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비밀 -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
미셸 파스투로 지음, 전창림 옮김 / 미술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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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색채는 물리계에서 실재하지 않는다. 색채는 태양광선의 파장이 사람의 눈에 의해 인지된 우연의 산물이다. (어떻게 보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고마운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색체는 실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현상들 중 하나이기에, ‘잠정적 실체라는 특성을 띠고 있다. 이 기묘한 특성으로 인해 색채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로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색채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곧 색채는 인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하나의 상징화된 통로였다. 그래서 색채는 이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상징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 신화, 예술, 의식 등에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역할을 해 왔다.”

 

2011.8.30. 나는 알라딘 페이퍼에 색체, 그 빛깔의 유혹이라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위 인용은 당시 발행한 글의 일부를 가져온 것. 이걸 재인용한 이유는 이후 색채에 관계된 다양한 책들을 봤지만, 색채의 특성을 잠정적 실체라고 당시에 표현한 것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해서다. (내가 명명한 조어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무엇보다 색채는 인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하나의 상징화된 통로였다. 그래서 색채는 이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상징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 신화, 예술, 의식 등에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역할을 해 왔다.”는 부분. 이에 부합하는 걸출한 색채에 관한 책을 만났기에, 전에 써둔 페이퍼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던 거.

 

<색의 비밀>(미술문화, 2003)은 색에 관계된 문화사 책 가운데 아주 유용하고 걸출한 책이다. 무척 쉽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밀도는 만만치 않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화권에서 색(Color)이 종교, 예술, 의식, 생활, 스포츠 등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그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확장해 왔는지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 색에 대해서 우리가 몰랐던 내용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지는 책이다.

 

저자 미셀파스투로는 <파랑의 역사>로 널리 알려진 문장학과 상징학의 거두이다.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사과의 상징적 역사>, <문장학 개론> 등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들이 다수이기에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서양 상징사의 대가. 본 책은 대가가 풀어 설명해 주는 색에 대한 상징과 의미의 역사적 스케치이다. (스케치일 수밖에 없는 게 설명이 너무 간략해서)

 

이 책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무척 많은데, 일단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색 관계는 출현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거. 보통 미술 시간에 빨강색의 보색은 청록색(또는 녹색)이라 배우고, 노랑색의 보색은 보라색이라고 배우지만 중세 시대 빨강의 보색은 흰색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옛날의 색채 계단은 스펙트럼의 순서대로가 아니라(뉴턴의 실험이 행해진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양단에 백과 흑이 오는 배열이었다(적색이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p187]

 

“18세기까지 녹색이 빨강의 반대 색으로 생각되었던 적은 전혀 없었다. 빨강에는 흰색(원시시대 이래)과 파랑(12~13세기 이후)이라는 두 개의 반대색이 있다. 서구 세계에서 최초로 녹색을 빨강의 반대색으로 여기게 만든 것은 1750~1850년 사이에 출현한 원색과 보색에 관한 색채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의해 빨강이 원색의 지위를 차지하고 색상환에서 녹색이 빨강의 보색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p99)

 

색은 역사적이고도 문화적인 그 시대의 산물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색의 의미는 과거와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 녹색은 교통표지판이나 병원(또는 약국) 그리고 기분을 차분하게 하는 벽지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린에 대한 이미지는 현재 매우 우호적이어서 그린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의례 평화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중세부터 이미 녹색은 악마의 색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색을 피했다. 그러나 녹색은 오히려 행운도 상징한다. 녹색은 양면성 즉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녹색은 요행수가 작용하는 상황이나 의식과 연결된다. 적어도 16세기부터 도박판은 녹색이며,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장도 그렇다. (탁구대, 축구장을 생각해 보라!)” (pp32-33)

 

재미있는 내용도 있다. 색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색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파란색이 나온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색 선호도 조사에서 서유럽, 미국, 캐나다에서도 항상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파랑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니 좋아하는 색은 다수가 좋아하는 색인 듯하다.

 

하지만 가장 혐오스러운 색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르지 않을까? 어떤 이는 검정색이라고 할 수 있고 , 어떤 이는 베이색이라고(특히 내 어머니)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자는 오늘날 이 질문의 답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대체로 황색과 녹색, 갈색의 중간쯤 되는 색이다. 이 색을 옛날에는 거의 똥색이라고 불렀고 최근에는 카키’, 현재는 겨자색이라고 부른다.” (p44)

 

웨딩드레스 이야기도 나온다. 개인적으로 하얀 웨딩드레스가 언제부터 출현했는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비교적 최근까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젊은 여성들에게 결혼 전의 행실이 순결했음을 선언하는 수단이었다. (중략) 그러나 유럽의 젊은 여성이 옛날부터 항상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것은 아니다. 이 유행은 18세기 말 이후에야 출현한 현상으로, 이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와 반개혁적인 가톨릭의 두 고전적 가치체계가 결합하여 이른바 부르주아적 가치관이 탄생했을 때부터였다.” (p171)

 

식품과 색의 관계에 대해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식품산업에서 사용하지 않는 색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 식품과 식습관을 통해서 노랑, 녹색, 하양, 빨강 등의 색을 식품에 사용해 왔다. 검정색 계열에 속하는 식물은 드물기는 해도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파랑색 계열의 식물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파랑은 일반적으로 의약품(정신안정제나 수면제)”에 한정되어 있지, 식품산업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pp178-179)

 

책의 부제는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이다. 미셸 파스투로가 다채롭게 풀어내는 색에 대한 상징과 사회적 의미는 실로 재미있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면이 다분하다. 사전 형식을 취하는 책이어서 그런지 내게는 윤덕노의 <음식 잡학 사전>처럼 나만 몰래 보고 싶은 책이다. '색(컬러)'에 관계된 책을 많이 읽어 왔지만, 색에 대해서 파스투로만큼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저자는 거의 못 본듯싶다.

 

“‘빨강, 파랑, 검정, 하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즉시 이러한 색을 가진 사물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색을 나타내고 있는 그 단어들의 더 깊은 의미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색채론>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파스투로는 이 책을 통해 아주 성공적으로 해 냈다. 책을 즐겨 읽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책을 만나는 건 축복이다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 행운을 이 페이퍼를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드린다. ()

 

 

[]

색은 문화적 소산으로 사람이 지각하지 않으면, 즉 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특히 뇌, 기억이나 인식 능력 혹은 상상력으로 해독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된다. 보이지 않는 색은 존재하지 않는 색이다.” 이 책 61페이지에 나온 대목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2011.8.30.자 발행한 페이퍼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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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5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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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5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입] Yusuke Kobayashi - How A Realist Hero Rebuilt The Kingdom: Part 1 (현실주의 용사의 왕국 재건기: 파트 1) (2021)(한글무자막)(Blu-ray + DVD)
Various Artists / Funimation Prod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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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줄창 넷플릭스로 애니를 보고 있다. 재미 없는 것도 많지만 내 취향이라고 넷플에서 추천해 주는 작품들은 의외로 재밌는 작품들이 많다. 제목과 포스터는 정말 '이게 재미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게 하지만, 막상 보기 시작하면 꽤 재밌다. (넷플의 추천 마법은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보게 된 작품이 <나 혼자만 레벨 업> 이틀만에 다 볼 정도로 몰입도가 장난아니었다. 그리고 넷플이 계속 추천해 준 작품이 <무직전생>. 역시 제목과 포스터는 정말 재미없게 보였지만 일단 보니 시간이 순삭이었다. 


이세계 애니가 내 취향이 아닌 듯했는데, 막상 보니 의외로 좋았다. 전생해서 주인공이 막강한 능력을 가져 적(마물)을 퇴치한다는 유치한 줄거리이지만, 이 뻔한 줄거리를 강력한 연출력으로 볼 거리를 제공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현실주의용사의 왕국재건기> 역시 이세계물 장르이다. 하지만 여타 이세계 판타지물과 현저히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게 바로 처세와 정치의 대표 고전인 <군주론>과 <손자병법>을 애니에서 만나볼 수가 있다는 거.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이세계 왕으로 불려온 주인공이  (현실의) <군주론>과 <손자병법>의 핵심 내용을 통해 쓰러져가는 이세계 왕국을 재건한다는 스토리다. 이세계 판타지물에서는 정말 드문 정치 이야기. 정말 참신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플롯의 짜임도 좋고 연출력도 괜찮다. 다만 음악과 캐릭터가 좀 약한 편이다. 하지만 매 에피소드의 내용이 <군주론>과 <손자병법>에서 따온거라 주제 집약도가 매우 좋다. 


'용병은 그 나라를 결국에는 파멸로 이끈다'라거나, '군주의 잔인함은 상황에 따라 나라에 좋은 덕목이 될 수 있다'는 <군주론>의 내용을 에피소드 내용에 잘 적용하여 작품성을 보장하고 있다. 심지어 12화의 타이틀은 <손자병법>에 나온 "적을 포위할 땐 반드시 퇴로를 열어줘라"이다. (11화 역시 '이도대강)


이세계 판타지물에서 현실정치학의 보고인 <군주론>과 <손자병법>의 핵심을 볼 줄을 미쳐 몰랐다. 이 두 책의 내용을 애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작품. 그만큼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이 이세계로 소환될 때 있었던 곳이 도서관이고, 주인공이 없어져 마지막에 땅에 떨어진 책이 <군주론>이다. 이 작품이 뭘 노리고 있는지 처음부터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군주론>의 21세기 아니메판. 넷플 시청자면 강추할 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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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2-03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만화(현실주의용사의 왕국재건기)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일본의 무수한 이세게물 만화대비 어떻게 보면 참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 매우 이채롭단 생각을 했지요.하지만 역시 만화는 만화라고 느낀것이 이세계 왕이 느닷없이 왕자라를 양보하는 대목으 현실 세계에선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지요.
아무튼 연재가 계속 진행 중인지 완결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애니로도 나왔다고 하니 한번 시청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yamoo 2025-12-03 17:53   좋아요 0 | URL
매우 이색적인 만화입니다. 왕자리를 양보하는 건 뭐...그럴 수 있겠지요. 만화니까. 이세계인데 뭘 못하겠습니까...ㅎㅎ
근데 정치학 경제학 처세술 등 학문적 배경이 작품의 근간이 되어서 그런지 내용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경제학적 기본 이론도 상당히 나옵니다. 이세계 애니 중 이런 애니가 있다는게 좀 신기하다랄까요. 재미도 있어요..ㅎㅎ

감은빛 2025-12-05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스쳐 지나가며 이 글을 얼핏 보고 넷플릭스에서 한번 찾아보았지요.
야무님 추천이시니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편당 분량이 짧아서 한 서너편을 죽 봤는데, 확실히 만화라 유치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독특한 만화이기는 하더라구요.
뒤쪽에 전쟁하는 내용도 나오는 것 같던데 나중에 시간나면 더 봐야겠어요.

yamoo 2025-12-08 11:38   좋아요 0 | URL
2기로 끝났는데, 하렘적 요소도 있긴 하지만 기본 스토리는 왕국의 재건이라 정치와 경제 쪽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전쟁의 전략과 전술 내용도 흥미진진하고요. 어쨌거나 이세계 애니 장르 중 특이하고 재미있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확실히 성인도 즐길 수 있는 무거운 주제를 재밌게 잘도 풀어낸 작품^^
 
최초의 현대 화가들 -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다카시나 슈지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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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현대미술과 관련된 책들을 잡다하게 읽고 있다. 그냥 손에 걸리는 대로 읽는 편인데 개중에는 좋은 책도 있고 아쉬운 책도 있다. 물론 설치미술이나 행위예술 또는 비디오아트와 관련된 분야가 포함되어 있고, 이 분야가 현대미술에서 그 위세를 불려 가서 그런지 몰라도 최근에 외국에서 출간된 책 중 이쪽 분량이 상당히 늘고 있다.

 

나는 여전히 회화나 조각 이외에는 불편한 시각이 많아 실험성이 짙은 설치미술, 행위미술, 비디오아트 등이 포함된 책은(그것도 많이!) 아직은 별로라는 느낌이 강하다. 뭐 어째겠는가, 내 취향이 그런데. 이렇게 읽어 가는 와중에 만난 책이 <최초의 현대화가들>(아트북스, 2005)이다. 일본 작가가 쓴 현대미술가론쯤 된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저자는 다키시나 슈지. 1932년 생.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현대미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동경대 졸업 후 프랑스 파리1대학과 루브르 미술관에서 서양 근대미술사를 전공했다니, 믿고 볼 수 있는 서양미술 전문가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쓴 책을 신뢰하는 편인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전문가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평이하지만 수준 높은 '작가론'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화가를 선별하고 정리한 저자의 시각이. 누구나 알 만한 작가와 생소한(?) 작가의 비율이 5:5 정도라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모르는 작가는 건너뛰고 아는 작가만 읽어도 좋다. 나중에 생소한 작가 순으로 읽어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잘 다루지 않는 움베르토 보초니, 에밀 놀데, 쿠르트 슈비터스, 프랑시스 피카비아 등의 대표작을 잘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반갑고 귀한 책이다.

 

예술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작품이 출발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예술가는 작품으로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들꽃에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듯이, 한 점의 작품에 예술가의 내면세계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단 한 점의 작품으로 예술가의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머리말중에서

 

이 책의 집필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낸 부분이다. 화가의 대표작 한 점을 매우 심도 있게 분석하여, 왜 최초의 현대 화가로 자리매김 되었는지 논평하는 책이다. 그런데 쉽다. 우리나라 평론가 그 누구도 본 책의 저자처럼 쉽고도 간결하게 작가의 대표작으로부터 작가의 전모를 잘 드러내는 글을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책을 읽고 그 누가 연상됐겠지.

 

그도 그런 것이 이런 방식의 작가론은 쓰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 한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세계와 작가가 지향했던 바를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내공이 깊어야 하기에 그렇다. 폴 세잔의 대표작 하면, 누구나 사과를 떠올린다. ‘세잔의 사과라고 회자될 만큼 미술사에서 세잔의 사과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세잔의 대표작은 <대수욕도>이다. 208×249cm의 대작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진짜 나 자신의 그림이 될 테지.”라고 말할 정도로 고심해서 그리려고 하던 나 자신(세잔)의 그림’. 지금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899년부터 1906까지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이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화가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대표작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 좋다.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림을 보는 방식인데, 이걸 가르쳐 주는 책이 별로 없다.

 

그림을 보는 방식과 그림이 왜 좋은지 그리고 왜 작가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 알려면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혼자 미술책을 보며 그림 보는 방식을 스스로 깨치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매우 답답하고 지쳐간다. 헌데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한 방에 날려주는 아주 고마운 책이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면 왜 고마운지 단박에 알게 된다.)

   

그에게(브란쿠시에게) <공간속의 새>는 단순히 조형적인 아름다움만을 노린 작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의 비상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브란쿠시는 이 작품에서 다름 아니라 새의 존재와 본질을 하나로 종합하는 일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p113)

 

책의 부제는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12명의 예술가를 선별해서 대표작 12점만을 소개했으면 우리나라 저자들의 책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12명의 대표작 12점과 그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전 작품들, 그리고 연관된 다른 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 본작이 탄생했는지 그림의 이력을 볼 수 있다는 거.

 

본 책에 수록된 12점의 대표작들은 화가들이 없던 걸 그린 게 아니었다. 이전 선배 대가들의 작품에서 어떤 구성과 부분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변형해 표현한 결과물이었다. 세잔에게 있어서는 푸생의 <플로라의 승리>,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오귀스트 프레오가 그리고 조르조 데 키리고에게는 뵈클린이 있었다. (물론 클레나 슈비터스는 이와는 좀 달랐다.)

 

그래서 미술에 관심이 있지만 그림은 잘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지침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볼 때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있다는 말씀. 그만큼 유익하고 쉽고 알찬 책이다. 아주 좋은 책인데 한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아쉽게 별 하나를 뺐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강추할 수 있는 책이다.  ()

 

 

* 104p 피카소 <게르니카>를 논한 부분 ; 피카소에게 이와 같은 화면 구성의 힌트를 준 것은 역시 죄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학살을 테마로 한 로마파의 거장 오귀스트 프레오의 부조 <학살>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프레오를 로마파라고 했는데, 찾아보니 프레오는 낭만주의 조각가로 나온다. 도대체 로마파는 어디 유파인지 모르겠다.

 

<<덧>>

사실 이런 책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 12인의 현대화가가 누구인지 직접 책을 읽고 확인하시길!

1. 이 책에 수록된 쿠르트 슈비터스를 보고 그의 독일어 작품집을 구매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영향을 깊게 받아 나의 조형 언어를 형상화하게 됐다.

2. 에밀 놀데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지만 지크프리드 렌츠의 <독일어 시간>의 모티브 화가라 해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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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1-2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짝짝짝. 반가운 리뷰입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 좋다.˝ - 이 점이 맘에 듭니다. 적은 작품을 가지고 논한다면 깊이 있는 분석을 담아 설명하는 책이겠군요. 반드시 구매하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읽은 이런 종류의 책과 얼마나 다른지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어 화집을 많이 갖고 있어요. 감솨^^

yamoo 2025-12-01 10:10   좋아요 1 | URL
출간된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현대회화 작가론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쉽고 유익한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자평하고 있습니다. 다카시나 슈지는 서양미술 전문가이지만 현학적인 설명을 전혀 하지 않고 일반일들도 쉽게 그림을 보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끔 친절히 설명해 준는 게 장점입니다.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문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를 보고 주고 있는 사람...이런 류의 책들이 많이 나오면 좋은데, 거의 없는 게 이분야의 실상이라...이 책의 장점이 두드러집니다..^^
 
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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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에 관련된 소설을 좋아한다그 이유는 내가 베르그손 사상(특히 <물질과 기억>)에 경도되어 있기에 그렇다기억에 관련된 소설은 무척 많다그중에서도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나 알랭 로그브리예의 <되풀이정도의 작품들은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할 수 있다여기서 인상 깊다라 함은 내 취향에 부합한다는 말과도 같다.

 

물론 줄리언 반즈의 기억의 파노라마’ 작품 세트도 재밌게 읽었다특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1페이지에 나오는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라는 문장은 이 소재의 모든 작품 해석의 치트키라 할 수 있다기억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해설 틀이기에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여기 기억을 소재로 하는 또 하나의 작품 <오래된 빛>이 있다노벨 문학상 후보에 언제나 회자되는 작가 중 한 명인 존 밴빌의 장편소설알라딘 소설 장인 뽈님이 별 다섯 개를 준 불후의 명작 중 하나그래서 무조건 읽어야 할 리스트에 포함하여 읽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대실망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설 분야인  누보로망 계열과 비슷한 전개로 나를 당혹케 했다작가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사랑의 무의미함?' 아니면 '사랑과 상실?' 또는 '기억의 속임수에 대한 섬세한 탐구?' 뭐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작가가 이 작품을 왜 썼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이 소설이 앨릭스와 캐스 클리크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라나그래서 의미는 있겠다 싶다하지만 전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작품만 읽으니 궁금증만 증폭되고줄거리와 관계없는 외부 풍경 묘사나 행동 하나하나를 지리할 정도로 늘어뜨려 묘사하는 스타일은 질린다. 알랭 로그브리예의 <질투>을 연상시킨다.

 

나는 이런 작품을 정말 싫어한다재미가 정말 없기 때문욘 포세만큼은 지루하지 않지만 그래도 읽기가 고역이다뒤에 뭔가가 있겠지’ 하며 던져 놓은 떡밥 때문에 꾸역꾸역 읽는 정도이런 류의 소설이 문체는 좋다고 하는데아포리즘과 같은 멋진 문장은 만나볼 수 없다진짜 줄 친 부분이 단 한 줄도 없다.

 

사실 소설 초반부를 읽고 매우 느낌이 좋았다이 책을 추천하는 분들도 대부분 좋다고 하고알라딘 평점이 무려 9.2라서 기대가 정말 컸다. <타타르인의 사막>과 같은 기대를 갖고 봤다더군다나 소설의 첫 부분은 너무도 매력적으로 시작해서 몰입도가 컸다. 초반부 읽고 나도 여기저기 추천을 해댔다.

 

빌리 그레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다사랑은 너무 강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에 적용될 더 약한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이 모든 일은 반백 년 전에 일어났다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미시즈 그레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p13)

 

15살 소년과 35살 유부녀의 육체적 사랑 놀음(불완전한 기억). 이것은 볼만했다전체 플롯에서 뭔가 상징적 메타포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고현실의 인물과 영화적 서사(주인공이 출연하는 영화)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여기에 주인공 알랙시 딸 캐스의 죽음과 영화 주인공(알랙시가 연기하는 인물인물과의 어떤 관계가 그려져 과거 알랙시의 왜곡된 사랑이 어떻게 딸의 죽음에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작가가 어떻게 플롯의 구조를 짤지 계속 기대하면서 봤는데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실망감은 커졌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이건 중간에 덮었어야 했다.

 

15세 때 미시즈 그레이와의 짧은 사랑, 딸 캐스의 죽음 그리고 돈 데번포트와의 영화 이야기가 완전히 따로 노는 느낌이 너무 강했다과거의 이상한 사랑은 현실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딸은 도대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알랙시는 딸이 죽은 곳으로 왜 데번포트과 같이 갔을까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미시즈 그레이와 벌였던 15세 알랙시의 기억은 미시즈 그레이의 딸에 의해 왜곡된 기억으로 밝혀졌지만 그 왜곡이 사건을 전복시키지도 딸의 죽음을 밝혀주는 메타포로도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독자는 그런 것을 기대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씀내가 전작을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아니 읽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소설 속 장치들을 들여다보는 수고를 들여야겠지해설을 읽으니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이런 재미없는 작품을 두 권을 더 읽느니 차라리 읽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이 작품을 읽고 쓸쓸한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정말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독자들일 거다윌리엄 트레버 작품을 보면 쓸쓸한 아름다움이 뭔지 단박에 느낄 수 있는데이 소설은 정말 그런 느낌이 아니다흐릿한 안개 속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이마를 땅에 찢는 그런 느낌이다.

 

이제 그는 백만 — 십억 — 일조— 마일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은하의 오래된 빛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그가 말했다. “여기이 테이블에서도 내 눈의 이미지라는 빛이 선생님 눈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아주 작은 시간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따라서 어디를 보든어디에서나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p254)

 

그래과거를 봐서 어쩌라고?! 과거의 사랑과 상실이 쓸쓸한 삶의 현재를 구축한다는 이 진부한 주제를 아름답게 포장해도 내용이 없다면(심리 그 자체가 내용이라면) 공허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든 생각이다.

 

 

총평 정말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작품이다.



[덧] 소설을 읽고 좋다고 하는 건 매우 주관적이다. 내게는 좋은데 다른 이들에게는 별로인게 이 주관성의 특성이다. 헌데 내가 읽고 좋아 추천했는데 다른 이들도 좋다고 하면 더욱이 그 수가 많으면 주관의 객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나는 좀 이 부분이 항상 신기하다. 그렇다라도 누구나 좋아할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별로인 작품은 항상 출현한다. <오래된 빛>은 내게 바로 그런 소설이다. 추천받은 작품들은 대체로 좋다. 하지만 완벽한 예외도 있다. 그래서 개인의 특수성은 여전히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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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8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번 느낀 거지만...저는 이런 심리를 이미지화하는 소설을 싫어하는 듯합니다. 아니 극혐하는 쪽이 맞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건과 갈등 대신 인물의 심리를 지루하게 서술하고 묘사하는 소설은 정말 적응하기 힘듭니다. 철학적 성찰도 없는 건 덤...밴빌의 추리소설은 어떨지..

페크pek0501 2025-11-21 11:56   좋아요 1 | URL
저는, 남들이 다 좋다는 소설인데 나는 별로인 경우 내가 뭐 잘못 읽었나, 뭔가 놓쳤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야무 님은 훌륭하십니다. 소신을 갖고 주관적인 느낌을 쓰는 자세, 배우고 갑니다.^^

yamoo 2025-11-24 10:50   좋아요 1 | URL
옛날에는 저도 페크님처럼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걍 내 취향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남들은 다 좋은데 나만 싫다는 리뷰는...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 내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하는 사람들의 찜찜한 생각을 날려주는 순기능도 있는 거 같기에...이런 리뷰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알라딘에서는 책을 좀 부정적으로 보는 리뷰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런 리류가 훨씬 좋은데 말입니다..ㅎㅎ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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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 재미있는 책만 골라 읽는다는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추천받았다. 앨런 베넷의 <일반적인지 않은 독자>(문학동네, 2010). 저자도 몰랐고, 책은 143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었다. 표지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중간중간 삽화도 있는데, 문고판(인디북)<톨스토이 단편집>에 나오는 삽화와 비슷했다.

 

책에 대한 첫인상은 드럽게 재미없게 생겼다’, ‘청소년 소설등과 같은 느낌이었다. 책 표지가 한몫 단단히 했다. 읽을까 말까 주저한 게 사실. 하지만 추천인이 문학을 전공했고, 나름 재밌는 소설만 찾아 읽는 이라 부정적인 인상을 걷어 내고 읽어 보기로 했다. 정말 모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럴까 첫 10여 페이지를 읽는데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드는 거다. 재미가 없을 거 같고 흡입력도 별로고, 많이 밋밋했다. 그래도 5페이지에 첫 등장하는 삽화가 있어 계속 읽기로 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번역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야기 속에 슬며시 스며들었다. 책에 관한 책을 소설로 읽으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책 읽기에 대한 우화. 처음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빠져 독서왕이 되는 과정을 플롯에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들었던 의문들과 책 속에 소개되는 책을 찾아 읽는 과정은 독서 이력이 어느 정도 있는 독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를 작성하고 모으고 읽는 과정은 공감할 수밖에 없다.

 

본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책덕후 노먼이 추천해 주는 책을 읽어나가며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들은 우리가 책에 빠져 지내온 지난날의 행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절 한창 읽어나가던 우리의 한때를 발견하고, 공감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여왕이 읽어가는 책 리스트를 보면서 내가 읽었던 책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재밌다.

 

책을 덮고 보니, 본 소설은 독서 덕후들을 위한 책이다. 지금 막 독서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에게는 여왕에 감정이입이 제대로 될 수 있고, 어느 정도 독서 이력이 붙는 이들에게는 과거의 지점들이 생각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은근한 미소를 띨 수 있게 한다. 책에 관한 책을 재미있는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니, 근사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책을 읽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을 여왕과 대비시켜 여왕의 독서를 방해하는 인물들로 설정했다. 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각국 정치가들과 각료 그리고 비서실장 및 여왕 주변의 시중드는 메이드까지 여왕이 책을 읽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총리는 여왕을 책의 세계로 인도한 노먼을 왕실에서 내쫓기까지 한다. (대학 학위를 핑계로)

 

이 상황이 매우 재밌는 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경향이 있어서다. 우리 가족만 봐도 어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헌데 아버지는 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책을 보면 책을 빼앗곤 했다. 책을 읽으면 못 읽게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기억이 있으니 소설 속 여왕의 독서를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여기서 한 가지,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 하나를 부가할까 한다. 책 타이틀이 본 작품을 일반적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Uncommon reader>이다. ‘common’에는 영국에서 왕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uncommon’은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론 ‘common reader’의 의미 중 하나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니, ‘Uncommon’은 그 반대의 뜻으로도 볼 수 있겠다. 책에서 여왕은 처음에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 책을 찾았다. 그러다가 책을 점점 많이 읽게 되면서 여왕은 자신의 독서 철학을 나타내게 된다. 즐거움이 아닌 궁금증을 해소하고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책은 행동을 촉발하지 않습니다. 책은 대개 자신이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바를,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기로 마음먹는 바를 확신시키기만 하죠.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려고 책을 찾습니다. 말하자면 책은 책으로 끝나는 겁니다.“ (p131)

 

어쨌거나 책의 타이틀은 매우 중의적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는 본 소설에서 여왕을 말하는 것으로,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특별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이되 비인간적 특권을 가진 인물로 본문에 표현된다.

앤서니 파월은 작가라고 해서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을 특권이 부여된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여왕에게는 그러한 특권이 주어진다. 나는 항상 인간처럼 보여야 하지만,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pp85-86)

 

이런 비인간적 특권을 행사하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독서 덕후인 노먼을 만나 일반적인 책 읽기의 세계로 들어가 일반적인 독서 행태를 보이는 과정이 이 책의 줄거리다. 책을 읽으면서 특권화된 여왕이 점점 그런 의식이 엷어지며 자신이 이전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부분을 인식하며 시나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뭔가 주장하지 않아도 독자에게 독서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게 하는 게 소설에서 말하는 Showing의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울러 나는 여왕의 독서에 대한 입장(p131 인용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책은 행동을 촉발한다.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책을 찾아 읽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책은 책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삶이 변하기 위해서다. 책이 책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허망한 것이다. 삶과 유리된 독서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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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0-30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 효과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우선 재밌으니까 또는 끌리니까 또는 궁금해서, 가 읽는 이유일 듯해요.
저의 경우 제가 글쓰기에 뜻을 두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책에 대한 큰 흥미가 없을 것 같아요. 마치 가수가 다른 가수의 노래를 공부 삼아 들어보듯이, 저는 다른 이들의 글을 공부 삼아 읽는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공부만이 독서의 목적은 아니에요. 확실히 독서를 하면 재미를 발견하거든요.^^

yamoo 2025-10-30 14:38   좋아요 0 | URL
어느 경우에나 책을 읽는 유입 경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책을 접하고 읽어나가면서 사람은 바뀌게 되죠. 재미를 찾아서 책을 읽지만...결국에는 페크님처럼 글을 쓰는 경우도 있구요. 이전에는 하지 않던 일을 하게 되는 힘...그게 저는 독서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책에서 끝나면 안되고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이지라...^^

transient-guest 2025-10-31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재미, 활자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지의 훈련, 가끔은 뭔가 배우거나 얻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읽습니다. 물론 책을 잘 정리해놓고 흐뭇해하는 것도 좋아합니다만.ㅎㅎ 눈에 띄는 변화까지는 몰라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죠. 근데 물도 독사가 마시면 맹독이 되는 것처럼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해도 사람이 이상하면 어쩔 수가 없네요.ㅎㅎ

yamoo 2025-10-31 10:24   좋아요 1 | URL
트랜스 님은 재미, 배움을 위해 읽으시는군요!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은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근데 그렇게 재미와 배움을 위해 꾸준히 읽으면 확실히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거 같습니다. 결이 계속 달라지고 추구하는 바가 달라지는 듯해요.

책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한 사람 중 이상한 사람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합니다. 교수들 보면 이상한 사람들 많더라구요..^^;;

cyrus 2025-11-02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이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제목 <보통의 독자>를 노리고 만든 걸까요? ㅎㅎㅎ

yamoo 2025-11-03 13:09   좋아요 0 | URL
<보통의 독자>라는 책이 있나봐요?!! 전 금시초문...아마도 울프의 그 책이 있었다면 그걸 노리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입니다.ㅎㅎ
아마도 그렇겠지요...아마도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