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8) 그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생각나는 것으로 상대에게 선물 공세로 환심을 사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효과도 안심할 수 없다. 상대가 선물을 준 ‘사람’이 아닌 선물로 준 ‘그것’만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듯하다. 돈도 들지 않고 효과도 만점인 것.


러셀에게서 답을 구했다.




특별히 예쁘거나 뛰어나지 않더라도 사랑 받는 방법은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의식적인 아부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그들과 어울리는 순간을 즐기고, 무엇보다 그들이 과시하는 능력을 즐기는 것이다. - 346쪽. 

-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서.




러셀에 의하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상대가 과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그 시간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 연인에게 열광했던, 또는 현재 열광하는, 또는 미래에 열광할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보다 연인에게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연인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멋지게 봐 줌으로써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일 것 같아서.



예를 들면 나는 그녀의 두 앞니 사이의 틈을 이상적인 배열로부터의 불쾌한 일탈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치아의 완벽성을 독창적으로 그리고 사랑할 가치가 있는 방식으로 재배치한 것으로 보았다. 나는 그녀의 치아 사이의 틈에 그냥 무심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예뻐했다. - 128쪽.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 150쪽.


-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의 눈엔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두 앞니 사이의 틈’에서도 독창성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게 바로 연인의 눈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최대한으로 아름답게 봐 주는 그 ‘연인’이 그렇지 않은 무심한 ‘친구’에 비해 좋아지는 건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 이런 게 있다.




아까 내가 마치 모욕 받은 계집처럼 네 앞에서 그만 눈물을 흘렸다는 것, 그것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원망할 거야! 또 지금 너한테 이런 걸 고백하고 있다는 것, 이것 때문에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미워할 거다! 그렇다, 너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공교롭게 그런 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 185쪽.

-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이 남자는 계집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여자를 원망하겠다고 한다. 하필 이러한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모습만을 보게 해 주고 싶었던 상대가 자신의 가장 추한 모습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목격이라 할지라도 남자는 화가 난다. 누구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본 사람을 싫어하고 자신을 근사한 모습으로 봐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땐 모른 척하고 지나갈 일이다.)


TV 드라마에서 딴 여자와 연애하는 남편의 단골 대사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 여자는 나를 남자로 느끼게 해 줘.”


이 말은, “그 여자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던 나를 남자로 느끼게 해 줘.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남자로 말이야.”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아내와 함께 있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살고 싶다는 마음의 표출인 셈이다. 결국 자신을 잘 봐 주는 이가 좋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무조건 그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 상대가 가진 매력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똑같은 조건 하에서라면 자신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정도로 매력적인 두 사람이 있다면 그중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다. 우월감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므로.


이런 예를 들어 본다.


만약 자신이 중학교 때의 성적은 상위권에 속하는데,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하위권에 속한다면 어느 동창회에 가길 좋아할까. 그 두 동창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있다면 어디로 발길을 돌릴까.  

답은 뻔하다. 중학교 동창회에 갈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다 우월하게 보이는 자리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친구보다 인정해 주는 친구를 좋아하나 보다.  

결론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면, 상대가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 것.


‘너를 만나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



<후기>


여러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같은 내용을 표현만 다르게 쓴 글이 많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다르지만 내용이 많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웬만큼 독서를 해 본 사람은 ‘거기서 거기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폼 나게 표현하면 ‘하늘 아래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같은 내용에 대해 다양한 변주가 있을 뿐이다.’가 된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미처 알지 못한 걸 생각해 냈다. 나를 따르는 후배 몇이 있는데, 내가 그들을 예뻐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만날 때마다 나를 좋게 봐 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이 ‘선배님과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아요.’하는 얼굴이라고 여겨질 때 내게서 아름다운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기에 그들을 좋아함을 알았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군요.’하는 듯한 얼굴로 보는 학생들을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독서를 ‘내면으로의 여행’, ‘나를 읽는 행위’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



<이 글과 관련한 책>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

알랭 드 보통 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1-07-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며 음, 음, 음, 하며 감탄을 탄복하며 읽었습니다. ^^ 지금 제 상황에 딱 맞는 리뷰이어서요. 크게 깨달아 우주의 지평이 열리는 기분입니다. ㅋㅋㅋ

저도 놀러왔어요. 이런 좋은 글을 보다니 오늘은 무척이나 상쾌한 날이네요. 헤헤 노신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방명록에 자극 받아 노신 선생의 리뷰를 쓸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

읽고 또 읽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페크pek0501 2011-07-19 15:18   좋아요 0 | URL
'탄복하며...'라는 말은 듣기 좋은 새콤달콤한 말입니다. 새콤달콤해지는군요. 고맙습니다.

참, 루쉰이라는 아이디를 잘 지으신 것 같아요. 제가 루쉰의 팬이라서 들르게 되었으니까요. 저도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좋아하는 작가 이름으로 아이디를 짓는 건데...ㅋㅋ 꼭 루쉰의 분신 같거든요.

좋은 리뷰 쓰시길 기원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사람은 남자로만 혹은 여자로만 살면 불륜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부모로,남편이나 아내로 살고 있기도 하다는 점을 자각해야 하는데...그래도 능수능란한 도사들에게 걸리면 해답이 없죠.

페크pek0501 2011-07-21 13:57   좋아요 0 | URL
결혼제도가 있어서 딴 길로 새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결혼제도가 아내나 남편,또는 부모의 자리를 갖게 함으로써 질서를 갖게 하죠.

"그래도 능수능란한 도사들에게 걸리면 해답이 없죠." - 이 말도 맞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정열이다(임어당의 말)."의 경우가 분명 있으니까요.

반가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1-07-22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4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 속을 산책하다가 좋은 글을 줍다> 행복하기 위한 마음가짐 4가지



1. 고난을 성장의 기회로 생각하기




어느 날 (그는) 작은 실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의 인생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뜨거운 창작의욕을 느꼈다. 그 열정으로 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세상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 작품이 바로 400여 년간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는 <돈키호테>, 역경을 재도약의 기회로 삼은 이 작가의 이름은 세르반테스이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 차동엽 저, <무지개 원리>에서.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잘 생긴’ 소나무들이 자라난 땅을 파보면 배수가 어렵고 토양이 매우 거친, 말하자면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살아남기 어려운 곳에서 자란 소나무가 명품이 되는 것이다. 쉽게 이루는 일보다 힘들게 이루는 일이 더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나 저항이 없으면 발전 가능성도 없다. 공기에 저항이 없으면 독수리가 비상할 수 없다. 물에 저항이 없으면 배가 뜰 수 없다. 중력이 없으면 걸을 수조차 없다.


- 차동엽 저, <무지개 원리>에서.



고난을 그저 고난으로만 보지 말고 성장의 기회로 본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


2. 타인을 배려하기




앞을 못 보는 맹인 한 분이 매일 황혼 무렵이 되면 늘 등을 가지고 마을의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이 “당신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왜 등을 가지고 나가십니까?”하면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이 빛을 보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 차동엽 저, <무지개 원리>에서.





누가 이런 맹인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위하기보다 남을 위할 때 오히려 행복은 자기의 것이 된다.


3. 해석을 잘 하기




어떤 사업가가 상담가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주식으로 얼마 전 20만 달러를 잃었습니다. 결국 저는 파산했고 명예를 잃었습니다.”


상담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생각을 그러한 사실에 추가시키지 않는다면 보다 행복해질 수 있어요. 20만 달러를 잃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세요. 당신이 파산해서 명예를 잃었다는 것은 당신 생각입니다.”


- 차동엽 저, <무지개 원리>에서.




삶에서 해석은 아주 중요하다. 때론 우리에겐 긍정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불행에 대해 엄살을 떠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부정적인 사고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 습기가 차고 흙탕물이 튀기는 점만 생각한다면 지루한 장마철이 되고 만다. 반대로 뜨거운 햇볕이 없어 덥지 않고 먼지가 없어 깨끗한 점을 생각한다면 행복한 장마철이 될 것이다.


4. 행복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호주 시드니 동쪽 2550km 남태평양 근해의 외딴 섬나라 ‘바누아투’ 공화국. 이 나라는 인구 19만 명에 문맹률 85%, 1인당 국민소득이 2944 달러에 그치는 후진국이다. 그러나 영국의 싱크 탱크인 신경제학재단(NEF)이 최근(2006. 7. 12) 발표한 세계 178개국 가운데 행복지수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 차동엽 저, <무지개 원리>에서.




이것만 보더라도 행복은 물질적 만족감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자가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다.

.......................................................................................




<후기> 뻔한 책 같아도 이 책은 좋았다


나의 경우 <무지개 원리> 같은 자기계발서의 책을 구입하는 일은 드물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동서로부터 선물을 받아서다. 선물을 받고서도 바로 읽지 않았다. 별로 내가 얻을 게 없을 것이라는 선입감 때문에 다른 책들을 끼고 살았다. 읽을 책들이 쌓여 있는데, 이런 책을 읽을 시간이 어딨어,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그러다가 만약 동서가 내게 “형님, 그 책을 읽으셨어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준 사람의 성의를 헤아려야 했다. 그래서 <무지개 원리>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아주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의 장점은 위에 소개한 글과 같이 유익한 예화가 다양하게 실린 점이다.


<무지개 원리>에 대한 어느 작가의 말 - “인간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생활에 녹아 있는 행복의 법칙들을 경쾌하고 날카롭게 발견해냄으로써 워즈워드의 시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기쁨의 무지개로 뛰게 한다.”(소설가 최인호)


내 경험으론 어느 분야든 20권쯤 읽고 나면 21권째의 책에선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다. 20권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중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든 문학이론서든 여성학이든 그 분야의 책을 20권만 읽으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게 아닌 이상 그저 독서광으로서 그 정도만 읽으면 (어디 가서 뽐내며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서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그 20권 안에 이 책 <무지개 원리>가 들어가 있길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상(17)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


1.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난 뒤에 그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져 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친구의 모임에 늦게 도착한 내게 친구가 왜 늦었냐고 물었던 날에 내가 한 대답이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런 대답을 했다. “차가 많이 밀렸어.”


그런데 실제로는 차는 조금만 밀렸고, 다른 이유로 늦었다. 전날 밤, 샤워를 하고 잤으므로 그 다음날 아침 외출준비를 할 땐 샤워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땀이 나서 샤워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머리를 말리고 손질하느라 늦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의 내 대답은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땀이 났고 시계를 보니깐 사워를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샤워했는데, 머리 말리고 손질하느라 늦었어.”라고 해야 진실이며 정확한 대답이다. 그런데 난 차가 밀렸다는 핑계를 대어서 나의 잘못을 ‘차가 밀린 도로 사정’의 탓으로 돌린 셈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차가 밀렸다고 말한 이유가 꼭 내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길게 대답하기보다 짧게 편히 말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어느 날 고등어 두 마리를 사서 조림을 했다. 갈치를 좋아하는 아이가 식탁에 앉으면서, 왜 하필 고등어 반찬이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등 푸른 생선이 몸에 좋으니까 사 왔지.”였지만 사실은 고등어가 세일을 하고 있어서 사 왔던 것이다. 이것도 세일을 해서 사 왔다는 것보다 몸에 좋아서 사 왔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했다기보다 그냥 생각난 대로 편히 말한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돌아보면 왜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려운 걸까, 하고 의아해진다. 그래서 다음부턴 진실만을 말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데, 또 진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같은 실수를 하고 만다. 잘못 대답함으로써 어떤 때는 내게 이롭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게 불리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나를 통해 조금씩 ‘인간’을 알아가고 있는데, 나를 포함해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을 왜 구입했냐는 물음에 대해 백 퍼센트의 진실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왜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해 백 퍼센트의 진실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좋아하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을 왜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해 백 퍼센트의 진실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이다. 물음에 꼭 알맞은 정확한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만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아, 그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 잘못 말했어.’라고. 이럴 때마다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필립 그레이브스 저, <소비자학?>에서 저자는 “설문조사처럼 경영자들과 마케터들이 의지하는 전통적인 시장조사 활동은 지난 50년간 산업 전반에 쓸데없는 혼란만 가져왔으며 쓸모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조선일보, 2011. 7. 9-10.) 이에 따르면 “기업에서 실시하는 시장조사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의식적인 활동인 데 반해 소비자의 구매 행동 대부분은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일 경우가 많다. 시장조사의 질문이 적절하고 소비자들도 성실히 이에 답한다 할지라도, 자신(소비자)이 미래에 행할 소비행위를 예언하듯 답할 재주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2.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 책


생활 속에서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는 걸 자주 경험하게 되는데, 책에서도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장하준 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이런 글이 있다.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엄청난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순응주의자가 되는 편이 훨씬 쉽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잘못된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신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될 텐데, 왜 굳이 먼 길을 돌아다니며 ‘불편한 진실’을 찾아다니겠는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부정부패와 게으름, 혹은 방탕함 탓으로 돌리면 쉬운데, 왜 굳이 가난한 나라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신경 쓰겠는가?”


장하준 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저자는 세계 경제의 재건을 위해 경제 시스템을 재설계하려 할 때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중 하나가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면 우리의 객관적 사고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2008년 우리의 경제 시스템이 붕괴한 것은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무한하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시스템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하준 저자의 글을 읽으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인간에 대한 통찰은 필수임을 인식하게 된다. 사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 그 어떠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먼저 이해해야 함은 당연하다. 인간이 관계하지 않는 세상일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임어당도 경제학 분야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이런 글을 썼다. “마르크스가 계산에서 빠뜨린 것은 영국인 및 미국인의 인간적 요인이었다. 또는 양국인의 일하는 방법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미숙한 경제학의 커다란 맹점은 국민적 문제의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종의 불가능한 요인을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생활의 발견>, 144쪽, 범우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아감으로써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가장 무관심한 게 ‘인간에 대한 이해’인 것 같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그 밑바탕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고 인간의 공통된 심리와 각각의 특색을 아는 일에 공부가 필요하다. 혹시 우리는 자신이 바로 인간이기에 따로 인간에 대한 공부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지각’ 부족을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외적인 힘에 의해 확실하게 강제되지 않는 한, 그들의 결정은 그들 자신의 것이며, 무엇인가를 바랄 때 그렇게 바라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환상의 하나이다.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자유로부터의 도피>, 168쪽, 홍신문화사)     

  

이 글을 읽으며 핸드폰을 떠올렸다. 핸드폰이 처음 출현할 때부터 난 구입하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족쇄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다. 또 친구의 모임에서도 수시로 울리는 누군가의 핸드폰도 싫었다. 얘기를 하는 중에 그 벨소리로 대화가 끊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을 사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생겼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내게 핸드폰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서야 할 수 없이 뒤늦게 핸드폰을 구입하게 되었다. 내가 사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영향 때문에 산 셈이며,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
 



<이 글과 관련한 책>


필립 그레이브스 저, <소비자학?>

장하준 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

에리히 프롬 저, <자유로부터의 도피>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1-07-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어느 블로그에 들어갔더니“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읽는 순간 이 문장에 반해 버렸다.

이 글에 쓴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라는 생각을 내가 한 것도 딱 내 개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 대한 관찰을 즐기는 나의 개성.

"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 - 이 구절로 나중에 칼럼을 쓰고 싶다. 소설 속에서 이 구절에 알맞는 인물들 몇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생긴대로 산다'가 되지 않을까.^^^

신지 2011-07-13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뭔가 댓글을 쓰려다가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pek님 글이 늘 공감되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댓글을 쓰려면 항상 '제대로 말하기'가 어려워서요.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구나, 싶습니다(!).^^ 인용하시는 부분들도 참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11-07-13 1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ㅋ

저 역시 여러 블로그를 돌아다니는데, 댓글 쓰는 것 쉽지 않아요. 제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죠. (그것을 읽는)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칼럼이나 단상의 글을 쓸 때도 글쓰기가 자신의 내면을 자신도 모르게 다 보여 주는 일 같아서 부담을 느낄 때가 많아요. 뷔퐁의 말대로 "문체란 곧 그 사람"이니까요.

저는 삶을 좀 마음 가볍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고민, 고뇌 없이), 글 쓸 때만은 무거워져요. 그래서 진지해져요. 아마 글 쓸 때가 가장 진지한 것 같아요. 삶은 그냥 대충 삽니다. 마치 간이역에 잠깐 내린 승객처럼요. 장례식장에 가 보면 느껴져요. 이 세상은 잠깐 머물다 가는 간이역과 같다는 것을...

반가웠습니다.

아, 제 블로그에서는 편하게 댓글 써도 됩니다. 인간은 정확한 대답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는 사람이므로...^^^


신지 2011-07-13 14:4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여러 블로그를 돌아다니는데, 댓글 쓰는 것 쉽지 않아요. 제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죠.

ㅡ> 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요 ㅜㅡ

-------------------------

삶은 그냥 대충 삽니다. 마치 간이역에 잠깐 내린 승객처럼요.

ㅡ> 이것도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삶은) 저는 좀 소극적이고, 사회적인 욕심이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좋지 않은 성격으로 보는데^^ 전 저의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페크pek0501 2011-07-13 21:16   좋아요 0 | URL
"(삶은) 저는 좀 소극적이고, 사회적인 욕심이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좋지 않은 성격으로 보는데^^ 전 저의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 저와 많이 비슷하시군요. 욕심이 많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제가 만약 피자집을 운영한다면 쏟아지는 주문을 어느 정도 선에서 끊어내고 문 닫고 조용히 앉아 시를 읽으며 휴식을 즐길 것 같습니다. 이걸로 저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합니다.

가끔 엄마에게 듣는 말, "넌 왜 그리 욕심이 없니?, 그러니 발전도 없지..."입니다. ㅋ 근데 전 그런 제가 좋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1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 씨 글을 보니 '용기의 반대말은 순응'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인습이나 고정관념 등에 순응하는 보통사람들과의 투쟁이 거대권력과 투쟁하는 것보다 더 힘들죠.

페크pek0501 2011-07-13 21:11   좋아요 0 | URL
새 손님이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용기의 반대말은 순응' - 이라는 말은 명언 같은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인습이나 고정관념 등에 순응하는 보통사람들과의 투쟁이 거대권력과 투쟁하는 것보다 더 힘들죠." - 동의합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ㅋ

노이에자이트 2011-07-14 17:41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배워가는 거죠.

페크pek0501 2011-07-15 00:45   좋아요 0 | URL
예 예 예!!!!!!!!

꼬마요정 2011-07-14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 씨 정말 좋아해요~^^

글이 너무 멋져서 저도 댓글을 달려고 하니.. 음.. 모르겠습니다.^^;;

횡설수설하는 게 제 개성인가봐요.. 무슨 말을 하다가도 삼천포로 빠지거나 주절주절 하거든요..ㅠㅠ

어쨌든, 멋집니다!!

페크pek0501 2011-07-15 00:45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접수하겠습니다.

횡설수설, 저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횡설수설이란 제목으로 글 쓰려던 적이 있어요.^^^ 인간적인 글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연애칼럼> 삼각관계에 놓인 연인들의 사랑


유부남이 서로 사랑한다고 느끼는 딴 여자와 함께 있다가 아내에게 들켰다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여러 경우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왕 이렇게 된 것, 아내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노라고 고백하고 이혼한 뒤 딴 여자를 택한다. 둘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에게 잘못을 빌고 딴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셋째, 아내에겐 딴 여자와의 관계를 끝냈다고 말하고 여전히 만나고 다닌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연인이 어떤 상황에 놓인다고 가정할 때 그 연인이 취할 태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연인을 깊이 이해한 것이 된다. 반대로 “당신이 그럴 줄 몰랐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 상대를 깊이 이해한 게 아니다.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아침드라마(‘미쓰 아줌마’)를 보게 되었는데, 한 가정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남편이 여자후배와 방 안에서 단 둘이 다정하게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남편과 여자후배는 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며 연애를 하던 사이였다. 또 아내와 여자후배는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남자는 여자후배와 사랑에 빠진 듯 달콤한 키스를 하기도 하는데, 아내에게 둘의 관계를 들키자 당황하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다. 여자후배를 급히 내쫓아 집 밖으로 내보냈으며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달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여자후배는 당연히 기분이 나빴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아내는 가방을 챙겨 가출한다. 남자는 여자후배에게 전화하여 혹시 가출한 아내가 거기에 가지 않았는지를 묻고, 여자후배는 자기를 걱정해서 전화한 게 아니라 마누라 걱정 때문에 전화한 남자에 대해 잔뜩 화가 난다. 분하고 불쾌하기까지 해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긴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세 사람들이 착각하는 모습이다. 아내는 다른 남편들이 모두 바람을 피운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남편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착각임을 알았고, 여자후배는 아무리 그의 아내에게 들켰다고 할지라도 남자가 백팔십도로 변해서 자신을 집에서 내쫓을 줄 몰랐으며, 또 남자는 미혼시절 아내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열정적인 사랑이 지금은 변했음을 간과하고 그 여자후배와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결국 그 부부는 이혼을 하고 남자는 여자후배와 결혼하기로 한다).


연인이 서로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의미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남자가 느끼는 사랑과 여자가 느끼는 사랑의 의미가 다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같은 성별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사랑이란 함께 있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일 수도 있고, 그 상대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일 수도 있다. 그 누구를 사랑할 경우, 그 상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랑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 만약 상대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마치 독약이 든 사랑과 같다.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은 누구나 반갑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사랑처럼 상대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이 드라마에서 남자와 여자후배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선 여자후배는 아내에게 들켜서 마음의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그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따뜻한 위로를 해 주어야 그게 사랑이 아닐까. 남자는 이런 곤란한 상황에 있게 한 여자후배에게 미안해 하고 내쫓김을 당하게 만든 일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해야 그게 사랑이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은 아내에게 들킨 그 사건 직후, 마치 그동안은 달콤한 꿈의 세계에서만 연애를 하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듯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신하고 만다. 남자는 행여 가정이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여자후배는 자신의 상한 기분만 생각한다. 서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신의 입장만 중요한 것이다. 이런 감정과 생각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서영은 저, <먼 그대>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여주인공은 일요일마다 방문하는 유부남을 기다린다. 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그의 아내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녀는 그 남자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나 조금도 남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남자에게 자기가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모조리 털어 주고, 거기다가 모자라면 빚까지 얻어다 준다. 어느 날 남자는 물주를 만나겠다며 그녀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그녀는 이모에게서 그 돈을 구해 남자에게 준다. 남자는 돈을 받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녀의 사랑법은 그랬다.


“사랑은 그것이 희생일 때 이외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적합하지 않다(R. 롤랑).”는 말처럼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희생’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눈에 보이는 효과로 판단한다면 우정보다는 증오에 더 가깝게 보인다(라로슈푸코).”는 말에 공감할 것 같다. 사랑을 하면 무조건 아낌없이 주는 태도를 갖기보다, 자신이 준 사랑에 비해 돌아오는 사랑이 작다고 생각되면 우선 화부터 나고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화가 많이 나면 날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마치 부모를 사랑하듯, 자식을 사랑하듯, 형제를 사랑하듯, 연인을 또는 배우자를 사랑해야 해야 한다. <먼 그대>라는 소설 속의 그녀처럼 말이다. 만약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한쪽 배우자가 어떤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는 달콤한 연애로 행복해 하기보다 그 삼각관계에 괴로워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다른 한쪽 배우자 역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런 괴로운 사랑에 빠진 배우자에게 연민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배우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그런 괴로운 사랑을 하게 되다니…, 가엾군요.”라고.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랑이란 <먼 그대>라는 소설 속의 그녀가 가진 희생적인 깊은 사랑이 아니라 다소 이기적이라고 할 만한 얕은 사랑일 듯싶다. 사랑이란 상대를 위한 사랑이기보다 자기를 위한 사랑에 지나지 않아서, 다만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이, 그를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모든 유형의 기본이 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은 '형제애'라고 말했듯이, 모든 남녀관계에서의 사랑은 형제애로써 ‘정’의 탑을 둘이 쌓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정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처음엔 설렘과 그리움으로 연애를 시작하지만 시간에 따라 그런 뜨거운 감정은 퇴색한다. 그 대신 함께 있는 시간이 만드는 ‘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쌓는 ‘정’의 탑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가 관건이 된다. 서로 아끼면서 배려해 주는 횟수가 많을 때 그 탑은 튼튼할 것이고, 싸우는 일이 잦아져서 정떨어지는 횟수가 많을 때 그 탑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 탑이 허물어질 때 연인은 이별을 하고 부부는 이혼을 한다.

......................................................................................


<후기> 그들은 사랑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1.


언제나 상대를 조금은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것, 이것이 끊임없는 갈망이 되어 행복한 사랑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의심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으며, 절대 지루해지는 법도 없다. 또한 매우 열중하게 되는 것도 특징이다.

- 스탕달 저, <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에서.


스탕달에 의하면, 서로를 믿는 안전한 사랑보다 의심하는 불안정한 사랑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2.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모습은 변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부부에게는 부모 자식 같은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원래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비탄에 잠기고 상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 속에 존재하고 그렇게 쌓인 것이 자기 인생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라서 사랑이 성취되었는지 어떤지는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강상중 저, <고민하는 힘>에서.


 강상중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어서 사랑에 대해 뭐라고 단정할 수 없다.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3.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세계를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이 그들 사랑의 강렬함의 증거라고까지 믿고 있는데 이것은 오류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

<이 글과 관련한 책들>


서영은 저, <먼 그대>

스탕달 저, <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

강상중 저, <고민하는 힘>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

 

.....................................................................................

<삼각관계에 관한 것으로 어떤 책이 있나>


조너선 프랜즌 저, <자유> : 이 소설은 남편을 배신하고 남편의 오랜 친구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주인공 패티의 이야기다.



'자유'는 가장 통속적이며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인간관계를 다룬다. 배우자의 배신과 불륜, 그리고 용서. 남편 월터를 배신하고 남편의 오랜 친구 리처드와 부정한 관계를 맺을 때 주인공 패티는 결코 어떤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덧없는 욕망에 단단히 붙들린 패배자에 불과함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욕망의 대상을 향해 돌진할 자유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왜곡된 자유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결혼은 붕괴됐고 패티는 자신이 냉소해 온 월터와의 관계가 사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굳건하고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묻는 가장 이지적이며 설득력 있는 장편.   

- 조선일보(2011. 6. 20.)에서


 참고로, 조너선 프랜즌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매우 좋아하는 작가다.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6-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내 남편만은~~~~~ 이런 착각은 하지 않고 살려면,
집에 들어오면 내 남자, 집 밖에 나가면 남의 남자라고 생각하라든가요.^^
추천해주신 책 살펴볼게요~~ 고마워요!!

페크pek0501 2011-06-28 23:2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추천은 제가 더 신세를 지고 있는 걸요.^^^

otillia95 2011-08-0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쌤 저 혜원이요 ^^ ㅠㅠ 넘 늦게 왔네요 ㅎㅎ 딴애들이랑은 연락하세요~^^
음,,, 내용이 어려워서,,,ㅋㅋ 걍 잠깐 왔다가 가요~
이멜로 답장 주세요^^

페크pek0501 2011-08-07 23:37   좋아요 0 | URL
와우, 반가워라. 김혜원이군.ㅋㅋ 혜원이란 이름이 또 있어서 잠시 헷갈렸어요. 그게 누군지 알지요?

이게 얼마만인가요? 아직도 럭키아파트에서 사나요? 난 서울로 이사했답니다. 으음, 혜원이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겠군요. 키도 많이 컸겠는데요.

다른 학생? 가끔 이메일로 인사하는 학생들이 있지요. 혜원이와 함께 수업한 학생 중에도 연락하는 학생이 있답니다. 그런데 내가 이메일을 늦게 보고 답장을 늦게 해서 미안했답니다. 반가워요 또 연락해요. ~~

참, 백혜원이 김혜원의 안부를 궁금해 하네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4-3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탕달의 책을 발견하고 검색해 보니 있어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17-05-02 12:30   좋아요 1 | URL
저도 오랜만에 이 글을 읽었답니다. 님 덕분에요.
벌써 6년이나 된 글이군요.

미쓰 아줌마, 라는 드라마를 봤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안 봤는데요. 그런 드라마 몰라요, 할 뻔했어요. 이번에 이 글을 보지 않았다면.
<먼 그대>라는 작품도 읽지 않았어요, 할 뻔했어요. 이번에 이 글을 보지 않았다면.

제 기억력이 그 정도입니다. ㅋ
제가 쓴 옛 글을 저도 읽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5-02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내는 동안 옛 생각에 잠겨서 추억을 더듬다 보면 글을 쓸 때의 감정이 되살아 날지 모르겠네요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 가 다른 요즘을 느끼면서 행복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페크pek0501 2017-05-04 13:05   좋아요 1 | URL
님이 행복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댓글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5-0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읽는것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 드립니다^__^

페크pek0501 2017-05-04 13:41   좋아요 0 | URL
옙~~ 감사합니다.
 


단상(16) 사치의 행복과 무소유의 행복과 즐김의 행복


1.

사치의 행복 : 가끔은 사치하고 싶다


<사치와 문명>이란 신간이 나왔다. 이 책은 동서고금 문명을 ‘사치’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것으로, “사치는 유용성에 앞서고, 인간적이며,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치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 발전의 견인차라고 주장하는 책이다(조선일보, 2011. 6. 11.). 사치가 없다면 세상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책장에서 찾아보았더니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라는 책에 ‘사치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에 의하면 사치욕구의 발로가 여가의 증대와 맞물려 ‘일할 의욕’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소비의 미덕’으로 이어져 유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그들이 영원히 ‘민중’으로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신분상승을 이룩해 ‘귀족’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대중적 귀족의 출현을 인정하고 대중적 사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른 반면, 민중들을 계속 검약(儉約)과 절제의 윤리로만 순치(馴致)시키는 사회는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다.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소비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일반 대중들이 땀 흘려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소련이나 동유럽국가들의 경제가 붕괴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에서.


 

사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두 권의 책이 반가웠다. 내가 사치로 인해 부끄럽게 여겨졌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 관리’를 몇 번 받으러 다닌 일이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발의 피로를 느끼던 때에 그 광고지를 보게 되어 가게 되었다. 지압과 마사지로 발의 피로를 풀어 줌으로써 몸의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어 건강하게 해 준다는 광고 문구가 꽤 유혹적이었던 것. ‘발 관리’를 받기 위해선 한꺼번에 돈을 내고 회원가입을 해야 했다. 이것은 내 생활수준에 비추어 보면 ‘사치’에 속한다. 평소엔 검소한 편이지만 가끔은 이런 사치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알뜰하기만 한 삶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 대학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는 학생들에 대한 기사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송을 볼 때면 나의 ‘발 관리’의 사치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돈이 없어 불행한 삶을 사는데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발 관리’를 받으러 다니는 사치나 누리며 살고 있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사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이 두 권의 책을 보니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세상은 물론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질적 향상도 없을 것이다. 훗날 부자가 되어 사치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게 한다. 고급 자동차와 외제 골프채를 갖고 싶은 욕구, 멋진 호텔 같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 ‘발 관리’나 ‘얼굴 마사지’와 같은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사는 게 좀 싱겁지 않겠는가.


때로는 사치에 대한 욕구가 생활의 활력을 주리라. 물론 지나친 사치라면 독이 되겠지만.



2.

무소유의 행복 : 버림으로써 행복하다


많이 가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교통난과 주차난이 심각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를 가지고 외출해서 불편했던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한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할 때가 있다.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기르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그 난초를 위해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그러던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그분은 외출 중에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알고 문득 난초가 생각났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외출했던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때 그 분은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난초를 안겨 주었다. 비로소 그 분은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분이 법정 스님이시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 법정 저, <무소유>에서.




무소유의 행복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치의 행복보다 무소유의 행복이 더 좋은 이유는 사치의 행복이 자신 혼자의 행복인 것에 반해 무소유의 행복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행복은 자기만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행복을 지향한다. 

 

3.

즐김의 행복 : 행복은 즐기는 것이다


사치의 행복은 이웃을 생각할 때 마음이 불편해지는 행복이다. 이웃에게 미안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사치의 행복으로 늘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소유의 행복은 정신 수양을 필요로 할 만큼 쉽게 갖지 못할 행복이다.


내가 갖고 싶은 행복은 ‘즐김의 행복’이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아무런 즐거움 없이 현재를 참고 견디며 사는 것에 반대한다. 예를 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절약하며 저축을 하는 삶을 살더라도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세 번 향락한다고 한다. 노동 자체에서, 노동의 결실에서,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연예인들 중에는 정상에 올랐던 위치에서 인기가 떨어져 아래로 추락하면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예인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결실만을 중요시해서 일의 결과에 따라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간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덜 외롭고 덜 불행할 텐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공자) 이것은 곧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뜻도 된다. 이처럼 공자도 즐기는 상태를 최고의 경지로 봤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 그 시간을 즐기는 게 행복의 비결. 우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구두쇠가 불행한 이유도 즐기지 못해서라고 한다. “구두쇠들은 가진 것을 결코 즐기지 못하고 잃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플루타르코스)


논어에 이런 글이 있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복습하는 것은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벗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논어)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는 ‘행복한 한때’가 어떤 때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글이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라면 참으로 행복한 한때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잠을 푹 자고 나서 아침에 깨어 새벽 공기를 마시면 폐가 부풀대로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져서 가슴 근처의 피부나 근육에 기분 좋은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그런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에 발을 뻗고 있으면 담배 연기가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그런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탄다. 아름답고 깨끗한 샘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는 펑펑 솟아오르는 그 얼음 같이 찬 물 속에다 발을 담그는 그런 한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안락의자에 턱 기대앉는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서로 꼭 맞는 사람들뿐. 흥겨운 청담(淸談)이 꼬리를 물고 경쾌하게 자꾸만 흘러나온다. 몸도 마음도 이처럼 천하태평스런 한때.


어느 여름날 오후, 지평선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한 15분만 있으면 초여름의 소낙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비를 맞고 싶은데, 우산을 안 들고 비오는 데 나가기도 어색하다. 그래서 급히 벌판 한가운데로 뛰어나가서 소낙비를 맞고는 흠뻑 젖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 사람들에게는, 뭘 비 좀 맞았는데… 하는 한때.


-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서.



나도 임어당의 글을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이 써 보았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거리의 사람들은 재빠르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 풍경을, 나는 비 한 방울 맞지 않는 집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본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어떤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게 만든다. 궁금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책을 읽고 나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다. 이런 게으른 자유의 행복이 얼마만이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건강을 위해서도, 몸 관리를 위해서도, 기분전환을 위해서도 운동은 필요하다. 땀 흘려 운동을 하고 난 뒤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한다. 우선 얼음물 같은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적시며 ‘아, 시원하다’라는 느낌을 즐기고 난 뒤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갈증이 난다. 이럴 때 냉장고에서 꺼내 시원한 물을 들이킨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외출하기 전,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아이에게 보이며 “나 어때?”라고 묻는다. 아이는 “그냥 사십대 아줌마 같지 뭐.”라고 답한다.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한 친구가 묻는다. “넌 어떤 말이 듣고 싶었는데?” 나는 답한다. “아가씨 같다는 말.” 이 얘기를 듣자 또한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즐기려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아진다.  



요즘 장마철이다. 비가 와서 습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비가 와서 공기가 상쾌함을 즐기자. 행복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의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그것을 느끼는 자의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