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언어들 - 세포에서 우주까지, 안주현의 생명과학 이야기
안주현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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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학은 결국 생명으로 이어진다!"


띠지 속 문구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과학이라는 언어로 생명을 읽어내고 있다. 초파리의 신경계 발생을 연구해 온 생명과학자이자 현재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안주현 저자가 교실과 유튜브 현장에서 갈고 닦은 생활 밀착형인 40편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담아내었다.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이라는 전통적 교과의 경계를 허물고 '생명'이라는 관점을 중심축으로 삼아 통합적인 서술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40편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를 골라 읽을 수도 있고, 각각의 주제가 유기적으로 생명이라는 중심 개념에 연결되어 있어 통합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자외선으로 인한 돌연변이에서 공룡의 멸종, 안 아픈 주사와 시드볼트(종자 저장고)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소재들이 해시태그와 함께 정리되어 있어 과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적 사실을 단순히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으로 이어나갈지를 스스로 성찰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투구계의 푸른 피를 통해 생명윤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혈압계 하나로 순환계의 과학을 자연스럽게 풀어냄으로써 교양서 이상의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안 아픈 주사’를 향한 과학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주사에 대한 두려움, 그 작고 날카로운 바늘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과학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저자는 주사기를 둘러싼 역사와 기술의 발전 그리고 고통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과학이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를 설득력 있게 담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약품 전달 수단이었던 주사기는 반복 사용으로 인한 감염 위험을 막기 위한 일회용 제품의 등장, 약물 투입량을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유리 주사기의 개발 등을 거쳐 진화해왔다. 하지만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두려움’이다. 통증에 대한 공포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백신 접종을 기피하게 만들며 예방의학의 실효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이 책은 이 문제를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닌 과학의 과제로 바라보고 있다. 바늘 없이 고압 분사로 약물을 체내에 침투시키는 ‘제트 인젝터’부터 통증 없이 약물을 반복 주입할 수 있는 ‘레이저 제트 주사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바늘을 피부에 접촉시키는 ‘마이크로니들’까지 다양한 기술들이 어떻게 인간의 불안을 줄이고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특히 마이크로니들은 피부의 표피층까지만 침투해 면역세포에 직접 약물을 전달할 수 있어 통증은 줄이면서 백신의 효과는 유지하는 방식으로 진화 중이다. 이처럼 고통 없이 백신을 접종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시도는 과학이 단순한 지식 축적을 넘어 인간 중심의 문제 해결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책은 과학을 지식의 영역이 아닌 삶과 감정이 깃든 현실 속 이야기로 끌어와 우리에게 ‘왜 과학이 중요하며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진다. 그 덕분에 주사기 하나조차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시드볼트’, 즉 종자금고에 관한 내용이다. 식물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존재다. 식량, 의약품, 생활 자원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기반으로서 인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기후 변화, 생태계 파괴, 전쟁, 질병 등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대재앙이 닥친다면 현재의 식물 자원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위기에 대비해 세계 곳곳에서 식물 종자를 장기 보존하고 있는 시설, 특히 시드볼트의 존재를 소개한다. 일반적인 종자은행이 농업이나 연구를 위해 비교적 짧은 기간 종자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시설이라면 시드볼트는 인류 문명이 붕괴된 이후를 상정한 ‘지구 최후의 날’ 대비책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저장된 종자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절대로 외부로 반출되지 않으며 인류가 멸종 위기에서 살아남을 경우 다시 식물을 재건하는 마지막 희망이 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했던 장소 인근에 위치한 이 시설은 해발 600m 지점에서 지하 46m까지 파고들어 강화 콘크리트와 내진 설계로 설계된 철통 보안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2025년 기준으로 6,000종이 넘는 식물 종자 28만 점 이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시드볼트는 일정한 온도(영하 20℃)와 습도(40% 이하)를 유지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종자의 생명력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저장소의 구조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종자의 생물학적 특성과 휴면 능력, 그리고 역사적으로 700년 된 연꽃 씨앗이 발아에 성공한 사례 등을 통해 종자가 얼마나 강인한 생명의 형태인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종자를 보관하고 있어도 그것이 자라날 ‘환경’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사실 또한 일깨워준다. 결국 시드볼트는 ‘종자의 저장’이라는 기술을 넘어 우리가 지켜야 할 지구 생태계의 경고이자 약속인 셈이다.


결국 이 책은 과학을 배워야 할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의 분류에 의해 단편적으로 흩어졌던 개념들을 하나의 생명의 이야기로 엮어서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는 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교과서나 책 속 지식이 아니라 물방울과 거미줄, 소리와 색, 씨앗과 주사와 같이 일상 속 평범한 사물에서 시작되는 점 역시 이 책의 특색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저자가 과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의 삶과 분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험실의 언어는 교실에서 수업이 되고 다시 대중과의 대화로 확장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그야말로 '생명의 언어들'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 줌으로써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계속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또다른 읽기를 지속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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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질러, 운동장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 리커버) 창비아동문고 279
진형민 지음, 이한솔 그림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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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했던 <소리 질러, 운동장>의 10주년 리커버로 출간되어 다시 읽게 되었다. 워낙에 야구를 좋아해서 주말마다 운동장서 야구를 했던 아이들이었던지라 이 책의 이야기에 폭 빠져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었던 이 책이 출간 10주년을 맞아 리커버 특별판으로 다시 나왔다니 어찌나 반갑던지. 아이들도 나도 반가움과 추억에 빠져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은 야구라는 소재를 통해 아이들의 성장과 우정, 그리고 세상의 벽에 맞서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야구부에서 쫓겨난 김동해와 여자라는 이유로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한 공희주가 만든 '막야구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운동장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장소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도니다. 그리고 운동장을 둘러싼 갈등과 화해, 학교와 사회의 규칙에 대한 질문, 그리고 함께하는 힘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감동과 오랜 울림을 가져다준다. 번듯한 장비가 없어도 충분히 즐겁고 유쾌하며 단단해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아마 오랫동안 마음에 남지 않을까.


이 책은 야구를 진짜로 좋아하는 김동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야구부에 들어가 매일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던 동해는 경기에서 번번이 아웃되면서도 야구를 향한 열정을 잃지 않는 아이다. 그러던 중 열린 지역 예선 경기에서 모두가 세이프라고 외치는 상황에서 동해는 자신의 팀이 아웃당한 장면을 솔직하게 증언하다. 그 정직한 동해의 한마디로 팀은 패배하고 감독님에게 동해는 야구부를 그만 나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왜 우리 편을 안드냐는 비난에도 끝까지 스포츠 정신과 양심을 지키는 아이가 바로 동해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해주의 이야기. 공해주는 어릴 때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던 야구를 사랑하는 아이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야구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 야구부는 공해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실력보다는 성별로 판단하는 벽 앞에서도 희주는 운동장에서 혼자 공을 던지고 차며 자신의 꿈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희주의 아빠는 수학학원 원장이다. 엄마의 권유로 아빠의 학원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희주는 수학보다는 야구에 마음이 더 끌린다. 희주의 아빠는 딸의 성적이 오르지 않아 걱정을 하면서도 학원 운영에 피해를 줄까 두려워 해주에게 학원에 나오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야구를 너무 좋아하지만 소외되어진 두 아이, 김동해와 공해주는 운동장에서 만나 번듯한 장비나 유니폼도 없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막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멋진 글러브도, 든든한 방망이도, 반짝이는 유니폼도 없지만 막야구부 아이들은 야구 모자 하나에 맨주먹으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야구를 즐겼다. 야구부처럼 시원한 타구를 날리거나 능숙하게 공을 잡아내지 못해도 기죽거나 창피해하지 않고 마음껏 웃고 야구 그 자체를 즐겼다고 할까. 모든 게 다 갖추어지지 않고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지만 야구에 몰입하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들은 절로 웃음이 났다. 바로 이런 게 운동장이, 그리고 야구가 아이들에게 주는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야구를 즐기던 막야구부 아이이들은 뜻밖의 장애물에 마주하게 된다. 방과 후 운동장을 차지하는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야구부 감독의 견제 때문이다. 감독은 학교 대표 야구부를 위해 막야구부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쫓아내려고 하는데.. 과연 막야구부 아이들은 운동장을 지켜낼 수 있을까?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아이들만의 기발한 방법에 아마 누구라도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고 자신을 키워가는 모습에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서 운동장은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 평등 그리고 연대와 용기와 같이 살면서 꼭 알아야 할 가치들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하는 장소가 된다. 김동해와 공희주, 그리고 막야구부 아이들은 그 소중한 운동장에서 부당한 현실에 맞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그 모습들이 주는 울림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깊이 퍼진다. 책은 '우리가 배워야 할 거의 모든 것은 운동장에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함께 뛰고 부딪히고 서로 웃고 즐기며 자라야 함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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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 모집! 상상 사무국
브래드 몬태규 지음, 크리스티 몬태규 그림, 김지은 옮김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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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도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책이다. <요원 모집! 상상 사무국>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상상의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어떤 기발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지 기대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은 마음 속에 숨겨둔 상상을 꺼내 세상과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상상 사무국'이라는 독창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하여 '뚝딱 공방', '꿈의 부서', '이야기 동굴'과 같은 공간들이 등장하여 어린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상상을 단순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험하고 개발하며 구체화 함으로써 아이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북돋을 수 있을 듯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상상 사무국에서 온 비밀스러운 편지 한장은 이 이야기에 단숨에 빠져들게 만든다. 미래의 특수 용원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마치 실제로 비밀 임무를 부여 받은 듯한 기분을 들게 하며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상상 사무국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게 한다. 유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어조, 그리고 마지막에 남긴 농담섞인 경고는 이 책에서 펼쳐질 이야기들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편지는 독자가 단순히 구경꾼이 아니라 직접 상상하고 행동하는 '상상 요원'이 되기를 바라는 초대장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라면 이 한 장의 편지만으로도 충분히 요원으로 합류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독자는 상상 사무국의 공식요원이 되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중앙 본부의 겉모습은 특급 기밀 사항이라 인간은 볼 수 없다는 설정은 이야기의 몰입감을 한층 더 높인다. 오직 상상하는 이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세계라는 설정은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독자가 이 책이 이끄는 상상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인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그리고 책은 상상 사무국에서 일하는 여러 상상 요원 중 스파키를 소개한다. 이 책의 주인공 스파키는 상상 사무국의 편지를 전달하는 배송 요원이다. 세상의 모든 상상인 반짝이는 아이디어에서 소소한 고민까지 상상 사무국으로 모이고 스파키의 손을 거쳐 각 부서로 전달된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스파키는 배송 일이 없을 때면 혼자 시를 쓰며 상상의 세계에 빠지지만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건 늘 두려운 일이다.


그러던 중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이야기들이 쌓인 '꼭꼭 숨어라 이야기 동굴'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스파키는 용기를 내어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과연 스파키는 무너질 위기에 처한 이야기 동굴을 구해낼 수 있을까? 스파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스파키가 인간 요원들에게 전하는 편지이다. 그 편지는 오랜 시간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상상르 꺼내 세상과 나누는 용기를 낸 스파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글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는 위기의 순간에 편지를 써 자신의 상상과 감정을 밖으로 내보인다. 그렇기에 이 편지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상상과 표현, 행동의 첫 걸음이자 두려움을 넘는 용기로 보이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특히 '우리 모두 용감하게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요'라는 문장은 상상이 혼자만의 마음 속에 간직했을 때보다 누군가와 나눌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큰 응원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망설임이 많은 아이들의 작아진 마음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상상하고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준다. 스파키는 두려움을 무릎쓰고 용기를 내어 쓴 자신의 글로 상상 사무국을 지켜내고 마침내 진심을 담은 편지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성정의 서사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용기 있게 표현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정교하게 설정된 세계관과 독자가 직접 상상 요원이 되어 참여하게 만드는 구조에 있다. 책 곳곳에 배치된 아기자기한 그림과 이야기들은 어린이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상상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어 이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상상하는 힘, 말로 꺼내는 용기와 그것을 나눌 때 생기는 기적 같은 변화에 대해 유쾌하고 따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상상은 혼자 할 때 보다 함께 나눌 때 더욱 풍성하고 힘을 지니게 된다는 이야기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용기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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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효율의 사랑 - 소란한 세상에서 조용히 귀 기울이기
최다은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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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세상에서 조용히 귀 기울이기'라는 소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우리는 살면서 말하기, 읽기, 쓰기에는 꾸준히 집중하면서 발전시켜왔지만 듣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하며 살아왔다. 일상에서도 교육에서도 '잘 듣는 법'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듣기는 어느새 가장 소홀한 감각이 되었고,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 무관심 속에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듣기'에 집중한다. 저자인 최다은 PD는 라디오와 팟캐스트라는 소리를 매개로 한 매체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며 듣는 사람으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듣기의 본질과 가치를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듣는 행위를 단순히 수용의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듣는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타인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동적인 행위이며 그것이 곧 관계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맨 처음 실린 〈듣다 보면 괜찮아져〉에서 저자는 '듣기'라는 행위가 단순히 정보를 수용하는 감각이 아니라, 무력하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유일하게 작동 가능한 내면의 능력이자 위안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 감염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태에 놓인 저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듣는 것'만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순간에도 듣기는 그 어떤 장비도 도구도 없이 작동하며 오히려 그 절대적인 수동성과 정적 속에서 더 깊은 감각을 일깨운다. 이 경험은 저자에게 듣기의 본질을 다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피아노를 배우던 유년기부터 음악을 전공하던 시절, 그리고 라디오 PD로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까지, 자신의 삶은 줄곧 ‘듣는 일’과 함께해왔음을 깨닫는다. 단순히 많이 듣는 것이 아니라, 다시 듣고, 나누어 듣고, 천천히 음미하는 것. 저자는 이러한 듣기의 다층적인 차원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명확히 깨닫게 된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듣기가 단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감각이며, 타인과의 연결, 자기 회복, 의미 있는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튜브 영상을 2배속으로 소비하는 것이 효율로 여겨지는 시대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귀를 기울이는 일은 어쩌면 낡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그 느린 속도와 비효율 속에서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타인의 감정과 취향, 말의 뉘앙스까지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에 켜켜이 쌓인 결들을 시간 들여 하나하나 살핀다. 효율을 앞세워 빠르게 판단하기 보다는, 상대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들을 존중하며 듣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저자는 음악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같은 원칙을 고수한다.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 배경 지식이나 전공 여부는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어떤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가이다. 단순한 정보보다 청자의 감각과 해석이 더 우선된다는 생각은 그의 음악 소개 방식에도 드러난다. 음악가의 이력이나 발매 연도 같은 사실들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감상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예술을 향유하는 데 있어 부담을 줄여준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반드시 사전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집중해서 듣고 보는 태도라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음악으로의 진입에 문턱을 낮춰준다고 할까. 그리고 오히려 지식의 강박이 감상의 기쁨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저자의 ‘알면 좋지만 몰라도 괜찮다’는 태도는 그렇기에 많은 공감과 위안이 된다.


음대를 졸업하고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뒤 라디오 PD로 입사해 인기 팟캐스트까지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저자의 이력은 겉보기에 단단하고 일관된 커리어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한 몇 줄의 성과 이면에 숨어 있는 수많은 실패와 우회, 반복된 좌절의 순간들을 고백한다. 음악을 처음 꿈꿨을 때의 부모님의 반대,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음대 입시 준비 과정, 어린 시절의 열등감, 음악가라는 꿈을 접고 언론 고시로 방향을 틀며 겪었던 불확실성과 불안까지. 그의 삶은 계획된 직선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곡선의 연속이었다. 그 자체로 이력서에선 지워지는 비효율의 기록이 하겠다.


그리고 가장 큰 위기는 귀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에게 역설적으로 청각에서 찾아왔다. 바로 이명(耳鳴). 이전까지 어떤 문제든 더 노력하고 더 준비하는 방식으로 돌파해왔던 저자에게 이명은 통제와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처음이자 낯선 경험이었다. 이 소리를 지우려 했던 모든 시도는 오히려 그 소리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고, 결국 저자는 이명과 ‘싸우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로 방향을 바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과거에는 차단하려 했던 냉장고 모터 소리, 초침 소리, 거리의 소음들이 이제는 오히려 마음을 진정시키는 저자와 ’주파수가 맞는' 소리가 된다. 냉장고 옆에서 자는 것이 더 편하다는 그의 고백은 그렇기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더 이상 없는 소리를 상상하며 고통받기보다는 지금 있는 소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렇게 저자는 ‘다시 듣는 삶’으로 회귀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난 삶에서 ‘비효율적’이라 여겨졌던 선택들이 오히려 자신을 회복시키고, 음악을 계속 사랑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였음을 받아들인다.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그 길이 아니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감각과 관계, 그리고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듣기는 본질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행위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던져 파악할 수 있는 ‘보기’와 달리, ‘듣기’는 반드시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찰나에 모든 것을 알아채는 ‘한눈’은 가능할지 몰라도, ‘한귀’에 모든 걸 듣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 음악의 한 소절, 또는 사연의 첫 문장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다. 바로 그 점에서 저자는 ‘듣는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며,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바로 이처럼 효율성과 속도를 강조하는 시대이지만 오히려 비효율이야말로 관계를 지속시키는 핵심적인 감각임을 말한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말의 맥락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일상의 소음을 차단하는 대신 받아들이는 일. 이런 ‘비효율적인 선택’들이 쌓여 결국 더 깊은 공감과 진정한 연결을 만들어낸다. 저자의 오랜 방송 경력과 삶의 경험이 녹아든 이 책은 듣는다는 단순한 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로 하려금 성과와 효율의 언어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 속에서 관계의 깊이와 감정의 온도는 오히려 느리고 손이 많이 가는 ‘비효율’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과 듣기라는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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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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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 작가의 신작이라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저자가 3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으로 다시 한번 김주혜 작가만의 매혹적인 이야기 세계에 폭 빠져들게 만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의 세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무용수의 삶은 단순한 성공의 서사를 넘어 예술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으며 깊은 울림을 가져다 준다. 가난과 결핍을 딛고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된 주인공의 삶의 여정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 빛의 이면에 함께 따르는 짙은 그림자들은 깊은 공감을 사며 그녀의 이야기 자체에 매료되게 만든다.


이 책은 무대에서 모든 걸 잃고 떠났던 발레리나가 2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그녀는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도착 직후부터 이미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인물, 드미트리와의 재회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래 묻혀 있던 갈등의 시작점처럼 보인다. 나탈리아는 그를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적처럼 여기는데, 도대체 이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책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먼저 떠나는 삶을 선택해 온 나탈리아가 결국 다시 돌아와 과거를 직면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라는 도시들을 배경으로 발레 세계의 냉혹한 현실, 예술가로서의 욕망, 인간관계의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추락한 후 마린스키의 ‘지젤’ 무대 제안을 받게 된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무언가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나탈리아의 이야기가 점점 궁금해지고, 서막부터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책은 현재의 나탈리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며 시작되지만, 이야기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데, 1장은 나탈리아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다룬다. 아무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탈리아는 외롭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발레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순간 역시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 외로운 시작이었다. 바가노바 발레학교의 오디션을 앞두고 그녀의 엄마는 현실의 벽과 발레계의 냉혹함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말렸지만, 결국 나탈리아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오디션 현장에서 나탈리아는 이미 수년간 훈련을 받아온 다른 아이들 틈에 섞여 위축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도 놀랄 만큼의 점프와 기량을 보여주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심사위원조차 ‘발 모양이 안 좋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디션을 통과한다. 500명의 지원자 중 최종 합격자는 단 두 명, 그 중 한 명이 바로 나탈리아였다. 이 책은 이렇게 단단한 현실을 배경으로 치열한 예술의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나탈리아와 과거의 나탈리아가 교차되며 드러나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프면서도 계속해서 궁금증을 자극하여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며 그녀의 선택과 여정을 자꾸만 응원하게 된다.


이 책에는 문장이 너무 좋고 공감되어 자꾸만 멈추게 되는 장면이 곳곳에 존재하는 게 큰 매력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 역시 그러하다. 나탈리아는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함께 웃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몇 달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이별 뒤에는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몇몇 사람들은 머리와 가슴 깊은 곳에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존재로 평생 떠나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마음의 한 부분처럼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종종 떠올리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이제는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기억이자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어쩜 그 감정들을 이리도 잘 표현하고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듯 김주혜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단한 이야기 구성과 매력적인 인물의 설정 뿐만 아니라 문장에 있다고 본다. 단순히 서사를 전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섬세한 감정묘사와 통찰이 차곡차곡 쌓인 문장들이 오래 마음에 남게 되는 것이다. 공감되거나 되새기고 싶은 표현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으니 이야기의 길이나 복잡성과 무관하게 우리는 문장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난 후 나탈리아 레오노바가 바가노바 발레학교 오디션에 합격한 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하며 결국 세계적인 발레단에 입단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를 아주 촘촘하게 담고 있다. 무대에 모든 것을 바친 그는 프리마 발레리나로 정점에 오르지만 한순간의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 꿈을 키우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는 상처를 직면하고 재기를 위한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리허설실에서의 긴장감, 동료 예술가들과의 충돌과 연대, 과거의 관계들 속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 사이에서 깊은 내적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게 이 책의 이야기는 단순한 복귀 여정을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탈리아는 다시 무대 위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답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확인해보기를 추천해본다.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와 냉담한 어머니의 시선 속에서 자란 나탈리아는 일찍이 삶은 사랑이나 행복이 아닌 불안과 슬픔, 상실로 채워진 것임을 깨달았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떠나는 삶을 선택해온 그녀에게 절박함은 곧 생존의 방식이었다. 책 속에서 나탈리아가 새로운 안정과 풍요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 오히려 불안이 싹트는 장면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붓을 드는 화가는 없다는 인식 아래, 그녀는 예술의 진정한 원동력이 고통과 긴장 속에 있다고 믿는다. “절박함은 내 평생의 항상성이었다”는 고백처럼 나탈리아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도 자신의 전부를 예술에 내던지며 버텨왔다.


그리고 소설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새는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절박함과 귀환, 생존의 본능을 나타낸다. 주인공은 정점에서 추락했음에도 다시 무대를 향해 날아오른다.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새도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문장처럼, 나탈리아는 결국 예술이 시작된 바로 그 도시, 그 무대로 되돌아온다. 그곳이 고통의 장소인 동시에, 유일하게 자신을 온전히 증명할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상과 현실, 예술과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려는 한 인간의 고구분투를 정밀하게 따라가고 있다. 간절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감내해야 했던 삶, 창작이라는 긴장 상태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발레리나의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에게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을 묻는다. 예술가의 고통과 구원, 인간의 존엄과 연민 그리고 삶에서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발레리나의 무대 복귀 이야기를 넘어 위기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끝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이 책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김주혜 작가의 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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