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 지음 / 좋은생각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 인생이 아름답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할 것 같아요.

그러나 그림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파리의 골목과 하늘, 그리고 눈 내리는 거리들을 보며,

“이건 누가 그린 거지?“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면,

아마 그 그림은 <미셸 들라크루아>라는 화가의 그림일 확률이 높다.

이 책 『영원히, 화가』는 그가 직접 자신의 삶과 그림을 이야기한 자전적 그림 에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미술가의 회고록은 아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그러하듯,

그의 말 한 줄 한 줄에도 그 시절의 공기와 시간 사람들의 숨결이 묻어 있는 듯 하다.

“저는 과거의 파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그림은 과거에 대한 사진이나 문서가 아닙니다.

파리의 인상에 대한 기록이지요.”

책 속에서 발견한 이 문장은,

그의 그림이 사진처럼 정교하지 않고 사실적이지 않은지를 단박에 이해하게 만든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그가 본 ‘풍경’이 아니라, 그가 간직한 ‘기억’에 가깝다.

정확한 원근법보다는 마음속 인상에 따라 배치된 건물들, 제멋대로인 크기의 인물들,

그리고 항상 어딘가 아련한 색감들

그는 그저 자신이 살았던 세계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의 유년기는 평범하면서도 풍요로웠다.

이브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비를 잡고, 숲속에서 나무 아래의 노을을 바라보며 보낸 여름방학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낯을 가리고 몽상에 잠긴 채로 그룹에 잘 섞이지 못한 아이였다. 성적은 좋지 않았고, 보이 스카우트나 피아노 수업은 오히려 괴로움이었다. 수업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으로 느껴졌고, 상상력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그림은 유일한 통로였고, 열 살 때 그림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첫 스승인 브르통에게 받은 물감 상자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그는 그 스승에게서 배운 원칙을 여전히 따르고 있으며,

그림은 그에게 단지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전쟁 이전의 파리가 등장한다.

빈부격차를 넘어 서로를 존중하던 시절, 축제처럼 빛나던 파리의 밤,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계절, 노을빛에 물드는 거리. 그는 “전쟁 이전의 파리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하며,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고백한다.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이름도 없고, 뚜렷한 표정도 없다.

하지만 익명성 속에 깃든 다정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의 기억을 투영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몽마르뜨의 언덕에서 사랑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창문에 불을 밝힌 아파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책의 후반부에는 미셸과 함께한 시간들을 회고하는 신미리 큐레이터의 에필로그가 실려 있다.

큐레이터는 2024년 전시 준비로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들라크루아와 직접 나눈 대화들,

그의 집과 작업실에서 마주한 인간적인 모습들을 감동적으로 전한다.

미셸은 그림을 가리키며 “이런 그림을 보면 에이전트가 충격 받을지도 몰라요”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보티첼리의 그림 앞에 서면 그림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그는 새 스튜디오를 짓고, 붓을 들고, “이게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두고 봐야 알지요.”라며 캔버스를 채운다. 그림이란 그런 것이다. 정해진 형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손끝에서 태어나는 또 하나의 생. 밥 로스를 연상시키는 그의 붓질에는 과시도 없고 욕심도 없다.

오직 진심과 시간, 그리고 기억만이 녹아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한 도시의 역사와 감정까지 함께 들여다본 기분이 든다.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들라크루아는 어쩌면 다음 생에도 여전히 화가로 살아가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는 정말 ‘영원히, 화가’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좋은생각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저의 풍경이자 환경이었으니 자연히 파리의 명소들을 많이 그릴 수밖에요. 저는 제가 살았던 곳을 얘기할 뿐입니다.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냐고요? 명소들은 친구와도 같은 존재죠. 에펠탑, 개선문 등 모든 명소는 모두에게 속해있어요. 우리의 문화유산이죠. 이것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 P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김나리 지음 / 행복우물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나온 모든 순간이 결국 나를 만든다.”

세상은 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도망치지 말고, 버텨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괜찮지 않은 날, 모든 것이 너무 벅차서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우리에겐 그런 말보다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말이 필요하다.

김나리 작가의 에세이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는 바로 그런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책의 초반부, 작가는 자신의 고백처럼 한 가지 습관을 털어놓는다.

바로 삶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리는 도피형 회피를 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이 행동은 사실 스스로의 호흡을 회복하기 위한 안간힘이다.

“숨통을 틔우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도망자의 일상은 때로 가벼운 탈출이 아닌, 치열한 전장이다.

버스 유리창에 붙은 작은 벌레 하나를 통해 펼쳐지는 작가의 내면은, 외롭고 지친 마음의 전투와도 같다. “날아가면 차라리 편해질 텐데…”라는 말 한 줄은,

놓아야 할 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세상에 휘둘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결국엔 스스로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작가는 ‘행복’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기쁨’이처럼, 우리도 행복만을 삶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하지만,

진짜 인생은 다섯 가지 감정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기쁨뿐 아니라 슬픔, 분노, 불안, 외로움도 있어야 비로소 인간의 삶이 완성된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문장을 썼다.

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자연스레 『불교 공부』에서 다뤘던 연기(緣起)의 개념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과 조건(因緣)이 겹쳐져 발생한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우연조차 사실은 인연의 결과라는 이 가르침은, 이 책의 메시지와도 깊이 닿아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 또한, 수많은 선택과 만남, 그리고 놓쳤던 시간들까지 모두 얽히며 만들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연기의 시선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내 실수도 후회도 단지 흘려버릴 일이 아니라, 다 의미 있는 흐름의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꼭 죽다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매일 같이 성장통을 겪으며 울고 웃는 지금 이 시간들조차 이미 천운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문장처럼, 우리 삶은 이미 충분히 기적 그 자체다. 마치 작가가 말하듯, “세월은 거저 흘러가지 않는다.” 세월 속엔 반드시 내가 있고, 내가 버텨 온 흔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은 부분 중 하나는, ‘조언’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해당 글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던 부분이다.

누구나 좋은 뜻으로 충고를 하지만, 그 조언이 어떻게 들릴지는 결국 듣는 사람의 몫이다.

작가분의 글을 통해 나 역시 조언을 건넨 적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 내게 길을 묻기 전까진 침묵하며 들어 주고,

정말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에만 내 경험을 가볍게 꺼내 보이는 정도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쩌면 그것이 성숙한 어른의 태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반드시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는 삶의 불안과 회피, 고독, 성장통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법에 대해 말한다. 도망치듯 살아온 시간들조차 결코 부끄럽지 않다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다정하게 말해준다. 행복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내가 걸어온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건네는 이 말이 오래도록 남는다.

“세상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도, 매일 전장을 치르는 것도, 실은 온통 나의 얘기다. 그러니 지금은 충분히 잘하고 있는 생명아, 이번엔 네가 나의 안녕을 빌어주길 바라.”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 날 반갑지 않은 내 모습을 보거나, 감정의 파도를 맞으며 마음이 슬픈 날에도, 조금 더 나를 소중하게 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조금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들

- 이유 없이 지치고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사람

-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무거운 날이 많은 사람

- 조용히 위로받고 싶지만, 누군가의 조언은 부담스러운 사람

- 매일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


'김나리'작기님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누구나 행복하고 특별한 인생을 살기를 강박처럼 바란다.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요즘 현실은 행복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실패한 인생이 된 것 같은 생각까지 든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과 수시로 비교하고, 경쟁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하지만, 끝없이 물을 부어도 뿌리 없는 나무는 결코 푸르러지지 않는다. 껍데기가 아닌 진짜 행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 P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편의 짧은 단편이 실려 있던 클레어 키건의 소설~!
책 내용이 궁금해서 미리 다른분들이 쓴 리뷰를 보다보니 <남극> 파트 대한 이야기가 많길래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일단 앞의 2개 파트를 가볍게 넘기고, <남극>파트부터 시작했다. (궁금한건 못 참아!)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아주 짧고도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집이다.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삶의 결심, 욕망, 상실, 그리고 후회와 감정을 응축해낸다.
키건 특유의 절제된 문장과 섬세한 묘사는 인물의 심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감각 깊숙이 파고든다.

3편 「남극 (Antarctica)」
이 단편은 세 편 중에서도 가장 짜릿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라 생각했다.
겉보기엔 한 여성의 일탈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엔 억눌린 욕망과 감정의 해방이 응축되어 있다.
이 짧은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지 다 언급하기도 힘들지경이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여자가 있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생각한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이 물음은 윤리보다 앞선 감정의 근원에서 솟아난 것이다.
그녀는 “너무 늙기 전에” 그 궁금증을 해소해보고 싶다는 일종의 다짐 상태가 되어 도시로 향한다.
마치 일탈의 성지처럼 그녀가 도착한 호텔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전 성직자들의 숙소 근처다.
그 장소 배치 자체가 이미 도덕과 욕망 사이의 긴장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른다.
그 행위는 마치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일종의 정서적 ‘무마’를 위한 제스처처럼 보였다.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가리려는 보상 심리”가 아닐까.

저녁이 되자 그녀는 한껏 꾸미고 술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는 그녀에게 놀랍도록 빠르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언젠가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나누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말.
도시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읽었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면, 그 내용을 읽었다면 그녀의 행동이 바뀌었을까? 오히려 그녀는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그의 접근이 반가웠으리라.
애초에 이번 여행 자체가 누군가의 접근을 기다리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그녀는 대화 도중에 자신이 결혼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가 기혼임을 알게 됐음에도 거리낌이 없다.
포켓볼을 치자는 제안은 가볍고도 노골적인 접근이었다.
여자는 점차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그러다 둘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사실 나의 ‘이상한 느낌’이 더 강력하게 시작된건,
둘이 시장에 있을 때 시장 장면을 묘사할 때부터였다.
남자가 시장을 데리러 왔을 때, 얼음 위에서 죽은 눈을 하고 있는 갓 잡은 물고기와
살아 있는 듯한 송어를 골라서 송어 머리를 자르고 포일로 싸서 가져온 물고기에서
기분 나쁜 묘한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남자가 살고 있는 공간은 너무도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무늬 하나 없는 벽, 창틀의 먼지, 얼룩이 남은 머그잔, 눅눅한 냄새, 장식 하나 없는 거실, 크리스마스 흔적조차 없는 그 집은 마치 ‘사람의 온기’가 오랫동안 지워진 장소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그 공간은 일종의 ‘죽은 집’이다. 나로서는 이 지점부터 불길한 직감을 품게 된다.

이쯤부터 주인공 여자에게 말을 하고 싶어진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그냥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게 어때?!! 당장말이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 남자가 “지금까지 알았던 남자들 중 가장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였을까?

아마도 이 남자의 일상적인 자연스런 태도와 비폭력적인 매너 때문이었을까.

남자는 “당신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보상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욕조에서 편안하게 목욕하게 하고, 물을 닦아주고 수건으로 감싸며, 머리칼을 빗어준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묘사되어, 긴장되어 있던 경계심을 잠시 풀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의심으로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당신은 아메리카 대륙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말에 남자는 “내가 콜럼버스가 될게요”라고 답한다.

이 대화는 은유로 포장된 정사를 동의한다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장면에서 둘은 마침내 욕망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간다.

관계 이후, 담배를 피우는 둘. 그러는 사이에 여자는 집 안에서 산탄총 탄약통을 발견한다.

남자는 그것이 선물용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둘이 저녁으로 샐러드와 숭어를 먹으면서 우연히 나누게 된 대화 주제는 ‘지옥’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수녀님에게 들은 말을 꺼낸다. 지옥이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가 상상하는 최악의 장소라고. 그녀에게 지옥은 “반쯤 얼어 있지만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곳.”

즉, 냉기와 고립,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 있는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어 말한다. “차라리 태양 아래 악마가 지켜보는 편이 낫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더 끔찍하다.”

그 순간, 그녀는 와인을 들이켜며 그 냉기를 떨치려 한다.

마치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너무도 실감나는, 혹은 어쩌면 그녀가 이미 겪고 있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자신의 지옥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폐한 곳”이라고 말한다.

악마도, 친구도, 말 걸 이도 없는 완전한 고립.

그에게 지옥이란 타인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공간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묘사된 두 사람의 지옥은, 놀랍게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수녀님에게 배운 지옥의 정의를 다시 끄집어낸다.

“지구상의 모든 모래가 다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면,

지옥이란 그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 그리고 고립.

이건 마치 그녀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이다.

나는 이 대화가 그저 지나가는 대사가 아니라고 느꼈다.

이 장면은 소설 전체에 흐르는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핵심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말한 ‘지옥’의 이미지 안에,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의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에 농담처럼 말한다.

“예배당에 있던 수녀님이 지금의 나를 보면 얼마나 웃을까?”

웃음 섞인 말이지만, 그 말 안엔 자조와 슬픔, 그리고 어떤 예감이 담겨 있었다.

이 대화는 그녀가 상상한 지옥의 풍경—의식을 잃지 않고 냉기에 갇힌 채 살아 있는 감옥—은

그녀의 현재 삶, 어쩌면 결혼 생활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

표면상 ‘행복한 결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정작 그녀 자신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남자의 지옥 또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폐한 곳’이다.

그는 말한다. “악마도 없고, 친구들도 다 그곳에 있을 테니까.”

이 대사는 그의 냉소를 드러내면서도 사실은 관계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을 상징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국 『남극』은 정서적 고립에 놓인 사람들이 그 고립을 깨뜨리려는 시도조차도

어쩌면 또 다른 고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옥이란 불이 타오르는 곳이 아니라 누구도 말 걸어주지 않는 차가운 공간이라는 걸

이 단편은 차분하고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3편을 순식간에 보고 난 후, 1편과 2편의 글을 읽었다.

3편을 보고 읽었더니 오히려 잔잔한 느낌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해당 파트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1편 「너무 늦은 시간 (So Late in the Day)」

한 남자가 조용한 금요일 오후, 집에 돌아와 신문을 읽고 맥주를 마시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프랑스 여성과의 약혼을 스스로 깨뜨렸다.

사랑하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질서를 우선시한 그 결단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을 후회를 남긴다. 내용은 단조롭지만 그 뒤에 숨겨진 ‘말하지 않은 감정’이 울림처럼 번진다.

가장 잃기 쉬운 건 다름 아닌 바로 곁에 있는 것들이라는 걸 조용히 상기시켜주는 이야기다.

2편 「기념일 (The Long and Painful Death)」

한 여성 작가가 독일의 괴테가 죽은 집에 머문다.

문학적 상징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작품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싸운다. 그녀의 내면은 조용한 항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괴테의 유령처럼 배회하는 남성 중심 문학 세계에 대한 은근한 반항이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남극」은 인간 내면의 호기심, 일탈, 그리고 그 대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흔히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한 번쯤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이 내용은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감정의 파장을 매우 섬세하게 보여준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세 편의 단편을 통해 말보다 더 큰 침묵의 힘,

그리고 행동보다 더 깊은 비행동의 여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클레어 키건은 격렬한 사건 없이도 사람의 내면을 흔드는 데에 성공한다.

그녀가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가 무심코 넘긴 선택의 순간들이다.

말하지 않은 한마디, 하지 않은 행동, 놓쳐버린 눈빛 하나가 시간이 흐른 뒤

얼마나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키건은 후회를 드러내지만, 그 후회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서툴고, 때로는 너무 늦게야 진실을 깨닫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다정하면서도 날카롭다.

그녀는 독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지금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 선택이 혹시, 나중에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마음속을 떠돌게 되지는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의 침묵과 망설임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그렇게 이 책은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남는다.

클레이 키건의 특유의 여백이 남는 글을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p.s : 너무 3편에 몰입한 리뷰 내용 같아서. 괜히 뻘쭘하지만,

3편 내용이 개인적으로 너무 몰입이 된 내용이었기에..

다음에 재독을 하게 되면 1,2편 내용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헤쳐 보기로 한다. 하핫 ^^;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지옥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그녀가 송어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고 물었더니 수녀님이 말했죠. ‘지구상의 모든 모래를 생각해 봐. 모든 해변과 모래 채석장, 해저, 사막을 말이야. 그 모래가 전부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렴. 거대한 요리용 타이머 같은 데 말이야. 일 년에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고 했을 때 영원은 세상의 모든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생각해 봐요! 우린 모두 겁에 질렸죠. 아주 어렸거든요."

"아직도 지옥을 믿는 건 아니죠?" 그가 말했다.

"네, 보면 몰라요? 에마누엘 수녀님이 지금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몸을 섞는 나를 보면 얼마나 웃길까요." 그녀가 송어 살점을 떼어내 손가락으로 먹었다.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범한 가족의 일상 속에서 가장 소중한 감정을 건져 올리는 이야기!”

1930년대,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격랑 속에서도 어떤 이야기는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R. C. 셰리프의 『구월의 보름』이 바로 그런 책이다.

배경은 영국 남해안의 작은 휴양지, 보그너 레지스.

한 가족이 매년 9월, 보름간의 여름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다.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은 없지만, 그 대신 이 소설은 “아무 일 없는 날들” 속에 숨겨진 감정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스티븐슨 가족의 보름은 반복적인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딸 메리는 스무 살, 아들 딕은 열일곱, 막내 어니는 열 살.

세 아이는 매년 조금씩 자라고, 그들이 머무는 ‘시뷰(Seaview)’라는 이름의 낡은 객실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딕이 어렸을 때 식탁보에 남긴 잉크 자국, 메리가 붙인 조가비 장식, 박제된 돌잉어 ‘리처즈 씨’ 등은

그들의 시간이 남긴 자국들이다. 그 익숙한 낡음과 사소한 흔적들이야말로 이 가족만의 여름을 증명하는 진짜 풍경이 된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 중에 개인적으로, 아들 딕이 어느 날 처음으로 스스로 산책을 나서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늘 가족의 품 안에서 움직이던 열일곱 살의 딕은 그날 처음으로 혼자만의 걸음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딕은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만히 사유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곧 성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부모님의 인생을 자신이 대신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 사유 속에서 조심스럽게 움튼다.

그 장면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외부 세계에 투영해 본 것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말없이 커져가고 있는 한 청년의 내면을 아주 조용히 응원하게 되었다.

이 가족의 하루는 늘 정해진 루틴을 따른다.

아침이면 해변을 거닐고, 오후엔 바닷가 데크 체어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그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저녁이면 크리켓 경기나 마을의 작은 행사에 들르고, 밤이면 나란히 앉아 붉은 노을을 본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은 은밀하게 변화하고 있다.

아버지는 매끼 식사 후 조용히 혼자 산책을 나서고, 어머니는 가족을 위한 역할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 앉는다.

어니의 키가 어느덧 자신을 훌쩍 넘어섰다는 사실에 놀라고,

아버지는 멀어지는 수평선을 보며 세월의 깊이를 실감한다.

이들은 말로 하지 않지만, 각자의 내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감정의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용한 장면.

해변의 벤치에 가족이 나란히 앉아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야기 전체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다.

누구도 무슨 말을 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내년에도 우리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조용한 물음이 그들의 마음에 잠겨 있다.

마지막 날, 짐을 싸고 시트를 다시 깔고 창문을 열며 맞이하는 아침.

그 바다는 여전히 눈부시지만, 어쩐지 색이 달라 보인다.

셰리프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보그너 해변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한 가족의 여름을 따라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고.

그 충동이 고요하고 단단한 한 권의 소설이 되었다.

이 책의 번역가 박지민은 이 소설을 “유리병 속 색색의 유리알”이라고 표현한다.

지금은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훗날 꺼내보면

햇살 아래서 반짝일 듯한 추억의 조각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유리알들을 한 알 한 알 꺼내 보며

거기서 받는 따스한 빛에 위안을 얻는 것과 같은 책.”

그 말처럼, 『구월의 보름』은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했지만 자주 잊히는 “그저 그런 하루”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조용한 삶의 풍경 속에 감춰진 감정의 파동.

그것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책 속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341~342)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그들은 이렇게 앉았다.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이 말이다.

다른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 전혀 없었다.” (p.104)

사건도 없고 갈등도 없지만, 이 소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구월의 보름』은 우리가 지나온 평범한 하루들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그 보름이, 우리 인생에도 분명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참 고맙고 따뜻한 날들이었다.”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무엇보다 근사한 부분은 휴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가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P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을 위한 불교 공부 - 마음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 여행, 교양으로 읽는 불교 이야기
노채숙 지음 / 지노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교는 인간의 역사와 늘 함께해왔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그 순간부터,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한 방식으로 종교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형태를 바꾸며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불이나 태양을 숭배하고, 동물이나 자연에 신의 존재를 부여하던 시절. 그 막연한 경외감 속에서, 인간은 점차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시작했고, 그 물음에 대한 깊은 답을 찾으려 했던 이가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님’이었다.

노채숙 작가의 『청소년을 위한 불교 공부』는 그렇게 시작된 불교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과 함께 자라났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를 조심스럽고도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책의 시작은 단순한 불교사 입문서 같지만, 읽다 보면 그 이상의 것을 건넨다. 종교를 이해하는 공부를 넘어,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기 때문이다.

책은 ‘다인’이라는 손녀와 ‘할머니’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막 중학교에 입학한 다인이가 불교에 대한 과제를 하며 품게 된 수많은 질문들, 예를 들어 “부처님은 왜 인생을 고해의 바다라고 했을까?”, “무상하다는 건 허무하다는 뜻일까?”, “욕심을 버리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같은 물음에 할머니가 아주 현실적이고 따뜻한 말로 답해주는 방식이다. 이 구성 덕분에 책은 종교를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무겁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 옆에서 조용히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느낌이다.

내가 특히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3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불교는 어떻게 되었어요?”였다. 이 장에서는 불교가 단지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 있는 철학이자 태도라는 걸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다.

할머니는 몽골의 나무 심기와 한국의 미세먼지 이야기를 꺼낸다. 겉으로 보면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사실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설명을 통해, 모든 현상이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는 ‘연기법’을 풀어낸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지혜라는 이야기. 이 가르침은 불교의 핵심인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잊고 사는 태도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이어지는 ‘무상’의 가르침도 인상 깊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은 흔히 ‘덧없고 허무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의미를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무상이란,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다. 이어폰이 고장 나듯, 게임기의 배터리가 닳듯, 마음도 관계도 모든 것은 계속 변한다. 중요한 건, 그 변화를 허무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할머니는 말한다. “지금 생긴 기쁨도, 지금 사라진 아쉬움도 모두 무상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말아야 해.” 그 말이 그렇게 단단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그리고 결국, 인생은 왜 괴로운가?

책 속에서 다인이가 이렇게 묻는다. “사는 게 고해의 바다라면, 도대체 무슨 희망으로 살아?”

그 물음에 할머니는 단순히 ‘참아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삶은 분명 힘들지만, 그 힘듦이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세상이 무상하듯 괴로움도 언젠가는 지나가며,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바뀐다고. 놓아야 할 것을 놓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불교는, 경전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다 읽고 나니, 불교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신에게 기대는 믿음이라기보다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는 가르침. 괴로움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그 원인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불교는 ‘참는 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흐름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청소년을 위한 불교 공부』라는 제목 때문에 처음엔 주저했지만, 이 책은 나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자주 흔들리고, 삶의 의미를 놓치곤 하는 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었다.

불교가 멀게만 느껴졌던 사람, 삶이 자꾸 복잡해지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좀 더 다정하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결국 이 책이 전하고자 했던 말은 하나였다.

“삶은 늘 흐르고, 변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노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다인 : 도대체 괴로움은 왜 생기는 거야?
할머니 : 괴로움을 인도말로 둑카라고 해. 괴로움이 왜 생기냐고?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이야. 맞지?
사람은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은데 병들다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괴롭고, 갖고 싶은 게 있는데 쉽게 가질 수 없어 괴롭고, 미운 사람이 있는데 자꾸 마주치니 괴롭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가니 괴롭고, 무언가를 보면 자꾸 욕심이 나서 괴롭지.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생겨났다가, 원인이 사라지면 생겨난 것도 사라진다고 했어.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무상하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겨난 물건도 사랑도 친구도 돈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해. 그것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마음에 들어서 가지고 싶은데 쉽게 살 수 없고, 설사 가졌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면 이제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어? 그래서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했어.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