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어엿한 '셀프'인문학 강좌다. 명문대학 필독서 목록에도. 유명인사의 서재 컬렉션에도 기죽을 필요 없다. 하버드대학교 추천도서 목록 등을 주섬주섬 뒤지다가 번뜩 깨달았다. 이렇게 평생 '타인의 목록'만 넘보다가는, 결코 나만의 '마음속 서재'를 만들 수 없겠구나. 나는 이제 광고나 목차를 보며 책을 상상하지 않는다. 무조건 부딪힌다. 낯선 책을 쓰다듬고 매만지며, 은밀하고 에로틱한 독서의 페티미즘을 즐긴다. 창작이란 이름 모를 독자,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독자를 향한 애틋한 구애의 몸짓이기에, 글이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에 대한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얼마 전 문득 깨달았다. 내겐 '앞으로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의 목록'때문에 '이미 읽은 책들이 놓일 마음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새로운 책에 대한 조바심을 내려놓고 오직 내가 읽은 책들로만 이루어진 작고 아름다운 마음의 도서관을 가꾸기로 했다. (P.11 )
나는 인문학을 열쇠로 쓴다. 타인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나는 인문학을 피난처로 쓴다. 누군가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그를 기꺼이 숨겨줄 수 있는. 나는 인문학을 손수건으로 쓴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보낸 당신의 땀과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한. 나는 인문학을 우체통으로 쓴다. 당신에게 보낼 수 없는 편지들. 주소를 몰라 보낼 수 없는 편지들, 모든 금지된 열망과 이룰 수 없는 꿈들을 적은 편지들. 그 편지들을 이 작고 아늑한 '마음의 서재'라는 우체통에 담뿍 집어넣고 싶다. (P.12 )
그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던 군주는 백성의 미움을 받지 않는 군주, 백성이 두려움 없이 자신의 꿈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장려하는 군주, 백성의 재산을 탐하지 않는 군주, 외세의 침략보다 인민의 숨은 분노를 두려워할 줄 아는 군주였다. <군주론>은 CEO용 자기계발서나 처세술로만 인용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책이다. <군주론>은 권력을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를 향해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한 철학적인 성찰이다. 독자의 비전에 따라 <군주론>은 천차만별의 목소리로 다가갈 것이다. (P.150 )
'운의 원한'을 피하기 위해 리더에게는 어떤 자질이 요구될까. "현존하는 최상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아첨꾼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진실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능력과 행운으로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는 '행운의 여신'을 항상 자기편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 정치의 본성임을, 군주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세의 침략이 아니라 인민의 분노임을 알았던 것이다. 타인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타인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이다. (P.150~151)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를 읽었다.
이 책은 인문학으로 책읽기에 대한 부드럽고 편안하고 번쩍, 생각의 관점을 바꾸어 볼 수 있는
책이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란, 다소 딱딱하거나 왠지 내겐 어려울
것이라는 그런 막연함을 쉽고도 따스한 성찰력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공감력으로 아주 행복하게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 인문학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저자의 말을 빌어 답한다.
-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우리들이, 끝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모든 지식이 인문학이라고. 우리가 굳이 애를 써서 찾아 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타인의 고통과 만나는 것. 그 고통에 우리가 '가해자'나 '공모자'가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 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이 한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믿는다. 당신의 존엄과 나의 존엄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번쩍, 하는 인문학적 교감'의 순간이다.-
봄이 오기 시작하는 순간에, 긴 겨울의 추웠지만 편안하게 겨울잠을 자던 안락함에서 이젠 잠깨야 하는 긴장의 순간, <마음의 서재>가 든든한 선물이 된 듯하다.
요 위의 시트가 구겨져 있으면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듯..이젠, 마음의 시트, 생각의 시트를 반듯이
정리하며 봄을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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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 드라마 <화이트 칼라>를 보다가 실제로 이런 기계가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수백년 전의 고서를 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 특수 유리장에 책을 펼친 채 넣어두고 무려 두 시간마다 딱 한 장만 읽을 수 있도록 책장이 천천히 넘어가게 만든 기계장치였다. 입맛 따라 골라 읽을 수 없으며, 무조건 우직하게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꼼꼼하게 다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속도를 정할 수 없고 아주 천천히 그 책이 보여주는 대로 읽어야 하는 철저히 타율적인 독서, 순간 나는 그 기계가 살짝 탐이 났다. 가끔 나는 책을 너무 빨리 읽게 될까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인터넷 정보들을 마우스의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 빨리빨리 넘겨보는 나 자신이 무서울 때도 있다. 소셜 미디어가 급증하면서 누구나 1인 미디어 하나쯤은 갖고 있지만, 글을 많이 쓰는 대신에 한 편 한 편의 글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려터진 독서 기계를 바라보며 점점 속독과 발췌독에 길들어가는 나의 메뚜기식 독서에 제동을 걸고 싶어졌다. 전부 이해했다 믿고, 다 안다고 믿으며 빨리빨리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깊은 곳에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듯 한 글자 한 글자 새겨가며 읽는 그런 독서가 그립다. 그렇게 천천히 타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마침내 글을 쓰는 행위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타인이 그토록 어렵게 쓴 글을 너무 쉽게 읽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읽어가며 가슴에 새기는 일은 내가 직접 글을 쓰는 행위만큼이나 힘겹지만 뿌듯한 그 무엇이 되
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의 글을 그렇게 천천히 읽어준다면, 서로의 언어를 소중히 다뤄준다면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찢는 오해와 갈등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어렵게 쓰고, 어렵게 읽었다
소셜미디어가 급증함으로써 대중의 글쓰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글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고 글의 본뜻을 깊이 있게 우려내어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글쓰기와 글 읽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우리는 글을 어렵게 쓰고 어렵게 읽었다. 그만큼 글쓰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글 속에 사람의 혼魂이 담겨 있다 여겼던 시대였다. 인터넷이 확산되자 사람들은 좀 더 많은 글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쓴 글을 쉽게 읽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대조차 지나, 쉽게 쓰고 더 쉽게 읽는 시대가 와버렸다. 글쓰기도 쉽고, 아니 쉬운 것처럼 보이고, 글 읽기는 더 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빠른 리액션과 경쾌한 글쓰기만이 지닌 장점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고 진중하게 세상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영역이 줄어든다는 점이 문제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오래 글을 쓰는 사람, 글 한 줄을 쓰는 데도 며칠 밤을 새워야 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평가절하되는 것이 문제다. 그리하여 나는더더욱 진 (P.271~272 )
지한 글쓰기, 심각한 글쓰기를 응원하고 싶다. 한 줄을 쓰더라도, 한 문단을 쓰더라도 마음에 남는 글쓰기, 억지로 읽으라고 권하지 않아도 한참 보고 또 곱씹고 또 되뇌고 싶은 글을 읽고 싶다.
-정여울 [그림자 여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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