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목을 적고 나니 떠오른다.
<죄와 벌>을 읽던 중2의 오후가...
그 토할 것만 같던 지겨움이...
아니, 대체 왜 그때 <죄와 벌>을 집어 들었는지 모를 일인데,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것 같다.
아니, 대체 왜 한 사람의 말이 두세 쪽에 걸쳐 주절주절 이어지는 것인지 열불을 토하며, 그래도 꾸역꾸역 완독했던 ... 나름 추억이구만.
최소 10년 이상 지나 다시 읽은 <죄와 벌>은 기억보다 꽤나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책에도 다 때가 있는 법.
아무튼 오늘 쓰려는 건 도스토옙스키의 그 죄와 벌은 아닙니다.
죄는 무엇인가...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악이 있고, 인간들이 정한 사회적 규칙인 법률에 따라 규정된 죄도 있다. 어느 정도는 나라마다 엇비슷한 형벌 규정들이 있겠지만, 각국에서 정한 법에 따라, 이 나라에서는 죄가 되는 것이 저 나라에서는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임신중지가 그렇다.
벌은 무엇인가... 역시 종교에서 말하는 천벌이나 사후세계의 지옥이 있고, 인간들의 법률에 따라 집행되는 처벌도 있다. 이 또한 당연히 나라마다 다르고, 그 차이는 형종에도 있겠고- 대표적으로 싱가포르의 태형-, 형량에도 당연히 있다.
그렇다면 어떤 죄에 대하여 어떤 벌이 합당한가에 정답은 없는 것이다.
사적인 제재는 감정에 휩쓸리기 쉽다. 피해자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가해자가 받는 처벌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렇기에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여 '받은 피해 수준에서만 벌하라'는 제약을 두었다.
지금에 와서는 함무라비 법전이 법률에서 정한 처벌을 넘어서서 사적인 제재를 부르짖는, 혹은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맥락에서 인용된다는 점이, 얼마나 우리가 죄와 벌에 대해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죽여 마땅한' 인간은 분명히 있다, 극히 소수일 뿐.
스릴러 소설, 범죄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그 지점은 상당한 고민거리일 것이다.
악당을 인간적으로 그려야 할까 완전한 악으로 그려야 할까?
악당에 대한 단죄는 적당한 선에서 해야 할까 아주 속이 시원할 만큼 끔찍해야 할까?
악당이 저지르는 죄와 악당이 받는 처벌의 묘사는 어느 정도로 상세히 이루어져야 할까?
여러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작가는 선택해야 한다. 독자에게 악당에 대한 연민의 가능성을 줄지 말지.
그 선택에 따라 악당의 삶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어느 정도 들어갈지 결정될 테고, 소설의 전반적인 느낌 또한 매우 달라질 것이다.
잭 리처의 <처단>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리 차일드는 악당은 그냥 악당이라고 말한다. 잭 리처가 목격하고 경험하는 그들의 행위가 중요하지, 그들이 어쩌다가 범죄에 빠져들었는지 파고들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에서 도려내야 할 싹이다.
악당을 악당답게 만드는 설정으로, 잭 리처의 악당들은 보통 '조직적 범죄'를 저지르고, 그 조직적 범죄 자체가 마약이나 군수품 거래 등 반드시 막아야 하는 종류의 것일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에서(또는 그 범죄 자체가) 여성이나 아이에 대한 폭력을 행사한다.
<처단>에서도 리 차일드는, 잭 리처가 타겟으로 삼은 악당 두목 외에 문지기 역할을 하던 부하(이름 기억 안 남)가 저지르는 악행을 보여주면서, 단지 악당 두목의 꼬붕 역할을 하는 남자의 아내를 강제추행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범죄까지 살짝 끼워 넣는다. 그럼으로써 이 놈은 '죽여 마땅한 놈'이 된다.
잭 리처의 행위에 '처단'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이유는, 놈들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하여 똑같은 끔찍함으로 보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가 선사하는 죽음은 짧고 확실하며, 불필요하게 고문하거나 잔인한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범죄 조직 말단에 있는 조무래기들에겐 관심이 없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중심부를 파괴하여 다시는 조직적인 범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체한다. 그래서 잭 리처의 행위는 사적인 복수를 넘어서는 정당성을 띄게 되고, 읽는 독자로서도 찜찜함이 없다.
프리다 맥파든의 <하우스메이드> 시리즈는 결이 다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악당을 처벌하는 역할을 잭 리처처럼 거구의 전직 헌병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음, 외모는 별로 안 평범. 예쁘다 - 20대 여성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우연에서 시작해서 정당방위로, 이어 다른 이들에 대한 도움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사실 잭 리처의 것과 다르게 한계가 명확하다. 그녀는 직업을 구하기조차 힘든 가난한 여자일 뿐이므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하거나 다른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되기도 하는데, 설정 자체가 대단히 아슬아슬하다.
평범한, 아니 뛰어난 미모의 20대-혹은 30대 가난한 여성이자 도무지 힘든 상황에 처한 여성을 두고 보지 못하는 희대의 오지라퍼 밀리의 인생은 사건사고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잭 리처처럼 치밀하지 못하고 무모해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잭 리처와 공통점이 있으니, 그렇게 악당을 처리하고 다녀도 딱히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잭 리처는 안 받은 거겠지만, 밀리는 못 받은 것일까. 어째서 그녀는 계속 가난한가...
아무튼 밀리의 처벌 방식은 잭 리처에 비해 더 함무라비에 가까운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잭 리처는 기회만 잡으면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고, 살인을 해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수습이 가능하지만, 밀리는 둘 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녀의 처단 방식은 보다 교묘해져야 한다.
하우스메이드의 악당들은 각자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그렇다고 딱히 감정이입이 되는 인간상은 아니긴 한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작가가 꽤 고민했을 듯하다. 어디까지 이 자들의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독자들이 연민을 느끼게 해도 되나? 완벽한 괴물과 평범하게 나쁜 인간 사이에서의 줄타기.
솔직히 나는 시리즈 1권 마지막에서 악당을 조금 동정하게 되었다. 이유를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생략하겠지만. 2권의 악당도 조금은. 이 악당들을 만들어 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잭 리처가 악당 조직을 뿌리 뽑듯 밀리가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결국 우리가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며 처벌받는 악당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현실에서 악은 많은 경우 가려져 있고, 잘도 도피하면서, 잡히더라도 피해자가 입은 고통을 똑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리라. (최소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정의관념에 들어맞는 결말을, 소설을 통해서라도 보고 싶은 게 아닐까.
현실의 나는, 죄형법정주의가 옳다고 믿고, 사적 제재를 사이다라며 부추기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똑같은 고통의 무게란 없고, 범죄란 온전히 한 개인의 것이기보다는 사회적 책임도 있는 것이라 여겨서 사형제도에도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죽여 마땅한' 자들이 그 마땅한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를 때로 읽고 싶은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