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인터넷 서점에서 어린이 책 편집장을 대상으로 내인생의 그림책 이벤트 하는 것을 보고, 한달정도 곰곰히 나야말로 내 인생의 그림책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하고 생각해봤어요. 지난 몇 년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은 그림책을 읽어주었지만, 무슨 계기로 그림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사실 전 큰 애 네살 때가지만해도 그림책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큰 애가 어릴 때 한 몇 년 광주에 살았는데, 광주 금남로에 나가면 금남로서점인가 하는 대형서점이 있었어요.  애아빠 회사가 그 근처여서 애아빠랑 점심도 같이 먹을 겸 따분함도 달랠 겸 해서 시내 나가면 애아빠한테 점심 얻어 먹고 서점 들려서 그림책 몇 권 사다 아이에게 읽어주곤 했어도, 그림책에 열혈 애정을 갖고 서점에 들려 책을 사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하품 쩌어쩍 했던 시절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이 책 <프레드릭>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 받아 책장 넘기며 읽는데 전율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머리에 쿵하고 내리치는 것 같았어요. 고만고만한 아이들 수준의 그림책을 읽었고 그림책이란 게 아이들의 전유물로서 인식하였던 저에게 자연의 색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은 시인 <프레드릭>과의 만남은 그림책에 대한 또 다른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만들었어요. 이 그림책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그림책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죠. 이 그림책의 만남 후  그림책은 아이들 것이야라는 속 좁은 편견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그림책 세계에 한번 알아보자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마디로 그림책 세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해준 책이었다고 할까요. 지금도 이 <프레드릭>을 읽으면, 그 때의  가슴 뭉클했던 분위기, 데자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책  처음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어찌나 난감하던지...그 때는 책도 안 뒤적여보고 받자마자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시절이었데, 맨 마지막 녹색 소파가 덩그러니 하얀 여백위에 놓여 있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면서 나중엔 눈물과 콧물범벅이 되었어요. 먼저 돌아가신 아빠의 이미지와 오버랩되면서......한장의 보잘 것 없는 그림이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 때까지 전 그림책이 일반독자에게 감정의 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큼의 파워를 가졌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 어떤 화려한 말도, 위로의 말도, 장식적인 그림도, 실험적인 의도 없이도 충분히 상실의 공감을 표현해 낸  존 버닝햄의 한 장의 그림앞에서 그림책의 보다 더 깊은, 보다 더 넓은 표현의 세계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랍니다. 아이들이 죽음이란 단어를 받아들이기엔 벅차지만,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어른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더랍니다.  이 책의 이야기 구성은 좀 독특한데, 음악기법으로 치면 스타카토 기법이 떠오를 정도로 이야기의 흐름이 일관되게 흐르는 작품이 아니고,  과거의 기억을 연결할 수 없는 것처럼 에피소드가 뚝뚝 끊어집니다. 처음 아이들에게 읽어줄 땐 이해 잘 안되지? 재차 물으면서 상당히 미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죠. 이 책은 회상이라는 구조, 그리고 기억의 재생이 불연속적인 속성을 이해했다면 좀 더 읽기 쉬운 작품이었는데 말입니다.

아,  알스버그는 그림책이 예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 작가입니다. 그림책을 몇 년 동안 보다보니, 저 다름대로의 그림책을 보는 여러 기준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작가가 색을 많이 사용하느냐 적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눌 수가 있는데, 알스버그는 색을 적게 사용하는 작가군에 속합니다. 이쪽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가로는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는 제인 레이나 환한 갈색톤으로 배경을 깔아 자칫 색이 화사해 색을 많이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가브리엘 뱅상, 그리고 흑백의 귀재 알스버그가 있습니다. 알스버그가 얼마나 멋지게 흑백의 표현력이 대단한지는 작품의 한장면 한 장면을 꼼꼼히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전 이 작가의 이 작품 보고 감탄감탄 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겉표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림 자체는 구체적인데 전체적인 인상은 기괴한 추상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게다가 가까이 들여다 보면 이잎사귀 한장 한장의 묘사는 빛에 팔랑대는 것처럼 묘사력이 기 막힐 정도입니다. 흑백 두 가지 색으로 색이 넘쳐 흐르는 것 같은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무궁무진한 그림책의 표현력에 찬사를 안 보낼 수가 없었어요. 이 작품은 나중에 팀 버튼의 에드워드 가위손에 영향을 준 것 같은데, 아이러닉한 것은 알스버그는 흑백으로 저 정원을 표현했는데, 팀 버튼은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알록달록하게 에드워드 가위손을 표현해 놨다는 점일 것입니다. 아마 우리 나라 왠만한 미술전공자들도 이정도이 표현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부럽죠! 이런 사람들이 그림책 시장에 뛰어드는 미국의 현실이.

이 작품은 판화그림책입니다. 그렇게 알려진 작품은 아닌데, 이 그림책은 판타지와 과학이 어우러진 독특한 방식을 취한 작품이예요. 보통 그림책이 판타지와 지식 그림책 두 부류로 나눠지잖아요. 겨울 할머니의 경우는 거위털로 만든 이불을 한번 털때마다 눈이 내린다는 상상력에다 눈이 내릴 때 동물들이 추운 겨울은 어떻게 견뎌내는지하는 사실적인 정보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어요. 전 처음엔 그림이 맘에 들어 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독특한 구성에 맘에 끌리네요. 겨울이 오면 이 책을 아이들에게 꼭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할머니에게 "할머니, 눈 내려주세요"하고 말해봐. 그러면 눈 내려주실거야, 라고 말하는데, 작년까진 큰애한테는 먹혔는데..올해는 글쎄요. 이 책은 우리집에서 아이의 순진성을 잴 수 있는 척도의 그림책입니다. 딸애는 올해까지 이 이야기가 먹힐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 선정은 무지 힘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가 <꿀벌나무>의 폴라코와 <아틀란티스를 찾아서>의 콜린 톰슨이 있는데, 그 둘을 집어넣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결국 이 책을... 일본그림책은 아이들의 일상을 참, 정확하게 묘사하죠. 작가와 아이가 같이 나란히 걸어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전 이 작품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저 어린 시절이 떠올라 너무나 행복했던 작품입니다. 저 어린시절에 골목길에 살았는데, 그 땐 차가 없어 눈이 내리면  골목길 위에 그 하얀 눈이 골목길 끝까지 쌓여있어 아이들하고 같이 놀던 때가 있었거든요. 이 그림책이 그 때의 그 추억을 불러일으킨 거죠. 불쾌한 추억도 아니고 잠재된 어린 시절의 한 끝자락을 다 큰 어른인 지금 다시 떠올리니, 그림책을 읽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이 책은 제가 좋아서 아이들에게 무지 많이 읽어주는 책입니다. 추억이 얽켜있는 그림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지금 점점 커가는 내 아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요.

제가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 작품들이다 보니, 초기에는 이렇게 무난한 글과 그림의 작품들이 먼저 눈에 와 닿더라구요. 평이한 작품들이지만, 이 작품들을 통해 더 깊은 그림책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구요. 지금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관심이 많이 가는 모리스 센닥의 기괴하고 불유쾌한 작품들이 왜 그렇게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지 알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준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그림책하고 약간 멀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이 50,60이 들어서도 그림책에 대한 열망은 간직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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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아프를 읽은 독자라면 존 어빙을 떠 올릴때면 바로 위의 모습, 덩치빨 좋은, 핸섬까지는 아니더라고 그런대로 강직하게 생긴 존 어빙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던 그가 ---------------------------------->

 



올해 웬일인지 한국땅에서 연거푸 2루 안타를 등장한 모습은 바로 이렇습니다.전 존 어빙, 턱 깍았는 줄 알았어요. 나이들면 이렇게 갸름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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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NCIS(s6xe6) 보다가 알게된 동영상

O-zone의Numa Numa를 따라 부르는데, 표정과 동작이 귀엽네요.

이 동영상보고 아이들하고 따라해봤는데, 아이들 무척이나 신나해합니다.

저의 큰애와 작은애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애들인데.... 부끄러워하면서도 따라합니다.

아이들하고 같이 하면서, 팔 쭉쭉 뻗으세요^^

혼자놀기가 이 정도면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오른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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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네코, 호기심 많은 고양이

썩 괜찮은 일본 그림책을 접할 때 가장 답답한 것은 일본어를 몰라 작품의 제목과 작가 이름을 모를 때입니다. 이 그림책은 앙징 맞은 고양이 코마짱의 영화촬영 분투기를 그린 그림책인데, 스톱모션 애니매이션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그림책이 먼저인지 아니면 영화를 만들고 그림책을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저기 블로그 돌아다녀봐도 애니의 원전이 그림책이라고 하는 분들은 없었거든요. 애니의 감독은 Tsuneo Goda입니다. 그림책 옆에 작가 이름이 일어로 써 있어서 그림책작가가 고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림책은 너무나 진지하고 유쾌합니다. 유투브에 들어가면 이 코마네코 시리즈가 제법 올라와 있네요. 말이 많지 않아 아이들하고 관람해 볼 만 합니다. 참고로 전 이 책 교보에서 구입했어요. 단골서점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안되네요^^





서비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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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
아이리스 장 지음, 윤지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떠오른 <요코이야기>의 논란 기사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81023010504594&p=yonhap를 읽으면서 찹작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과연 이 <요코이야기>이란 소설에서 묘사한 폭력과 강간이 우리땅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패망 후 달아나는 일본인들에게 몇 십년동안 당했던 설움과 굴욕을 폭력과 강간으로 되갚지 않았다고 증언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없지만,  난 <요코이야기>의 작가가 한국땅을 떠나면서 겪었다고 주장한 폭력과 강간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아니 전시였기에 어쩌면 그런 일이 가능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역사 앞에서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균형감각이다. 자신들의 과거가 수치스럽고  치욕스럽다고 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감정적으로 억지 논리를 펴는 것은 강간당한 역사앞에서 우리가  할 짓이 아니다.  <요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러한 증언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 진실 여부를 가렸어야 했고 만약 그러한 일들이 사실이었다면, 사죄하고 그런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세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요코이야기>가 미국의 추천도서가 되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코이야기>가 추천도서목록에 뽑혔다면, 그 책과 나란히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 책 또한 추천목록에 뽑힐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했어야 했다. 세계대전의 가해국이 원폭으로 인해 피해국으로 둔갑한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의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기록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일 것이다.

<요코이야기>에서 묘사한 폭력과 강간이 우리 땅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의 은폐이며, 일본 우익이 자신들은 세계2차 대전중에 결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우리의 그런 不認은 일본우익의 진실 은폐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지사지로 <요코이야기>같이 일본인한테 당한 이야기를 써서 세계적인 작품이 나와 미국교과서 추천목록으로 선정되었다면, 일본 또한 역사의 왜곡이요 허구라고 쌩 난리를 칠 것이 뻔한 거 아닌가. 너희도 <요코이야기>가 역사의 진실을 덮고 날조라며 추천목록 저지를 위해 총력을 다했는데, 우리 또한 그러지 말란 법있냐고 항변하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변명을 해야한단 말인가.  역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덮여있는 역사를 걷어내고 용기있게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역사 앞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강간당한 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 일본의 만행을 세계적으로 환기시킨 아이리스 장을 본보기로 삼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아이리스 장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한테 들은 난징대학살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신념과 열정을 바쳐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라는 작품을 쓰고 그 작품으로 목숨까지 잃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이리스 장은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태어나 일리노이 주 샴페인- 어바나에서 자랐다.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난징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들으면서 자랐다. 그녀는 이 거대한 범죄가 잊혀진 역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The rape of Nanking>을 썼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수도인 난징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폭로한 이 책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장은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다큐멘터리 작가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난징 희생자들을 위해 싸우는 행동주의자이자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된다. 이 책은 1937년 난징에서 일어난 대학살과 만행의 참상을 생생히 되살려, 영어로 씌여진 난징대학살에 대한 훌륭한 첫번재 보고서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일본학자들과 일본의 우익세력은 아이리스 장의 책은 사실 왜곡과 날조라고 반박하며 아이리스 장에게 전화와 메일, 시위 등의 방법으로 협박하였고 일본에서 한 출판사가 번역 출판하려고 하자 대규모 규탄 집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시체가 캘리포니아 외곽 로스 산또스 고속도로에서 발견되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부터 일본 우익 단체의 집요한 협박으로 그녀는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그로인해 인해 그녀 나이 36살, 2004년에 총을 쏴 자살한다.

이 책은 난징에 남아 있는 수십만 개의 주인 모를 무덤에 바치는 묘비명(316p)이다. 난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한 이 책은,  사진기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들과 기사와 살아 남은 자의 증언과 그 곳에서 중국인들을 일본군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외국체류자들의 일기와 편지등을 토대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수된 중국군 포로들의 머리가 나란히 있는 사진, 포로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 입술 사이로 담배꽁초가 물려진 중국군의 목이 철조망에 올려져 있는 사진, 의자에 묶여 반복적으로 강간당한 소녀의 사진, 강간당하고 수족을 절단 당한 사진등과 그것도 모자라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타메시 소위의 100인 목 베기 시합등 너무나 끔찍하고 잠혹한 사진과 기사 그리고 체류 외국인이 쓴 글은 역사적 진실을 한 치의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일본군의 난징침략으로 죽은 사람은 영국군의 드레스덴 공습과 이에 뒤이은 화재폭풍으로 인한 사상자 수 (당시에는 22만 5천명의 사상자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최근에사망 6만명, 부상 3만명이라는 좀 더 객관적인 수치가 제시 되고 있다) 보다 많았다고 한다. 사실 난징대학살로 죽은 희생자 수는 최소 26만명에서 최대 35만명으로 추산되며, 죽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하여 일본군은 구덩이를 파 시체를 쌓아놓거나 불에 태우거나 아무데나 버려 곳곳이 시체들로 가득 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불행한 역사적 사실과 직면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책은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아이리스 장이 목숨과 바꾼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는 이 사실기록의 책은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타국의 기록이다. 우리는 일제점령기의 핍박받은 기록도 허구의 소설도 제대로 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작품 운운은 말해 무엇하리오.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알려야 하고 그들의 역사 왜곡과 날조를 강력하게 규탄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역사 앞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정정당당히 맞서야하지 않을까.  언젠가 우리도 우리만의 <요코이야기> 같은 작품과 맞짱 뜰 수 있는 작품이 나온다면 아이리스 장, 중국이름 장춘루(張純如)가 이루어 낸 업적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것이다.

덧붙여 :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과 날조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잘못이 크다는거 안다. 반성조차 하지 않은,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요코이야기>같은 책이 나온 것이 어쩌면 그들의 뻔뻔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전적 소설인 <요코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도 잘못한 것을 인정해야, 역사 왜곡과 날조를 밥 먹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을 비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처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가 과연 그네들의 역사왜곡을 비난할 수 있을까나. 차라리 난 6~8학년 교과추천목록에 <요코이야기>가 들어가야 한다면,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서 이런 난징대학살같은 작품도 집어 넣어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균형의 상실이야 말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적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난 일본소설 많이 읽지만 일본작가들의 은연중에 드러나는 애국관이나 국가관 비웃으면서 읽는다.

마지막으로 아이리스 장의 명복을 기원한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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