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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김주혜 작가의 신작이라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저자가 3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으로 다시 한번 김주혜 작가만의 매혹적인 이야기 세계에 폭 빠져들게 만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의 세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무용수의 삶은 단순한 성공의 서사를 넘어 예술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으며 깊은 울림을 가져다 준다. 가난과 결핍을 딛고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된 주인공의 삶의 여정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 빛의 이면에 함께 따르는 짙은 그림자들은 깊은 공감을 사며 그녀의 이야기 자체에 매료되게 만든다.
이 책은 무대에서 모든 걸 잃고 떠났던 발레리나가 2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그녀는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도착 직후부터 이미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인물, 드미트리와의 재회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래 묻혀 있던 갈등의 시작점처럼 보인다. 나탈리아는 그를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적처럼 여기는데, 도대체 이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책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먼저 떠나는 삶을 선택해 온 나탈리아가 결국 다시 돌아와 과거를 직면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라는 도시들을 배경으로 발레 세계의 냉혹한 현실, 예술가로서의 욕망, 인간관계의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추락한 후 마린스키의 ‘지젤’ 무대 제안을 받게 된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무언가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나탈리아의 이야기가 점점 궁금해지고, 서막부터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책은 현재의 나탈리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며 시작되지만, 이야기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데, 1장은 나탈리아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다룬다. 아무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탈리아는 외롭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발레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순간 역시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 외로운 시작이었다. 바가노바 발레학교의 오디션을 앞두고 그녀의 엄마는 현실의 벽과 발레계의 냉혹함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말렸지만, 결국 나탈리아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오디션 현장에서 나탈리아는 이미 수년간 훈련을 받아온 다른 아이들 틈에 섞여 위축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도 놀랄 만큼의 점프와 기량을 보여주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심사위원조차 ‘발 모양이 안 좋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디션을 통과한다. 500명의 지원자 중 최종 합격자는 단 두 명, 그 중 한 명이 바로 나탈리아였다. 이 책은 이렇게 단단한 현실을 배경으로 치열한 예술의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나탈리아와 과거의 나탈리아가 교차되며 드러나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프면서도 계속해서 궁금증을 자극하여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며 그녀의 선택과 여정을 자꾸만 응원하게 된다.
이 책에는 문장이 너무 좋고 공감되어 자꾸만 멈추게 되는 장면이 곳곳에 존재하는 게 큰 매력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 역시 그러하다. 나탈리아는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함께 웃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몇 달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이별 뒤에는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몇몇 사람들은 머리와 가슴 깊은 곳에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존재로 평생 떠나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마음의 한 부분처럼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종종 떠올리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이제는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기억이자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어쩜 그 감정들을 이리도 잘 표현하고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듯 김주혜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단한 이야기 구성과 매력적인 인물의 설정 뿐만 아니라 문장에 있다고 본다. 단순히 서사를 전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섬세한 감정묘사와 통찰이 차곡차곡 쌓인 문장들이 오래 마음에 남게 되는 것이다. 공감되거나 되새기고 싶은 표현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으니 이야기의 길이나 복잡성과 무관하게 우리는 문장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난 후 나탈리아 레오노바가 바가노바 발레학교 오디션에 합격한 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하며 결국 세계적인 발레단에 입단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를 아주 촘촘하게 담고 있다. 무대에 모든 것을 바친 그는 프리마 발레리나로 정점에 오르지만 한순간의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 꿈을 키우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는 상처를 직면하고 재기를 위한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리허설실에서의 긴장감, 동료 예술가들과의 충돌과 연대, 과거의 관계들 속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 사이에서 깊은 내적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게 이 책의 이야기는 단순한 복귀 여정을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탈리아는 다시 무대 위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답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확인해보기를 추천해본다.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와 냉담한 어머니의 시선 속에서 자란 나탈리아는 일찍이 삶은 사랑이나 행복이 아닌 불안과 슬픔, 상실로 채워진 것임을 깨달았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떠나는 삶을 선택해온 그녀에게 절박함은 곧 생존의 방식이었다. 책 속에서 나탈리아가 새로운 안정과 풍요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 오히려 불안이 싹트는 장면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붓을 드는 화가는 없다는 인식 아래, 그녀는 예술의 진정한 원동력이 고통과 긴장 속에 있다고 믿는다. “절박함은 내 평생의 항상성이었다”는 고백처럼 나탈리아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도 자신의 전부를 예술에 내던지며 버텨왔다.
그리고 소설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새는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절박함과 귀환, 생존의 본능을 나타낸다. 주인공은 정점에서 추락했음에도 다시 무대를 향해 날아오른다.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새도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문장처럼, 나탈리아는 결국 예술이 시작된 바로 그 도시, 그 무대로 되돌아온다. 그곳이 고통의 장소인 동시에, 유일하게 자신을 온전히 증명할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상과 현실, 예술과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려는 한 인간의 고구분투를 정밀하게 따라가고 있다. 간절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감내해야 했던 삶, 창작이라는 긴장 상태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발레리나의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에게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을 묻는다. 예술가의 고통과 구원, 인간의 존엄과 연민 그리고 삶에서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발레리나의 무대 복귀 이야기를 넘어 위기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끝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이 책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김주혜 작가의 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