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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밤새 김주혜 작가의 『밤새들의 도시』를 읽었다.
수많은 장르의 책들 속에서도 유난히 소설이 잘 읽히지 않다 보니, 처음 집중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하지만 한 번 물결을 타기 시작하니, 머릿속에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결국 밤새며 읽었다. 이 소설은 그들이 있던 장소와 주인공의 모습들, 그들의 성격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더라.
발레는 가까이에서 자주 접했던 익숙한 장르는 아니었지만,
이 소설이 선택한 발레라는 소재는 장르를 넘어선 감정의 서사가 있었다.
단순히 발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한 사람의 내면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과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모두가 ‘나타샤’라고 부르는 그녀는
한때 파리 무대에서 키트리 점프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며 박수갈채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젤’ 무대에서의 부상은 그녀를 무대 밖으로 끌어냈다.
이후 거의 2년 가까이, 나타샤는 공허하고 생기 없는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았다.
살아는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나날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 부상 이후 무대에서 내려온 나타샤는,
자신이 발레를 처음 시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그녀는 수많은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 스베타 이모의 권유로 발레학교 오디션을 봤던 날,
엄마가 직접 수작업으로 만든 발레복을 입고 긴장 속에 무대에 섰던 장면,
그 오디션에서 나탈리아가 보였던 놀라운 집중력과 몰입,
자신을 무시하던 심사위원조차 침묵하게 만들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발레학교에 입학한 후, 함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친구 니나와 세료자,
그리고 이들과의 우정과 경쟁, 때로는 애매한 감정이 뒤섞인 관계들도
지금의 고요한 방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또한, 무대 위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끝내고 쏟아지는 박수를 받던 날들의 열기,
지젤 무대에서의 부상 순간과 함께 느껴졌던 무력감,
그 후 찾아온 공허함과 방황—
이 모든 장면들이 과거의 광채와 현재의 침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와 내면의 흔들림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다양한 장면 중에서 나타샤가 발레 슬리퍼를 신어 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발레 슬리퍼를 신자 발에 생생함과 기민함이 돌아오며 바닥과 연결되고,
무릎뼈가 들리며, 골반이 열린다. 어깻죽지가 편편히 펴지고 당겨져 내려가며 목은 길고 곧게 선다.
엄청난 안도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촛불이 어느 바람 한 줄에 확 커졌다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나도 순간 나란 존재를 다시 알아본다.”
이 문장은 단순한 동작의 묘사를 넘어,
몸이 기억을 깨우고, 마음이 스스로를 마주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타샤는 그 순간,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해왔는지를 되찾는다.
바로 자기 존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무대에서 멀어진 이유는 단순히 부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미트리가 던진 한마디가 모든 걸 드러낸다.
“네 부상 말이야.”
“내가 보기엔 거의, 아니면 전부, 네 머릿속에 있다고.”
이 말은, 몸은 회복되었지만 마음의 상처가 여전히 그녀를 가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나타샤를 무너뜨린 건, 자기 의심과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엄마와의 대화 장면은 유독 속상하고 화도 나고 슬펐다.
“프리마 발레리나는 10년에 한 번 태어난단다.”
이 말은 “넌 그 중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딸이 겪을지 모를 고생을 막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 말 속엔 믿음의 부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신뢰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무대 위에서 넘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로 남는다.
나타샤는 자신을 “고양이, 빗, 주전자” 같은
하찮고 평범한 존재처럼 느끼며, 세상의 무심함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에 받은 그런 말들은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그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엄마 역시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기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거란 생각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정 이입하며 봤던 장면 중 하나다.
친구 니나와의 장면도 강하게 남았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니나는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고,
나타샤는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폭발한다.
처음에는 말다툼 정도로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서로를 향해 억눌러왔던 감정의 고백이었다.
니나는 참아왔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고,
나타샤의 무심한 말은 그 감정에 불을 붙였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상처,
오해가 부딪힌 지점이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긴장되었던 장면이었다.
니나와의 다툼 이후 집에 돌아온 나타샤는 뒤늦게 도착한 세료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고백한다.
짧은 말이지만 그 장면에서 섬세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수십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은 밤의 도시에 날아오르는 새들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느리게 날더라도
자신의 방향을 찾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다.
『밤새들의 도시』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를 품고 있는 듯하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자신만의 빛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무너지고, 의심하고, 다시 길을 찾는 그 여정이 결코 낯설지 않다.
발레를 모르는 사람도, 예술가가 아닌 사람도 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조각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밤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날개를 펼치고 있을 나타샤가 떠올랐다.
“혼자서 길을 찾아 나서는 존재”라는 메타포는 내 안에도 조용히 숨 쉬던 무언가를 흔들어 놓았다.
이 책은 말없이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지금 이 밤 속을 걷는 너도 분명 빛날 수 있어” 라고 말해주는 이야기다. 발레리나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삶 앞에서 다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위로를 전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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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태형이 곁무대로 돌아오자 다른 무용수들이 그의 옆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이미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른 주역 무용수들이었지만,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흥분한 코르 드 발레 단원들 같았다. 태형은 그들과 인내심 있게 차례대로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젊은 남자 무용수들에게 있어서 겸손함과 천부적 재능은 으레 상반된 관계다. 그의 겸손함은 춤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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