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의 기적
마르코 레이노 지음, 이현정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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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크리스마스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365일 중에 단 하루, 그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 산타클로스.
어린 시절엔 그를 믿다못해, 꾸벅꾸벅 졸면서도 기다리곤 했는데, 어른이 되면서 그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산타클로스를 우리곁으로 다시 데려다 주었다. 

잘 있어, 우리집!!
어린 니콜라스가 집을 떠나게 된 이유는 혼자 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곱 살 인생에 니콜라스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바다는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아름다운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바다의 잔인함이 니콜라스의 가족을 삼켜버렸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여동생 아다까지.

아주 작고 가난한 어부 마을, 크로바요키.
삶이 넉넉치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번갈아가며 니콜라스를 1년씩 돌보기로했다.  마을사람들은 니콜라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크고, 제일 사랑하는 것을 잃은 니콜라스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1년을 머물던 집을 떠나게 되면서 니콜라스는 그 집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그는 매년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만들었고, 그 선물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 앞에 전달되었다. 이런 니콜라스를 도운 사람이 함께 살게 된 이사키 아저씨였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니콜라스와의 생활로 달래고 있었다. 슬픔이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니콜라스가 떠났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이들에게 배달된다. 그의 따뜻한 마음과 정신이 남아 마을에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코르바요키 마을 전체가 니콜라스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유년시절 우리 곁을 떠났던 산타클로스는 이렇게 어느새 우리 마음 속에 되돌아와 있었다. 따뜻한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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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음모 - 가장 성스러운 곳에서 가장 참혹하게!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변선희 옮김 / 뜨인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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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엔 보이지 않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며 잘 안다고 확신하는 것 중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작가는 은연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대사화해서 소설에 숨겨둔다. 이것 역시 작가가 가지고 있던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확신하는 것 중 우리가 모르는 것들. 역사 속엔 분명 그런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1478년 성당에서 일어난 음모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가문의 경제력과 탁월한 통찰력. 남자 미실이라고 불려도 좋을만큼 최고의 지도자였던 피렌체의 "위대한 로렌초"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꽃미남 남동생 줄리아노가 4월의 음모의 타킷이 될 줄은 음모자들밖에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운명으로부터 사랑받았던 그가 피렌체를 오늘날까지 회자될 예술의 도시로 만들어 놓은 일들을 보았을 때 그는 제거 대상이기보다는 보호대상이 되어야 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질투를 허락하였을 때엔, 한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4월의 음모 속에서 로렌초는 아끼던 남동생 줄리아노를 잃는다. 그저 한 차례 칼에 찔려서 죽은 것이 아니라 짐승을 해부하듯 찢어발겨 놓은 동생의 시신. 그리고 극적인 탈출. 이제 메디치 가의 수장은 처철한 복수를 시작했다.

소설은 처음부터 로렌초를 중심선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웬일인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들을 재조명하고 있었다. 

복원은 해석의 작업이다. 라는 말처럼 그 당시 그림 속에서 과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또한 흥미롭지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역시 과거 속에 있다. 그 해 4월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것이 요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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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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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여자, 누경...

누경. 그녀는 사막의 한 가운데 서 있다. 
기름지고 비옥해서 씨를 뿌렸다가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토인 땅이나 건물을 올려 많은 많은 수익을 내는 도시의 땅이 아닌  심심하고 밋밋한 사막의 땅. 그 땅엔 가끔 바람이 불지만 그녀는 언제나 목마르고 쓸쓸하다. 

기다림과 목마름이 계속되던 그녀의 삶 속에 "같이 섬에 가실래요?"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옛날 그 남자처럼. 그와는 가지 못했던 약속의 땅, 섬에 이 낯선 남자와는 갈 수 있었다. 그 남자와는 섬보다 남자가 중요했지만 이 남자와는 남자보다 섬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누경,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이 남자도 누경에게 끌린 남자였다. 세상의 모든 남자를 가질 수 있어도 단 한 남자, 그토록 원하는 남자는 그녀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 점이 누경을 매마르게 만들고 있었다. 사막의 한가운데 던져놓고 기다리게 만드는 남자. 그래도 그에 대한 기다림은 멈출 수 없는 누경. 

그런 누경을 두고 어떤 남자는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말했고, 실의에 빠진 채 취미도 없이 홀로 늙어갈 가여운 여자라고도 말했으며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살아버린 노파같이 이미 텅텅 비었다고도 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구제 불능의 잠을 잘 여자라고 하거나 홀로 죽어서 고양이에게 먹힐 여자라고까지 악담을 늘어놓는 남자도 있었다. 


두 남자, 기현과 강주...

그들 모두 누경을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심장에 새겨진 "얼룩"을 보지 못하는 남자들. 누경은 그런 남자들에게 관심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 남자가 계속 비집고 들어오려고 한다. 섬에 함께 다녀온 남자였다. 

사랑과 결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비혼족인 친구 상미조차 인정해준 남자 기현. 처음부터 끌림이 있었다는 기현을 두고도 누경은 사막을 건널줄을 모른다. 그녀에게 강주는 기다림인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인 존재였다. 

서강주. 엄마의 사촌의 아들인 남자. 누경이 열 여섯일때 결혼한 이 남자와 누경 사이를 정의할 단어가 사전 속에는 없다. 사랑이라고하기엔 모자라고 불륜이라고 하기엔 넘친다. 분명 누경에겐 사랑이지만 강주에겐 불륜인 관계. 그 어떤 교집합도 없는 관계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는 약속을 한번도 지킨적이 없었다. 치마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섬에 함께 가자는 약속도, 전화조차도 먼저 걸 수 없게 만드는 남자. 이 남자를 기다리면서 누경은 점점 사막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누경을 따라 걷는 걸음...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누경의 그림자가 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인생을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걸으면서 때로는 그녀의 속이 되고, 때로는 그녀의 겉이 되면서 누경의 눈으로 기다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친구나 가족조차 이해못할 그녀의 행적들을 그림자이기에 함께 나누면서 걷는다. 읽었다기 보다는 걸었다는 표현이 맞을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  

누경을 따라 걷는 걸음은 언제나 일정하다. 한 걸음도 늦춰지거나 빨라짐이 없다. 항상 같은 속도다. 그래서 나는 누경이 더 안타깝다. 인생은 늘 같은 속도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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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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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책읽기를 시작하면서 최고의 걸작을 만났다.

마치 번역본을 읽는듯한 완벽한 느낌과 동시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물론 우리의 소설도 훌륭하다. 우리의 소설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보통 우리 작가가 외국에 대한 소재를 쓴다하더라도 상상력은 그것을 절반쯤은 접게 만들곤 했다. 작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작품의 배경을 상상하는데 제한을 두게 하거나 그 상상의 무대가 한국으로 그려지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천년의 침묵]은 완벽하리만큼 고대 그리스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현자 피타고라스의 이름은 회자되지 않는다. 그저 현자라고만 밝혀지며 그는 몇몇 단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충성을 맹세할만큼 우월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수학사에서 피타고라스는 자주 불려지는 이름이다. 수학시간에 계산이 서투르거나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있어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들어보지 않은 이들은 없다. 여러 법칙들이 있지만 그 만든 이를 일일이 다 기억해놓지 못해도 단 한 사람, 피타고라스만큼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랬던 그가 학문에 대한 욕심이 앞서 사람을 죽였다니... 그것도 직접해한 것과 타인에게 사주하여 해한 것. 학문에 대한 탐구심이 지나쳤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검은 마음이 학문을 향한 푸른 마음과 합쳐졌다고 감히 말해도 좋을까.

 

현자가 머무는 곳에서 한순간에 음모의 도시로 타락해버린 크로톤. 학파라는 것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것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해하게 된 사실이었다. 보통 철학자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학파"라는 것들과 대면하지만 수학에서도 "학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 생소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형의 억울한 죽음을 쫓아 "학파"로 잠입한 아리스톤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스케일은 단순한 살인사건의 범위를 넘어선다. 인간으로 살면서 권력과 명예욕 앞에서 우리의 자세에 대해 저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의 화두가 자꾸만 떠올려지는 이유는 인간은 욕망앞에서 참 나약하다는 것을 발견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그 누구도 자신의 욕망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었다. 애욕이든,명예욕이든, 물욕이든 간에...

 

인간이기에 그런 것인가보다. 인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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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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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을 좋아하던 아이에게 어느날부터 아이스크림이 공포의 대상이 되면 세상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닐까. 좋아하던 것이 싫어질수는 있지만 그것이 무서워진다면 세상은 더이상 재미있는 놀이터가 아닐 것이다.

 

[책이 되어버린 남자]는 책을 좋아하는 내게 최악의 책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던 대상을 잃어버렸다.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이제 더이상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이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한은.

 

"사망"

 

어느 여인이 쓰러져 죽은 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잡은 남자는 팔지 않겠다는 상인의 말에 그 책을 훔쳐 버렸다. 그의 도둑질은 운이 좋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남자의 이름은 비블리였다.

 

비블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나 이후부터 그는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겨우 마흔살인 그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책을 훔치고 나서였으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애서가 비블리는 어느새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체중도, 신체도 아무 이유없이... 그러던 어느날 그는 책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 스스로가 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린 시절 게으름뱅이가 소가 된 동화는 읽어본 적 있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이 되어 버리다니...책이 된 비블리의 모험이 흥미진진하기는 했지만 그것 뿐이라면 이 책은 근사한 모험담으로 남아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주인을 옮겨다니던 비블리는 결국 무덤에서 환생했으나 책에서 나오자마자 어느 여인처럼 죽어버렸고, 그 책은 또 다른 여인에게로 건네졌다. 로마나에게.

로마나 역시 책을 읽고선 머리맡에 둔 채 잠들어 버렸다.

 

우리는 알 수 있다. 로마나 역시 책이 흡수하리라는 것을.

 

공포는 사실 우리 곁에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귀신이 나오거나 누군가가 사라지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러울 수는 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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