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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의 한 뼘 더 깊은 세계사 : 유럽 편 - 5,000년 유럽사의 흐름이 단숨에 읽히는
저스티스(윤경록)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평점 :
대학 졸업 후 10년 넘게 한 회사만 다닌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회사 생활에서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역사책 읽기였죠. 그러던 2019년 초, 고등 세계사 교과과정에 있는 모든 내용을 교과서보다 조금 더 깊게 다뤄보기로 다짐하며 첫 영상을 올렸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책의 저자 저스티스는 경희대학교 사학과 출신으로 유튜브 채널 '저스티스의 역사여행'을 운영하고 있다. 정확한 정보 전달을 목표로 삼아 교과서 내용만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역사적 궁금증을 해결코자 7년째 영상을 만들어 대학 진학 수험생, 임용고시 준비생, 중교교 역사선생님 등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총 5부로 구성된 책은 찬란한 영광의 시기인 고대 유럽사, 암흑 같은 대흥망의 중세 유럽사, 강력한 재탄생의 근세 유럽사, 프랑스대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근대 유럽사, 미국발 경제 대공황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현대 유럽사까지 다루고 있다.
고대 유럽사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헬레니즘 시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는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크게 변화했으며 또한 유럽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4세기에서 7세기까지 지속된 역사적 사건인데, 로마 제국 밖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안으로 이동하면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운 시기를 일컫는다. 이런 이동이 시작된 주요 원인은 훈족의 압박이었다.
훈족은 4세기 중반에 흑해 북쪽에서 갑자기 등장해 서쪽으로 이동하며 전 유럽에 걸쳐 파괴와 공포를 불러일으킨 중앙 아시아 출신의 유목 민족이었다. 훈족의 압박 외에도 4세기 이후 북유럽과 동유럽을 덮친 기후 변화로 농업이 어려워진 점도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한 원인이었다. 추운 북쪽 지역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려는 게르만족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로마 제국의 영토를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중세 유럽사
9~10세기 서유럽은 혼란과 무질서의 시기를 겪었다. 서유럽 여러 지역에선 중앙집권적 통치가 약해졌고 바이킹의 침입과 내전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서유럽은 봉건 제도가 정착하면서 각 지방 영주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경쟁하는 시기로 변모하고 있었다.
반면 동유럽에선 상대적으로 안정된 권력이 이어졌는데, 이 지역을 지배한 동로마 제국은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로도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 문화를 유지하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어갔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새롭게 떠오른 튀르크계 셀주크 (튀르크)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이 위기는 십자군 전쟁을 촉발시켰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유럽의 기독교 연합군과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차지하고자 벌인 일련의 전쟁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성지로 가는 길’이라고 여겼으며, 참가자들은 ‘순례자’라고 불렀다. 무기를 들고 떠나는 특이한 형태의 순례길을 나섰던 것이다.
서유럽은 1071년 동로마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 패배하며 이슬람 세력에게 위협받는 상황을 똑똑히 지켜봤다. 동로마 제국이 더 이상 유럽의 방어선으로서 강력하지 않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슬람의 위협을 인지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동로마 제국의 요청 없이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출정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약 200년간 이어진 9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세 유럽사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어 17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Rebirth(재탄생)’ 혹은 ‘Renewal(갱신)’에 해당한다. 그러나 단순한 ‘리뉴얼’의 개념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지식, 철학을 재발 견하고, 이를 중세의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에 맞서 부활시키려 는 지적, 예술적, 사회적 운동이었습니다. 학문과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개인의 창의성,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이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지중해 무역권이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가면서 유럽은 큰 문제에 직면했다. 유럽인들에게 필수품인 향신료를 동방에서 수입하는 게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통제하며 향신료 무역을 독점적으로 조종했고 향신료 가격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서유럽 국가들은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을 통해 향신료를 수입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포르투갈, 스페인과 같은 해양 국가들은 남쪽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모험을 시작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근대 유럽사
백년전쟁(1337~1453년)의 결과, 영국은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상실했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선 예상치 못한 이점을 얻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플랜더스 지방의 방직업자들이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찾아 영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방직 기술을 획득, 특히 영국 왕실은 방직 기술을 적극 장려하며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기화로 영국에선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총과 대포를 탈취한 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 감옥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곳이라 혁명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인접 왕조들은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향할까 봐 우려하여 프랑스대혁명을 저지하려 했다. 프랑스는 이에 맞서 1792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프랑스혁명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유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 진영과 프랑스와 러시아 연합 진영으로 구축되어 불안정한 정세에 처했다. 당시 영국은 '화려한 고립'이란 외교정책을 표방했지만 독일의 급격한 팽창을 그냥 손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프랑스와 러시아 연합편에 가담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은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의 고립을 야기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은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자국이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것에 대한 반발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다.
프린치프는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합병에 반발해 범슬라브주의를 주장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인 흑수단黑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저항하고 세르비아를 포함한 모든 슬라브 민족들이 하나로 통합되길 바랐던 것이다. 비록 사건 자체로는 작게 보일지리도 당시 유럽의 복잡한 동맹 관계와 긴장된 정치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현대 유럽사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잿더미로 변한 반면, 미국은 전후 유럽 재건에 투자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유럽의 경제적 혼란과 파괴 속에서 미국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제 세계사의 중심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옮겨졌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우뚝 선 미국 경제의 번영을 상징했으며, 주식시장은 지속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증권거래소는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들로 붐볐다. 1920년대는 미국 경제의 황금기였고 미국의 경제 성장과 번영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1925년부터 건설 산업이 하락세로 접어들며 경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건설업의 침체는 공업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졌고 소비자 수요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고 생산 둔화로 이어졌다. 결국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에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는 유럽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히틀러는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했다. 독일과 소련 간에 체결된 불가침 조약에 기반을 둔 침공이었으며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엇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유럽국가들의 전쟁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함께 독일 점령지를 대대적으로 진격해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를 향해 진군했다. 마침내 1945년 5월에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1947년,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 유럽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보호하고자 미국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는데,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마셜 플랜이 등장한다.
마셜 플랜은 미국이 전후 유럽의 재건을 지원하고자 대규모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의 목표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를 부흥시켜,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고 서유럽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유럽을 연방체제로 만들어 독일의 재무장을 막고, 중부 유럽을 소련으로부터 방어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만들어진 냉전 체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역사 #세계사 #저스티스의한뼘더깊은세계사 #유럽편 #윤경록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대학 졸업 후 10년 넘게 한 회사만 다닌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회사 생활에서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역사책 읽기였죠. 그러던 2019년 초, 고등 세계사 교과과정에 있는 모든 내용을 교과서보다 조금 더 깊게 다뤄보기로 다짐하며 첫 영상을 올렸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책의 저자 저스티스는 경희대학교 사학과 출신으로 유튜브 채널 '저스티스의 역사여행'을 운영하고 있다. 정확한 정보 전달을 목표로 삼아 교과서 내용만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역사적 궁금증을 해결코자 7년째 영상을 만들어 대학 진학 수험생, 임용고시 준비생, 중교교 역사선생님 등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총 5부로 구성된 책은 찬란한 영광의 시기인 고대 유럽사, 암흑 같은 대흥망의 중세 유럽사, 강력한 재탄생의 근세 유럽사, 프랑스대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근대 유럽사, 미국발 경제 대공황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현대 유럽사까지 다루고 있다.
고대 유럽사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헬레니즘 시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는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크게 변화했으며 또한 유럽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4세기에서 7세기까지 지속된 역사적 사건인데, 로마 제국 밖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안으로 이동하면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운 시기를 일컫는다. 이런 이동이 시작된 주요 원인은 훈족의 압박이었다.
훈족은 4세기 중반에 흑해 북쪽에서 갑자기 등장해 서쪽으로 이동하며 전 유럽에 걸쳐 파괴와 공포를 불러일으킨 중앙 아시아 출신의 유목 민족이었다. 훈족의 압박 외에도 4세기 이후 북유럽과 동유럽을 덮친 기후 변화로 농업이 어려워진 점도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한 원인이었다. 추운 북쪽 지역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려는 게르만족은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로마 제국의 영토를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중세 유럽사
9~10세기 서유럽은 혼란과 무질서의 시기를 겪었다. 서유럽 여러 지역에선 중앙집권적 통치가 약해졌고 바이킹의 침입과 내전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서유럽은 봉건 제도가 정착하면서 각 지방 영주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경쟁하는 시기로 변모하고 있었다.
반면 동유럽에선 상대적으로 안정된 권력이 이어졌는데, 이 지역을 지배한 동로마 제국은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로도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 문화를 유지하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어갔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새롭게 떠오른 튀르크계 셀주크 (튀르크)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이 위기는 십자군 전쟁을 촉발시켰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유럽의 기독교 연합군과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차지하고자 벌인 일련의 전쟁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성지로 가는 길’이라고 여겼으며, 참가자들은 ‘순례자’라고 불렀다. 무기를 들고 떠나는 특이한 형태의 순례길을 나섰던 것이다.
서유럽은 1071년 동로마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 패배하며 이슬람 세력에게 위협받는 상황을 똑똑히 지켜봤다. 동로마 제국이 더 이상 유럽의 방어선으로서 강력하지 않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슬람의 위협을 인지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동로마 제국의 요청 없이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출정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약 200년간 이어진 9차례의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세 유럽사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어 17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Rebirth(재탄생)’ 혹은 ‘Renewal(갱신)’에 해당한다. 그러나 단순한 ‘리뉴얼’의 개념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지식, 철학을 재발 견하고, 이를 중세의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에 맞서 부활시키려 는 지적, 예술적, 사회적 운동이었습니다. 학문과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개인의 창의성,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이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지중해 무역권이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가면서 유럽은 큰 문제에 직면했다. 유럽인들에게 필수품인 향신료를 동방에서 수입하는 게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를 통제하며 향신료 무역을 독점적으로 조종했고 향신료 가격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서유럽 국가들은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을 통해 향신료를 수입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포르투갈, 스페인과 같은 해양 국가들은 남쪽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모험을 시작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근대 유럽사
백년전쟁(1337~1453년)의 결과, 영국은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상실했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선 예상치 못한 이점을 얻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플랜더스 지방의 방직업자들이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찾아 영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방직 기술을 획득, 특히 영국 왕실은 방직 기술을 적극 장려하며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기화로 영국에선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총과 대포를 탈취한 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 감옥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곳이라 혁명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인접 왕조들은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향할까 봐 우려하여 프랑스대혁명을 저지하려 했다. 프랑스는 이에 맞서 1792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프랑스혁명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유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 진영과 프랑스와 러시아 연합 진영으로 구축되어 불안정한 정세에 처했다. 당시 영국은 '화려한 고립'이란 외교정책을 표방했지만 독일의 급격한 팽창을 그냥 손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프랑스와 러시아 연합편에 가담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은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의 고립을 야기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은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자국이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것에 대한 반발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다.
프린치프는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합병에 반발해 범슬라브주의를 주장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인 흑수단黑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저항하고 세르비아를 포함한 모든 슬라브 민족들이 하나로 통합되길 바랐던 것이다. 비록 사건 자체로는 작게 보일지리도 당시 유럽의 복잡한 동맹 관계와 긴장된 정치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현대 유럽사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잿더미로 변한 반면, 미국은 전후 유럽 재건에 투자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유럽의 경제적 혼란과 파괴 속에서 미국은 새로운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제 세계사의 중심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옮겨졌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우뚝 선 미국 경제의 번영을 상징했으며, 주식시장은 지속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증권거래소는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들로 붐볐다. 1920년대는 미국 경제의 황금기였고 미국의 경제 성장과 번영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1925년부터 건설 산업이 하락세로 접어들며 경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건설업의 침체는 공업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졌고 소비자 수요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고 생산 둔화로 이어졌다. 결국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에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는 유럽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히틀러는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했다. 독일과 소련 간에 체결된 불가침 조약에 기반을 둔 침공이었으며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엇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유럽국가들의 전쟁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함께 독일 점령지를 대대적으로 진격해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를 향해 진군했다. 마침내 1945년 5월에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1947년,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 유럽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보호하고자 미국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는데,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마셜 플랜이 등장한다.
마셜 플랜은 미국이 전후 유럽의 재건을 지원하고자 대규모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의 목표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를 부흥시켜,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고 서유럽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유럽을 연방체제로 만들어 독일의 재무장을 막고, 중부 유럽을 소련으로부터 방어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만들어진 냉전 체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역사 #세계사 #저스티스의한뼘더깊은세계사 #유럽편 #윤경록 #믹스커피 #원앤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