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내 마음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일을 좋아하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싫어하다가 좋아지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싫어하다가 좋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는 일을 경험하고 나니 내 마음을 신뢰할 수가 없다.

 

 

또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장소나 환경에 따라 그것의 느낌이 달라지는 걸 경험한다. 예를 하나 들면, 병원에서의 식사가 그렇다. 나는 병실에서는 물론이고 병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도 밥 먹기를 힘들어 한다. 평소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이라 할지라도 병원에서 먹으면 맛이 없어 먹기가 괴롭다. 이렇게 먹는 장소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지는 것은 마음이 유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같은 풍경이라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이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우울·불쾌·슬픔·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좋은 감정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이와 관련해 세 권의 책을 뽑아 보았다. 내가 아주 흥미롭게 읽은 책들이다. 나는 이런 책들을 좋아한다.

 

 

 

 

1.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알랭 드 보통 <불안>에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높은 지위’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며, 그래서 지위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불안’이 생기는 것에 주목하였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을 결정하기 때문이다.”(9쪽)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9쪽)

 

 

그리하여 ‘지위로 인한 불안’을 없애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죽음을 생각하기이다.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297쪽)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떤 행동들이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301쪽)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죽음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306쪽) 아무리 잘난 사람도 결국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갈망하는 ‘지위’라는 것도 별것 아닌 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폐허를 보는 것이다. 폐허는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316쪽)이며 “국지적인 승리는 가능하지만, 몇 년 정도 혼돈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원시의 용액으로 돌아갈 운명”(316쪽)임을 말해 준다. 이처럼 “영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316쪽) 그러므로 폐허를 보고 나면 ‘지위’라는 것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셋째, 광대한 풍경을 보는 것이다. “광대한 풍경 역시 폐허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다독여 주는 효과가 있다.”(320쪽) “광대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회적 위계 내에서 우리가 하찮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이 우주 안에서 하찮다는 느낌 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320쪽~321쪽)

 

 

이것을 정리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또는 폐허나 광대한 풍경을 보게 되면 마음이 움직여서 불안(또는 불행)을 없애거나 덜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큰 불행을 겪은 사람이 여행을 하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도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겠다. 여행을 통해 광대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2.

당신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에서 ‘대조효과’를 이용한 어느 여대생의 편지를 공개한다. 그 여대생은 자신의 나쁜 성적을 부모에게 편지로 알리는데, 부모가 화가 덜 나도록 ‘대조효과’를 이용한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집을 떠나 학교에 온 후로 자주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저는 지금 모든 것이 편안합니다. 이곳 기숙사에 입주하자마자 불이 나서 저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다가 골절상과 뇌진탕의 부상을 입었지만 이제는 거의 다 나아 괜찮습니다. 병원에는 단지 2주일 동안만 입원해 있었어요. 이제는 하루에 한 차례씩 두통에 시달리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다행히 저의 기숙사에 불이 난 것과 제가 불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을 기숙사 근처의 주유소 직원이 목격을 하고 저를 위해 증언을 해 주어서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화재를 발견하고 소방서에 연락했을 뿐 아니라 구급차를 불러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답니다.

 

 

더군다나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저를 위문차 찾아와서 기숙사가 불이 나서 갈 데가 없다면 그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도 좋다고 저를 초대하는 호의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사실 그의 아파트라는 것이 지하실의 단칸방에 불과했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그는 매우 훌륭한 청년이어서 우리는 금방 서로 사랑에 빠졌고 장래를 약속했답니다. 아직 구체적인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있으면 제 배가 더욱 불러져서 보기 싫어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놀라셨죠? 그래요 저는 임신을 했답니다. (…) 저희가 아직 결혼 날짜를 확정하지 못한 것은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이의 질병이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고 저도 어쩌다 보니까 그 병에 전염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부모님은 그이를 우리 집안의 사위로 환영해 주시리라 믿어요. (…)

 

 

(이것에 이어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하하! 엄마, 아빠 이제 정말로 저의 최근 근황을 말씀드릴게요. 사실은 기숙사에 불이 난 적도 없으며 저는 골절상과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어요. 게다가, 저는 남자 친구도 없으며 동거한 적도 없고 따라서 임신도 하지 않았지요. 물론 질병에 걸리지도 않았구요. 그러나 문제는 제가 미국사 과목에서 ‘D’ 학점을 그리고 화학에서 ‘F’ 학점을 받았다는 거죠(--!!). 매우 유감스러운 성적이지만 제가 건강히 학교를 잘 다니고 있으니 별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샤론 드림

 

(46쪽~47쪽)

 

 

 

이 편지를 받은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성적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리라.

 

 

 

3.

당신은 상술로 인해 마음이 움직인 적은 없는가

 

 

 

 

 

에릭 번 <심리게임>에서 인간의 내면에는 부모, 어른, 아이 등 세 가지의 ‘자아 상태’가 존재한다며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부모 - 부모 역할을 하는 인물과 닮은 자아 상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 부모를 모시고 다닌다.)

 

 

어른 - 자율적으로 객관적 현실 평가를 지향하는 자아 상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어른이 있다.)

 

 

아이 - 아동기 초기에 고착되어 지금까지도 활용하는, 미성숙한 아동기 흔적을 대표하는 자아 상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그리고 극적인 판매 게임으로, 상술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를 소개한다.

 

 

판매원 : “이게 더 낫긴 한데, 고객님한테는 좀 부담스럽죠.”

주부 : “이걸로 하겠어요.”

 

(53쪽)

 

 

판매원은 어른으로서 두 가지 객관적 사실을 언급한다. “이것이 더 낫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을 살 형편이 안 된다.” 표면적 혹은 사회적 수준에서 보면 이 진술은 주부의 어른에게 말하고 있으며, 주부의 어른이라면 “두 가지 모두 맞는 말씀입니다.”쯤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면, 혹은 심리적 벡터는 노련한 판매원의 어른으로부터 주부의 아이를 향하고 있다. 판매원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은 아이의 대답이 입증하고 있다. 아이는 사실상 “가계부에 구멍이 나든 말든 이 거만한 친구에게 내가 누구보다 훌륭한 고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53쪽)

 

 

자기 안의 ‘아이’를 잘 지배하지 않으면 남으로부터 지배당하는 일이 생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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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1-2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내 마음'을 예쁘게 믿으면서
하루하루 즐거이 누려 주셔요~

페크pek0501 2012-01-28 23:07   좋아요 0 | URL
된장님, 아름다운 말씀 감사 드립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1-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판매원의 사례는 경제학에선 베블렌 효과라고 하지요.경제학 서적도 재미있다는 것을 몸소실천해준 베블렌!

페크pek0501 2012-01-28 23:09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전 몰랐어요. 경제학 서적도 재밌는 것 많지요. ㅋ

늘 감사해요.

oren 2012-01-2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움직이는 문제'와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의 원인으로 지적한 '지위에 대한 갈망'을 결부시켜 놓은 글을 읽어보니, 스티븐 핑커가『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지위'에 관한 문제를 그토록 여러 페이지에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한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창고에서 '지위'라는 단어를 검색해서 이 글과 연관이 있겠다 싶은 내용들을 덧붙여 봅니다.

* * *

서열과 지위


인간에겐 엄격한 서열이 없지만,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 사이에 일종의 서열 관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서열이 높은 사람은 의견의 우선권이 있고, 공동의 결정에서 발언권이 크고, 대개 공동의 자원을 더 많이 분배받고, 아내와 애인을 더 많이 거느리고, 다른 남자들의 아내와 더 많이 성관계를 맺는다. 남자들은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동물학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들과 인간에게 고유한 방법들을 이용해 지위를 획득한다. 싸움을 잘하는 남자들은 더 높은 지위를 얻고, 외모가 매력적인 남자들도 높은 서열을 얻는다.(764쪽)

지위

지위는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다. 그런 자산에는 아름다움, 독보적인 재능이나 전문성, 유력자들의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부가 포함된다. 지위를 뒷받침하는 자산들은 대용이 가능하다. 부는 인맥을 만들고, 인맥은 부를 만든다. 아름다움은 (선물과 결혼을 통해) 부로 전환되거나, 중요한 사람들의 주목을 끌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구혼자를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자산 소유자는 단지 자산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후광이나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총애를 받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총애를 원하게 만들면 항상 편리하므로, 지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간절히 원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아첨꾼들은 누구에게 빌붙을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지위는 어디까지나 한정된 자원이다. A의 지위가 높으면 B의 지위는 낮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들은 경쟁을 해야 한다. (766쪽)

간통의 심리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경쟁자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권위, 찬성, 존엄, 우월, 명성, 존경, 체면, 지위, 탁월함, 위신, 지위, 존중, 평판, 신분, 고매함 등으로 불리는 그림자 같은 실체를 거머쥐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리본과 한 조각의 금속을 목에 걸기 위해 굶주리고, 목숨을 걸고, 재산을 탕진한다. 경제학자 소스타인 배블런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너무 많은 생활필수품을 희생하기 때문에 마치 '고상한 정신적 필요'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위와 미덕이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다음의 단어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사도 정신이 있는 chivalrous, 귀족적인classy, 품격이 있는courtly, 신사다운gentlemanly, 명예로운honorable, 고귀한noble, 위엄 있는princely. 정반대의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버릇없이 자란ill-bred, 비천한low-class, 천한low-rent, 비열한mean, 역겨운nasty, 무례한rude, 인색한shabby, 천한shoddy. 개인의 사소한 외양에 대해서도 우리는 옳은right, 선량한good, 예절에 맞는correct, 흠잡을 데 없는faultless 같은 도덕적 비유로 그 멋을 표현하고, 볼품없이 입은 자를 비난할 때에는 대개 죄악을 가리키는 어조를 동원하여 초라한tack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술사가 쿠엔틴 벨은 그런 태도를 '의복 도덕성sartorial morality'이라고 칭했다.(757쪽)

명예(honor)

자기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빈민가의 폭력배는 특정한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문화에서 비슷한 유형이 발견되는 보편적 인물이다. (영어를 포함하여) 많은 언어에서 명예honor라는 말은 불가피할 때는 피를 보더라도 모욕에는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의미한다. 많은 식량수집 사회에서 소년은 살인을 한 후에야 남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한 남자의 존경은 살인을 입증하는 증거의 수에 비례하고, 그에 따라 머리 가죽 벗기기나 머리 사냥 같은 관습이 탄생한다. '명예로운 남자들'의 결투는 미국 남부의 전통이었고, 많은 남자들이 결투를 통해 지도자의 지위에 올랐다. 10달러 지폐에 새겨진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은 아론 버 부통령과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20달러 지폐에 새겨진 앤드로 잭슨 대통령은 두 번의 결투에서 승리했고 그 밖에도 여러 번 결투를 도발했다.(763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에서

oren 2012-01-29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제가 가끔씩 떠올리는 방법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 * *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275∼276쪽)

- 아담 스미스(Adam Smith),『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中에서

oren 2012-01-29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움직이고 다스리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프로이트와 C.G.융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현대심리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쇼펜하우어로부터 배울 수 있는 내용들도 덧붙여 봅니다.
* * *

모든 불행과 고통에 있어 우리에게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자기보다 더욱 비참한 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153쪽)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 일의 객관적인 진실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즉 사물에 대해 우리가 하는 해석을 관장하는 주관적인 진실이다. 이것을 에픽테토스는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다"라고 말했다.(303쪽)

우리는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을 더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재앙이 일어났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 것은 우리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불행한 등료들'과 어울리는 일이다.(416쪽)

이미 변경할 수 없게 된 불행한 사고를 냈을 경우,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거나 미리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자꾸 후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고통을 조장하며, 결국에는 자학에 빠지게 되므로 차라리 다윗 왕처럼 할 일이다. 왕은 자식이 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께 기도와 애원으로 성가시게 했으나, 자식이 죽어 버리자 거문고를 튕기며 이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손쉽게 체념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다는 대진리를 자각함으로써 숙명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제일 좋다.(418쪽)

자기 혼자서는 모든 소망 중에서 극히 작은 한 부분밖에 손에 넣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재앙은 모든 사람들이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고 우리의 소망에 하나의 목표를 세워 욕구를 억제하고 분노를 막아야 한다. '그대들은 절제하고, 참고 나가라.' 이것이 하나의 법도이다. 이를 무시하면 재물도 권세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비참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이를 주제로 해서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모든 일을 손쉽게 처리하는 방법은
현자의 글을 읽고 석학에게서 배우는 것.
탐욕도, 불안도, 무익한 기대도
그대를 이제 괴롭히지 않으리니 ······.
- 《서한집》 1;18의 96 (424쪽)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 中에서


페크pek0501 2012-01-29 12:43   좋아요 0 | URL
아, 감탄사 연발합니다. !!!!!!!!!!!!! 그리고 감사 드립니다. 댓글을 세 개씩이나, 그것도 길게 써 주셔서 썰렁하던 제 서재가 꽉 찬 느낌이 드네요.ㅋ

제가 다 아는 책들이라서 더 반갑네요.ㅋ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사진 않았지만 네이버의 '오늘의 책'리뷰를 읽고 알았어요. 여기에도 좋은 글이 많네요. 명예를 위해 결투를 해서 목숨을 잃기도 한다 - 는 것은 <불안>에도 나옵니다. 그깟 명예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이런 점이 저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점으로 읽혀요. 인간의 본질 같은...

애덤 스미스의 글은 저도 밑줄을 쳐 놓았던 부분입니다. 지금 확인하고 웃습니다. ㅋㅋ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다"라고 말한 에픽테토스의 말, 외워 놓고 싶은 문장이군요.(어디다 적어 놔야지...ㅋ)

아, 이 말씀 진작 드리고 싶었어요. 오렌님의 이미지 사진은 참 멋있어요. 꼭 오렌님이 배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댓글 쓰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요. 물론 이곳에도 배를 타고 오신 것 같고요. 멋진 상상 아닙니까. ㅋ

아, 그리고 아쉬운 점은 댓글도 잘 쓰면 추천 누르기가 있어야 하는 건데,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말로(그냥 말로만) 제가 추천을 한 번 눌러 드리겠습니다. 댓글에 추천을 꽉~~~^^^:)

oren 2012-01-30 02:24   좋아요 0 | URL
"마음을 바꾸거나 다스리는 법"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고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아닐까 싶은데,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 같아서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에픽테토스의 『불확실한 세상을 사는 확실한 지혜』라는 책도 구입해 놓고 있는데 (매우 얇은 책이지만) 여태 읽어보지 못하고 있답니다.

'명예'를 위해 어리석게 '결투'를 하는 '한심한 풍경'은 쇼펜하우어에게도 너무나 인상적이었던지 그의 책 『삶의 예지』에서 너무나 '지겹도록' 길고도 상세하게 '철학적으로' 고찰해 놓았더군요.

'마음을 바꾸기 위한' 얘기들을 이래 저래 떠올려 보니 문득 평생동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애를 썼던 몽테뉴 생각도 많이 납니다.
* * *
몽테뉴의《수상록》에 대한 독후감(1984. 9.18)
(관련글 ☞ http://blog.aladin.co.kr/oren/4070322)






페크pek0501 2012-01-30 14:01   좋아요 0 | URL
아, 오렌님은 글씨를 꽤 잘 쓰시는군요.(저는 내용보다 필체를 더 눈여겨 봤음) 혹시 학창시절에 모범생에다가 우등생이셨나요? 아무래도 그런 듯해요.

저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혜원출판사의 것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보니 이런 글에 줄이 쳐져 있네요. "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해롭다" - 즉 우리 마음 속의 소원은 대부분이 타인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깨달음을 주는 글에 미쳐?요. 다시 꼼꼼히 읽어야겠어요. 좋은 인용문도 많이 나오죠.

다음 페이퍼엔 '마음'에 대한 제 생각의 글을 쓰려 해요. 제 생각 많이 담아서요. 구상은 끝났는데 잘 될지는 써 봐야 알겠어요. 사실 그걸 쓰고 싶었는데 저의 생각 짦음을 들킬까 봐 이 페이퍼엔 제 생각 쓰기를 자제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전 자신감이 없답니다.ㅋ 며칠 뒤 다시 배를 타고 놀러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의 하찮은 글의 댓글에 님의 필체까지 공개해 주신 점, 감사할 뿐입니다. 호호~~

oren 2012-01-30 23:33   좋아요 0 | URL
"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해롭다"는 말은 '불가피성'을 띠고 있어서 '필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몽테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지만, (좀 더 범위를 넓게 확대해서 바라본) 다윈의『종의 기원』에서도 무수한 생명체들이 결국 '개체의 보존과 번식'을 위해 '다른 개체'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잡아 먹습니다'. '생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식물은 물과 공기와 여러 원소들을 소비한다는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지요.

다윈보다 좀 더 앞선(출생으로 따져보나 대표적인 저작의 집필과 출판으로 따져보나) 쇼펜하우어도 '다윈의 주장에 버금갈 정도로' 이 '생명의 필연'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우리는 자연의 도처에서 항쟁, 투쟁, 그리고 승리의 교체를 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의지와의 근본적인 분열을 한층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의지의 객관화에서 각 단계는 다른 단계의 물질, 공간, 시간과 투쟁한다.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유기적인 여러 현상은 각기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고 싶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발현시키려고 애쓰면서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서로 물질을 탈취하려고 하므로 지속적인 물질은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싸움은 모든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 자연은 이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사물 속에 투쟁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일 것이다"라고 엠페도클레스는 말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제5권) 왜냐하면 이 투쟁이야말로 의지와 자신과의 근본적인 분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투쟁이 가장 명백하게 보이는 것은 동물계이며, 동물계는 식물계를 그 영양으로 갖고, 또 각 동물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고 영양이 된다. 즉 그 이념을 나타낸 물질은 다른 이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며, 각 동물은 다른 동물을 끊임없이 파괴함으로써만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생에 대한 의지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고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지만, 결국 인류는 다른 존재를 제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자기가 사용하기 위한 제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제4권에서 언급할 작정이지만, 그 인류도 자신 속에 투쟁, 즉 의지의 자기 분열을 무서울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고,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가 되는 것이다.(671쪽)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의 객관화 과정' 中에서

페크pek0501 2012-01-31 12:41   좋아요 0 | URL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나요. ㅋㅋ오래 전에 읽어서요.

제가 <어느 독서광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진짜 독서광은 제가 아니라 오렌님 같아요. 감탄!감탄!ㅋㅋ

그래서 오렌님을 독서광으로 임명합니다.(제게 이런 권한은 없지만요...)

배멀미는 안 하시는지...ㅋㅋ

sslmo 2012-01-2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페이퍼와 이 페이퍼의 댓글들과 댓글의 덧글들을 꼼꼼히 읽은 저로서는,
위 글 모두를 캡쳐해서 꽝꽝꽝 추천을 한 백만개 쯤 날리고 싶어요.
글이 논리정연하고 차곡차곡 반듯한 진행이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근데, 마음을 움직이기 전에...제 마음 좀 어딨는지 찾아주시면 안될까요?@@

oren 2012-01-30 01:2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께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ㅎㅎ
'마음'이야 제 스스로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법일텐데, 궁금한 건 늘 '어디에서 어디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 * *
"인간의 마음이란 한 번 새로운 생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 절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 올리버 웬델 홈스

페크pek0501 2012-01-30 14: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도 잘 모르는데, 님의 마음을 어떻게 찾아 드릴까요?ㅋㅋ

아, 저도 님을 배워요. 한 백만 개쯤의 추천이라..., 참 스케일 크십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이런 글은 한 20개쯤 추천을 날려야 하는 건데, 라고... 그런데 이젠 백만 개라고 해야 겠어요. 양철나무꾼님을 따라 해서...ㅋㅋ

굿바이 2012-01-3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0501님의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건데요 저는 어떤 노력도 잘 안하는 것 같아요.
제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같아요.
게으른 것이 원인인지, 겁이 많은 게 원인인지, 둘 다 해당되는 건지 따져봐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12-01-30 14:0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ㅋ
마음이란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사는 게, 속 편하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요. 또 어떤 면에서는 그래야 될 것도 같고요.
또 뵈요. !!!!ㅋ 고맙습니다.

마태우스 2012-01-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그언니 안녕하세요
움 저 여대생의 편지를 읽고 부모님이 안도했을 거 같진 않네요.
너무 엄청난 얘기들을 많이 써놓았고,
나중에 뻥이야,란 말을 듣고도 분이 안풀릴 것 같은데요
제가 너무 인색한가요^^

페크pek0501 2012-01-30 14:19   좋아요 0 | URL
페크언니, 라고 하셨습니까? 크하하하하하하...
왜 저를 이렇게 웃기십니까? 다행히도 커피를 다 마셔서 빈잔이 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번처럼 쏟을 뻔했는데...ㅋㅋ

님이 인색하신 건 아닌 것 같고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사람의 따라서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건 상상의 문제로 볼 수 있을 듯해요. 아이의 성적이 나쁘면 더 나쁜 상황(예를 들면 어디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다든지 하는...)을 상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교훈 얻을 순 있을 것 같아요. 이 글을 통해서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면 좀 나아지는 걸 경험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 빈말이 아닌 것 아시죠?

마녀고양이 2012-01-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릭번의 <심리게임>은 제가 토요일에 주문한 책인데,
언니네 서재에서 보다니,, 하고 신기해하고 있어요.

마음이라, 마음이라,,, 저는 오늘 같은 날은, 제 마음 없애버리고 싶어요.
왜 이리 벌렁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내내. ㅠㅠ

페크pek0501 2012-01-31 12:43   좋아요 0 | URL
<심리게임>, 재밌어요. 탁월한 주문되시겠습니다. 저도 님의 서재에서 정보 갖고 왔어요. ㅋㅋ 나도 사야지, 하면서...


아이리시스 2012-01-3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안녕.
우리 마고님을 위로해주세요.
그리고 저도 응원해주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뭔 소리인지;;)

페크pek0501 2012-01-31 12:43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은 제가 응원 안 해도 잘 하고 계십니다. 늘 그렇게 하고 계세요. 늘 지금처럼... 오늘 제가 누가 온다고 해서 시간이 없어서 님의 그 긴 글을 꼼꼼히 못 보는데, 다음에 보게 될 거예요. ㅋㅋ

잘잘라 2012-01-3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드 보통의 불안,을 읽어봐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1-31 12:44   좋아요 0 | URL
아, 메리포핀스님,
<불안>을 탐독해 보세요. 저는 이런 책에 열광한답니다. 한 가지 주제로 어떻게 한 권의 책을 만들었는지를 감탄했답니다.ㅋㅋ 좋은 독서 되실 거예요. ㅋㅋ
 

 

 

 

살다 보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기분이 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상황을 범인(凡人)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작가적인 눈’으로 보자고.

 

 

그러면 그 생각만으로도 다소 위안이 된다. 작가적인 눈은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눈이 아니던가. 그래서 음지를 양지로 생각하기도 하고, 실패를 성공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게 작가적인 눈이 아니던가. 무엇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키는 그 눈을 닮고 싶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항상 봐 왔던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작가적인 눈이 가지는 ‘새로운 시각’은 중요하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일도, 기분이 상한 일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나면 달라져 보이니까. 나쁜 ‘위기’가 좋은 ‘기회’로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요즘 난 ‘작가적인 눈’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내가 닮고 싶은 ‘작가적인 눈’을 살펴보기 위해, 그와 관련된 글들을 골라 보았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좋은 글들이기도 하다.

 

 

 

 

1.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이런 대답을 한다고 썼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19쪽)

 

 

소설가가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이유는,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맛있는 음료를 내놓고, 상대가 그곳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것. 마치 자기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445쪽)

 

 

그래서 독자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루키가 만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독자가 그 방을 아주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마음이 통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세상사를 서로 나눠 가진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독자가 그 방에 있는 동안엔 세상을 작가의 눈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하루키가 세상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쓰고 싶은 책에 대해서는,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거나 찌르는 책만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만 한다.”(459쪽)

 

 

책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게 카프카의 생각이며 동시에 하루키의 생각인 것이다. 그 정도로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려면 어떤 책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뻔하지 않음’을 담고 있는 내용의 책이어야 하겠다. 낯선 세계 또는 의외성이 있는 세계로 안내하는 책이면 될 것 같다. ‘세상의 비밀’이 담겨 있는 책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고착된 생각의 언 바다를 깰 수 있으면 된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이 고착되어 있는가. 이렇게 고착되어 있는 것들을 깨려면 ‘작가적인 눈’이 필요하리라.

 

 

 

 

2. 알랭 드 보통, <불안>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소설이란 장르에선 ‘작가적인 눈’이 어떻게 나타날까. 이에 대해 언급한 책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세상을 보는 소설가의 시각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며 이렇게 썼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져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의 움직임은 물질적 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부자이고 품행이 단정하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180쪽~181쪽)

 

 

때로는 “첫째가 꼴찌 비슷해지고, 꼴찌가 첫째 비슷해진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1834)에서 우리의 공감이 이끌리는 사람은 호화로운 집에 사는 마담 드 뉘싱겐이 아니라 더러운 하숙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빨 빠진 고리오 영감이다. 하디의 <미천한 주드>(1895)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은 옥스퍼드의 연구원들이 아니라 대학의 석상을 수리하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석공이다.”(182쪽~183쪽)

 

 

이와 같이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점심 준비로 바쁜 하녀가 보기 드문 감수성과 도덕적 위엄의 소유자인 반면, 시끄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은광 소유자 남작의 마음은 시들고 역겨울 수 있다.”(183쪽)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훈을 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 내면의 가장 좋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외적인 성취로 표현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183쪽)

 

 

이처럼 소설은 현실에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인간의 감추어진 어떤 모습을 부각시켜서 그것의 가치를 드러낸다. 눈에 띄지 않아 올바르게 알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이런 ‘세상의 비밀’을 포착하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 <불안>의 인용문 페이지는 구판의 책에 따라 표시함.

 

 

 

 

3.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수필에서는 ‘작가적인 눈’이 어떻게 나타날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은 저자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마라톤’에 대한 글이다. 모두들 1등으로 달리는 마라토너만을 향해서 응원하는 데 반해 저자는 꼴찌에게 응원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꼴찌로 달리는) 푸른 마라토너는 점점 더 나와 가까워졌다. 드디어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지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저자는 마라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라톤이란 매력 없는 우직한 스포츠라고밖에 생각 안 했었다. 그러나 앞으로 그것을 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이 조금도 속임수가 용납 안 되는 정직한 운동이기 때문에. 또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이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꼴찌로 달리는 마라토너에게도 관심을 갖고 그의 비밀을 발견해 내는 것이 작가적인 눈이다. 그에게서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이 있다는 점을 알고 응원할 수 있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4. 유치환, <깃발>

 

 

 

 

 

 

시에서는 ‘작가적인 눈’이 어떻게 나타날까.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깃발>

 

 

 

이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지금껏 몰랐던 ‘깃발’의 비밀을 알게 된다.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기도 하고,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기도 하고, ‘순정’이기도 하고, ‘애수’이기도 하고,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깃발을 단순히 깃발로만 보지 않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 맺는말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보듯,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우리 안의 고착된 생각들)를 깨뜨릴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불안>에서 보듯, 부와 권력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인격의 특질을 중요시할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골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보듯, 골찌에게도 응원의 박수갈채를 보낼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깃발>에서 보듯, 한 가지의 사물을 다양한 모습으로 볼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은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떤 고정관념과 편견에 갇히지 않는 일이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일이다. 어떤 것에 대한 비밀의 ‘진실 찾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커다란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는 더듬거려 가며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밝혀 보려고 애쓰는 발견자이다.”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비밀’이겠다. 작가적인 눈을 가지고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될수록 세상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가고, 세상의 진실을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해지는 일이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작가적인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적인 눈’으로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어떤 세계든 어떤 사물이든 시각에 따라서 아주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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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권력은 이야기를 가진 자라는 걸 최근 <부러진 화살>을 보면서 깨닫 게 됐어요.
특정 분야를 잘하는 사람은 그 분야만 잘해요.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그들 보다 우위에 있죠. 권력 참 무서운 건데.ㅜ
작가들이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참 순수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언니도 잡문집 읽으셨군요. 이책 의외로 읽은 맛이 쏠쏠한 것 같아요.
물론 어느 부분은 건너뛰긴 했지만.ㅋ

페크pek0501 2012-01-17 16:23   좋아요 0 | URL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작년에 사 두고 이제야 읽었어요. 그의 소설은 몇 권 읽었는데, 에세이는 처음 봤어요. 하루키는 사유가 깊은 뛰어난 작가라기 보단 매력적인 작가 같아요. 그러니까 교과서에 실릴, 역사에 남을 작가가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작가라는 거죠. 그가 매력이 있든지 아니면 어떻게 글 써야 독자들을 매료시킬지를 알든지, 둘 중 하나 같아요.

하루키도 좋지만 전 알랭드보통이 더 좋아요. <불안>은 분석력이 뛰어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어요. '불안'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인간을 그만큼 통찰한다는 걸 보는 게 즐거웠어요. 아마 알랭드보통의 책들 중엔, <불안> 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을 듯해요.

루쉰P 2012-01-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이라 이렇게 정체를 드러내고 댓글을 쓸 수 밖에 없군요. 페크님이 써 준 글은 왜 내가 소설을 읽는가에 대한 답도 되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소설에서 답을 찾으려고 독서를 했던 것 같아요. ㅋㅋ 마치 시험 보듯이 말이에요. 근데 그게 아니라 내 시각은 편안히 내려놓고 작가의 시선을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독서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요. 그와 나의 사상의 접점을 찾아보기도 하구요. ㅋㅋㅋ 제가 고전이라 위대한 작가라 할 지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저보다 몇 십배 높은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하 페크님 글 너무 좋아 좋아 ㅋ

페크pek0501 2012-01-18 13:09   좋아요 0 | URL

늘 호의적으로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글은 저 같은 사람들이 좋아하죠. 문학의 '문'자만 들어가도 좋은 사람들... 문학에 대해 논하는 글은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들...
그래서 한때 문학이론서를 수십 권 읽었어요. 재밌었어요.

문학의 '문' 자만 들어가도 좋은 사람들 중엔 우리 루쉰님도 포함될 듯해요.ㅋㅋ

프레이야 2012-01-1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페이퍼가 너무 좋아 한참 머물게 되어요.
작가적인 눈으로 세상 보기,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네요. 세상의 비밀을 볼 수 있는 눈, 저도 갇혀있지 않은 눈이어야겠어요.
전 김영갑 사진 작가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보고도 이와 비슷한 걸 느꼈어요.
제주 사람은 여기 뭐 찍을 게 있다고..라고 눈만 뜨면 카메라를 들고 들판을 다니는
그에게 핀잔과 염려를 줬지만 그 풍광 속 비경을 엿보고 영원히 담은 그는 그 대가로
루게릭을 얻었을까요?
위에 쓰신 박완서님이 수필도 참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12-01-18 13:07   좋아요 0 | URL
반가운 프레이야님.
닉네임이 참 좋습니다. 프레이야, 라고 발음하는 순간, 상큼한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느낌이에요. (여신인가요?)

지난번 님의 좋은 글을 저도 잘 읽었답니다.

다음엔, 프레이야님의 서재에서 뵙겠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12-01-18 22:56   좋아요 0 | URL
호호~ 좋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라 저도 기분 좋아요.^^
그 닉은 사실 예전 것에서 바꾼 것인데 여기 알라디너 한 분이 주신
이름이에요. 북구의 여신 이름이랍니다. ^^

페크pek0501 2012-01-19 13:25   좋아요 0 | URL
여신의 이름이 맞군요. ㅋ

또 뵈요, 프레이야님... 상큼한 향기가 나는...ㅋ

oren 2012-01-18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마치 최근에 나온 '어느 신간의 일부분'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다소 엉뚱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한편으로는 '작가적인 눈'은 곧 '어린아이의 눈'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결국 (다른 숱한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시인이나 작가 혹은 예술가들은 '어린아이의 눈'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반면, 작가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척 사나운' 세상과 마주치며, 결국 '삶의 난동'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 *

"사람의 두뇌는 일곱 살쯤 되면 상당히 커지며, 지능도 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외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생기발랄해 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사실 모든 시와 예술의 본질은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이데아(사물의 실체)를 붙잡는 일, 다시 말해서 개체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 일이다"

"또한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무렵에는 외부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하나하나의 사물이 대표적으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그 종류 가운데서 유익한 실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인식보다는 의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므로 외부의 사물은 대부분 고뇌를 안겨 준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인식의 눈으로 보면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의지의 눈으로 보면 무척 사나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자보다는 전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유년시절의 특징이다.

이 무렵의 인간은 사물의 아름다운 일면만을 알고 두려운 점을 모르며, 우리 자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에 순수한 그 사물 자체 또는 예술에 묘사된 것과 흡사하여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으레 행운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을 벗어나면 차츰 인식보다 의지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생활의 대상으로서 선과 미를 의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사물과 의지의 여러 가지 반작용이 일어나 괴로운 운명에 시달리면서 '삶의 난동' 속에 빠져 들어간다."


페크pek0501 2012-01-18 13:0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래서 "시심은 동심"이란 말이 있나봐요. 사물을 처음 보는 눈으로 낯설게 볼 때 예술작품이 탄생한대요.

우리 아이가 어릴 때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보고, 엄마 누가 저렇게 높이 올라가서 반달을 접었지?, 하더라고요. 그때 한참 종이접기 하고 놀 때인데 달마저도 누가 반으로 종이접기한 걸로 알더라고요. 그게 시심이고 동심인 것 같아요. ㅋㅋ 그런 시각은 이미 어른들은 힘들죠. 예술가들에겐 가능하겠지만...

좋은 글, 천천히 읽으며 감상했어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1-1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 언니, 항상 감탄하며 읽는 글들입니다.

적절하게 사회성에 적응하면서도,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지나치게 새로운 눈만 추구한다는 것 역시 위험하니까요.
그렇다고 지나치게 안주하는 것 역시... 균형이 역시 문제구나 싶어집니다.

최근 들어, 자신 내면으로만 파고들어
사회나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 이해를 못 하여 자신 또한 고생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고 있기에 더욱 생각이 많습니다...

페크pek0501 2012-01-18 20: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새로운 눈만 추구해도 역시 인간은 기존의 눈으로 봐 왔던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할 것이므로, 그냥 새로운 시각의 추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해요. 저 역시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마녀고양이님은 이 방면으로 생각을(공부를)많이 해 보신 듯해요. 균형, 공감, 이해 등 사용하시는 낱말만 봐도 알 수 있지요. ㅋㅋ


아이리시스 2012-01-1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도 말하기 힘든 게 보통 사람인데 소설가나 예술가들은 창조하고 비틀기까지 하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여러 텍스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페크님의 페이퍼도요.

1월 시작이 어제인데 벌써 절반이 지나갔잖아요. 저도 독서에 좀 열올려야 이런 글 쓸 수 있을까요? 책 읽는 시간은 사치 같으면서 TV는 잘도 보고 앉아있어요. 이런ㅠㅠㅠㅠㅠㅠㅠㅠ

페크pek0501 2012-01-18 20: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창조와 비틀기, 어려운 일이지요.
소설의 경우 에둘러 쓰는 일이라 저처럼 직설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직설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칼럼을 써야 하죠.

독서? 늘 하고 계시잖아요. 영화도 꽤 챙겨 보시는 것 보고 놀랐어요.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요... ㅋㅋㅠㅠㅠㅠㅠ

마태우스 2012-01-18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걸 님의 글과 댓글들을 보면서 재확인합니다. 책으로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추천합니다. 21번째예요. ^^

페크pek0501 2012-01-19 13:24   좋아요 0 | URL
책으로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요? 호호~~~ 일단 감사합니다.

음~~ 책, 내고 싶죠. 그런데 글이 아직 멀었으니 이러고 있어요. 글을 119편을 올렸는데, 글을 그 정도로 써 본 사람이면 자신의 역량을 자신이 가장 잘 알게 되죠. 아무리 주위에서 호평을 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저는 앞으로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써야 해요. 갈 길 멀어요.

그래도 생각은 죽기 전에 한 권은 내겠지, 하고 있어요. 이렇게 미래에 책을 낸다고 생각하고 살면 마음이 풍성해지고 삶도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제게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히히~~

신지 2012-01-2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은 절제되고 정돈된 글을 쓰시면서 좋은 생각을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시는 것 같아요. 큰 장점인 듯 해요.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인사했을 때가 명절 때(추석 때인가..)였던 것 같네요. 이번에도 집에 다녀오기 전에 들렀습니다. 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

페크pek0501 2012-01-24 00:58   좋아요 0 | URL
어머낫, 이게 누구신가요? 오랜만에 보는 닉네임, 오래만에 보는 이미지 사진이네요. 무척 반갑습니다.

답글이 늦어 미안합니다. 3일 전에 대구에 갔다가 오늘밤 늦게 돌아왔어요.

추석 때라면 으음~~ 넉달 동안 잠적하신 셈이네요. 서재활동을 중단하셨나, 했어요.ㅋ 어쨌든 컴백?하신 것 같아 반가워요.

신지님도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 또 뵙기를...

순오기 2012-01-27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면 생각쓰기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이 됩니다.
'책은 도끼다'를 제목으로 삼은 박웅현이 인용한 카프카의 글을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꼴찌에게 갈채를 보낼 줄 아는 마음결을 나도 갖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12-01-28 12:54   좋아요 0 | URL
아, 언제나 반가운 순오기님.

카프카의 글, 유명하죠. 저도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인용한 적이 있는 글이에요. 책은 도끼다, 를 읽어셨군요. 저는 못 읽었어요. 평은 좋던데...

참, 출연은 어떻게 되셨나요? 꼭 글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볼게요.ㅋㅋ

순오기님에 비하면 난 너무 게이름뱅이... 이 게으름뱅이가 오늘은 새 글을 올릴 거예요. 후~후~
 

 

1. 시간 : 벌써 2012년 1월로 넘어섰다. 새 달력을 걸었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 가끔 흘러가는 시간이 두렵다. 앞으로 시간이 바퀴가 달린 듯 빠르게 달려가서 어느 새 내가 폭삭 늙어 버릴 것 같아서.

 

 

 

2. 친구 : 그래도 다행이다. 나만 늙는다면 억울할 것을, 같이 늙어갈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들을 보며 위안 삼는다. 내 늙음의 서글픔을 친구들 말고 누가 알아줄 것인가. 부모님에겐 자식의 도리로써 늙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남편에겐 부질없는 어리광이 될 것 같아 말할 수 없고, 자식들에겐 내 마음을 공감하기 어려울 터이니 말할 수 없고. 결국 친구들에게만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은 내 마음을 알아줄 터였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나 보다. 친구 없는 사람이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같은 시대를 같은 나이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3. 올해의 독서 계획 : 어느 서재인님의 서재에 들어갔더니 자신이 일 년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 그 서재인님은 남들이 일 년 동안 읽을 책을 한 달에 읽는 듯했다. 그만큼 많은 양의 책을 읽고 리뷰를 올린 분이다. 그 성실성에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 댓글을 남기고 왔다.

 

 

나도 한때는 다독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다독의 즐거움을 포기한 지 오래다. 다독을 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 첫째,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책을 많이 읽으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며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시간이란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냥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나가는 모래알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 책을 많이 읽어도 병이 나질 않아야 하므로 몸의 건강은 필수다.

 

 

그런데 나는 그 두 가지 조건에서 실격이다. 우선 부지런하지 않다. 아니 부지런하기가 싫다. 일 년 전만 해도 아주 바쁘게 살았는데, 그 바쁜 일들을 정리하고 난 지금의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 그 생활로 되돌아가서 살게 된다면 살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생활이 마냥 한가롭기만 한 건 아니다. 지금도 바쁘긴 마찬가지라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 버릴 정도다. 그리고 몸에 탈이 잘 난다. 어느 날 하루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더니 병이 났다. 내가 지금 공부하다가 병이 날 나이는 아니다. 고시생도 아니고.

 

 

그래서 결심했다. 이젠 한 달에 4권의 책을 읽고 4편의 글을 쓰기로 하고 무리하지 않기로.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므로.

 

 

 

4. 기억해 두고 싶은 글 :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에서 좋은 글을 발견하여 그것을 인용해서 쓴 글을 서재에 올린 적이 있다. 바로 이 글을 인용했다.

 

 

“도둑놈이 어떤 부잣집의 물건을 훔치는 경우, 그는 부자는 이 물건이 없더라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비록 도둑을 맞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부(姦夫)가 자기 친구의 처(妻)를 유혹해서 간통을 하려는 경우, 그가 자신의 음모를 감추어 그 남편의 의혹만 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정의 평화만 깨뜨리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처럼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행하지 못할 정도로 흉악한 범죄행위는 하나도 없게 된다.” -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 327쪽.

 

 

참 탁월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뜻이겠다. 이 글이 좋은 까닭은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앞으로 자신을 성찰할 시간을 갖게 될 것 같아서다. 예를 들면 친구의 단점에 대해 충고를 할 경우, 충고하는 사람이 자신이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한 것인지를 성찰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충고를 하는 건 다 너를 위해서야.’하면서 상대방의 단점을 상처 받을 정도로 마구 늘어놓고서, ‘아픈 만큼 성숙해질 테니 나는 친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이고 어떤 악도 행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참 좋은 글을 썼다. 꼭 기억해 두고 싶은 글이다.

 

 

 

5. 나쁜 댓글 : 나도 악성 댓글을 받아 봤다. 이런 댓글은 방문자 수가 많은, 인기 있는 파워블로거만 받는 걸로 알았다. 악성 댓글이 달렸다는 건 곧 그 글쓴이가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방문자 수가 많지 않은, 별로 인기도 없는 내 서재에서 악성 댓글이 출현한 것은 좀 어이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그 분에 대한 예의상 그 댓글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겠고, 내 글이 말이 안 된다는 내용의 댓글이었다고만 밝히겠다. 그런데 나는 그 댓글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 전달된 메시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당신의 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음부턴 이런 글 따위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대가 비밀 댓글로 썼으므로 나도 비밀 댓글로 이런 답글을 달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내가 쓰고 싶은 답글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사실은 요렇게 쓰고 싶은 충동을 잠시 느꼈다.

 

 

‘제 글이 못마땅하신 모양인데, 저 같으면 그런 글이 있는 서재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웬 관심이십니까?’

 

 

요렇게 썼다는 게 절대 아니다. 충동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정도의 댓글은 악성 댓글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악성의 정도가 약하고 또 예의를 갖추고 쓴 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할 목적이 아니고 진심으로 내가 잘못 쓴 부분을 지적해서 내가 앞으로 신중하게 글을 쓰길 바라는 목적으로 썼을 것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만약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다. 또 하나 감사할 일은 그 댓글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 댓글로 남긴 점이다. 나를 악의로 공격하고 싶었다면 비밀 댓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서재를 다니면서 악의적인 악성 댓글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예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글쓴이가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낄 만한 글이었다. 이럴 때 나는 궁금하다. 악성 댓글을 쓰는 사람이 그런 글을 쓰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어떻게 삶을 살 수 있는지.

 

 

 

6. 좋은 댓글 : 내 글에 가장 찬사를 보내 준 댓글이 있다.

 

 

‘역시 보통 분이 아니다 싶었는데, 이런 대단한 글을 써 주시네요. 어느 정도 내공이 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요?’라고 쓴 아무개님의 비밀 댓글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장난삼아서다.

 

 

‘역시 탁월한 분은 탁월한 글을 알아보시네요.’라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얼마나 재수 없고 밥맛 떨어지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답글을 썼다.

 

 

‘과찬이십니다. 고맙습니다.’라고.

 

 

 

7. 언젠가는 알게 된다 :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리석은 존재라고 말하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무지해서 착각을 잘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본다.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고 믿는다. 그 당시엔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게 된다. 또 그 당시엔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못났는지도 알게 된다. 내가 경험함으로써 안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어떤 착각을 한다고 해도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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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7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페크 언니는 참!
나 같으면 정말 언니가 써 주고 싶었던 그대로 썼을 것 같아요.
그렇게 싫으면 안 보면 되는 거지 꾸역꾸역 보고 그런 댓글을 달 건 뭐란 말입니까?
비단 그 사람만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정말 이 비판하고 단죄하는 게 좀 사라져야 하는데 언제쯤 가능할런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저도 좀 찔리네요. 어디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ㅜ

페크pek0501 2012-01-08 20:04   좋아요 0 | URL
에그에그... 제가 보기엔 스텔라님도 마음 약해서 세게 못 나가실 것 같은데요.

으음~~, 저도 어디선가 이상한? 댓글을 쓰고 있을지 몰라요. ㅋㅋ

파란놀 2012-01-08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들 스스로 얼마나 좋은 삶과 목숨인가를 느낀다면 참으로 기쁘겠어요..

페크pek0501 2012-01-08 20:04   좋아요 0 | URL
예, 이 추운 날 따뜻하게 지내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 갖겠슴다. ^^

그리고 된장님의 댓글 매일 달기 계획을 저도 따라하겠어요. 호호...

파란놀 2012-01-09 02:24   좋아요 0 | URL
네, 참말 따스한 날씨는
고마운 축복이에요.

페크pek0501 2012-01-09 13:27   좋아요 0 | URL
된장님의 또 다른 닉네임은 따스함이세요, 따스함님.ㅋㅋ

이진 2012-01-0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페크님의 글을 못마땅하다고 하였단 말입니까...
저는볼때마다 감탄을 내뱉는걸요.
그 증거로 매달 이달의 당선작에도 당선되시지 않습니까 ㅋㅋ
페크님도 인기블로거시라니깐요~

페크pek0501 2012-01-09 13:26   좋아요 0 | URL
와우, 제가 인~기~블~로~거? 란 말입니까? 푸하하~~~
이러면 또 소이진님이 좋아지잖아요. 아휴~~~

듣기만 해도 좋습니다. 인기라는 게 거품과도 같이 쓸데없는 것이긴 하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제가 인기가 있다한들(있다고 치고) 소이진님의 인기만 하겠습니까? 모두들 님을 아주 좋아하시던데요.
(아, 남들이 보면 우리 둘이 '놀고 있네' 하겠네요.ㅋㅋ)그만 해야지... 반가웠어요. 또 봐요. 새 글 올리시면 당장 달려가서 흔적을 남기겠음...ㅋ

잘잘라 2012-01-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나이 먹어가는 친구가 있다는게 새삼 든든하게 느껴져요^^ 1,2,3,4,5,6,7. 일곱 번 웃고 일곱 번 공감하고 일곱 번 추천.. 추천은 한번만 하고 갑니당~ ^^

페크pek0501 2012-01-09 13:28   좋아요 0 | URL
아, 일곱 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엔 몰랐어요.
제가 쓴 글이 7번까지 있네요. 히죽~ 웃었음.

일곱 번 웃으셨다니 감사해요. 늘 재밌는 글 쓰고 싶지만 그게 안 되죠. ㅋㅋ
그러나 언젠가는 재밌는 글, 꼭 쓰고 말 거예요. 다음의 새 글이 궁금해질 만큼 재밌는 글을요.

프레이야 2012-01-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차분 하나씩 '나'와 '우리'를 생각하며 읽었어요.
새해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또 하게 되네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렵지도 않겠지요.
첫인사 새해인사와 더불어 드립니다. 좋은 글 자주 뵈어요^^
새해 복 담뿍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2-01-10 14:00   좋아요 0 | URL
첫인사, 고맙습니다, 환영합니다. 많인 본 닉네임이라 낯설지 않네요. ㅋ
이 변변치 못한 글에 댓글 남겨 주시니 황송하네요.

저도 글을 많이 써서 유능해 보고 싶은데, 사람마다 능력의 크기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유능하지 못해서인지 유능한 사람을 좋아해요. 예를 들면 서재의 달인이 되신 분들... 크하하~~

4년 연속 서재의 달인님께서 오셔서 영광으로 생각한답니다. 또 뵈요!!!!!!

아이리시스 2012-01-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짜 싫으면 물러가라고 공개글로 댓글을 함 달아볼까ㅋㅋㅋ 생각해봐요. 그 정도는 돼야 장인정신ㅋㅋㅋ 인정을 하죠. 다들 책을 그만 사겠다는데 심지어 저는 사고싶은 책 참지말고 그때그때 사자, 이렇게 다이어리에 적어놨다니까요ㅋㅋㅋ

친구가 좋긴 한가봐요. 나이 들수록 자식도 남편도 저 멀리멀리 호호호.

페크pek0501 2012-01-11 14:06   좋아요 0 | URL
남편들은 여자들이 늙었다고 하면 공감 못해요. 저희 부부는 동갑인데, 여자들은 사오십대를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남자들은 자신이 한창때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얘기가 안 되죠. 또 부엌일의 피로감도 공감 못해요. 이럴 땐 친구들이 제일이죠.

그렇지만 아이님은 꼭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내 편이 한 명 있다는 것이거든요. 만약 친구와 싸웠다면 남편은 아내 편을 들어줄 겁니다. 또 친정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큰 위로를 해 줄 사람도 남편이랍니다. 친구는 멀리 있어서 도움을 요청할 때만 위로해 줄 수밖에 없어요. 육체가 멀리 있다는 건 마음도 멀리 있는 거예요.

서로의 인생을 죽는 날까지 책임져 주는 부부의 관계가 멋지지 않나요?(어, 쓰고 보니 결혼 예찬론자가 되었네.ㅋ)제 딸들도 꼭 결혼시킬 거예요. 참고하시길... 앞으로 물어 볼 일이 있으면 물어 보세요. 이 부분에선 해 줄 말이 많습니다. ㅋ

아, 중요한 한 가지, 여자를 구속하는 남자보단 여자에게 자유를 주는 남자가 남편감으로 좋습니다. 또 여자를 이기는 것에 관심 없는 남자가 좋아요. 호호~~

마녀고양이 2012-01-1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처음에 누군가가 <인기 블로거>라고 해서 너무 당황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걸까 아니면 그냥 인사치례일까 하구요.
그담에 어떤 서재에 처음으로 놀러갔는데, "아니 마녀고양이님이 이런 곳에" 라고
하신 분께 다시 한번 당황했구요..... 물론 그분들은 선의셨습니다, 감사하기도 했어요.

제가 서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마다 악성 댓글의 정의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당연히
잘못은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행하십니다. 그걸 악성이라 생각하지 않으시지요. 그런데 그걸 받는 사람은, 그 글의 형식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뉘앙스가 다르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악성 댓글 또는 비난이나 힐난성의 댓글을 달았던 분의 서재에 비슷하게 댓글을 달면, 달았던 분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기분나빠하고 상처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받는 입장의 악성 댓글은 비슷하고,
쓰는 입장의 악성 댓글은 다른거 같아요... 제 생각에는 비판은 해도 좋으나
예의는 지켜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용이 옳다 해서 형식을 아무렇게나 취해도 되는건 아닌거 같아요. 결국 상처받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

그러니 말은, 아무쪼록 예쁘게 하고 사는게 제일 좋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페크 언니, 제가 말을 예쁘게 하나요? 네?

페크pek0501 2012-01-11 14:09   좋아요 0 | URL
예, 예쁘게 하십니다. ㅋㅋ 저도 동감이에요. 잘못된 글을 지적할 땐 예의를 갖추면 좋겠고 그리고 비밀 댓글로 해 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말 맞습니다. 악성 댓글 다는 입장에선 의도가 다를 수 있으나 상대편의 기분은 똑같이 나쁜 것.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해서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해서요. - 마고님의 좋은 관찰력이었음.ㅋ

아, 마녀고양이님은 인기 블로거 맞습니다. 저도 처음에 저의 서재에 방문하실 때 같은 느낌이었어요. 인기 블로거가 이런 데 오시다니... 그런 느낌?...ㅋㅋ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루의 방문자가 백 명 넘으면 인기블로거라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저는 며칠 합쳐야 백 명 된다는...크크)

순오기 2012-01-1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 4권, 4편의 리뷰~~~~ 많은 게 꼭 좋은 건 아니니까요.^^
님의 글은 항상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2-01-13 13:03   좋아요 0 | URL
반가운 순오기님, 고맙다니요.ㅋㅋ
순오기님이 늘 인기 블로거로서 그 자리에 계신다면 저야말로 고맙겠습니다.
저도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얻으니까요. 늘 그 모습으로 계세요. 늘 지금처럼... ㅋ

저도 글을 쓰면서 저를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글쓰기는 마음의 점검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나이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일찍 늙는다고 의사들도 말하더군요. 어떤 여자의 블로그 글에 "이제 나이를 먹고 늙으니 운운" 하는 내용이 많아서 저는 그 여인이 최소한 50은 넘었고 혹시 60대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는데 알고 봤더니 이제 사십대 초반이더라고요.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에 접어든 여인이라면 사십대 초반이 그런 소리한다고 언짢아 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여자는 사십줄에 접어들면 이제 늙었구나 하고 푸념하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해요.

페크pek0501 2012-01-15 12:52   좋아요 0 | URL
ㅋㅋ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미모를 많이 따지고, 그 미모가 젊음과 직결된 문제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흰머리만 해도 남자들은 멋있거든요.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대학교수님들, 멋있잖아요. 그런데 흰머리 있는 여자에게서 멋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안타깝게도...ㅋ)물론 염색약이 있긴 하지만요...

남자분들은 좋으시겠어요? ㅋ

노이에자이트 2012-01-15 16:02   좋아요 0 | URL
그런데 남자들도 30대 중반 넘으면 배 나오고 목소리도 변하기 시작하죠.옷으로도 망가진 몸매를 못감추는 거죠.바지가 계속 내려간다든가, 엉덩이가 펑퍼짐해진다든가 합니다.

남자 목욕탕 가보면 배는 불룩 나오고 상체와 사지가 빈약한 몸매가 많아요.

제가 아는 사람들은 교수나 그런 직업을 가진 이는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남자도 외모를 가꾼다지만 그래도 남자는 여자만큼은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2-01-16 16:40   좋아요 0 | URL
늙음에서 체형은 생각 못 했네요. 우리 남편은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체중이 같아서요. 저도 그렇고요. 살이 안 찌는 체질들이라서...ㅋ


2012-01-1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9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문에 신간이 소개된 것을 볼 때마다 이번엔 어떤 새 책이 나왔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아마도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간에 대한 관심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몇 권 살 때마다 신간을 한 권쯤은 끼어서 구입하고 싶을 것이다. 신간은 마치 새 보물 상자를 열어보는 듯 설레게 한다.

 

 

이번에 내가 눈여겨본 신간은 데얀 수딕 저, <거대건축이라는 욕망>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욕망이 만든 거대한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거대한 건축물은 거대한 권력을 나타낸다.

 

 

 

 

 

 

루이 14세, 나폴레옹, 카타리나 대제, 카이저 빌헬름 2세부터 스탈린, 무솔리니, 히틀러를 거쳐 마오쩌둥과 차우셰스쿠, 후세인을 하나로 엮는 단어는 '거대 건축물'이었다. 거대 건축물은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의지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징표다. 유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히틀러는 약 7만평(23만㎡)에 달하는 제2관저와 40만석 규모 경기장을 꿈꿨다. 스탈린은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그 상징인 '겨울 궁전'은 그대로 뒀다. 혁명가에겐 제국의 위엄이 장식으로 필요했다. 독재자 시대가 갔어도, 비슷한 건축은 계속 나온다. 1995년 영국 베어링 증권 파산 후 경기는 바닥을 쳤고, 정권도 바뀌었다. 그러나 집권 노동당 블레어 총리는 보수당 프로젝트를 승계했다. 세계 표준시 기준점 그리니치 반도에 대형건물을 세워 '영국 죽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조선일보, 2011. 12. 3.)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낱말을 열거하면 거대 건축물, 권력, 과시 등이다. 이 세 가지의 낱말들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인간은 자신의 권력과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거대 건축물이 탄생한다.’

 

 

<거대건축이라는 욕망>을 읽으면 히틀러, 스탈린, 블레어 등 그들이 자신의 권력을 나타내기 위해 건축물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건축물은 그 자체로 권력자의 권력을 나타냄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건축물이 크고 훌륭할수록 자신의 권력도 커 보인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은 순수한 예술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적’ 예술행위의 영역에 있게 된다.

 

 

권력자들이 그처럼 자신의 권력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리라.

 

 

이 욕망,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주목하여 관련된 책들을 살펴보았다.

 

 

 

 

1.

이 욕망에 대해서 데일 카네기도 인정한 바 있다.

 

 

데일 카네기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소망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뿌리 깊은 욕구”라고 말한 존 듀이와 “인간 본성의 가장 끈질긴 욕망은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여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욕구이며, 인간이 문명 자체를 진전시켜 온 것도 바로 이러한 욕구 때문이라고 하였다.

 

 

 

 

 

 

 

2.

이에 대해 애덤 스미스도 통찰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우리가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허영 때문이라고 밝혀 놓았다.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경쟁심(競爭心)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同感)과 호의(好意)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安樂)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虛榮)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信念)에 기초한다.” - <도덕감정론>, 92쪽.

 

 

 

 

3.

이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남들의 이목을 중요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들의 생활에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버트런드 러셀은 <런던통신 1931-1935>에서 ‘우리가 가구를 사면서 생각하는 것들’이란 제목으로 쓴 글에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가구를 구입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고르기보다 이웃들의 수준에 뒤처지지 않는 것으로 고름으로써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인정받으려 애쓴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주부는 커튼과 양탄자, 식탁과 의자, 만찬용 식기와 커피잔 따위에서 자기표현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구를 갖추는 과정을 은밀하고 개인적인 작업으로 생각한다. 개성적인 아름다움, 특히 창조자 특유의 기질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보다 수줍고 소심한 자아를 가진 이들-현대 세계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도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염원은 남들이 자신을 이웃들과 정확히 똑같게 봐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구에서도 자기만의 취향을 표현하기보다는 정확성을 추구한다.” - <런던통신 1931-1935>, 147쪽.

 

 

남들이 자신을 이웃들과 정확히 똑같게 봐주는 것만이 중요하므로, 자신의 취향대로 가구를 구입하지 않고 그저 이웃을 의식해서 가구를 고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을 그는 이렇게 비판한다.

 

 

“이웃을 두려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고질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로 모든 성취의 적이기도 하다. 거실을 가구로 꾸미는 일처럼 비교적 단순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퉁명스러운 검열관 같은 태도로 이 감정을 서로에게 강요한다. 이러한 태도 탓에 우리는 서로를 우둔하게 만들 뿐 아니라, 활기 넘치는 개성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광경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스스로 박탈한다. 따라서 꼴사나운 가구의 근원은 전쟁이나 종교 박해 등 인간 삶에서 주요한 모든 해악의 근원과 동일하다.” - <런던통신 1931-1935>, 148쪽~149쪽.

 

 

그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예로 들어, 파티를 치르는 일에서도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모습을 포착하여 비판한다. 파티를 즐기지를 못하고 그저 파티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하는 것에 주목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피로연을 여는 신혼부부 한 쌍에 대해 어디에선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파티가 끝나자 두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정확하게 똑같은 파티를 치렀다는 사실을 서로 축하한다.” - <런던통신 1931-1935>, 148쪽.

 

 

신혼부부인 그들은 파티를 즐기려는 마음을 갖기보다 남들과 똑같은 파티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파티에 임했을 뿐이다.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남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의 만족감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남들에게서 찾으려 한다.

 

 

 

 

4.

그렇다면 인간은 남들의 눈만을 의식한 인생에 대해 끝까지 만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예로 들어 ‘만족할 수 없는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 이전에 가졌던 생각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지위에 목을 매단 사람이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커다란 아파트에 살며, 이 아파트는 이 시대 유행에 따라 장식이 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맥이 빠진 저녁 잔치가 자주 벌어지지만, 따뜻하거나 진지한 말이 오가는 법은 없다. 이반 일리치는 고등법원 판사라는 직위를 즐기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존중을 받기 때문이다. (…) 그러다가 이반은 마흔다섯 살에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는데, 이것이 점차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의사들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 그는 너무 피곤해 일을 하지 못한다. 장에는 불이 붙은 느낌이다. 식욕도 떨어지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휘스트 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판사 자신이나 주위의 모든 사람도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 그의 부인은 그의 죽음 자체가 안타까운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받을 연금 규모가 줄어들까 봐 걱정을 한다. 사교계의 명사인 딸은 아버지의 장례식 때문에 자신의 결혼 계획이 엉망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이반은 이제 살날이 몇 주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이 지상에서 얻은 시간을 낭비했고, 겉으로는 품위가 있지만 속으로는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성장, 교육, 일을 돌이켜 보며,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불안>, 291쪽~293쪽.

 

 

주인공은 병에 걸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함으로써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다.

 

 

 

* 맺는말

 

 

1.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고 욕망을 지배하기

 

 

여러 책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인간은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살게 되고, 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남들로부터 보이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가구를 구입할 때조차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맘에 드는 가구를 고르지 못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고른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무시하고 사회(또는 이웃)가 추구하는 가치에만 집착하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삶인지 자기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 이것이 첫 번째 생각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삶의 재미도 없고 삶의 발전도 없다. 만약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가 머리를 파마하고 새 옷을 구입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장님이라면 이런 노력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또는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우러러보지 않고 오히려 비난한다면 이런 노력을 하지 않을 테니까.) 이것이 두 번째 생각이다.

 

 

어떤 욕망이든 중요한 건 ‘욕망에 지배당하느냐, 아니면 욕망을 지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욕망이 지나치게 크면 욕망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을 위해 못할 일이 없게 되어 삶의 균형이 깨진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에 지배당해서 성형수술에 중독된 사람들이 생겨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지배당해서 비리나 범죄를 마구 저지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2. 욕망이 가린 일상적인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지 않기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에겐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오로지 회사 일에만 집중하며 살았다. 이미 그는 그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회사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으로만 살았다. 그 욕망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기도 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암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인생의 새로운 행복에 눈뜨게 된다. 딸아이와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시간도 소중하고, 가족이 함께 떠난 낚시여행을 하는 시간도 소중했다. 그러면서 왜 진작 이런 행복들을 알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며 살다가, 뒤늦게 인생의 행복은 이런 평범한 작은 일들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고 생각했다. 혹시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차를 타고 빨리 달리느라 기차가 지나친 일상적인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고.

 

 

(2011년을 보내며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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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2-30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2011년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과 내일만 지나면 2012년이 됩니다.

그동안 제 서재에 댓글을 남겨 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댓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방문해 주신 분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분들 덕분에 힘이 나서 글을 써 왔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지금까지 총 117편의 글을 올렸습니다. 내년에 보다 나은 글을 올리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시는 분들 모두,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럼 2012년에 뵐~게~요~

(페크 올림.)

oren 2011-12-31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건축물'에 관한 글을 보니 문득 '피라미드'를 비롯한 고대이집트의 건축물들이 생각납니다. 2008년 2월에 이집트 일주여행을 갔을 때 '테베'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엔 고대 이집트 18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때부터 건설되기 시작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1,500년 동안 지어졌다고 하는 '카르낙 대신전'이 있더군요. 거기엔 약 200년 전 쯤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 곳에 진주했을 때 카르낙 대신전의 정문 쪽의 거대한 석축의 신전의 '벽 높이'에 감동받아 여기에 '맞장'을 뜨기 위해 자신의 군대병력을 동원시켜 흙벽돌을 마주 쌓아 올렸던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더더욱 인상적이었답니다. 그런데 헨리 데이빗 소루우는 이 멋진 '건축물'에 대해 '천박한 장관'일 뿐이라고 일침을 놓았더군요.
* * *
여러 민족들은 그들이 다듬어서 남긴 석재의 양으로 자신들에 대한 추억을 영구화하려는 광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차라리 그만한 노력을 자신의 품행을 가다듬는 데 바쳤다면 어땠을까? 한 조각의 양식良識은 달까지 솟아오른 기념비보다 더 기릴 만한 것이 아닐까?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 테베의 장관은 천박한 장관일 뿐이다. 인생의 참다운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100개의 대문을 가진 테베의 신전보다는 어느 정직한 사람의 밭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돌담이 더 의미가 있다. 야만스럽고 이교도적인 종교와 문명은 화려한 신전들을 짓는다. 그러나 기독교, 참다운 기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한 민족이 다듬는 돌은 대부분 그들의 무덤으로 간다. 그야말로 그들은 스스로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한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차라리 그 작자를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뜯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했으리라.

- 헨리 데이빗 소로우,『월든』中에서

oren 2011-12-31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저도 오래전에 읽어봤는데 pek님께서 이 글의 내용에 어울리도록 정말 절묘하게 인용해 주셨군요.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갈망은 참으로 끈질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허망한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 * *
남의 견해, 즉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 나타나는 우리의 존재는 그저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우리의 행복에 본질적인 것이 못 됨을 곧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타고난 천성이 지닌 약점으로 인해서 일반적으로 그것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기가 남에게 호감을 사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거나, 자기의 허영심을 자극해 주면 마음속으로 커다란 기쁨을 느낀다. 마치 고양이가 자기 등을 쓰다듬어 주면 목청을 꾸르륵거리는 것처럼, 칭찬을 들은 사람은(그의 헛된 자부심의 범위 내에 속하기만 하면, 그 칭찬이 분명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도) 으레 달콤한 기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참된 불행이나 행복, 다시 말해 지금까지 줄곧 이야기해 온 그 두 원천이 실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는 갈채에 위로를 얻는다. 이와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나 그 정도를 불문하고 조금이라도 자기 허영심이 손상되거나 모욕받거나, 또는 무시당하거나 멸시를 받으면, 영락없이 격분하거나 때로는 커다란 비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中에서

페크pek0501 2012-01-01 12:42   좋아요 0 | URL
이렇게 긴 댓글을 써 주시다니, 그것도 두 개씩이나, 이러면 어떡합니까?
그럼 제가 무지 감사해서 황송해지잖아요. 호호...

소로우의 인용은 저도 처음엔 넣었다가 뺐답니다. 이 글이 길기도 하고, 또 그동안 소로우를 몇 번 인용한 적도 있고 해서요. 그런데 오렌님이 쓴 그 글은 제가 찾은 인용문보다 훨씬 좋은데요.ㅋ
늘 느끼는 거지만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전부 머릿속에 입력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은 반복해서 세 번쯤은 읽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오래 전에 읽어 어떤 내용인지 생각나지 않았는데, <불안>을 읽고, 아, 이런 내용이었구나, 했을 정도예요. ㅋㅋ

쇼펜하우어도 제가 단골로 인용하는 인물이에요. 전 그의 책이 재밌어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 흥미롭지만 인생론 에세이도 흥미로워요.

댓글로 좋은 글을 감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바라시는 일 많이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stella.K 2011-12-3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도 드라마를 보고 잤는데 등장인물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 죽는데,
행복해지기 위해 살라고, 그렇다고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이 행복은 아니라고,
사람은 가만 있으면 불행해지니 행복하기를 결심하고 살라고. 대략 뭐 이런 말을 하고 죽더군요. 그런데 그 말이 왤케 다가오던지. 겁 많고, 게으른 저에게 정말 와닿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내년 한해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생각 좀 하고 살려구요.ㅋ
페크님도 내년 한해 행복하게 사십시오. 꼭이요.^^

페크pek0501 2012-01-01 12:44   좋아요 0 | URL
페크님도 내년 한해 행복하게 사십시오. 꼭이요.^^ - 요것 스텔라님에게 반사합니다. ㅋㅋ

요렇게 감동적인 멘트를 날리시다니... 내 가슴 속엔 감동의 물결이 넘실댑니다. 스텔라님, 행복하게 글 쓰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길, 그리고 바라는대로 이루어지길 빕니다. ㅋ

마녀고양이 2011-12-3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저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보다 '왜 인정받고 싶어할까, 어떻게 해소할까'에
더 관심이 있는거 같아요. 아들러는 인간 성장의 동력은 '열등감 해소' 및 '우월감 추구'라고 했는데 일견 납득이 가는 부분이예요. 언니가 말씀하신 발전과 비슷한거죠.

페크 언니를 안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정말 푸근한 언니 한분 모셔서 기쁘고
새해에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하셔요.

페크pek0501 2012-01-01 12:47   좋아요 0 | URL
아, 푸근한 언니라, 그것 참 맘에 드는데요. 한번도 푸근하다 소릴 못 들어봤어요. 그건 좀 체격이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 몸은 좀 홀쭉한 편이라서요.
그러나... 마녀고양이님이 제 콘셉트를 정해 주신 걸로 알고 새해엔 푸근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고맙습니다.

새해 바쁘실 턴데 시간관리 잘 하셔서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잘잘라 2011-12-3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보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면서 한편으로는 누구와도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며 청개구리처럼 살아온 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누구와도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야말로 '나는 너희와 다르다. 천상천하유아도존!'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말이죠.

새해에도 페크님의 진심 담은 좋은 글, 기대합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2-01-01 12:48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호호~~
님도 좋은 글 많이 쓰시고요, 소원성취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새해엔 자주 뵈요.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2-3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는 늘 남을 의식하고 비교하면서도 남을 배려하지는 않는 인간들이 있습니다.남에게 폐를 끼치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그런 인간들! 어떻게 혼내줄까요?

페크pek0501 2012-01-01 12:53   좋아요 0 | URL
혼내줄 필요가 없답니다. 그런 싸가지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 자체가 벌이니까요. 그런 심성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답니다. 일이 잘 풀릴 리도 없고요. 그게 벌이지 않겠습니까. 남으로부터 존중 받지 못하고 욕을 먹으며 사는 것, 그것도 벌입니다.

그냥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나쁜 전범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새해에도 자주 방문해 주세요. 늘 고마워한답니다. ㅋㅋ
상투적이지만,... ㅋ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ira 2011-12-3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1년 마지막 날 우연히 들어왔는데 너무 좋은 글이네요. 저자신의 욕망도 어떤 기차, 어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 자주 놀러 올께요

페크pek0501 2012-01-01 12:55   좋아요 0 | URL
아, 첫 손님, 반갑습니다. 자주 놀러 오신다니 제가 힘이 나네요. 참 좋은 말입니다.ㅋㅋ

저도 나중에 시간 내서 님의 서재에 들를게요.
또 뵙기를...

2012-01-01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1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01-02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책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우리 독서회원이 올해 읽고 싶은 책 중에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꼽았는데 토론도서로 선정할까요?^^

페크pek0501 2012-01-02 16:57   좋아요 0 | URL
어머머, 까르르~~ 조금 전에 순오기님의 서재에 들렀는데...
이걸 텔레파시라고 하나요?

챙기실 분들이 많으실 텐데, 저한테까지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 저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책으로 구입했는데, 글쎄요. 님이 직접 목차를 보고 토론도서로 선정해야 할 것 같네요.
상대방을 설득하는 12가지 방법, 리더가 되는 9가지 방법, 인간관계를 잘 맺는 6가지 방법 등이 있답니다. ㅋㅋ저는 재밌던데...

복 많은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

파란놀 2012-01-0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 눈치나 인정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간다면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즐거운 길을 걸을 테니까
이때에는 나한테 가장 인정받을 삶을 사랑하리라 믿어요~

페크pek0501 2012-01-03 14:21   좋아요 0 | URL
반가운 된장님이 오셨군요.

자기만족이 제일 중요하죠.
자신한테 인정받는 삶을 저도 살고 싶어요.

복된 새해가 되시길...

카스피 2012-01-02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님,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페크pek0501 2012-01-03 14:23   좋아요 0 | URL
반가운 카스피님,

이게 용의 그림이군요. 멋집니다. 그리고 이 용이 제게 큰 복을 줄 것만 같군요. 이 선물, 고맙습니다.

복된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2-01-0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easis 2015-10-10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동받고 갑니다..정말 대단하네요ㅎ
후배들을 위해 짧은 글 쓰고 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종와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선생님. ^^

페크pek0501 2015-10-16 17: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답글이 늦이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글도 썼군요. 오랜만에 훑어 보았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씀하시니 웃음이 나네요. 알라딘에선 잘 쓰지 않는 말인 것 같아서요. 어쨌든 님의 댓글을 기분 좋게 접수합니다. 고맙습니다.
 

 

 

 

 

1. 참았네

 

 

친구 넷이서 만났다.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만둣국을 잘 하는 음식점을 안다고 해서 점심을 먹으러 거기로 갔다. 겉으로 보기에 깔끔한 음식점이었다. 우리는 만둣국을 주문했다. 우선 종업원이 물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컵 안의 물에 닿은 걸 내가 보았다. ‘종업원의 손가락을 적신 물을 먹으라는군.’

 

 

불쾌했지만 참았다. 그 종업원은 바빴고 청결문제 같은 건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 다음, 주문한 만둣국이 나왔다. 만둣국은 맛있었다. 아, 그런데 반쯤 먹었을 때 내가 먹고 있는 만둣국에 긴 머리카락이 하나 빠져 있는 게 보였다. 비위가 상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까지 비위가 상할까 봐 그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종업원에게 따질 수도 있었으나, 또 참았다. 친구들을 만나서 기분 좋은 날에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해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참기만 한 게 잘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컵 안의 물에 손가락이 닿았다고, 만둣국에 머리카락이 있었다고, 음식점의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야 옳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나처럼 불쾌함을 느끼는 손님이 또 생기지 않도록 그들이 주의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2. 이번엔 못 참았네

 

 

대구에 사는 친구 둘이 서울로 놀러 왔다. 나처럼 서울에 사는 친구 한 명도 함께여서 넷이 모였다. 대구의 두 명과 서울의 두 명이 만난 것이다. 원래 대구와 서울의 중간 지점인 대전역에서 넷이 만나곤 했는데, 이번엔 대구에 사는 둘이 아예 서울로 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 덕분에 내가 편했다. 대전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까. 차비도 굳었다.

 

 

일단 우리 집에서 모였다. 두 친구가 대구에서 얼마나 부지런을 떨며 일찍 출발했는지 오전 11시쯤 되니 네 명이 다 모였다. 우리 집에서 빵과 과일과 커피와 함께 수다떨기가 신나게 시작됐다. 점심은 나가서 먹기로 해서 12시가 넘자 우린 외출 준비를 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음식점과 카페가 모여 있기로 유명한 카페촌에 가서 먹기로 했다. 점심은 내가 사기로 했다.

 

 

우리 넷은 한정식을 먹기로 의견을 모아 한정식을 파는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다. 들어가니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음식 가격이 비싼 편이었지만 반찬 종류가 다양하고 다 맛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점을 잘 선택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문제는 질 낮은 서비스였다. 우리가 음식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바로, 종업원이 와서는 양해를 구하는 말도 없이 그릇을 치울 모양으로 쟁반에 옮겨 담는 게 아닌가. 그것도 달그락, 쾅쾅 소리를 내면서였다. 마치 우리에게 빨리 나가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푸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고급 음식점으로 보이던 그곳이 싸구려 음식점으로 보였다.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았다.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이런 고급스런 음식점에서 이런 불친절이라니….

 

 

대구 친구 중 한 명이, 서울은 다 이러냐고 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친구들 모두 기분이 상해 보였다. 내 기분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했다. 밥은 잘 먹었는데, 이렇게 기분을 구겨 놓다니. 우리의 기분이 구겨진 종이처럼 느껴졌다. 이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음식 값을 내면서 한마디 해야겠다고 별렀다. 우리의 기분이 나빠서이기도 하지만 우리처럼 기분 상하는 손님이 또 생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업원의 불친절에 대해 지적해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음식 값을 내러 계산대로 갔더니 음식점 주인이 있었다. 그에게 음식 값을 지불한 다음에 종업원의 불친절에 대해 말하며 우리들의 불쾌함을 표명했더니, 상대편에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릇을 치우는 게 그렇게 급한 일인가요? 모처럼 지방에서 친구들이 올라와서 점심 사 주러 왔는데, 그 불친절한 종업원 때문에 우리 넷 다 불쾌해졌어요.”

 

 

“죄송합니다. (그 종업원이) 그릇을 치우고 깨끗한 테이블에서 이야기 나누시라고 그런 것 같아요.”

 

 

그건 핑계 같았다. 하지만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태도를 보고 기분이 풀렸다.

 

 

 

 

3. 며칠 뒤, 애덤 스미스가 생각났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나 그 일을 생각해 보니 내가 종업원의 불친절을 지적해서 사과를 받은 일이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나로 인해 음식점 주인한테 그 종업원이 혼나게 되었다면 그래서 그 종업원이 상처를 받았다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준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내가 음식점 주인에게 종업원의 불친절을 지적한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단 한 가지의 이유로 그랬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정확하지 못한 법이다. 내가 왜 그랬는지를 곰곰이 분석해 보니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지난번에 음식점에서 종업원의 손가락이 닿은 물도 참았고, 머리카락이 빠져 있는 음식도 참았는데, 이번에도 또 참으면 내가 아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난번의 일이 없었다면 이번엔 참았을지 모른다.)

 

 

둘째, 이번에 참으면 내가 처신을 잘하지 못했다고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번에 참으면 내가 친구들 앞에서 바보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들이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우리들의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의 이유가 한마디 해야겠다는 나의 태도에 대해 갈등 없게 만들었다. 내가 ‘악’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해 준 이유다.

 

 

다섯째, 내가 느낀 불쾌감을 얘기해 줘야 앞으로 나처럼 불쾌한 손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다섯째 이유로 인해서 애덤 스미스의 글이 떠올랐다.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대한 글이다.

 

 

 

 

도둑놈이 어떤 부잣집의 물건을 훔치는 경우, 그는 부자는 이 물건이 없더라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비록 도둑을 맞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부(姦夫)가 자기 친구의 처(妻)를 유혹해서 간통을 하려는 경우, 그가 자신의 음모를 감추어 그 남편의 의혹만 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정의 평화만 깨뜨리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처럼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행하지 못할 정도로 흉악한 범죄행위는 하나도 없게 된다. -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 327쪽.

 

 

 

 

도둑이 어떤 부잣집의 물건을 훔칠 때, 집 주인이 부자니까 이 물건이 없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있다면, 또 부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기꾼도 그런 생각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겠다. 또 빈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기꾼도 당신의 형편이 나보단 나으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겠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악’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합리화의 명수’여서 자신이 한 일을 합리화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손님이 나처럼 기분 상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종업원의 불친절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 종업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된다고 해도, 나는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건 옳은 일인가. 아니면 혹시 나도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속아서 잘못을 저지른 걸까.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누군가가 불친절해서 내가 불쾌해졌을 때 참아야 할지, 참지 말아야 할지를.<끝>

 

 

 

 

................................................................................................................

 

 

<이 글을 쓰고 나서>

 

 

며칠 전에 친구들이 놀러 와서 생긴 일을 글로 옮겨 보았다. 만약 내가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을 읽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 책의 어떤 구절(위에서 인용한, 327쪽의 글)이 떠올라서였으니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뛰어난 경제학자이다. 내가 보기엔 인간을 통찰한 학자로서도 뛰어나다. 요즘 나는 <도덕감정론>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교과서’로 읽고 있다. 그래서 아직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기회에 ‘역자 서문’의 글을 옮겨서 이 책에 대해 소개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특히 어떠한 천성 내지 심성을 가진 존재인가? 인간 속에 있는 <마음이라는 자연(自然)>은 어떠한 법칙(法則)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의 심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인간완성의 조건, 인간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심성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 개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 아담 스미스가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올바른 사회과학 이론과 올바른 사회발전 원리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론이 인간의 심성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원리와 발전원리를 가장 명쾌하고 정확하게 밝힌 최고의 명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의 밑바탕에는 바로 <도덕감정론>에 나타난 아담 스미스의 인간 심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역자 서문 <초판>’에서.

 

 

<도덕감정론>은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좋은 책이라고 해서 책 전체의 내용이 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즘 내가 하는 독서란, 마치 모래밭에서 숨은 보석을 찾아내듯, 책을 읽으며 좋은 문장을 찾는 일인 것 같다. 그 ‘찾는 일’이 참 재밌다. 이게 독서의 달콤한 맛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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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2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정남이나 애정녀가 필요하신 것 같아요.ㅋㅋ
저는 그런 상황 같으면 즉시 말해 버립니다.
남이사 어쨌거나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고,
손님을 상대로한 장사라면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죠.
그럼 장사를 하지 말던가...
아, 그렇다고 제가 애정녀라는 건 아니고.
그런 상황에선 복잡하게 여러가지로 생각할 거 뭐 있나요?
(아, 그러니까 오히려 심각해지네.-_-;;)

와, 근데 정말 책을 세심하게 찾아 보시는군요.
저는 아직 말씀하신 책은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글은 참 쉽고 또렷하게 잘 쓰세요.^^
저는 감정의 뒤범벅인데.ㅎㅎ

페크pek0501 2011-12-25 20:27   좋아요 0 | URL
무슨 겸손의 말씀을...

책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밑줄 친, 인상적인 구절을 자주 들춰 보는 취미가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좋아하는 책은 표지가 닳아 헌 책이 되지요. 하지만 저도 읽고도 놓치는 글, 많아요. 그래서 가끔 남의 리뷰를 보고 그 책에 그런 내용도 있었나, 하고 다시 들춰 보곤 해요.

첫 댓글, 고맙습니다. ^^ 크리스마스 밤을 잘 보내세요. :)

이진 2011-12-25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낯도 많이 가리고 쑥스럼도 많아서, 절대
사장에게까지도 그렇게 말을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음식점에서 머리카락이 나온것은 참을수가 없는걸요?
가끔 저희 학교 급식에서 파리가 나오는것은 제가 겪어도 봤고 보기도 많이 봤지만
그때마다 불쾌감과 짜증이 확 밀려오더라구요.
어떨때는 한 숟가락 펐는데 파리가 나오고 , 우동을 신나게 먹고있는데
파리가 둥둥 떠있어서 얼마나 속이 메슥거리던지...
그 종업원도 꽤나 불쾌하셨겠어요.
저는 그릇치우는 것을 평소에 신경안쓰는 타입인지라...
그런데 치워달라는 말도 안했는데 치우나요? 이상한걸요 ㅎㅎ

그나저나 저 애덤스미스의 말 너무 좋아요
가끔 제가 자기 합리화를 하고있을 때 생각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1-12-26 10:53   좋아요 0 | URL
예, 치워달라고 안 했는데, 그러더라고요. 순간 무안하고 당황스러웠어요. ㅋ

저도 마음 약한 편이라 싫은 소리, 따지는 것 잘 못하는데, 그날은 힘좀? 썼어요.

자기합리화인지 아닌지... 애덤스미스의 말을 상기하면 자기 성찰에 도움이 될 듯해요. 저도 그러려고요.

친구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며 충고를 하면서 아픈 말 던지면 안 될 것 같아요.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일지 몰라요.ㅋㅋ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12-2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빼놓고 다시 먹었을 거예요. 아 저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특별히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냥 참는 편인 것 같네요. 그런 상황에서는요. 벌레 나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요. 그나저나 친구들이랑 만나 즐거우셨겠어요. 저 지금 [나홀로 집에] 찍고 있어요. 뭘 좀 하는 중인데, 눈이 빠지겠어요.ㅋㅋㅋ 프린터가 고장나서 생긴 일.ㅠ

예전에도 [도덕감정론] 말씀하셨었죠? 맞아요, 좋은 책이라도 다 좋진 않죠. 좋은 영화라도 다 좋진 않고. 그래서 재밌냐 아니냐로 물어보면 아주 난감하다는;; 좋고 싫은 건 지극히 제 기호죠. 그래서 쓸때마다 조심스럽고. 누군가 영향을 받으니까요. 이건 눈치 보는 것과는 다른 문제 같아요 :)

오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어요?^^

페크pek0501 2011-12-26 10:56   좋아요 0 | URL
24일엔 친정에서 크리스마스 보냈어요.
어젠 집에서요. 기됵교인이 아니라서 크리스마스보단 연말이 더 의미가 있죠. 나이 한 살 더 먹네요. ㅋㅋ 더 이상 나이 안 먹고 싶은데...ㅋㅋ

연말 잘 보내세요. :):)

oren 2011-12-25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은 저 역시 올해 가장 흥미롭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었던 책 가운데 한 권이었는데, pek님의 글을 읽어보니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대해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문득 `합리화`에 관한 재미난 댓글이나 하나 남겨볼까 싶네요. ㅎㅎ
* * *
영화 「새로운 탄생(The Big Chill)」에서 제프 골드블럼은, "합리화는 섹스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친구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이렇게 묻는다. "한 번도 합리화를 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는가?"
- 스티븐 핑커,『빈 서판』중에서

페크pek0501 2011-12-26 10:5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오렌님이 이 글을 읽으셔서 좋네요.
오렌님이 도덕감정론을 추천해 주신 분이니까요. 그 점, 감사 드립니다.

누군가를 알고 지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져요.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니까요.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노는 물이 중요하다...ㅋㅋ 그런 점에서 오렌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소개해 주세요.

새로운 탄생, 대사 멋지네요. 저런 게 통찰이죠.

곧 연말이네요. 망년회가 많으시겠어요. 즐겁게 보내세요.


파란놀 2011-12-2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만 담기엔 생각주머니가 아주 커서
이렇게 글 하나로 솔솔 풀려나왔구나 싶어요.
생채기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믿어요.

페크pek0501 2011-12-26 11:01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 된장님 같은 분만 계신다면 불친절, 불쾌감 같은 건 없을 텐데요. ㅋㅋ

이 해, 잘 마무리하시고 연말 잘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12-2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언니, 글이 너무 좋아요, 진짜루요... (이렇게 입에 짝짝 붙을수가!)

언니랑 저랑 고민하는(?) 주제가 비슷한거 같아요.
저도 타인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최근 제가 상담심리 공부를 하면서 살짝 든 생각은 이것이 일종의 `투사`구나 싶더라구요. 투사란게 자신에게 버겁거나 힘든 사고와 감정을 타인에게 넘기는거거든요. 즉,
내가 타인에게서 듣기 힘든 소리를, 타인에게 해야할 때도 힘들어하는거 아닐까 하는거죠.

하지만 또 한편으로
사람마다 들을 때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서, 모든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특히 사소한 문제인 경우 말이죠. 그리고 해야할 말을 못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적응하는데 문제가 있고, 나중에는 우리나라의 소위 홧병(?)으로 남아서요, 갑자기 욱하고 폭발하는 성향을 보이더라구요. 평소에 얌전하다가 욱하는 그런.

결국 이슈는, 어떻게 부드럽게 나의 의견을 전달하는가 인거 같아요.
제가 평소 고민하던 문제라 댓글이 무지하게 길어졌어요,,, 아하하. 페크 언니,
즐거운 연말 되시고, 올해 언니를 알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답니다~~~~~~

페크pek0501 2011-12-27 13:16   좋아요 0 | URL
저도 마녀고양이님을 알게 되어 무척 기쁘답니다.~~~~~~~~
입에 짝짝 붙는 글을 썼군요, 제가...ㅋㅋ
아마 마녀고양이님과 제가 심리학을 좋아하고 관심 갖는 게 비슷해서 좋게 읽어 주신 것 같아요.

김형경은 <사람풍경>이란 책에서 투사를, 내면의 부정적인 면을 타인에게 옳겨놓기라고 요약했어요.
지역감정, 인종차별주의, 마녀사냥 등이 대표적인 투사 방어기제라는 군요.
게슈탈트의 말 - "모든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결국 투사를 살펴보면 누구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가 되지요. 예를 들면 게으른 동생을 보고 지나치게 화를 낸다면 그건 자신의 게으름을 동생을 통해 보게 되어서 화를 낸다는것...

아, 저도 얘기가 길어졌어요. 마녀고양이님과는 얘기가 무궁무진할 것 같은 이 예감... 좋은 예감이죠? ㅋㅋ 연말 잘 보내세요.

마태우스 2011-12-26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사건에서 전에 읽은 책을 떠올리다니, 삶과 독서를 연결시키는 훌륭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저도 배우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11-12-27 13:16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배우고 싶어요! 마태우스님의 그 유머를요.
그래서 우울증이 싹 날아갔아요, 라는 댓글을 저도 받고 싶어요.
심하게 반갑습니다. ^^

달사르 2011-12-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습니다. 일상에서 하는 이런 탐구, 이게 바로 스스로 터득하는 삶의 지혜, 뭐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저도 많이 공감되는 지점입니다. 뭔가 정의로운 일인듯해서 행했으나 뒷끝이 개운치 않을 때 주로 드는 생각들인데요. 매번 무언가를 행하고 나서, 그 행함에 교묘한 지점은 없었는지 체크하는 버릇. 아주 멋진 버릇 같애요. ^^

방명록 글은 오늘 읽었어요. 감사드립니다. ^^

페크pek0501 2011-12-27 13:1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삶의 지혜라는 표현은 과찬이시고요.ㅋㅋ

제가 방명록에 근황을 묻는 고런 기특한 글을 남겼네요.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아서 궁금했어요. 앞으로는 글을 올리실 거죠? 일이 바쁘셔서 그런 건 알지만요...

필사 진도가 궁금했답니다. 또 뵈요.

노이에자이트 2011-12-2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초로 도덕감정론을 번역한 박세일 씨는 요즘 장기표 씨와 함께 보수주의가 거듭나야한다며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총선준비 중이더군요.문제는 인지도가 너무 낮아 내년 총선에 몇 명이나 당선될지 암담하다는 거죠...저는 이런 사실에도 관심이 많아서...

페크pek0501 2011-12-27 18:58   좋아요 0 | URL
아, 정보맨이시군요.
제가 갖고 있는 책도 박세일님 번역입니다.
아무튼 노님은 그냥 평범하게 사시기엔 아까운 분이신 것 같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