치 않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흔적들과 마주치기 때문이다.(235)”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거리산책자의 사적 과거에 대한 기억보다는 베를린의 특정 장소와 연관된 역사적 일화의 비중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크라카워는 대도시를 해독되어야 할 텍스트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헤셀, 벤야민과 유사한 문제의힉을 지닌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도시의 현재가 아닌 과거이 파편들을 해독의 대상으로 삼았던 벤야민과 달리, 크라카워는 생생한 도시의 현재가 제공하는 공간상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으로 시대의 현실 안으로, 대도시의 미지의 영역안으로 전입했다고 할 수 있다.(241-242)”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가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크라카워는 도시의 공간상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도시의 대표적인 건축물처럼 의도적 계획적으로 형성된 공간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하게 형성되어 한 번도 어떤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없던 도시상이다.(245)”라는 대목을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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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확장 - 길 위에서 행복 채굴하기
나승유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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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여정을 통하여 보고 들어 배운 것들을 정리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여행에도 관심이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여행은 물론, 그 여행을 어떻게 글로 담아냈는지가 궁금한 이유는 제가 정리하고 있는 여행기에 변화를 줄 무엇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여행의 확장>길 위에서 행복 채굴하기라는 부제가 눈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여행을 계획하며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보면 이 책에 담고 싶은 생각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여행을 통하여 행복을 어떻게 채굴해냈는지 분명치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가 다녀온 해외여행지로, 히말라야를 시작으로 동북아, 그것도 몽고와 러시아 그리고 중국의 북쪽 변두리 지역을 돌아보는 여행이 이어지고, 아프리카를 거쳐 순다열도로 마무리됩니다. 모든 여행들이 저자와 아내 두 분이서 여행사의 도움 없이 자유여행으로 다녀오셨다고 하는데, 일정을 보면 이동하고 잠깐 구경하고 또 이동하여 잠깐 구경하는 방식인데 여정의 큰 틀을 정해놓고 현지 사정에 따라 일정을 수정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지 사정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요즘은 여행사의 상품을 비교해보고 정하고 있습니다만, 미국에 있을 때는 한 달 정도 준비한 끝에 여정의 큰 틀을 정하고 숙소는 현지에서 정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한 적이 있어서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희말라야 트레킹을 떠나게 된 계기가 TV에서 동창들끼리 네팔을 여행하는 모습을 보고, 누리망 정보를 찾아보았더니 초보자도 가능할 듯하여 떠나기로 했다는 시작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용감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것도 우기에 떠났다는 것인데, 전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숙소를 정한다거나 하는 어려움은 없었지만, 일정의 대부분을 빗속을 걷거나 히말라야의 명산들이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여행 시기를 정하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여행을 도와주는 현지 안내인과도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 숙소에서 만나는 방식을 취한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길이 일방통행이라서 어려움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산에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산을 경외하라는 산악인들의 말씀이 공연한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에게 명상과 참선을 위한 적절한 장소는 공기가 희박한 고산 준봉이 아니라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나의 아파트임을 깨달았다고 적은 대목을 읽으면서 해외여행은 이것으로 끝일까 싶었던 것인데, 비슷한 방식의 여행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말라야를 걷다보면 현지 안내인이 가리키는 에베레스트산이 우람하게 솟은 산봉우리에 묻혀 더 낮은 작은 봉우리처럼 보이더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각인식의 한계로 인한 착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어려운 것은 산 높이의 파악만이 아니다. 우리의 대인 관계에서도 수많은 오해와 착각이 있다.그렇기에 심각한 오류를 극복하여 조금이라도 진실에 접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39)”라고 한 대목이 작가가 말하는 길 위에서 채굴한 행복인가 싶었습니다.


앞서 얘기한 동북아 여행도 아내분이 TV교양편성에서 본 그랜드 투어를 따라가는 여행이었다고 합니다. 아내분이 내놓은 동그라미에 가까운 경로가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도를 가지고 여정을 짰다고 합니다. TV의 여행 편성은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을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현지인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오지를 선택하여 보여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오지에서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1부 여행의 확장에 이은 2부 일상의 확장은 맥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순서를 바꾸어 일상에서 해외여행으로 확장되는 방식으로 정리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떻든 여행에 관한 색다른 주제 한편을 읽은 것으로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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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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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쓴 델핀 오르빌뢰르는 랍비이자 철학자 그리고 작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에 라빈 총리 암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로 돌아와 언론인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뉴욕으로 이주하여 맨해튼의 히브리 유니온 칼리지에서 탈무드를 공부하고 랍비가 되었다. 그녀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돕는다는 점에서 의학과 저널리즘, 유대교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그녀가 랍비로서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죽은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점들을 정리하였습니다. “나는 장례를 진행할 때마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죽은 자에게서 살아 있는 자에게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의 힘으로, 그 자리를 빛내고, 확장하려고 노력한다.(25)”라고 적은 대목이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죽음과 관련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다양한 관습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아즈라엘-손안의 생명과 죽음에서는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라는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아즈라엘은 한 손에 검을 쥐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주변을 서성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 아즈라엘을 속이려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장례식에 참석했더라도 집에 곧장 가지 않고 다른 장소에 들러서 죽음을 떼어놓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글을 엘자를 비롯하여 장례식을 의뢰한 사람들의 사연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뒤에서는 자신의 장례식을 생전에 치른 미리암의 사연을 비롯하여 죽고 싶지 않았던 모세에 관한 이야기, 그녀의 조국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이 책에서는 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과 관습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책을 읽다가 표시를 해둔 부분을 몇 곳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로 묘지는 베트 아하임(Beit ahH’aym)이라고 하는데 생명의 집혹은 살아있는 자들의 집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죽음을 부정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그곳에 뻔히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승리이 징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유대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건배 구호는 레하임(LeH’ayim)인데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건배를 할 때마다 질병을 조롱하자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매장되는 순간까지 고인의 시신 가까이에 초를 켜두어야 한다는데, 이는 아직 살아 있는 영혼의 존재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관에 담겨 장례식장을 떠날 때까지 촛불과 향불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14살이 되던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향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밤새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의 장례식장에서는 자정이 되기 전에 상주들이 장례식장을 정리하고 잠을 청하는 분위기라고 하는데 촛불과 향불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분명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가 사후세계와 부활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른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라고 하는 모세오경에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스올(shéol)이라는 곳이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질문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죽음에는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만이 남게 된다는 뜻일까요?


앞서 미리암의 사례가 사전에 장례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처럼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우리네 생각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자신이 입을 수의를 미리 장만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죽음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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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 - 걷기 좋은 유럽, 읽기 좋은 도시, 그곳에서의 낭만적 독서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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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유럽, 읽기 좋은 도시, 그곳에서의 낭만적인 독서라는 부제가 <도시를 걷는 문장들>을 읽어보기로 한 이유였습니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강병융 작가의 여행수필 모음입니다. 슬로베니아를 두 번 여행하면서 류블랴나를 세 번 지나치면서 정작 한 번도 머물러보지 못한 도시입니다.


저는 주로 여행사에서 기획한 상품을 통해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만 필자는 주로 자유여행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자유여행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일을 겪기 마련입니다만, 작가는 행복한 여행을 위해선 그 중심에 , 자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상스러운여행을 통하여 내가 중심인 여행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행지에서 읽은 책은 최고의 책이고, 그 책을 다시 읽으면 머물렀던 곳이 떠오르게 만드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시를 걷는 문장들>은 그 문장, 그 느낌, 그 장소를 기록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지난해 그동안 다녀온 유럽여행과 책읽기를 연결한 <양기화의 BOOK소리-유럽여행>을 출간했습니다만, 여행과 책읽기를 새롭게 연결한 책으로 읽었습니다. <도시를 걷는 문장들>에서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키슬라바와 정혜윤의 <마술라디오>를 시작으로 유럽 20개국의 22개 도시에서 읽은 22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작가가 여행한 22곳 가운데 12곳에는 저도 가보았습니다만, 작가가 소개한 22권의 책 가운데 읽어본 책은 단 3권이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10곳은 여행사의 상품에는 포함되지 않는 곳이며, 작가와 저의 독서 취향이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19개 국ㅏ에서 각각 하나의 도시를 소개하는데, 이탈리아만큼은 3곳의 도시가 소개됩니다. 도시들은 위치에 따라 유럽의 중부, 동부, 서부, 남부, 그리고 북부로 나누어놓았는데, 유럽의 남부의 도시들 가운데 페루의 리마가 포함된 사연이 무엇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만약에 저라면 리마와 이탈리아의 도시 2곳을 제외하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부에 각각 5개 도시를 선정하여 모두 24개 도시로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 도시의 말미에 있는 한 장소는 나름 그 도시를 대표하는 곳을 골랐다는 생각을 했지만, 부다페스트에서 부다페스트 아이를 고른 것 이유가 분명치 않았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부다페스트 아이를 본 사람은 많겠지만, ‘부다페스트 아이에서 부다페스트를 본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부다페스트에 두 번 갔지만 부다페스트 아이를 본 기억은 없습니다. 당연히 부다페스트 아이에서 부다페스트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다페스트 국립미술관의 노대에서 그리고 겔레르트 언덕에서 부다페스트 시내를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을 읽고는 이 도시와 그 소설이 비슷한 몇 가지라는 제목의 글을 적었습니다.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리가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고령화 가족>과 연결하는 것을 보면, “리가와 <고령화 가족>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역시 내가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일테니라고 마무리한 대목의 의미를 알듯합니다. 그리고 리마편에서 소개한 한 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이야기 꼭지마다 고른 한 장소는 그곳에 있는 장소인 듯하나, ‘한 문장은 딱히 그곳에서 읽은 책에서 고른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정형적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책읽기를 마치고는 든 생각은 이 책에서 소개된 장소들 가운데 가본 적이 있는 12곳에서 저자가 읽었다는 책들을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작가의 생각에 얼마나 동조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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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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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다녀온 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로쟈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시마자키 도손의 첫 번째 소설 <파계>를 읽었습니다.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에밀 졸라가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자연주의문학은 자연의 사실을 관찰하고 진실을 묘사하기 위해 모든 미화를 거부하라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 이상이나 관념을 버리고 철저하게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려했고, 자연과 자연의 법칙, 유전과 사회 환경의 인과 법칙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을 뻔뻔하게 묘사하고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파계>는 메이지유신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신평민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백정[워낙이는 부락민(部落民)이나 우리말로 옮기면서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던 백정으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에도 시대 때부터 최하층 대접을 받으며 특별지역에 거주하던 천민 계층을 말합니다.


에도시대의 신분제도는 병농공상(兵農工商)4단계로 구분되어 세습되었는데, 이들보다 낮은 불가촉천민으로 가축의 도살, 형장의 사형 집행인, 피혁 가공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에타(穢多, 예다)’와 사형 집행 보조인 및 그 관할하의 걸인, 육류 납품·판매업, 죄인 및 시체 매장, 도로 청소, 사찰의 종자, 광대 등 히닌(非人, 비인)’이 있어 히사베츠부라쿠(被差別部落, 피차별부락)’라고 하는 제한된 장소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세수확대를 위해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부락쿠민을 일반국민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부라쿠민에 대한 일본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 때문에 평민과 동등한 지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해방령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들에게 신평민(新平民)이란 호칭을 붙여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소설 <파계>에서는 신평민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세가와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부락을 떠나 목장에서 목부로 일하면서 신분을 속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세가와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공부에 매진하여 사범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끝에 보통학교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세가와는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마라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각별하게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하숙집에 부라쿠민이 들었다가 쫓겨나는 일이 있자 곧바로 하숙을 옮긴다거나 하는 주변에서 보면 오해를 살만한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신평민으로 지목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사회활동을 하는 이노코 렌타로의 사상에 동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에게만은 자신도 부락쿠민이라는 사실을 고백할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목부로 일하던 아버지가 씨소에 받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러 고향에 가면서 일이 꼬이게 됩니다.


렌타로가 지지하는 이치무라 변호사와 맞붙게 된 다카야기 리사부로가 고향이 같은 부라쿠민의 딸과 결혼을 해서 처가의 지원을 받을 속셈이었는데, 그 부인이 우시마쓰의 신분을 남편에게 알리고 다카야기는 이를 우시마쓰가 근무하는 학교의 가쓰노 분페이라는 신참선생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장학관의 조카라는 이유로 교장이 각별하게 챙기면서 우시마쓰를 제거하려 획책하는 교장과 분페이는 은밀하게 이 사실을 확대하면서 우시마쓰 제거 작업을 시작합니다.


고향에서 만난 렌타로에게 자신 역시 부락쿠민이라는 신분을 밝히려다가 아버지의 계명이 마음에 걸려 결행하지 못했던 우시마쓰는 다카야기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가 렌타로를 습격하여 살해하는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지금까지 신분을 속여 왔음을 주위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지도하던 학생들에게도 알리면서 사죄하고 학교를 사직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시마쓰의 신분을 알게되면서 흥분을 하는 쪽이 많은데 반하여 학생들은 평소 존경하던 우시마쓰가 부라쿠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주도한 신분제도 폐지 문제는 결국은 세대교체가 되어서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우시마쓰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자신이 부라쿠민임을 스스로 알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가, 세상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 뒤에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했다는 것이니, 이야기의 제목처럼 아버지의 계명을 파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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