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P.31 )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부활절에 새 신발을 맞추어드렸습니다. 도화지 위에 한센인의
발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어서 발 모양을 떴는데, 발가락이 없거
나 뒤틀려 있어 감자 모양, 계란 모양, 가지 모양 등등의 해괴망
측한 발들을 처음으로 보고 마음이 아펐던 기억도 있습니다. 착
화식 날 생전 처음으로 신어보는 신발을 신고 덩실덩실 춤을 추
고 박수치며 노래하던 한센인의 환한 얼굴들은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이라 생각됍니다.
-고(故) 이태석 신부(구수환 [울지마 톤즈, 그 후...선물]중)
살며 만났던
모든 선과 색들이
떨리며 녹아들었을
간신히 발인
상처의 테두리인
저 선이 어찌 단선이랴
저 선이 어찌 단색이랴
선 그어지는 소리에
마음도 깊이 패였을
검은 선을 덮기도 했을
거북 발 같은 검은 피부에
곡선이 울어
감자, 계란, 가지처럼 울며
인류가 신고 걸어가야 할
마음의 신발
여기 그려놓았구나 (P.48 )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 사내가 산다
어제 사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오늘 내리는 눈을 보았다
사내는 개를 기른다
개는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을 따로 먹는다
개는 쇠줄에 묶여 있고
사내는 전화기줄에 묶여 있다
사내가 전화기줄에 당겨져 외출을 하면
개는 사내 생각에 매인다
집은 기다림
개의 기다림이 집을 지킨다
고드름 끝에 달이 맺히고
추척,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찬 귀를 세운
몇
날
전화기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내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게 아닌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P.26 )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1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株聯)이 있었다
문 맞았다
2
전철안에서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은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P.86 )
-함민복 詩集,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서
함민복 시인의 8년만에 나온 새 詩集을 읽는다.
함민복 詩人, 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찡하다. 세상의 사나움이나
모짐에 대해 화내는 일 없이 그저 가만가만히 살펴보는 시인의 따듯하고 맑은, 큰 눈빛때문일까.
2005년, 10년만의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을 펴낸 데 이어 다시 8년만에 선보이는, 이 다섯번째 시집에는 세월의 무게에 값하는 70편의 수작이 실려있다.
함민복의 詩는 꾸밈없는 삶의기록이다.
수사나 과장 없이 정갈한 언어에 실린,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날 선 눈초리를 잃지 않는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며...마음이 한없이 기쁜 그런 밤이다. 감사하다.
이 시집을 함께 할 사람들이 떠올라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