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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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화적 충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세대 차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유교적 관념에 사로잡힌 사대주의적 사고의 경직성 때문인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많이 당황스러웠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여자 형제 없이 삼형제로 자랐기에 여자 아이들이 어떤 사춘기 과정을 거치는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다. 남자인 나하고는 다르겠지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사춘기 여자 아이(어떤 의미에서 그보다도 더 빠른 시기부터이지만)의 성적 관심을 표현한 글이 낯설기만 하다. 아니 여자 아이들은 성적 관심이 남자 아이들보다 당연히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라고 왜 성적인 관심이 없겠는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인데.

 

이 소설에서는 조그마한 마을 클레브에 사는 솔랑주와 그 일당들이 성에 보이는 관심과 몽상을 그리고 있다. 솔랑주가 생리를 시작하는 시기부터 어설픈 성적 유희를 거치면서 섹스에 이르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너무 적나라해 때로는 민망하기도 하다. 성적인 묘사도 상당히 거칠다. 성기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정말 당황스러웠던 것은 솔랑주와 이웃집 아저씨 비오츠와의 관계이다. 픽션이기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픽션>을 대하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할 행동은 아니라고 옮긴이는 말하지만 픽션이 있을 법한 이야기, 혹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본다면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우리나라 정서랑은 너무나 동떨어진 관계를 맺는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범죄라고 여겨질 정도다. 솔랑주와 아르노의 관계는 또 어떤가? 그들도 그렇게 바람직한 사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 놀라웠던 것은 아르노의 엄마가 말하는 내용이다. 아르노와 솔랑주가 무엇을 할지 뻔히 알면서 솔랑주에게 던지는 질문이 가관이다.

 

너 아무것도 필요 없니? 괜찮아?”(p. 207)

 

고리타분한 어른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일이 내 딸에게 일어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교과서적인 말일지는 몰라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또한 정도가 있다. 그렇기에 적합한 시기에 적합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가시내 솔랑주는 내 믿음의 범주 밖에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든 픽션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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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입 더 - 철학자 편
데이비드 에드먼즈 & 나이절 워버턴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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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제목이 어쩜 그렇게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철학자들을 추려 그들의 사상을 맛보기로 그려낸 작품이다. 책에 실린 대담은 팟캐스트에서 구두로 진행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각 대담의 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다. 오히려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분량이다. 그렇기에 27가지 맛난 음식을 차려놓은 한정식 집에서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든 맛깔난 음식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깊은 맛을 음미하듯이 이들의 깊은 사상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철학자들이 뽑은 철학자들이 우리의 예상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뽑은 인물들 중에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인물들도 많았고,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철학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가 가장 많은 표를 얻기도 하였다.

 

27장으로 이루어진 각 대담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각 대담이 다루는 내용이 각 철학자나 사상의 핵심 사유를 설명한 것이기에 서로 간의 연결 고리는 그렇게 높지 않다. 그렇기에 나 역시 순서대로 읽지 않고 가장 많은 철학자들이 좋아한다고 뽑은 데이비드 흄에 관한 대담부터 읽어나갔다.

 

선택이 좋았던 걸까? 아무리 짧은 분량이라도 위대한 철학자의 핵심적 사고를 설명한 것이기에 어느 정도는 어려움을 예상하고 읽었는데 당구공이 부딪치는 사례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하였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미래를 판단하는 인간을 동물계의 일원으로 본 데이브드 흄의 생각이 18세기에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각 철학자와 그의 생각을 대담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책을 읽은 후에 이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책에 실린 모든 이들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보고 싶어졌다. 고맙게도 나와 같은 독자를 예상하고 책 말미에서 더 읽으면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짧고 굵게를 외치는 사람들을 철학의 향연으로 이끌만한 단단한 구성의 책, 바로 <철학 한입 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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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학 수업 -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에리카 하야사키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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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많았다.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 뒤에도 나를, 가족을 , 친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 나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는 걸까?

아주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는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바쁘게 살다보니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얼마 전에 예전에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분이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보다도 몇 년 아래였던 분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스럽고 착착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죽음학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책 제목으로 수업이란 표현을 쓴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진짜 죽음학 수업이란 과목이 있고 이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가 노마 보위 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수업은 3년 치 수강분이 마감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수업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수업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녀의 수업을 참관한 전직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자이자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문학 저널리즘 프로그램 조교수인 에리카 하야사키가 쓴 글이다. 그녀는 노마 교수의 수업을 참관한 내용을 이야기식으로 풀어쓴다. 그녀의 수업을 들었던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또한 죽음에 대비한 삶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케이틀린, 조나단, 이스라엘, 아이시스 등이 겪은 죽음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지는 않다고 할지 모르지만 또한 아주 멀리 동떨어진 일도 아니다. 노마 교수는 다양한 수업 방식으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세상을 떠난 누군가에게 쓰는 작별 편지, 검시소에서 죽음을 보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언제인지,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를 써보는 되감기 버튼,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 표현 등 그녀의 수업은 현장과 작문 등으로 학생들이 깊은 사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예수님을 믿기에 영생, 부활을 믿는다.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죽음과 비교해 우리의 현재 삶도 역시 사랑해야 한다.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분명한 선물이다.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할지, 어디에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이다.


만약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자신도 남에게도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는 불운한 삶을 살지 선택하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당연히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죽음학 수업은 삶의 사랑학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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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 - 역사학자 홉스봄이 바라본 재즈의 삶과 죽음
에릭 홉스봄 지음, 황덕호 옮김 / 포노(PHONO)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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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친구가 데리고 간 이태원 어느 재즈 카페.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재즈를 접했다. 자그마한 카페 안에 자욱하게 깔린 담배 연기. 때로는 몽환적으로 흐느적거리고 때로는 온 몸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신나는 연주. 달콤한 한 잔의 속삭임 속에 울려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개인적인 일로 너무나 힘들어 하던 내게 재즈는 아픔을 보듬어주는 치유제였다.

 

재즈란 어떤 음악일까? 누군가는 클래식으로 가는 대중음악의 마지막 교두보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재즈는 클래식으로 가기 위한 음악이 아니다. 재즈,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예술이다. 유럽으로 간 재즈는 단순한 실용음악이 아니라 진지한 감상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재즈를 받아들인 계층과 의미는 달랐지만 재즈는 사교 음악으로써도, 하나의 예술로써도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재즈는 비범한 음악이다.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책의 제목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었을까? 역사학자 홉스봄은 시드니 베셰,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빌리 홀리데이라는 4명의 재즈 거장들을 소개한다. 언뜻 보면 이들은 뚜렷한 능력을 드러내어 천재라고 불릴만한 존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그들만의 능력을 가진 또 다른 천재들이다. 베이시의 경우를 보자.

 

베이시는 템포를 벗어나 비트를 넣는데 탁월했고 지금도 그렇다. (p.84)

 

편곡의 원재료가 무엇이든 간에 그 곡은 가차 없는 발췌와 조각을 통해 베이시 버전으로 만들어졌다.(p.86)

 

듣는다는 것은 그의 본질적인 능력이었다.(p.87)

 

 

베이시는 연주자들의 연주들 듣고 자신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쉬워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창작의 과정이다. 이런 능력이 말 그대로 타고난다.

 

이 책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또한 재즈를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재즈와 재즈 연주자의 모습이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된 재즈 평가서가 아닌가 싶다.

 

다만, 조금 더 다듬어진 번역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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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4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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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이애린 작가는 80년대를 여는 학번이다. 나는 80년대를 닫는 학번이다. 그렇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소설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와는 또 다른 문화와 정서 속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80년대를 마무리하고 90년대에 들어서서도 민주화를 향한 대학생들의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학교 앞에 상주하다시피 한 백골단과 이들과 맞서 싸우던 사수대와 학생들. 발밑에서 우리를 쫓아다니던 지랄탄. NLPD계열. 학교 앞 해방터에서 목 놓아 부르던 운동가요. 마치 어제 일 인양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주로 90년대에 보낸 내 학창 시절은 한편으론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기도 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린 때이기도 하였다.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워크맨으로 수없이 토익 L/C를 듣기도 하였고,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친구들이 점차 늘어나던 시대였다. 어떤 친구들은 유럽으로 배낭을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사회와 민주를 향한 이념 학습보다는 학점을 우선시하던 친구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 세대이기도 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를 다시 생각해보니 나 역시 민주화의 현장에 있었지만 또한 그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적으로 벗어나지도 전적으로 빠져들지도 않았던 어중간한 청춘. 돌아보니 아쉬움이 너무나 크게 남는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 민주주의는 분명히 앞선 세대와 우리들 세대, 또한 우리 후배들 세대의 눈물과 땀과 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가 열정적으로 민주화를 외치고, 이념적 무장을 하던 그 때를 바라보니, 때로는 하나를 보다 다른 것을 놓치고 마는, 열정이 앞서 냉정하지 못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풋풋한 사랑의 흔적만을 남긴 순수하면서도 아직은 영글지 않은 나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애린과 동혁이 하나를 보며 다른 하나를 놓쳤던 것처럼.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작가의 정서, 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나의 정서, 2014년에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젊은 청춘들의 정서는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와 도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주어진 동등한 기회일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갈지 말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시대적 아픔과 개인적 아픔이 어우러진 작가의 이야기가 온전히 나를 사로잡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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