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
토마스 바셰크 지음, 이재영 옮김 / 열림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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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무거운 같은 느낌이 먼저 든다. 아마 노동자라고 하면 모든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육체노동자가 먼저 떠오르는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동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친구한테 이메일을 쓰는 경우라도 단순히 안부를 묻는 내용일 수도, 혹은 무언가 업무적으로 부탁하는 내용일 수도 있는데, 내용에 따라 어떤 것은 분명 노동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기에 이를 구별하는 일은 상당히 난해하다.

 

노동에 대한 선입견은 저자의 말처럼 성경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담의 원죄 이후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리신 벌이 바로 노동이었으니까 말이다. 혹은 철학자들의 사례처럼 어떤 신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노동을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노동에 대한 가치를 상당히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노동은 정말로 낮은 평가를 받아야 대상인가? 행복한 삶을 위해서 노동은 가능한 최대로 줄어야만 하는가?

 

책은 저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일과 삶의 균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좋은 노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노동과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노동이 바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은퇴한 갑작스럽게 나이가 드는 분들을 종종 발견한다. 이는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사람의 가운데에서 얼마나 불행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노동이 주는 사회적 관계 형성, 신뢰, 인정 등을 차지하더라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노동이라는 사실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워커홀릭이라고 불릴만한 일중독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일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말이다. 노동은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노동이 갖는 이점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면 그런 노동은 좋은 삶으로 이어진다. 책에서는 마지막에 다양한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실어서 좋은 노동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다양한 사상과 철학자들을 불러들여 저자의 주장을 설명해 나가는 방식이라 조금은 어려운 면도 있지만 노동에 대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생각을 번쯤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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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22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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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60년이라는 집필 기간만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간 동안 똘스또이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편 소설을 제외하고 .단편 소설만 50 편을 썼단다. 짧은 에세이나 논문 하나 쓰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뭐라고 표현하기조차 힘들다.

 

책에는 똘스또이의 중단편 소설 13편을 선정해서 모아놓았다. 시기별로 똘스또이의 사상과 생각을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13 중에는 예전에 이미 읽어본 소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소설이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품이었다. 13 모두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 다가왔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왔던 작품은 전쟁의 모습을 그린 초기 작품보다 종교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사랑을 강조한 후기 작품들로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작품 모두 주제를 마디로 정의하라면 아마 사랑이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기에 예전에 이미 읽었었지만 이번에 다시 읽을 때에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 <가난한 사람들> 이번에 처음 읽은 소설이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작품들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악쇼노프처럼 내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삶도 힘든데 어미가 죽은 이웃집 아이들을 선뜻 데려온 잔나와 같은 사랑이 있는가?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당연한 사랑을 제외한다면 사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대가 각박하다고 말을 하지만 그런 시대를 만드는 바로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전쟁의 모습을 그린 <세바스또뽈 이야기> 상당한 눈길을 끌었다. 특히 안내인과 함께 병실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기법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또한 말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홀스또메르> 낯설게 하기 기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책의 가진 가장 장점은 똘스또이의 작품 세계를 시대별로 있다는 점이다. 물론 똘스또이라는 대문호를 하나만으로 전부다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 죽음, 사랑, 종교 똘스또이의 사상과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흐름의 밑그림이라도 그리고자 하는 이라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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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형님들의 진짜 운동 - 20대 체력이 그립지 않냐고? 나는 지금이 최고다!
최영민 지음 / 한문화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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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몸보다 사이즈가 작으면 몸에 끼고 몸보다 사이즈가 크면 맵시가 나지 않는다. 운동도 역시 그렇다. 몸에 맞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약이 되기보다는 독이 되기 쉽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렇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몸을 알아야 한다.

 

불혹이라는 40.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주위의 끝없는 충고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몸무게가 점점 늘어났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상당한 몸집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막상 운동을 시작하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도 대고, 내일부터 해야지 하면서 입으로만 운동을 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책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저자는 40대라고 해서 늦은 것이 아니라는, 아니 이제부터 시작하면 20-30 때와 비슷한 체력과 몸을 만들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운동은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헬스장을 번이라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보았을 만한 운동이다. 스콰트, 데드리프트, 케틀벨. 이렇게 3가지 종류만 설명한다. 오로지 가지 운동법만 소개했다는 것은 그만큼 운동의 효과가 좋다는 의미이다. 운동법에 더해 운동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몸으로 하는 운동법도 소개한다. 이는 최소한의 공간만 있어도 우리 몸을 강하고 유연하게 만들어줄 운동법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달리는 주법 소개에서 저자가 추천한 가지 주법을 사진과 함께 조금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운동과 함께 병행할 식단도 간략하게나마 덧붙여 놓았다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좋은 운동법이라도 실제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제는 시간을 핑계로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40대는 강한 남자가 되기에 충분한 나이이다. 저자는 강한 육체와 유연한 사고를 위해 운동하라고 말한다. 이제 운동을 시작하다.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말이다. 인생의 남은 절반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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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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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

나른함이 몸에 흘러내리는 시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방해 없이 자신만의 평온함을 누리고 싶어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 은퇴한 번잡한 모든 일에서 벗어나 한적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고자 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자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것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같이. 그렇다고 찾아 시간에 무언가 즐거운 소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파에 시간 동안 앉아있으면서 묻는 말에 그렇다, 아니다 정도의 답변만 하다 가버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우리의 주인공 에밀과 그의 부인 쥘리에트가 <우리집>으로 이사 이런 일을 매일같이 겪게 된다. 이웃에 사는 베르나르댕이라는 의사의 방문이 처음에는 그저 예의상 찾아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멈출 기미가 없자 에밀은 그의 방문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집을 비우기도 하고 어렵고 현학적인 주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베르나르댕의 방문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점차 에밀과 베르나르댕을 둘러싸고 무언의 기싸움이 펼쳐지며 감춰졌던 본능적 모습들이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한다.

 

소설의 내용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단순한 플롯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속에는 알게 모르게 기묘함이 넘친다. 예의를 갖추어 이웃을 대하려는 에밀의 모습과 예의를 완전히 무시한 남의 집에서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베르나르댕은 서로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이 사는 집은 똑같은 모양이다. 이는 결국 그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무언의 암시는 아닐까?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을 점점 이해할 없게 된다.(p.9)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에밀의 모습을 보면 결국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다른 인물을 속에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있었던 존재인지, 누군가의 자극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보면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품 속에는 단순하지만 긴장감이 넘친다. 알게 모르게 대립하는 사람의 모습이 날카로우면서도 재미있게 그려진다. 나라는 존재, 타인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담은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읽어나갈 있게 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탁월한 글솜씨가 드러나는 정말 즐겁게 읽을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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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믿음을 아느냐 김남국 목사의 창세기 파헤치기 2
김남국 지음 / 두란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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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이란 자기 삶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믿음의 삶을 통해 붙여질 있는 이름입니다.(p.228)

 

우리 삶의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다음 세대를 끌어갈 있는 믿음의 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p.230)

 

지금까지 창세기를 수십 번은 읽었을 거다. 매년 성경 1독을 목표로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완독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창세기, 출애굽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정도는 읽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현재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번은 넘게 창세기를 읽은 같다. 그런데 읽기만 했다.

 

성경 통독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올바로 읽고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에 알게 되었다. 수없이 읽었던 창세기였지만 전달하는 내용 중에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이 담겨있음을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김남국 목사님의 말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받치기로 순종의 모습만이 머릿속에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서 믿음의 후손이라는 보다 중요한 문제는 간과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 후손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도 아이가 생기다보니 자신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아이를 어떻게 올바르게 믿음의 아이로 키워야 할지가 기도제목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끝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또한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뒤를 이어나갈 믿음의 후손들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에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교회의 표어이기도 말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를 보면서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온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후손에게 넘겨줄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믿음의 표본은 이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원인과 결과가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 하나님이 아니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믿음은 나의 노력과 행동으로 만들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시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자라게 하셨다.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면서 그의 믿음과 순종은 두려움이나 불평 마디 없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정도까지 성장해간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도 역시 하나님이 이런 믿음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가실 것이다.

 

지금 눈을 들어 보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즐거움, 세상의 법칙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길인가? 믿음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 말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길만 바라보았다. 결코 세상의 길을 보지 않았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길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후회가 아닌 온전한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믿음만으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을 올바로 세우려고 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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