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사람들이란 원래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라 할 수 있죠. 나는 그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뒤틀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는 눈조차 전혀 다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곁눈질해 보고, 언제나 겁먹은 눈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혹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꼴사나운 놈이라고 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거나 아닐까, 이쪽에서 보면 어떻고 저쪽에서 보면 어떨까 하고 나를 흉보고 있는 게 아닐까?―이런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이고 따라서 누구한테도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엉터리 문학가들이 별의별 수작을 다 늘어놓는다 해도 가난뱅이임에는 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140~141쪽, 하서 출판사.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경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다고 느껴지는 글을 발견할 때 나는 감탄한다. 이 글을 읽고도 감탄했는데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을 경험한 적이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난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래전 그의 다른 작품 「죄와 벌」을 읽을 때 이미 그가 탁월한 역량을 가진 작가임을 알았다. 살인자가 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서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살인자의 심리를 잘 알아야 할 만큼 작가는 심리학자여야 할 것 같다. 





















**

공연을 하는 서커스단에서 지내는 난쟁이는 키가 작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난쟁이가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느 날 키가 커져 버렸다. 95센티미터였던 그의 키가 무려 175센티미터가 되었고 게다가 아주 잘생긴 미남으로 변했다. 난쟁이의 이름은 발랑땡이었다. 발랑땡은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동료들의 공연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발랑땡은 공연장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제르미나 양을 바라보았다. 곡마사는 말 위에 서서 팔을 관중 쪽으로 뻗어, 갈채에 웃음으로 답하고 있었는데, 발랑땡은 그녀의 웃음이 결코 자신에게 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고독이 지겨웠고 수치스러웠다. 그는 조금 전에 빠따끌라끄, 자니도 형제들, 줄넘기 곡예사 프림베르 양, 피프를랭과 일본인들 등 써커스단의 동료 대부분이 무대 위에서 줄지어 행진하는 것을 본 터였다. 그들의 공연이 모두 그를 새로이 좌절하게 했다.

“끝났어.” 그가 한숨지었다. “결코 공연장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야. 이제 바르나붐 써커스단에 나를 위한 자리는 없어.”(마르쎌 에메의 ‘난쟁이’에서)

-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280쪽. 


서커스단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키가 크고 미남인 것은 인생을 사는 데 유리한 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커스단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소설의 글감이 될 수 있는 이유일 듯하다. 


키가 커진 그는 서커스단에서 쓸모가 없어진 존재가 되었으므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 뒤 난쟁이였던 시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가족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경험도 없으니 생계를 위해 취업하기조차 힘들 테니 말이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 수록된 마르쎌 에메의 소설 ‘난쟁이’는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것, 무엇이든 그 가치는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난쟁이의 키가 커진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뒤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풀어 가는 재미있는 단편 소설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다른 작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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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06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한 작품이예요.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읽어보고 싶네요

페크pek0501 2025-02-06 22:02   좋아요 2 | URL
가난한 사람들, 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저 역시 좋아합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에는 14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데 하나씩 읽어 보는 재미가 있답니다. 330쪽까지 읽었어요. 추천합니다!!!

서니데이 2025-02-06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 은행잎이 떨어진 유리창을 보니 가을에 찍은 사진이네요. 천장도 일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 보면 밝은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것 같았는데, 없어진 이전의 것들을 아쉬워한다면 새로 생긴 것들을 좋아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페크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5-02-07 12: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지난 가을에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언젠가 써먹어야지 했는데 이제 올렸네요. 하나의 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표현, 참 좋네요.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요. 서니데이 님도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2025-02-07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7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8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5-02-07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시절이 길었대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자신이 가난했다고 다 그렇게 쓸 수 있는건 아니죠. 도스토예프스키니까.... ㅎㅎ 마르셀 에메라는 작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니 또 좋네요. ^^

페크pek0501 2025-02-08 13:08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창비세계문학단편선, 덕택에 새로운 단편을 알게 되는 기쁨이 있어요. 국가별 시리즈라서 하나씩 읽어 볼 생각입니다. 위의 책은 프랑스편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2-12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궁금하네요ㅎ

도스토옙스키는 심리묘사의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ㅎ 최근 톨스토이도 읽고 있는데 역시 심리묘사의 천재더라고요^^

페크pek0501 2025-02-12 16:11   좋아요 1 | URL
제 고민 중 하나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시리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어떤 것을 읽느냐, 예요. 읽을 책이 많아 몇 달째 고민만 합니다.ㅋ^^

고양이라디오 2025-02-13 21:12   좋아요 1 | URL
행복한 고민이네요ㅎ 전 <안나 카레니나> 읽고 있는데 너무 좋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생책이고요.

페크pek0501 2025-02-14 11:21   좋아요 1 | URL
행복한 고민, 맞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책으로도 영화로도 봤습니다. 명작이죠.
요즘은 카라마조프~쪽으로 기울여 있습니다. 올해는 신중하게 책을 사기로 했어요. 잘 될지 모르지만요. 오늘 책을 주문했는데 미우라 아야코의 책만 세 권을 주문했어요. 오디오북 듣다가 내용이 너무 좋아서요. 카라마조프~를 읽으셨군요. 아직 읽지 않은 제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ㅋㅋ^^

고양이라디오 2025-02-14 19:01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승자네요^^

저도 안나카레니나 아직 다 안봤으니 쌤쌤이네요ㅎ

페크pek0501 2025-02-16 10:58   좋아요 0 | URL
예, 쌤쌤입니다. 쌤쌤, 오랜만에 들어 봅니다.ㅋ^^

金慶子 2025-03-04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보다는 ‘도스또에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페크pek0501 2025-03-06 11:34   좋아요 0 | URL
아,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두 작품 중 무엇을 읽어야 하나, 하고 고민했었어요. 까라마~로 택했는데 그러길 잘했네요. 일단 밀린 책부터 읽어 놓고 까라마~를 사야겠어요. 좋은하루보내십시오.^^
 


꼬리 

                       이병률


네발 달린 짐승에게 

꼬리가 있는 이유는


​좋은 풍경 앞에서

다리 네 개를 잠시 접고

꼬리라도 깔고 앉아 풍경이라도 보라는 이유


​네발 있는 동물에게

꼬리가 달린 이유는


다급히 기다리는 것이 있을 때

날개 삼아 꼬리를 펼쳐놓고

기다림을 기다리라는 이유


​양지바른 자리에

천 리를 깔고 앉아

만 리를 기다리는 운명을 명심하라는 이유


-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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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5-02-06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추워서인지, 초록색 잎이 있는 화분과 공간이 편안한 느낌이 들어요.
사진 잘 봤습니다.^^

페크pek0501 2025-02-07 13:05   좋아요 1 | URL
왠지 모르게 이 사진이 맘에 들었어요. 이 사진도 어느 카페에서 찍은 사진일 듯해요. 카페의 뒷문일지도 모르겠어요. 항상 폰을 휴대하고 다니니 사진으로 남기기가 간편합니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친정에서 올 때 조심히 왔어요. 눈길에서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어요.^^
 

노인은 후처의 학대에 못 이겨 그 괴로움을 잊으려고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노인은 남의 집에 얹혀사는 아들 포크로프스키를 사랑했다. 아들을 일주일에 두 번씩 꼭꼭 찾아왔으며, 아들의 얘기 외에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포크로프스키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한 청년이었다. 책을 좋아했으나 공부를 계속하기에는 몸이 약했다. 결국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장례식은 안나 표도로브나가 맡아서 치렀다. 몹시 초라하고 값싼 관을 사고, 짐마차도 불러왔다. 장례식 비용에 충당한다며 안나 표도로브나는 그의 책과 물건을 모두 가져갔다. 노인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시끄럽게 욕설을 퍼부으며 그 책들을 빼앗아 가지고 주머니에 가득 쑤셔넣고 모자 속에까지 넣고는 사흘 동안이나 가지고 다녔다.(81쪽)


아들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므로 이제 유품이 된 그것들은 노인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 되었으리라. 


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이고 못을 꽝꽝 박은 다음 짐마차에 실었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81쪽)


다음 글을 읽으면 아들의 관을 실은 마차를 쫓아가는 노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주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머리는 비를 맞아 흠뻑 젖어 있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진눈깨비가 사정없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낡아빠진 프록 코트 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나오고, 손에는 무슨 책인지 커다란 책을 한 권 부둥켜안고 있었다. 길 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노인의 주머니에서 진흙탕 위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책이 떨어졌다고 가르쳐 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81~82쪽)


「가난한 사람들」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이같이 슬픈 광경이 또 어디 있겠는가? 기억에 남아 옮겨 적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하서 출판사의 책인데 절판된 모양이다. 

오래전에 구매했다.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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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1-20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지금은 없어진 삼중당 문고로 읽었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책 중 하나랍니다.
인용해주신 부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머리 속에 그려지네요.

페크pek0501 2025-01-21 10:38   좋아요 0 | URL
아, 나인 님은 읽으셨군요. 저는 오래전에 사 놨는데 앞부분만 밑줄이 처져 있는 걸로 보아 완독을 못한 것 같아요. 책이 두껍지 않아 금방 완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식을 잃은 사람처럼 가엾게 느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어요. 이런 명작을 이제야 읽고 있네요. 좋은하루보내세요.^^

coolcat329 2025-01-21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참 강렬했어요. 뒤에 나오는 단추 에피소드! 아 ㅠㅠ

페크pek0501 2025-01-24 15:21   좋아요 1 | URL
강렬한 소설이지요. 단추 에피소드까지는 제가 읽지 못했나 봅니다. 어제 읽은 부분은 고골의 ‘외투‘를 읽고 나서 그 평을 쓴 마카르의 편지, 인데 슬픈 얘기지만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요. 외투에 대해 그렇게 엉뚱하게 읽을 수도 있다니 참 재밌는 소설입니다. 저도 외투를 서너 번 읽은 것 같은데 읽을 적마다 해석이 달라져서 참 헷갈리는 소설로 기억합니다. 아, 멋져요!!

coolcat329 2025-01-24 15:2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 부분도 진짜 웃겨요. ㅋㅋㅋ

페크pek0501 2025-01-24 15:54   좋아요 1 | URL
고골의 ‘외투‘에 대해 평을 쓴, 마카르의 편지 중에서 일부 소개할게요. 혼자 보기 아까워요. :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소설을 쓰는 것일까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이걸 읽는 사람 중에서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 외투를 사 주겠다고 나서는 친구가 생길까요, 장화를 새로 맞추어 주는 친구가 나타날까요? 천만에, 독자는 이것을 다 읽고 나면 다시 그 다음을 요구할 뿐입니다.(중략) 하기는 작자가 끝에 가서는 생각을 달리 먹고 관대하게 취급했더군요.(중략) 훌륭한 시민이었다. 자기 동료들로부터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중략)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바렌카, 나는 이 작품이 매우 못마땅하다는 것을 정식으로 밝혀 두는 바입니다.
- 저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용^^

감은빛 2025-01-23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난한 사람이라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씀처럼 정말 눈 앞에 그 모습이 그려지는 묘사네요.

자식의 죽음이라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겠지요.
그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살면서 절대 겪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자식을 먼저 잃는 일이겠지요.

이 글을 읽으면 자꾸 아까운 목숨들을 잃은 대형 참사들이 떠오르네요.
세월호도, 이태원도, 이번 비행기 참사도 너무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요.
가장 안타까운 사고였던 씨랜드 참사도 떠오르구요.
세상에 그 어린 아가들이 불 속에 갇혀서......

에휴, 괜히 기분이 더 쳐지네요.
책 소개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5-01-24 15:16   좋아요 0 | URL
요즘은 물가가 오르고 해서 거의 다 가난한 것 같습니다.
슬픔이 배어 있는 듯한 소설이지요. 쉽게 쓴 듯하지만 묘사가 뛰어납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게 자식의 죽음일 것 같아요.
대형 참사 소식을 접하면 그 유족이 그 아픔을 어찌 견디고 살지 헤아리게 됩니다.
좋은 소설이 너무 많아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다 읽고 싶네요.
댓글 고맙습니다.^^

2025-01-25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1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6 0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6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뉴욕대 심리학자인 가브리엘레 외팅겐은 25년 넘게 목표 설정과 성공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그녀는 한 연구에서 체중 감량을 원하는 여성들을 관찰했는데, ‘감량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높은 사람이 실제로도 가장 많이 체중을 감량할까’ 하는 점이 연구의 포인트였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여성들보다 의심이 많았던 여성들이 훨씬 더 목표에 근접했던 것이다. 왜일까? 후자는 많은 방해 요소가 존재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훨씬 현실적이었고 체중 감량을 위해 준비한 규칙도 잘 지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른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 마티아스 뇔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69~70쪽. 


자기의 목표 달성에 대해 자신감이 넘친 사람들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다. 자신감이 넘치는 이들은 좋은 결과를 얻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복잡한 변수들을 간과할 만큼 판단력이 흐리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신감이 없는 이들은 그 변수들을 고려할 만큼 판단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낼 듯싶다.    



*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스케줄은 뭐지?’하고 탁상 달력을 본다. 이때 그날의 날짜에 스케줄이 적혀 있지 않아 외출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 기분이 좋다. 밖에 나가기 싫어서다. 친정에 가고, 강좌를 들으러 다니고, 스터디 모임에 나가고, 영화토론 모임에 나가고, 발레를 하러 가거나 걷기 운동을 하다 보면 집에만 있는 하루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떠올려 보니 학창 시절에도 비활동적이었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가는 게 달갑지 않았고, 음악 시간에는 음악실로 이동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내가 즐기는 외출이 하나 있긴 하다. 가끔씩 글을 쓰러 노트북을 가지고 집 부근 카페에 가는 일이다. 카페에서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노트북을 열고 있으면 나만의 한가로움을 맛볼 수 있어 힐링의 시간이 되고, 카페의 시끄러운 소음과 음악이 오히려 글쓰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며칠 전에도 카페에 가서 글을 썼다. 내가 가는 카페에는 나처럼 노트북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카페 방문 인증 숏.(규범 표기는 ‘인증 샷’이 아니라 ‘인증 숏’이다.)



**

방 안에 있던 실내 자전거를 버렸다. 긴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은데 그것이 건강상 좋지 않을 뿐더러 엉덩이가 아프다. 그런데 실내 자전거로 운동을 할 때면 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실내 자전거를 없애고 대신에 발레바를 구매했다. 내가 연습하고 싶은 동작이 있어서 발레바가 필요했다. 요즘 발레 동작을 배울 수 있는 유튜브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으니 발레바가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 


발레바 구매 인증 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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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1-20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레를 꾸준히 하시네요. 제 친구 중에도 발레를 배우는 친구가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 하는데도 자세와 스트레칭에 도움이 된다면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권하더라고요.
요즘 무릎이 안좋아서 병원에 잠시 다녔는데 무릎에 부담이 적은 운동으로 실내자전거를 권하기에 주로 러닝머신 하던 저는 실내자전거로 바꿔야 하나 생각하는 중이어요.

페크pek0501 2025-01-21 10:28   좋아요 1 | URL
발레 배우기 전엔 헬스, 다녔는데 어찌나 시간이 안 가는지 포기했어요. 발레는 80분간 하는데도 시간이 잘 가는 거예요. 코로나 전부터 배웠는데 코로나 때 쉬고 2021년 가을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발레의 장점은 스트레칭을 함으로써 우리가 잘 안 쓰는 근육을 쓰게 해 주고, 어깨가 굽지 않고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주고, 땀이 많이 나고, 제 키를 1센티미터 늘려 줬다는 점, 유연성을 키우는 데 최고. 저도 주 1회 하고 있는데 다음달엔 주 2회로 늘릴까 하고 있어요. 실내자전거도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엉덩이가 아파서..ㅋ

서니데이 2025-01-20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몇년 전 실내 공사를 하면서 실내 자전거를 정리했는데, 요즘에 운동량이 적어서 새로 살 지 고민되네요. 근데 사면 또 쓰지 않을 것 같아서, 금방 결정을 못 하겠어요. 페크님은 발레도 꾸준히 하고 계시니 집에 하나 있으면 잘 쓰실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5-01-21 10:30   좋아요 1 | URL
실내 자전거를 애용할 땐 저녁만 먹으면 올라가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티브이를 보는 거죠. 그런데 저는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앉지 말자, 로 정하고 자전거를 버렸어요. 발레바를 사 놓으니 뿌듯하네요.^^

희선 2025-01-21 0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레바가 있으니 집에서도 발레 동작을 하시겠습니다 집에서 연습하면 더 잘하시겠습니다 저거 보니 발레 안 해도 운동하기에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리 스트레칭 같은 거... 잘 걷기 어려운 사람은 걷기 연습...

카페에서 글을 쓰기도 하시는군요 멋지네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1-21 10:33   좋아요 1 | URL
유튜브를 티브이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설정해 놓아서 발레 동작을 배울 수 있어 좋네요. 연습하고 싶은 동작이 있어서 흥미로워요. 발레바 잡고 다리를 공중으로 띄우기도 합니다. 하고 나면 몸이 뻐근하죠.
사진 속의 노트북은 작은 넷북이라 가벼워요. 휴대용으로 씁니다. 희선 님은 저보다 글을 더 많이 올리시면서...ㅋㅋ 저는 카페에서 주로 칼럼을 씁니다. 좋은하루보내세요.

2025-01-22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4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5-01-23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발레바를 구매하셨군요.
제가 바벨과 덤벨 운동을 위해 벤치를 사고, 실내 철봉을 샀을 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거 얼마 못가서 빨래걸이나 되고, 먼지를 덮어쓰고 사용 안 할거다!
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저는 10년 가까이 꾸준히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는 건 대체로 자기 자신 기준인 경우가 많죠.
저는 어느 정도 운동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걸 그들은 모르니까요.

발레바로 집에서 운동이 가능하면 정말 좋으시겠어요!! 축하드립니다!!

어제 딸들과 대화하면서 둘 다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아이들 표현으로 집순이인 녀석들이 제게 묻더라구요. 엄마랑 아빠는 둘 다 돌아다니길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왜 엄마랑 아빠 딸인 우리들은 집에 있는 것이 제일 좋아요?

글쎄요. 적절한 답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조금 고민하다가,
아빠도 어떤 날엔 집에 있는 것이 좋은 날도 있다고 말을 하면서
딱 잘라서 집순이와 집순이가 아닌 사람을 나누기는 어려울 것이고,
경향과 성향이라는 것이 있을텐데,
엄마나 아빠는 성향에 비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것들도 또 있을 것이고.
암튼 결론은 너희도 나중에 바뀔지도 모르고, 엄마나 아빠도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거였어요.

페크pek0501 2025-01-24 15:41   좋아요 0 | URL
발레바 사고 뿌듯했지요. 실내 자전거 잡고 스트레칭 하기엔 한계가 있더라고요.
운동이 습관되어 있는 사람은 꾸준히 하더라고요.
요즘은 애들이 집에서만 지내도 심심하지 않잖아요. 스마트폰 아이패드 넷플릭스 등등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저도 한때 집순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살았는데 요즘 많이 나갈 일이 있었어요. 오늘 발레, 하고 왔는데 오늘까지 4일 내내 나갔네요. 내일은 집콕, 할 예정입니다.
맞습니다. 또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그리고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제가 활동적이어서 취재 다니는 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어한 줄 알았는데 막상 접해 보니 취재보다 사무실에서 기사 쓰는 게 더 좋더라고요. 그래도 사람들은 제가 지금도 활동적으로 보이나 봐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근데 사실은 집콕을 좋아하고 비활동적인 생활을 좋아해요. 애들은 어떤 면에선 부모를 닮고 어떤 면에서 전혀 닮지 않더군요. 우리 애들 보면 신기해요. 저와 안 닮아서.ㅋㅋ 긴 댓글, 고맙습니다.^^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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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80년에 있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일로 지금까지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며 악몽을 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대였고 인간의 잔인성이 상상을 초월했던 시대였다. 작가가 그 시대를 아파하며 쓴 걸로 알고 있는데 대다수 독자들 또한 아파하며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 역시 읽어 가는 도중 마음이 괴로워 책을 덮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는지라 허투루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기에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이 많았다. 그런 문장 중 골라 발췌하여 옮기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소설은 6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장마다 시점과 화자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말해 두어야겠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17쪽)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거대한 풍선 같은 침묵이 병실의 모서리들을 향해 부풀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트럭이 병원 앞길을 지나가며 목소리가 크고 선명해졌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91쪽)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95쪽)



대학가와 가까운 그녀의 동네는 전염병이 지나간 것처럼 인적 없이 괴괴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자 아버지는 기다렸던 듯 달려나와 그녀를 들이고는 대문을 잠갔다. 다락에 그녀를 감춘 뒤, 다락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비키니 옷장을 옮겨놓았다. 오후부터 군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문을 열고 누군가를 끌어내는 소리,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아니라우, 우리 아들은 데모 안했어라우, 총 같은 건 만져본 적도 없어라. 그들은 그녀의 집 초인종도 눌렀다.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딸이 고3이오. 아들들은 인자 중학생 초등학생인디, 누가 데모를 했겄소.(96~97쪽)



다음 날 저녁 그녀가 다락에서 내려왔을 때, 어머니는 시청 청소차들이 주검들을 싣고 공동묘지로 갔다고 말했다. 분수대 앞에 던져진 주검들뿐 아니라, 상무관에 있던 관들과 미확인 시신들까지 모두 싣고 갔다고 했다.(97쪽)



그 순서가 끝나면 그들은 침착하게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소총의 개머리판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그들은 등과 허리를 밟았습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내가 몸을 뒤집으면 군화로 정강이를 짓이겼습니다.(106쪽)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쪽)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할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115~116쪽)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116쪽)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117쪽)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중략)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166~167쪽)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170쪽)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73~174쪽)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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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09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읽어야할 것 같긴한데 역시 아픈 역사는 큰숨 한번 내쉬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요즘 여기가 좀 뜸해져서 새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좀 늦었지만 설까지는 유효하니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자주 뵈어요.^^

페크pek0501 2025-01-13 09:26   좋아요 1 | URL
5.18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많았죠. 가장 아프게 느낀 게 <소년이 온다>였어요.
한강 작가의 상상력이 압권. 소설을 습작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교과서가 될 듯해요.
시점이나 화자를 다르게 쓰는 등 방식의 다양함을 배울 수 있거든요. 피해자의 어머니의 육성을 들을 수도 있어요.
스텔라 님도 저도 새해 들어 글이 올리지 않아 새해 인사를 나누지 못했네요. 스텔라 님도 새해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고 바라는 바를 이루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스텔라 님과 나는 오래된 친구...^^ㅋㅋ

2025-01-09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5-01-10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사놓기는 했는데, 노벨상 수상 소식 이후에 책을 찾아보려고 하니 못 찾겠네요. 분명 책장 어딘가 있을텐데, 조만간 책도 찾을겸 책장 정리 한 번 해야겠어요.

지인들이 다들 너무 읽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전철에서 읽다가 눈물이 나서 덮었다는 얘기도 하구요.

페크pek0501 2025-01-13 09:32   좋아요 0 | URL
저도 사 놓기는 오래전에 사 놨더라고요. 둘째애가 몇 년 전에 읽고 눈물이 났다고 해서 잘 읽었다, 라고만 하고 저는 읽지 않았어요. 워낙 5.18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접했는지라 또 다 아는 사건이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읽어 보니 꽤 꼼꼼히 취재해서 쓴 소설이더라고요. 발로 뛴 소설인데다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죽은 사람의 영혼이 생각하는 걸 쓴 부분.
읽기가 좀 괴로운 소설이에요.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감은빛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희선 2025-01-14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흘렀다 해도 그때 일을 겪은 사람은 잊지 못하겠습니다 무서운 꿈도 꾸고 여전히 힘들겠지요 그런 걸 치료해주는 것도 있어야 할 텐데... 지나간 일이지만 아주 지난 일이 아니기도 한 듯합니다 저도 아직 못 읽었네요 이 책은 언젠가 볼까 합니다

페크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페크pek0501 2025-01-17 21:25   좋아요 1 | URL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고 게다가 악몽까지 꾼다면 괴롭겠지요. 마음의 병은 잘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도 이제야 읽었습니다.
매일 나갈 일이 있어 댓글이 늦었습니다. 희선 님도 매일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2025-01-18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0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