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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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P12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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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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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 P31

제사는 산 자들이 정색하며 공연하는 한 편의 연극이며 주제는 기억이다. 창과 문을 열어 귀신을 환영한다는 뜻을 표하고 지방에 조상의 이름을 써서 태운다. 귀신이 어련히 알아서 자기 집을 찾으올 텐데, 뭐하러 지방에 이름까지 써서 태울까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저 영계에는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귀신들이 너무 많아서 지방에 이름을 정확히 써서 태우지 않으면 모든 귀신, 이른바 ‘온갖 잡귀‘가 다 몰려온다는 것이다. 잡초가 이름을 모르는 식물을 의미하듯 잡귀는 이름이 잊힌 귀신이다. 잡귀가 아닌 귀신은 그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가 있다. 이름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불러 초대하면서 제사가 시작된다. - P63

떠난 사람은 루저가 아니라 그냥 떠난 사람일 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도 위너가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 사람일 뿐이다. - P122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 P137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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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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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회사에서 밥 먹을 때는 김밥천국 자주 가지. 하지만 당신이 맛집이랬잖아. 김밥천국이 어디가 맛집이야?"

"원래 남이 차려주는 밥은 다 맛있는 법이야."

영주는 상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주는 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주는 밥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남이 먹다 남긴 게 아닌 정갈한 반찬 두세가지. 산해진미 같은 것이 없어도 딱 그만큼이어도 족하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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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1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붙여 내가 한 밥이 제일 맛없습니다. 밥하기 싫어요. ㅎㅎ 잘 지내시죠.? 오랫만에 인사드리는 듯요.

LAYLA 2025-05-19 18:4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아예 집에서 밥솥을 치운지 1년이 넘었습니다. 얼마 전 생일이라 누가 끓여다 준 미역국을 먹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하루하루는 힘들다 생각하는데 그래도 생일이라 미역국 끓여다주는 사람이 있다니 꽤 잘 지내고 있는거 같습니다..^^
 
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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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면서 살 생각입니까?" 남자가 두 번째 수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질문했다.

"그냥 살려고요." 엘런이 답했다. 드문 일이었다. 엘런은 항상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라,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번 만남은 영원할지, 자신이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두 사람이 탄 자동차 바퀴가 갑자기 튀어 나가는 바람에 반송장이 되어 길가이 널브러지지 않을지 걱정하곤 했으니까.

"현명해지는 거로군." 남자가 말했다.
"나이가 드는 거죠." 엘런은 전보다 행복했고, 만족했고, 그러니 젊어진 셈이었다. - P32

"다들 결혼하잖아요." 엘런은 다소 씁쓸한 듯 말했다. "습관적으로."

"난 세 번 했어." 시드니가 말했다. 자축하는 듯했다.
"기억나는 결혼 있어요?" 엘런이 물었다.
"첫 번째 결혼은 기억하지. 아내는 과학자였어." ...

시드니는 회상에 잠겨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갔으나 엘런은 일찍이 관심을 잃었다. 엘런은 식사와 돈과 일상의 걱정으로 더럽혀진 나날들에서 잘 선별해 낸 특별한 것, 특별한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 P117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어?" 귄이 말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 기분이 상한 엘런이 대꾸했다. 결혼 이야기는 자세히 하고 싶지 않았다. 지위를 획득하려고 아내가 되었을 뿐, 심문받기 위해 결혼한 건 아니었다. - P136

"엘런은 또 아이를 갖게 될 거야" 바비가 말했다. "아니면 다른 걸 갖게 되겠지?"

"무슨 말이야?" 엘런이 말했다. 바비는 잠자리를 목적으로 엘런을 찾아온 걸까?

"엘런도 알잖아." 바비가 말했다. "슬럼가와 찌꺼지 더미와 똥무덤에서도 무언가가-예쁜 것이-탄생하는 걸 그간 많이 봤잖아. 저 거대하고 경박한 나무 보여?" 바비가 탈의실 뒤로 보이는 야자수를 가리켰다.

"정말 경박해" 엘런이 울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야." 바비가 말했다. - P184

"내일 아침에 피우게 한 개비만 남겨 줄래요?" 엘런이 부탁했다. 휴느ㄴ 한 갑을 통째로 남겼다.

"하나면 되는데." 엘런이 말했다.
"난 가는 길에 사면 돼요." 휴는 용서의 의미로 살짝 미소지었다. 잘생긴 남자였다.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는 사랑하기 좋은 여자가 12월 하늘의 별만큼 무수했다. 엘런은 이 모든 것이 어찌나 공허한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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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장들 - 한 줄의 문장에서 러시아를 읽다
벨랴코프 일리야 지음 / 틈새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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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러시아 사람들의 자랑이다. 혹여 외국인이 러시아 말을 배운다고 하면 바로 푸시킨이나 다른 유명한 작가의 명언을 읊으면서 러시아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런 아름다운 언어로 쓴 문학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한국 문화와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 나에게 박경리 작가의 토지 같은 작품을 언급하는 한국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P11

사랑 앞에서는 나이가 고개를 숙인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 P76

러시아 문화에서 가장 멸시하는 인생은 ‘평범함‘이다. 평범함을 경멸하고 깔보며 비웃는다 ...‘제대로 살거나 죽어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러시아 문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해 왔다. - P207

진짜 남자는 여자의 생일은 꼭 기억하지만 나이는 절대 모르는 사람이다. -파이나 라녭스카야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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