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노트 2
폴 크리스토퍼 지음, 임선희 옮김 / 반디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크롤리와 피터의 죽음이후 핀과 발렌틴은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풀어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연인으로 발전해나가는 두 사람.  중간중간에 암살자인 거짓신부가 찾아다니는 프레드에 대한 단서들이 드러나는 가운데 소설은 갈 곳을 잃어버린 듯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미켈란젤로나 그의 드로잉을 중심으로 썼더라면, 마치 다빈치코드나 비밀의 만찬처럼 그 본질에 접근했더라면 더 재미난 소설이 되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미켈란젤로의 노트에 관한 비밀을 그 시대로 끌고 가서 풀어내면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사실감 있는 역사추리물이 더 흥미를 유발해내지 않았을까. 

이 소설속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라고 작가가 지정해놓은 한 유명 화가의 노트는 방향을 잃었다. 꼭 그의 노트라는 설정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리. 라 그라지에의 산 지오바니 올로페니오 수녀원에서 자란 프레데이코 보뜨는 1946년 6월 뉴욕에 도착했다. 이젠 60대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는 그를 찾고 있는 암살자. 그는 바로 에우게니오 파첼리 즉 교황 피우스 12세의 아들이었다. 교황이 질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 그래서 그는 표적이 되었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글감이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렇게만 엮어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이야기가 반감된 이유는 함께 이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닐까. 

수채화를 그리다보면 그럴때가 있다. 모자란 듯 해서 붓으로 더 덧칠을 해대면 아예 탁해져버려 수채화 본질의 투명성을 잃는 그런 때. 이 소설의 안타까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마치 후회가 가득해진 수채화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시작은 참 재미있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템플기사단의 검
폴 크리스토퍼 지음, 전행선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템플기사단의 검]은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작가 폴 크리스토퍼에 대한 기대나 스토리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템플기사단이라는 제목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성단기사단 그리고 프리메이슨. 이들은 여러 영화나 책을 통해서도 검증되었듯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거리이기에 그들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일은 마치 추리소설풀이에 참여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템플기사단의 검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검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점층적으로 응집력있게 몰아가는 시간적 추적이 있어야 했는데, 소설에는 그것이 빠져 있었다. 극적인 긴장감과 속도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에 있었던 그것이 이 책에는 빠져 있었다. 실제로 흥미로울 수 있는 소재였는데, 몇 가지 이유로 이 책은 읽는 동안 약간의 지루함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전개방식이 약간 지루하더라도 캐릭터가 명확하다면 그래도 책은 끝까지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닥터 홀리데이와 페기 블랙스톡은 그다지 매력적인 화자로 와닿지 않았다. 김전일이나 유가와 교수 혹은 인디아나 존스, 로버트 랭던 등은 이야기의 재미를 배제해 두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브랜드 네이밍 가치를 지닌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이 어떤 사건에 뛰어들든 그들이 빠져드는 사건들이라면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힘. 캐릭터의 힘을 작가는 잊어버린 것일까. 

템플기사단의 검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호기심으로 다가섰다가 약간의 실망감으로 읽기를 끝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발 작가의 다음 작품은 이 두가지 만큼은 재미를 기대할 수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헌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것조차 소설의 일부일까. 아니면 정말 진실함이 묻어난 헌사일 뿐일까. 책의 첫장은 보통 "...에게 바칩니다"라고 간략히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파울로 코엘료는 헌사를 한 장 반이나 작성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구구절절하게 적어야 했을까. 

헌사를 보면 십 년 전, 영적 탐색을 목적으로 한 순례의 길에 대한 후회가 담겨져 있다. "시간 낭비"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람이라는 단체를 떠날 생각까지 했던 그에게 마스터는 순례의 길을 추천했는데, 그 길에서 페트루스를 만났다. 그리고 처음의 후회와는 달리 그 깨달음의 의미를 알게 되고 쓴 책이 출판되었을때 페트루스는 연락을 거절했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세월의 힘에 못이겨 연락이 끊긴 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저자는 이 책을 그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가 장장 한장반이나 되는 페이지 속에 설명되어져 있다. 그래서 이 헌사가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순례자의 길은 고난와 가난이 함께 하는 길이다. 알고자 떠나는 길이 아니라 깨닫고자 떠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처음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칼을 찾기 위한 목적성 여행을 떠났으며 그것으로 인해 여행길이 내내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아주 사소한 결정 하나라도 당신 인생에 관해 다른 사람이 결정하도록 용납할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아내의 말을 빌어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고집스러운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로마의 방랑자"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길, "수상가"라고 불리는 예수의 성묘로 향하는 길, "순례자"라고 불리는 사도 야고보의 성 유골에 이르는 길. 이 세가지 순례길 중에 그는 순례자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온통 검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그 본질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 검은 하나의 결과일 뿐인데,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길에서 깨달음을 발견해냈다. 순례자의 길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기적에 가까운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같아 보이면서도 결코 같지 않아졌다. 이것은 진실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클라베
로베르토 파치 지음, 전영미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conclave. 콘클라베는 "열쇠로 잠긴 방"이라는 뜻이다. 라팅어로, 가톨릭 교회의 교황 선출 선거 방식을 의미하며 선거에 참여하는 추기경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선거를 진행한다.  이미 콘클라베는 대중들 앞에 많이 드러나 있다. 여러 작가들에 의해 소설화되고 영화화 되었기 때문이다. 굴뚝으로부터 흰연기가 나올때까지 수차례 계속되는 검은 연기의 향연. 그 지루함이 끝나고나면 가톨릭은 가장 지지받는 수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흔히 종교라고 하면 순교와 희생, 봉사를 떠올리기 쉽상이지만 이젠 종교도 정치권력이 배여있는 집단임을 어른이 되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모임 속에는 반드시 그 권력구도가 생성되며 종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다. 

로베르토 파치의 소설 [콘클라베] 속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희생적이면서 믿음,소망,사랑을 실천할 하나님의 숭고한 종을 뽑는 의식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들의 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추기경을 천거하고 반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새 교황의 선출을 알리는 하베무스 파팜이 공표될리 없었다. 

127명의 추기경들이 모두 투표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그럴 수 없는 것이 80세 이하의 추기경들이 모이다보니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들도 속출했다. 124명이 투표해 참석했던 11회차 투표 결과도 무산되면서 12회차 투표를 준비하던 추기경들은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반드시 이탈리아에서 교황이 선출되어야 한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해오던 알폰소 체리니 밀라노 대주교나 교회에서 반대하는 마술에 심취한 레오폴드 탄자니아 주교, 회의에 불참하곤 하는 압둘라 조셉 레바논 주교 등등 많은 개성있는 대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의견일치의 길은 멀고도 험해 보였다. 

하지만 콘클라베 도중 이상현상들이 계속되고, 결국 투표절차 없이 만장일치로 에토레 말베치 토리노 대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기적같은 장면을 상상했었던 것 같다. 투표도 없이 모두의 마음에 신심이 일어 동의하는 장면. 하지만 반대로 그 장면이야말로 글로 읽는 순간 가장 모순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종일관 지루하게 이어지던 콘클라베의 끝이 결국 이렇다니...허무감까지 밀려왔다. 댄 브라운 식의 종미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좀 더 숭고한 결말을 기대했었는데, 역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기에 작품에 대한 실망이 밀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여자로서는 절대 알 수 없을 콘클라베에 대한 좋은 지식들을 이 책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상상이 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번 교향곡
조셉 젤리네크 지음, 김현철 옮김 / 세계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만약 신이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아간 일이다."
                                                                    -로맹롤랑-

그가 청각을 잃었기 때문에 악성이 더 뛰어나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몇 번 쯤은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장애가 있어도 뛰어넘을만큼의 천재라면 정상적인 귀를 가졌을때엔 얼마나 더 대단한 것들을 토해낼 수 있을 것인지는 간과해버린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는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은 늘 모른다.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들으면서, 코로 맡으면서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고 마시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느낌들이 예술가들에겐 그저 지나치는 하루의 일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공감각적인 기능들이 그들의 예술혼을 불태운다는 사실을 평범한 사람들이 알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귀를 거세당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음악을 들을때마다 애잔하다. 

조셉 젤리네크는 후작 [악마의 바이올린]을 통해 알게 된 작가였다. 하지만 그 작품보다 전작인 [10번 교향곡]이 훨씬 더 흥미롭다. 지루한 부분도 없을 뿐더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모르는 이야기가 뇌를 자극시킨다. 

베토벤. 그의 불행한 일생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인전을 통해서, 각종 책과 영화를 통해서도 알려졌던 사생활. 하지만 정작 알려진 것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도 미스테리한 일이다. 그 많은 여인을 사귀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의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단 하나의 인물이 아닌 여러명일지도 모를 그녀 또한 그녀를. 게다가 그의 조카가 그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설은 이젠 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 가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잘 알려진 한 작곡가의 삶에 어떤 흥미로움이  더 있다고 조셉은 그를 모델로 삼았을까. 

그는 "누구를"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을 목표로 했기에 성공한 셈이다. 그의 10번 교향곡. 그것을 둘러싼 비밀과 진실에 관해서. 우리는 이쯤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의 음악에 대해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게 된다. 푸욱-.

서른 다섯의 다니엘 파니아구아는 역사음악학 교수이며 베토벤이 전공인 사람이다. 그의 논문은 언제나 베토벤을 향해 열려 있고, 이번 사건 또한 베토벤이 연류된 사건이기에 그는 뛰어들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 이 소설에서 베토벤이 프리메이슨이였는지 일루미나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를 위한 작곡이었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10번째 교향곡의 원본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손에 있는지가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사실 베토벤을 좋아하지 않거나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장치들이 책 속에는 가득했다. 살인사건이나 사라진 악보를 찾는다는 설정은 목마른 미스터리를 채우기에, 애너그램과 알베르티의 암호바퀴,트리토누스는 지적호기심을 채워줄만 했다.

흔히 음악은 시와 결부시키지만  소설 속에서 음악은 하나의 약속이고 수학이었으며 문학이엇다. 그것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