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다 인천 지리·역사·문학 지역 체험 학습 1
지호진 지음, 이진아 그림 / 다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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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지도를 따로 떼어서 보면 느낌이 확 오겠지만, 인천은 바다-섬-하늘을 잇는 진짜 특별한 땅이야. 역사적으로는 가장 먼저 나라 문을 열고, 전쟁의 한복판에 서고, 독립운동의 함성이 울린 곳이기도 해. 게다가 평범한 서민의 삶과 애환이 절절히 담긴 문학 작품들의 단골 배경이 되기도 했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너도 이렇게 말할걸? “노잼 도시? 아니! 완전 꿀잼 도시잖아!” - '여는 글'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은 총3부 각 3장씩 모두 아홉 개 장으로 구성되어 인천의 지리, 인천의 역사, 인천의 문화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 지호진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와 관광 이야기를 담는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고, 출판사에서 어린이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어린이책 전문 기획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책 속 이야기를 만나보자. 

북적북적 항구도시

인천은 한반도 지도를 펼쳐서 보면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옆으로는 서쪽 바다인 서해와 맞닿아 있으며, 강원도에서 시작해 수도인 서울을 지나 서해로 바져나가는 한강의 하류에 있다. 인천의 동쪽은 서울시 강서구와 경기도 부천시, 남동쪽은 경기도 시흥시, 북족은 경기도 김포시와 이웃해 있다. 

정식 이름은 '인천광역시'로 넓은 면적에다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기에 '넓은 광廣' 자의 광역시라 부른다. 면적은 약 1,067제공킬로미터로 우리나라 광역시 6개 중 2위이며 서울의 1.7배가 넘는 면적이다. 인구수는 약 300만 명으로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인천은 항구 도시다. 서해에서 가장 큰 항구가 바로 인천항인데, 우리나리 전체에서 부산 다음으로 큰 국제적인 무역항이다.
 
인천의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섬이 무려 168개나 있다. 이중 40개 섬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과거 항공기가 없던 시절엔 사람들이 중국이나 제주도로 가기 위해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야 했다. 그래서 연안부두는 인천을 상징하는 명소였다.


(사진, 연안부두 노래비)  


섬으로 구성된 옹진군

인천항에서 서해로 나아가면 크고 작은 섬들이 펼쳐진다. 그 섬들 대부분은 옹진군에 속해 있는데, 옹진군은 육지 없이 섬으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지역이다. 연안부두에서 옹진군으로 가는 배를 타면 여러 섬을 가 볼 수 있다.

옹진군은 북쪽으로는 북한의 황해남도, 남쪽으로는 남한의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며 서해 바다의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연안부두를 거치지 않으면 섬끼리 직접 오갈 수 없고, 강화군의 강화도처럼 하나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섬도 없다. 그래서 행정상 편의를 위해 옹진군의 군청은 옹진군이 아닌 미추홀구 용현동에 자리해 있다.


국가의 도읍지가 된 섬

1231년 몽골군이 말을 탄 병사단을 이끌고 고려 땅에 쳐들어왔다. 이미 중국 대륙은 물론 세계 곳곳을 정복하고 난 이후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무신정권의 6대 권력자인 최우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려는 몽골군의 거센 공격에 대항하다 1232년에 도읍지를 강화도로 옮겼다. 이는 도망이 아니라 오히려 몽골군에게 맞서기 위해서였다. 섬이 왕조의 도읍지가 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강화도였을까? 몽골군의 주력 부대가 말을 타고 육지를 달리는 기마병이었기에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에는 약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에 몽골군은 깅화도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섬을 고립시켜 쉽게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고려의 저항은 거셌다. 


(사진, 팔만대장경)

그 뒤 강화도는 40년 가까이 고려의 임시 수도였다. 크기는 작지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한 궁궐을 지엇고,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100년을 이어 오던 무신정권이 1270년에 무너지자 고려 원종은 몽골과 화친을 맺고 다시 개경으로 복귀했다. 이때 삼별초는 항복을 반대하며 끝까지 항전하면서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옮기며 저항하다가 3년 만에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다.

덕적도와 영흥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625 전쟁의 기세가 뒤집어졌다.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려면 큰 배들이 지나갈 길이 필요했다. 바로 그 길에 인천의 덕적도와 영흥도라는 섬이 있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미해군첩보부대가 섬에 상륙해 ‘엑스레이 작전’이라는 첩보 작전을 진행했다. 비밀리에 북한군의 정보를 모아 전투에 이용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해군첩보부대가 북한군이 마을에 숨어 있을 거라 여기고 수색하던 중 무기도 없는 일반 주민들에게 총을 쏜 것이다. 그 결과로 덕적도와 영흥도에서 최소 100명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진다. 가슴 아픈 역사이다.

한센인의 삶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그는 바로 한하운이다. 191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지만 1949년 12월 인천시 부평구에 자리를 잡고 투병 생활과 작품 활동을 이어 갔던 '한센인 시인'이었다. 그의 대표작 <파랑새>엔 새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과 들을 날아다니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1949년 12월에 한하운은 한센병 환자 가족 70여 명과 함께 인천시 북구 부평동 공동묘지 골짜기에 정착했다. 바로 한센인 정착촌인 성계원이었다. 1952년에는 인천시 북구 십정동에 한센인의 자녀들을 위한 신명보육원을 세우고 원장으로 일했다.


(사진, 백운공원의 한하운 시비)

그는 1959년 완치 판정을 받은 뒤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5년 십정동의 집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센병 환자 치료·요양소가 있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와 현재의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에는 그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의 뼈가 묻힌 김포시 풍무동 장릉 공원묘지 옆에는 ‘한하운 시인길’이 생겼다.

#어린이 #초등학교오육학년 #우리가간다인천 #지역체험학습 #지호진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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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마법 학교 - 마법처럼 부를 키우는 건물주 성공 법칙
서동원.윤나겸 지음 / 원앤원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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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동산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닙니다. 제대로 다룰 줄 안다면 여러분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뒤바꿀 어마어마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 손대면 순식간에 모든 걸 집어삼키는 늪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저는 그 늪에서 허우적대다 마법 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짜릿한 기회와 무서운 함정을 구분하는 식견을 얻었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공저자인 논현동 능력자 서동원과 청담동 아우름 세무사 윤나겸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부부다. 서동원은 부동산 개발 및 PM 전문가로 지난 15년간 200여 건 이상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며, 윤나겸 세무사는 절세 전문가로 현재 세무 유튜브 '절세 TV'를 통해 절세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도전 정신, 부동산의 본질, 건물 가치 극대화하기, 절세와 리스크 대비, 실전 사례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부동산 마법을 전하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부동산 디벨로퍼 도널드 트럼프 등  11인의 전설적 멘토가 등장해 딱딱할 수 있는 부동산 용어와 지식을 알기 쉽게 전하는 특징을 지녔다. 

마법사의 멘토링

"된다고 주문울 외워라, 될 때까지"
"눈을 감고, 생각하고, 그려라"
"말 한마디로 건물주 된다"
"부동산은 갑자기 오르지 않는다"
"현금흐름을 피처럼 여겨라"
"남의 돈으로 건물주 되기, 사업도 남의 돈으로 하는 것처럼"
"흥행에는 스타가 필요하다"
"골다공증보다 공실이 더 무섭다"
"언제 살까, 언제 팔아야 할까의 해답은 단순하다"
"자신 규모에 따라 투자 전략은 달라진다"
"세후 수익이 진짜 수익이다" 

"하면 된다", 강력한 추진력 

첫 번째 멘토링은 현대그룹을 설립한 정주영 회장의 실행력이다. 부동산 투자의 첫걸음은 할 수 있다고 믿고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에서 시작한다. '난 반드시 된다'라고 믿는 사람만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부동산 시장이 열어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비전 수립, 시각화

두 번째 멘토링은 <레버리지>의 저자 롭 무어의 큰 그림 구상이다. 부동산 투자에서는 '언제, 어디, 어느 정도 자산을 목표로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해야 한다. 내가 꿈꾸는 건물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순간,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일단 '해당 토지의 지역과 건물의 특성을 특정해서 본 건물을 통해 얼마의 이익을 얼마의 기간에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할지'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즉 목표가 어렴풋하면 의욕도 흐려진다.


(사진, 진정한 레버리지, 71쪽) 

은행, 매도인, 임차인의 협상 기법, 파트너십 구축

세 번째 멘토링은 부동산 디벨로퍼 도널드 트럼프의 협상법이다. 부동산 거래, 임대료 협상 과정에서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떻게 제안하느냐'가 수익률을 좌우한다. 협상력이란 곧 '돈을 낳는 언어'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내는 '한마디'가 우월적 지위에서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월적 지위 확보를 포기해선 안 된다.

“협상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협상은 일단 전쟁이야. 승리 아니면 패배. 중간은 없어. 원하는 조건을 얻어내면 승리고 그게 아니면 패배겠지. 승리에도 원인이 있고, 패배에도 원인이 있어. 한번 생각해봐. 자네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상대가 네 말대로 고분고분 움직여주겠는지 말이야. 협상의 대상은 은행이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선 셀러와 직접 파이낸싱을 협상하거나 파트너십을 통해 투자금을 모으는 식으로 길을 열 수도 있어. 정부도, 세금도 다 협상 대상이야. 

세금은 특히 협상이야. 결국 협상력이 있으면 규제나 자금 부족도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어. 물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겠지만 말이야.

장기 가치 상승 요소 분석

네 번째는 맥도날드 설립자 레이 크록의 멘토링이다. 가격이 상승하는 데는 정부 정책과 금리의 변화, 입지와 교통 개발 호재 등 분명한 이유가 있다. 장기적으로 시장 흐름을 예측하는 '눈'을 기르면 기회가 보인다. 가치가 오를 땅엔 언제나 이유가 있고, 가격 상승장이 시작되기 전에는 반드시 '시그널'이 있다. 

하지만 그 시그널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 수는 없다. 준비된 시림만이 개발에 참여할 수 있고 개발 이익도 실현할 수 있다. 이때 브랜드가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된다. 현금흐름이 있고 개발 이익을 창출한 브렌드를 경험해서 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만 확보한다면 누구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있다. 영화 <파운더The Founder>에서 맥도날드는 햄버거 가게가 아니라 부동산 기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중심 생활권. 단순한 상권이 아니라, 마을의 중심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자리였다. 

앵커 테넌트로서의 스타벅스

새로 생기는 상가나 건물에 스타벅스를 유치하려는 건물주들이 많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상업용 건물에 '앵커 테넌트(핵심 임차인)'이 입주하면 시너지 효과로 전체 임대료 및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공연장의 흥행에 스타 배우가 필요하듯, 건물 가치 상승엔 스타 임차인 유치가 핵심 요소이다. 

"맥도날드가 위치를 선점하고, 프랜차이즈 확장을 통해 임대료와 부동산 가치를 끌어올렸다면, 스타벅스는 브랜드 파워로 공간의 가치를 끌어 올립니다. 우리는 모든 매장이 직영이고 수수료를 나누는 방식으로 공간을 사용합니다. 건물을 사지 않고 건물주의 임차인이 아닌 파트너의 지위로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죠." - 하워드 슐츠

자기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건물주로 나아가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건물주 역할의 파트너가 자신을 찾아 제안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건물을 발굴하고 이를 매수하기 위한 자기자본에 투자해줄 재무적 투자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투자자를 유치할 경우, 단순 개인 투자자보다는 재무적 투자자의 지위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법인 투자자가 서로에게 더 잘 맞을 수 있다. 재무적 투자자는 해당 지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재무적 투자자는 투자자일 뿐, 동업자의 지위도 건물주의 지위도 갖지 않는다. 법인의 재무 담당자들은 대개 법인의 잉여자금을 안전하게 굴려줄 투자처를 지속적으로 찾는다.

부동산 자산 절세 전략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면 매년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산정된 금액에 따라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를 부과받는다. 하지만 공시가격이 시세보다 지나치게 높게 책정될 경우, 그만큼 과도한 세금이 부과될 수 있다. 이럴 때는 국토교통부의 공시가격 이의신청 절차를 통해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

공시가격 이의신청은 매년 발표된 공시가격에 대해 30일 이내에 서면 또는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으며, 이때 합리적인 근거 자료를 함께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시가격이 낮아지면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가 함께 줄어들기 때문에 연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절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공시가격을 매년 꾸준히 확인하고, 과도하게 평가되었다면 즉시 이의신청을 해서 조정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절세 전략이다.


(사진, 뒷표지)

#재테크 #부동산투자 #부동산마법학교 #서동원 #윤나겸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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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와 트럼프 이펙트: 대격변 예고
콜리 황 지음, 이철 옮김 / 경이로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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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는 다수의 거대 기술 기업들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균형 잡힌 수급 시스템이 붕괴되어 글로벌 산업 혼란이 발생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엔비디아,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구글, 메타와 같은 미국의 기술 기업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누가 게임의 규칙을 정하느냐’에 있습니다. - '서문' 중에서


책의 저자 콜리 황은 IT 전문 언론기업인 디지타임즈의 창업자이자 40년 경력의 글로벌 ICT 산업 분석가이다. 대만의 씽크탱크인 MIC의 주임을 역임했으며, 대만 경제부, 타이베이시 정부, 이란현 정부 등의 정책 고문과 대련회, 타오위안 공항, 항공발전화, 외국무역협화 등의 기관 이사를 역임했다.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대격변의 예고, 반도체 100년 여정이란 주제로 다섯 개 장에 걸쳐 바람은 불고 비는 내린다, AI와 소요유, 선택된 나라, 중국굴기에서 동승서강까지, 반도체와 대만의 미래 등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먼저 TSMC의 생산능력을 살펴보자. 2024년까지 TSMC는 13개의 12인치 웨이퍼 팹, 9개의 6인치 및 8인치 팹을 보유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OSAT 기능을 갖출 공장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5년까지 전 세계에 최소 10개의 신규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이 공장들은 다양한 공정 요구 사항을 가진 528개 고객사에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모든 이들을 위한 파운드리가 되겠습니다”가 TSMC의 모토이다. 이에 7만 6천명의 TSMC 직원들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킴으로써 업계에 무해한 파트너임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TSMC는 약 1만 명의 R&D 직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매출의 8%를 R&D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2024년 매출 비중에서 컴퓨터, 통신, 자동차 관련 매출은 대부분 제자리 걸음을 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AIoT는 7~9% 성장하고 첨단 제조 공정을 사용하는 AI 가속기는 최대 2.5배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4년 TSMC의 매출은 900억 달러(2023년, 693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매출총이익률은 53%, 순이익률은 40%에 가까운 수준이다. TSMC의 요구를 충족하는 장비, 소프트웨어 또는 지식 서비스 하청업체가 되는 것은 회사의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TSMC의 대외 영향력은 TSMC의 선도적 입지를 가속화하고 확장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한국의 유망 중소기업들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아웃소싱업체로 등록되면 회사의 미래성장이 담보된다는 논리와 동일한 맥락이다. 


저자는 1985년 한국 전담 산업 연구원으로서 대만에 부임한 이후 40년에 걸쳐 한국 전자 산업의 발전 과정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해 왔다. 이 기간 동안 오명, 배순훈, 진대제 등 세 명의 한국 과학기술부 장관들과 수차례 만났으며, 삼성의 고위 임원진인 이준우, 진대제, 그리고 경계현 사장이 대만을 방문할 때마다 비공식적인 교류 자리를 유지했다. 


대만과 한국의 산업 발전 경험은 서로에게 벤치마킹의 기회를 제공해 왔다. 특히 1993년 삼성이 추진한 '신경영' 계획을 중심축으로, 글로벌 브랜드 구축과 핵심 기술 역량 확보에 집중하는 시차적時差的 발전 전략을 체계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한국 전자 산업은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으로 번영해 왔다. 이러한 발전 과정은 오늘날 대만-한국 간 경제 및 무역 관계에 새로운 협력 기회를 창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2024년 대만의 대외 무역 구조에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변화는 한국이 처음으로 대만의 무역 흑자 국가로 전환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무역 구조의 변화는 대만이 SK하이닉스와 삼성 같은 한국 기업들로부터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이를 서버, AI 가속기 등의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조립한 후 미국, 유럽 등 제3국 시장으로 수출하는 복잡한 가치사슬 구조에 기인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 산업과 첨단 정보 전자 산업의 본질적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통 산업이 대체로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띠며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관계가 단순한 상하 선형 구조를 형성하는 반면, 정보 전자 산업은 교차 매트릭스 관계를 바탕으로 한 복잡한 생태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이러한 생태계의 상호의존성과 시너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업과 국가가 긍극적인 승자가 될 수 있다.

세계 5대 국제 항공화물 공항인 홍콩, 인천, 푸동, 타오위안, 나리타 공항이 모두 대만 인근 동중국해에 위치해 있으며, 전 세계 해상 교통량의 48%가 대만 주변 해역인 서태평양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대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동서양의 문화와 무역 교류의 중심지로 발전한 대만, 전 세계 첨단 칩, 서버, 노트북의 80% 이상이 대만 제조업체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전원 공급 장치, 커넥터, 인쇄 회로 기판, 전자 회로 등 IT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대만 기업인들은 뛰어난 기술력과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같은 대만의 현위치는 우연이 아닌 필요에 의한 선택과 노력, 그리고 지정학적 압력의 결과물이다. 1965년 미국의 원조가 종료되었을 당시,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248달러에 불과했으며, 연간 5천만 달러의 외환 부족은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대만 정부는 대만 중앙에 위치한 가오슝 가공수출구를 설립하여 새로운 경제 발전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대만 전자 산업의 초창기에는 일본 기업과 미국 기업이 인재 양성의 요람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1971년에 화타이 일렉트로닉스와 델타 일렉트록닉스가 각각 설립되었고, 잇따라 1974년에 컴퓨터 회사인 폭스콘과 미탁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는 대만에 다중적 위기가 닥친 시기였다. 미국의 원조 중단과 함께 대만은 유엔에서 탈퇴하고 일본,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국민 경제는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1974년 반도체 산업을 개발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제안에 부응한 대만 정부의 지원에 따라 후팅화胡定華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반도체 기술과 경영을 배우려고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 팀의 구성원들이 이후 TSMC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의 창립자가 되었던 것이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익히 알려진대로 대만계 미국인으로 "AI가 소프트웨어를 지배하고,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하드웨어 제조의 근본적 가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TSMC가 주도하는 대만의 반도체 제조 산업은 국가 경제에 막대한 영광과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한국인이 선도적으로 AI 세계를 펼치지 못한 것이 못내 유감이란 생각이 든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젠슨 황의 입장에선 같은 값이면 붉은 치마라는 판단하에 TSMC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므로, 삼성전자가 이를 극복하려면 TSMC보다 압도적으로 기술력 우위의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며, 이는 피할 수없는 숙명인 셈이다.


미국과 중국의 거대한 무역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대만 기업들이 중국 내의 생산 공장(기지)들을 중국업자에게 매각하고 AI와 생산-판매 동기화라는 새로운 시대를 수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2019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분쟁을 촉발한 이후 서구 진영에 속한 대만은 산업 전략을 근본적으로 조정하면서, 더 많은 대만 기업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해 새로운 스마트 제조 생태계의 상호 연동 및 다각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국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살펴보자. 중국은 주변국들에 독자적으로 정한 게임의 규칙을 무조건 수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정작 중국 자신은 보편적인 국제 규범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 대변인이 “중국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모든 것은 반드시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라고 신중하게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중국의 이중적 태도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 공산당 정권은 주변 이웃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 사건이 갑자기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 자국민들의 피난 비상 계획을 시뮬레이션했으며, 특히 오키나와 주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재차 반복될 것을 걱정하며 심지어 대만해협 유사시를 대비한 특수 대피소까지 건설하는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이럴진대 대만 국민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자본 시장에서 전 세계 준비 통화의 62%는 미국 달러이다. 위안화는 2% 미만(그나마 중국인구가 워낙 많음에 기인한 결과로 보임)으로 유로화의 10분의 1, 영국 파운드와 일본 엔화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중국 공산당 정부는 원유 수입량이 많다는 이유를 내세워 위안화로 결제 가능하게 만들고자 사우디 아라비아와 밀착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중국은 산유국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디지털 화폐와 전자 거래를 통해 자국 통화의 양상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디지털 화폐는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위안화가 디지털화되면 중국은 위안화의 흐름을 추적하여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해외로 돈을 밀반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 취임한 트럼프 행정부는 필연적으로 미국 달러를 무기로 사용할 것이며, 미국 달러를 포기하는 국가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비록 TSMC가 높은 전세계 시장점유율을 유지할지라도 트럼프 정부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 분명하다.


#경제경영 #TSMC와트럼프이펙트 #콜리황 #반도체기업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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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23 -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조가람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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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Op.23은 발라드 1번, 차이콥스키의 Op.23은 피아노 협주곡 1번, 슈만의 Op.23은 밤의 노래, 라흐마니노프의 Op.23은 전주곡, 그리그의 Op.23은 페르귄트.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Op.23 즈음도 자신만의 매혹이 피어나던 어귀였습니다. - '작가의 말'중에서

책의 작가 조가람은 유럽 각지의 언론에서 호평받으며 음악성을 인정받은 피아니스트로 서울대학교 움대를 졸업한 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 '한스 아이슬러'에서 최고 연주자과정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졸업하였다. 또 러시아 피아노의 거장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계보를 잇는 가브리엘레 쿠퍼나겔 교수에게 사사하였다. 

그로아티아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쇼팽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가녀림, 타협 없는 눈빛을 지닌 잘생긴 청년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자아내는 그는 쑥스럽게 인사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예술에 맞고 틀림이 있겠냐마는, 콩쿠르의 세계에는 '정正'과 '誤'가 존재한다. 표준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의 연주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었다. '정격 연주'의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그의 파격적인 해석에 1980년의 바르샤바는 시끄러웠다. 결국 그는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당시 실황 연주는 지금도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흐름의 예상치를 뒤엎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 어떤 이는 신경이 거슬릴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바보처럼 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후자後者였다.

끝없이 과거를 복원하고, 모방하고, 학습하여 재현하는 클래식 음악의 세계. 그 안에서 그는 여전히 창작과 창조성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그가 펼쳐낸 새로운 지평은 아름다웠다. 모두가 지쳐버린 예술의 불모지에서 다시금 불씨를 지핀 그는, 클래식 음악이 여전히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백건우가 연주하는 쇼팽의 '밤의 노래'

백건우는 음악의 정도正道에 다다르고자 지성의 신을 신고 한길을 걸어왓다. 그 길 위에서 정성 어린 진의의 음악으로 타인의 눈물을 닦아왔다. 이제 일흔셋, 그가 쇼팽의 일기장을 폈다. 그리고 쇼팽의 생각을 더듬어 따라가 본다. 

1964년, 23세의 나이로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 등장한 그는 '한국인 최초'라는 수식어에 가둘 수 없는 범세계적인 거장의 길을 걸었다. 청년 백건우는 이미, 한 세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업적을 세웠다. 그런데, 아마도 저자가 착각한 듯하다. 1969년 부조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4위(특별상 수상)입상한 것으로 나타난다.   

쇼팽이 살았던 19세기의 속도가 21세기보다 두 배쯤 느렸다면, 그래서 사유의 양이 두 배쯤 많았다면, 쇼팽의 영혼은 일흔셋의 백건우와 동갑내기라 해도 괜찮을까? 그래서 그의 밤의 노래(야상곡夜想曲)는 이토록 깊이 스며드는가.

아니면, 이 바쁜 시대 속에서 홀로 모든 문화적 빠름을 뒤로 하고, 오로지 음악에 몰입한 세월을 살아낸 그의 삶의 정결함이, 쇼팽의 야상곡을 이해할 수 있는 문지방을 넘을 수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의 야상곡이 이토록 깊이 파고드는가.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 

리스트((1811~1886년)는 헝가리계 독일인 피아니스트로 아이돌에 필적하는 인기를 누린 남자였다. 뛰어난 문필가이자 위대한 작곡가였으며 숱한 여인들과 스캔들을 뿌렸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멸의 찬사를 받아 마땅한 비범한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37세의 리스트는 러시아 출신의 문인, 공작부인, 유부녀였던 캐롤린 비트켄슈타인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이전 연인戀人인 열정적인 다구 부인과 달리 그녀는 이지적 매력으로 그을 사로잡았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우정으로 변했지만 그 깊이는 더욱 단단해졌다. 40년 동안 정서적 교류를 이어갔다. 

이곡은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프라일리그라트의 시詩에 선율을 더하고, 이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되었다.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리스트는 사랑을 꿈꾸었고, 그 꿈을 영원히 잠들지 않는 노래로 남겼다. 아름다운 그 꿈을 음표 하나하나에 새겨 넣었다.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오리니, 그대가 무덤가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 

오래도록 잠들지 않은 그의 사랑 이야기, 이백 년의 시간을 건너서도,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처럼 마음을 파고드는 이 사랑 노래. 사랑 앞에 비범한 사람도 평범해지고, 바로 이 평범함이 한 인간의 고귀한 깊은 내면의 고유한 비범함을 이끌어 낸다는 진실을 리스트는 노래한다. 그가 비트켄슈타인을 만나 수많은 내면의 음악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117쪽)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하면 엉킨 실타래가 보이고, 오래 보면 논리가 보이는 곡"이라고 말이다. 이어서 겉으로는 가슴 아픈 로맨틱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노골적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있고, 그 아래 다층적으로 첩첩이 숨겨진 멜로디들이 있다고 첨언한다. 

그는 오랜 고뇌 끝에 낭만성과 대중성을 큰 맥으로 잡고, 그 아래에 흐르고 있는 복잡다단한 당대의 러시아 인간사가 섬세하게 얽힌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제국주의적 시선이나 정치적 시선을 담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불안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지극한 한 사람으로서 그려냈죠. 그래서 이 곡은 어쩌면 교향곡 1번보다도, 피아노 협주곡 2번보다도 가장 라흐마니노프 자신에 가까운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172쪽)

1악장은 러시아를 횡단하는 기차에 탑승하며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러시아를 둘러보는 여행기가 시작된다. 여행에서 여러 사람 사는 모습들을 본다.

2악장은 1악장의 여행에서 둘러본 삶과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아픔에 대한 사무치는 번뇌와 신에게 고함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3악장은 인간의 한계를 ㅅ시험하는 듯, 끝나고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각종 테크닉 때문에 마냥 인간적이지는 않다. 피아니스트들끼리는 라흐마니노프가 실수로 악보에 모래를 쏟았다고 농담할 정도로 까만 음표가 빽빽하다.

#에세이 #클래식에세이 #조가람 #피아니스트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쇼팽의 Op.23은 발라드 1번, 차이콥스키의 Op.23은 피아노 협주곡 1번, 슈만의 Op.23은 밤의 노래, 라흐마니노프의 Op.23은 전주곡, 그리그의 Op.23은 페르귄트.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Op.23 즈음도 자심낭의 매혹이 피어나면던 어귀엿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책의 저자 조가람은 유럽 각자의 언론에서의 호평과 함께 음악성을 인정받는 피아니스트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를 졸업한 후 독일 베를린국립음대 '한스 아이슬러'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독일 정부 주최 학술 교류 연구소 DAAD 상을 수상했다. 


크로아티아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쇼팽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가녀림, 타협 없는 눈빛을 지닌 잘생긴 청년(1958년생)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자아내는 그는 쑥스럽게 인사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예술에 맞고 틀림이 있겠냐마는, 콩쿠르의 세계엔 '정正'과 '오誤'가 존재한다. 그의 연주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었다. '정격 연주'의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그의 파격적인 해석에 1980년의 바르샤바는 시끄러웠다. 결국 그는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당시 실황 연주는 지금도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흐름의 예상치를 뒤엎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 어떤 이는 신경이 거슬릴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바보처럼 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후자에 속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이 여전히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 콩쿠르에 입상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1964년, 23세의 나이로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한 그는 '한국인 최초'라는 수식어에 가둘 수 없는 범세계적인 거장의 길을 걸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그런데, 이는 저자의 착각인 듯싶다. 서울 태생의 백건우(1946년생)는 1968년 콩쿠르에서 4등으로 입상했다. 물론 한국인 최초로 입상했다. 이탈리아 페루초에서 거행되는 세계적 권위를 지닌 이 콩쿠르는 피아노 부문만 개최되는 대회이다.


쇼팽(1810~1849년)이 살았던 19세기의 속도가 21세기보다 두 배쯤 느렸다면, 그래서 사유의 양이 두 배쯤 많았다면, 쇼팽의 영혼은 일흔셋의 백건우와 동갑내기라 해도 괜찮을까? 그래서 백건우가 연주하는 쇼팽의 '밤의 노래'는 이토록 깊이 스며드는가.

아니면, 이 바쁜 시대 속에서 홀로 모든 문화적 빠름을 뒤로 하고, 오로지 음악에 몰입한 세월을 살아낸 그의 삶의 정결함이, 쇼팽의 야상곡夜想曲을 이해할 수 있는 문지방을 넘을 수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의 야상곡이 이토록 깊이 파고드는가.


리스트의 '사랑의 꿈' 


프란츠 리스트(1811~1886년)는 아이돌에 필적하는 인기를 누린 남자이다. 뛰어난 문필가이자 위대한 작곡가였으니 무수한 여인들과의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37세의 리스트는 러시아 출신의 문인이자 공작부인인 캐롤린 비트켄슈타인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전에 사귀던 열정적인 연인과 달리 이지적인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결국 우정으로 변했지만, 그 깊이는 훨신 더 단단해졌다. 두 사람은 40년산 정서적 교류를 이어갔던 것이다. 음악가 리스트의 수많은 멸작들이 그녀와의 정신적 교류 속에서 탄생했다. 리스트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음익으로 바쳤다. 바로 '사랑의 꿈'이다.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오리니, 그대가 무덤가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


이 곡은 독일 시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에 선율을 더해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되었다.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리스트는 사랑을 꿈꾸었고, 그 꿈을 영원히 잠들지 않는 노래로 남겼다. 아름다운 그 꿈을 음표 하나하나에 새겨 넣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도록 잠들지 않은 그의 사랑 이야기, 이백 년의 시간을 건너서도,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처럼 마음을 파고드는 이 사랑 노래. 사랑 앞에 비범한 사람도 평범해지고, 바로 이 평범함이 한 인간의 고귀한 깊은 내면의 고유한 비범함을 이끌어 낸다는 진실을 리스트는 노래한다. 그가 비트켄슈타인을 만나 수많은 내면의 음악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처음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하면 엉킨 실타래가 보이고, 오래 보면 논리가 보이는' 곡이라고 평한다. 이어서 겉으로는 가슴 아픈 로맨틱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노골적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있고, 그 아래 첩첩이 숨겨진 멜로디들이 있다고 첨언한다. 총 3악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종 콩쿠르에서 이 곡을 시도하는 연주가자들이 종종 있다. 


1악장은 러시아를 횡단하는 기차에 탑승하며 시작된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는 소리 같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러시아를 둘러보는 여행이 시작된다.


2악장은 여행에서 둘러본 삶과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아픔에 대한 사무치는 번뇌와 신에게 고함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3악장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마냥 인간적이진 않다.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각종 테크닉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들끼리는 라흐마니노프가 실수로 악보에 모래를 쏟았다고 농담할 정도로 까만 음표가 빽빽하다.


#에세이 #클래식에세이 #Op23 #조가람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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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05-0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록하던 글이 사라져서 재작성했더니 사라진 글이 다시 나타났네요.ㅠㅠ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지음 / 파람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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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묻는다. 다만 목숨을 걸고 옳은 일을 시도한 이가 누구인가? 오늘날 자신의 이익과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를 팔고 국민을 파는 사이비 정치인 그리고 사이비 지식인에게 김옥균의 일생이 작은 울림을 주기를 바랄 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이 소설의 저자 이상훈은 KBS 공채 PD
출신으로 SBS 개국에도 참여했고, 채널A 제작본부장까지 거치는 동안 수많은 히트작을 제작했다.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첫 소설 <한복 입은 남자>로 문단에 등단한 이후 세 번째 소설 <김의 나라>로 제16회 류주현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역사소설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김옥균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이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로 근대화를 외면한 '우물안 개구리' 격의 왕조였다. 뒤를 이은 고종의 우유부단함과 무능, 그리고 민비의 탐욕과 국정농단은 조선을 점점 위기 속으로 몰고가는 형국이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뿐만 아니라 서구의 열강마저도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조선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김옥균(1851~1894년)은 조선 말기의 관료, 정치가로 급진개혁파였다. 문과 장원급제 후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그는 개화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지만 이같은 그의 행보에 민씨 외척 세력은 번번히 발목을 잡았다. 참다 못한 그는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켜 정권을 손에 쥐었으나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만다. 이후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 재기를 노렸으나 그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옥균은 아버지 김병태와 어머니 은진송씨의 장남으로 충청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동김씨 후손이었지만 몇 대 째 벼슬을 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섯 살이 지나자 천자문을 뗄 정도로 영특했던 옥균은 여섯 살 때 옥천으로 이사,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던 중 옥균에 대한 소문은 안동김씨 가문에 널리 퍼지고, 한양의 명문가로 자리잡은 육촌 형 김병기는 슬하에 자식이 없자 옥균을 양자로 입적했다.

입양 후 어린 옥균의 학문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명문가의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안목을 더욱 더 키워나갔다. 강릉부사가 된 양부를 따라 강릉에서 자라며 노론의 학통도 몸에 익혔다. 16세에 다시 양부를 따라 한양으로 복귀했다. 이때 옥균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를 이끌던 박규수를 만나게 되었다. 박규수는 1864년부터 병조참판과 이조참판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아 1865년에는 한성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1866년 2월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5개월 전의 상황이었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고 프랑스 신부를 죽인 것을 빌미 삼아 프랑스함대가 군함 여러 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침입해왔다. 바로 '병인양요'였다. 이때 박규수의 제자 오경석이 대원군에게 프랑스함대의 약점을 보고하면서 적을 유인해 약점만 공격하면서 장기전으로 간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건의를 수용, 대원군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박규수와 오경석은 대원군의 부국강병을 기초로 개화를 이룬다면 일본을 곧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원군은 승리를 기회로 더욱 더 쇄국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매제였던 박영효(1861년생)와 첫 만남을 가진 옥균은 비록 자신보다 10살이나 아래이지만 지위가 높았기에 영호를 존대했다. 박규수의 북촌집 사랑방 모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주역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의 사숙과 비슷했다. 안타깝게도 박규수가 뿌린 조선의 개화사상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무너진 반면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켜 일본을 근대회화 이끌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1894년 3월 25일 나가사키 항구에는 상해행 사이쿄마루(西京丸)증기선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정박해 있었다. 한편 부둣가에는 상하이로 떠나는 김옥균을 배웅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이 줄지어 섰다. 그는 청나라의 리홍장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의 일행엔 일본인 와다 엔지로, 통역을 맡은 청국공사관 서기 오보인, 그리고 갓을 쓴 조선인 홍종우가 있었다.

운명적 만남

역관 출신인 오경석에게는 김옥균과 동갑인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오경화였다. 경화는 장신에다 힘도 세어 여장부의 풍모가 있었다. 오경석은 딸이었음에도 경화에게 서양의 학문과 역관의 지식을 전해주었다. 경화의 어머니는 당시의 보수적인 여성들이 그렇듯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 가는 게 행복인 여자에게 왜 학문를 가르치냐며 남편을 핀잔했다. 

오경석이 중국에서 돌아오면 옥균은 항상 오경석의 집으로 찾아가 자연스럽게 옥균과 경화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옥균에게 호감을 가진 경화는 아버지와 옥균이 나누는 대화를 옆방에서 몰래 엿들었다. 해박한 옥균의 지식에 겅화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신분차별이 분명한 조선이기에선 장원급제한 양반 남성과 중인 계급의 여성을 양가 부모 모두 불허했던 것이다.

1877년 스승인 박규수가 죽자 스승의 유언대로 오경석과 함께 개화 사업에 더욱 몰두했다. 여자 한 명 때문에 개화 사업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기에 결국 옥균은 양부모가 주선한 유씨 집안의 딸과 혼인했다. 유길준의 먼 친척되는 집안이었다. 또 다른 스승인 오경석도 폐병이 깊어져 각혈을 토해내다가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경화는 양학에 밝고 영특하다는 소식을 들은 조대비가 곁에 두고 싶다는 제안을 해옴에 따라 옥균 외의 남자와는 결혼 의사도 없고 개화 사업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조대비의 상궁이 된다.  

태극기의 탄생

주역에 관심이 많았던 김옥균은 영국 공사의 말을 듣고 주역 64괘 중에서 지금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백성을 한마음으로 모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염원을 담아 김옥균은 먼저 왼쪽 위아래에 건괘(乾卦)와 리괘(離卦)를 그렸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 감괘(坎卦)를 그리고 아래에 곤괘(坤卦)를 그렸다. 

태극기의 왼쪽은 64괘 중 천화동인天火同人, 오른쪽은 수지비水地比의 괘가 완성되었다. 천화동인에는 ‘하늘과 불이 서로 만나니, 군자는 뜻이 같은 자들을 모아 일을 완성하고 처리한다.’라는 의미가 담겼고, 수지비에는 ‘비가 땅에 촉촉하게 내려 만물을 적시고 만국을 세워 하나가 되게 한다.’라는 의미가 담겼다. 따라서 태극기의 사괘에는 모두가 듯을 모아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그 은혜를 만백성에게 고루 스며들게 한다는 염원이 담겨있었다. 

고종의 윤허

김옥균의 집에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핵심 인사들이 모여 거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김옥균)"전하의 윤허를 얻었습니다. 문서로 우리 개화파를 밀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나라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개화해 자주독립 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홍영식)“전하의 우유부단한 성품을 봐서 언제 또 입장이 바뀔지 모릅니다.”

(김옥균)“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하의 동의를 구해놓지 않으면 명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전하를 이 거사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거사는 군사를 동원한 폭동이 아닙니다. 정치를 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서광범)“그래도 거사에 힘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듭니다. 군사들 동원 계획은 문제가 없습니까?”

(서재필)“일단 광주군영의 신식군대 지휘관들은 우리 편입니다. 그들이 비록 민씨 일당의 군영에 속해 있지만 오백 명 정도는 우리가 거사를 일으킬 때 함께 돕기로 했습니다.”

(박영효)"아직도 청의 군사 천오백 명이 조선에 남아있습니다. 만약 원세개가 눈치채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김옥균)"청의 나머지 군사도 안남으로 이동시킬 것이라 들었습니다. 거사일까지 이동하지 않으면 부득이 일본의 사백 명 정예군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이미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밀약을 했습니다." 

그렇다. 군의 도움이 없다면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종은 갑신정변을 인정했음에도 민비의 꼬드김에 솔깃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고종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민비의 지시로 계속 소란을 일으키는 환관 유재현을 본보기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변심

경기감사 심상훈과 민비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고종에게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고종은 환관 유재현을 죽이지 말라 수십 번 외쳤건만 김옥균 일파가 처단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이미 많은 정승이 죽어 나갔다는 소식에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갑신정변의 정강과 인사를 자신과 의논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보고 고종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갑신정변의 정강을 읽어본 고종은 김옥균에게 격하게 화를 내며 말했다. 고종은 마지막까지 권력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이런 정변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자객의 그림자

고종과 민비는 김옥균을 오사카 사건의 배후호 지목하고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김옥균을 죽이려고 두 번째 암살단 파견을 결정했다. 고종은 한때 개화파의 일원이었으며 김옥균과 친분이 있는 지운영을 궁궐로 호출해 권총 한 자루와 돈을 내어놓으며 당장 일본으로 떠나라고 명령했다. 

1886년 3월, 지운영이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종두법을 조선에 보급한 지석영의 형이다. 일찍 개화에 눈을 떠 김옥균 수하에서 일하기도 했다. 먼저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동생 석영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밝히자 역사의 죄인이 된다며 극구 만류했다. 그럼에도 어명을 거역하면 집안의 몰락이 불보듯 뻔하다며 고종에게서 받은 돈 정반을 동생에게 내놓고 사라졌다. 

김옥균 주위를 맴돌던 지운영은 한양 김옥균 집에서 만난 적이 있던 유혁로를 만나게 되었다. 눈치를 챈 유혁로가 지운영을 술집으로 데려갔다. 취중진담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유혁로는 김옥균을 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장단을 맞춘 유혁로는 김옥균과 미리 말을 맞춘 후 지운영을 김옥균에게 인사시켰다. 김옥균은 일부러 유혁로를 종 부리듯 하며 짜증을 냈다. 유혁로를 포섭하면 거사의 성공은 따논 당상이라고 판단한 지운영은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운영)“나는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서 전하의 명을 받고 조선에서 왔소. 그대가 도움을 주면 전하께서도 큰 상을 내리실 것이요.”

(유혁로)“전하께서 큰 상을 준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겠소. 전하께서 그대에게 내리신 증표라도 있으면 내가 믿겠소.”

유혁로의 말에 지운영은 품 안에 있던 고종의 친필 신표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유혁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후 술을 마시자고 제의했다. 지운영은 그날 진탕 마시고 술에 취한 채 잠에 골아 떨어졌다. 유혁로는 지운영의 품 안에서 고종의 친필 신표를 꺼내어 유유히 사라졌다. 이후 고종의 밀서가 일본의 언론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총탄에 쓰러지다

1894년 3월 28일, 숙소 앞 강가에선 폭죽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옥균은 홍종우에게 상하이 은행으로 가서 어음을 현금으로 교환하라고 지시했다. 홍종우가 들고 간 어음은 가짜였다. 상하이 거리를 배회하면서 홍종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가짜 어음이 탄로나기 전, 김옥균을 암살해야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포착되지 않았다. 

옥균은 이홍장을 만나 중국 역사를 들먹이며 대화를 풀어나가려고 방에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다. 일본인 와다 엔지로는 이런 옥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하이 은행으로 갔던 홍종우는 돌아와 은행 지배인이 출타중이라 바꾸지 못헸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와다 엔지로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홍종우는 이일직이 준 리볼버 권총을 들고 김옥균의 방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였다. 권총을 쥔 그의 손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급기야 자고 있는 옥균을 향해 권총 한 발을 발사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손에 권총이 미끄러져 총알은 김옥균을 스쳐 지나갔다. 눈을 뜬 옥균이 홍종우를 쳐다보았다. 두 번째 총알이 옥균의 어깨를 관통했다. 옥균은 피를 쏟으면서 홍종우의 다리를 잡고 소리쳤다.

“나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더라도 이홍장을 만난 이후에 죽여라. 너는 역사가 두렵지 않으냐?”

겁이 난 홍종우는 세 번째 총알을 옥균의 심장에 쏘았다. 밖에 있던 와다 엔지로가 총소리를 득고 급히 계단을 올라왔으나 홍종우가 그를 밀치고 도망쳤다. 고종이 김옥균 암살에 병적으로 집착했음이 <고종실록>에 나와 있다.

하늘이 나라를 도와주어 비로소 죄인이 죽었다. 온 나라에 대사령을 내리는 것을 어찌 주저하겠는가? 이달 27일까지 잡범으로서 사형수 이하는 모두 용서해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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