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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 - 역사적 트라우마에 저항하는 단독자 1949~1992 ㅣ 아티스트웨이 2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5년 7월
평점 :

김응교의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에 대한 가장 치열하고도 개인적인 해부이자, 문학과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하루키의 문학을 그저 감성적이고 위로를 주는 ‘힐링 소설’로만 여기거나, 재즈와 와인, 고양이, 달리기처럼 세련된 취향을 담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쿨한 문학’으로만 생각해온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전혀 다른 얼굴의 하루키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덤덤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복잡한 상황에서도 냉소적이거나 무심한 태도로 대응한다. 이러한 특징은 하루키 문학을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인 작품으로 인식하게 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는 그 이면에 자리한 역사적 트라우마와 무의식의 상처, 그리고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책의 제목 ‘지금 어디에 있니’는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 마지막 장면에서 따온 문장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전화를 건 미도리에게 “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라고 되묻는다. 이는 단순한 위치 확인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정체성, 삶의 방향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김응교는 이 질문을 하루키 문학 전체를 꿰뚫는 상징으로 본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질문에 응답하려는 시도다.
책의 시작부터 흥미롭다. 하루키가 소학교 시절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조개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소개된다.
이 발언의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김응교는 그것이 하루키 문학의 주제와 강하게 연결된다고 본다. 일본에서 1958년에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는 전범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병사의 이야기이며,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인간이 아니라 조개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하다.
하루키가 아홉 살 무렵 이 드라마를 보았을 가능성은 높고, 그 충격은 그의 문학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자주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겪는다.
전쟁, 국가 시스템, 사회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지도 않지만, 무력하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비현실과 환상을 통해 도피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저자는 이것을 ‘부조리한 역사에 대한 독특한 저항 방식’으로 해석한다.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는 말은 그런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더는 상처받지 않고 조용히 숨 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 문장은 하루키 문학 전반을 꿰뚫는 중요한 상징이다.
1장에서 특히 인상 깊은 대목은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는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에세이에서 아버지 무라카미 치아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고, 전쟁 이후 평생을 참회의 마음으로 독경하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어릴 적 하루키는 아버지에게서 참수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충격을 평생 잊지 못한다. 이 기억은 소설 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부정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하루키는 1939년 소련과 일본이 충돌한 ‘노몬한 전투’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실제로 그 전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루키의 여행법』에서 그는 “왜 그 전쟁에 끌리는지 모르겠지만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이 관심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라, 아버지 세대가 남긴 어두운 기억을 문학적으로 마주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역사라는 것을 짊어지고 살고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감춰도 반드시 밖으로 나온다.”
그는 난징 대학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후 일본의 침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대학살을 묘사한 대목은 일본 극우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하루키는 “10만 명이든 40만 명이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군부, 사이비 종교, 부패한 자본주의를 모두 포함하는 ‘시스템 악’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버지’라는 상징이 놓여 있다.
김응교는 이를 ‘아시아적 아버지 콤플렉스’라고 명명한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 개인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이 남긴 역사적 죄책감과 폭력의 기억을 온몸으로 짊어진 세대의 고뇌를 말한다.
하루키의 이 같은 태도는 프란츠 카프카와도 연결된다.
카프카 역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변신』을 통해 가부장적 권위에 눌린 삶을 고백했고,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주인공에게 ‘카프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이 전통을 잇는다.
김응교는 하루키 문장 곳곳에서 “카프카적인 무거움”이 감지된다고 말한다.
둘 다 자신의 문학을 통해 아버지와 권위, 그리고 잊히는 기억과 싸워온 작가들이다.
하루키의 창작 계기 또한 흥미롭다.
그는 1979년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야구장을 찾아가 외야 잔디밭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그 순간 방망이에 공이 맞는 소리를 듣고 문득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즉시 서점으로 달려가 만년필과 원고지를 사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단 두 달 만에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놀라운 데뷔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눌려 있던 무의식의 응축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사건이었다.
결국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사회가 외면해온 역사적 상처를 소설 안에 조용히 묻는다.
전쟁의 그림자, 아버지 세대의 죄의식, 잊힌 기억의 파편은 그의 작품 속 곳곳에 스며 있다.
김응교는 하루키가 아버지의 전쟁 경험, 노몬한 전투, 난징 대학살처럼 일본이 침묵해온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기록하고 사유하려 했다고 말한다.
하루키 문학의 핵심은 ‘기억의 복원’이며, 그 중심에는 ‘말하지 않음에 대한 저항’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는 하루키를 단지 인기 있는 소설가로 소비하던 독자에게, 전혀 다른 얼굴의 작가를 보여준다.
문학을 통해 역사와 화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울림을 전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서 김응교는 우리가 하루키에게 던졌던 질문을 독자 스스로에게 돌려주듯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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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고양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우리는 광대한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수많은 물방울 중 이름모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한 방울 빗물의 역사가 있어서, 그것을(역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한 방울 빗물의 책무가 있다. (‘고양이를 버리다’, 9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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