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크레딧 - 성매매, 금융의 얼굴을 하다
김주희 지음 / 현실문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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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가 돌아가는 방식에 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이 이 책을 읽으니 이해되었다. 금융, 자본, 이것들이 정말 괴물같은 것이구나. 수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미래를 저당잡히고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모습이, 남일로 여겨지지 않아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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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1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부채는 자산이라고 배웠사온데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6-13 11:5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부채가 자산이라고 결코 생각할 수가 없는 인간 여기 있사옵니다 ㅋㅋ

- 2022-06-14 17:09   좋아요 1 | URL
회계원리 배울 때 1번이 부채는 자산이라고 했단 말이죠? ㅋㅋ
근데 이 담보의 담보의 담보가 여성의 몸일 줄이야ㅋㅋㅋㅋㅋ 에휴.. 거기서 다 나오는 것일 줄이야... 어휴...

독서괭 2022-06-14 17:39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 아니 근데 쟝쟝님 회계원리는 언제 배웠어요?

- 2022-06-14 17:39   좋아요 1 | URL
저 경영학 전공이고 현재 사장입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6-14 17:44   좋아요 1 | URL
경영학 전공이셨군요?! 어쩐지 주식 책 같은 것도 잘 읽으시더라.. 전 경영/경제 1도 몰라서 ㅠㅠ
공사장님(??), 새우깡 챙겨가며 운영하셔야 합니다 ㅎㅎ
 
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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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는데, 어? 나 이거 읽었다??
검색해보니 이 책을 산 게 2011년인데, 이때 같이 주문했던 책이 <천국의 열쇠>, <사랑이라니, 선영아>, <내 심장을 쏴라> 였고 이 책들은 확실히 다 읽었다.
그러니 곰스크도 그때 읽었나 보다.. 어쩌면 표제작만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정말 소설 편향이었군.
표제작만 읽고 일단 뭔가 쓰고 싶어져서 리뷰를 쓴다.

표제작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는데, 이거..
이 남자는 N이고, 이 여자는 S다. 틀림없어! 남자는 계속 저 멀리 곰스크를 바라보고 있고, 여자는 안락의자(새우깡)를 구한다. 
- 자꾸 새우깡 얘기를 하게 되는데 모르시는 분은 아래 링크 참고 

아내 역시 우리가 언젠가는 곰스크로 가게 될 것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곳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어떤 느낌이나 희망, 걱정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젊은 사람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처럼.  - 34쪽
​10년 전에 읽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 남자의 마음에 이입해서 안타까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자에게 이입해서 빡친다. 곰스크는 내 꿈이 아니야, 네 꿈이잖아! 왜 자꾸 "우리"라고 하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 마침내 다가온 거야!"(39쪽)라니, 아내는 결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은 것 같건만. 심지어 곰스크로 갈 생각에 골몰해 아내가 배가 불러오는 것도 모른다. 아니 언제든 떠날 생각이었으면 그것도 조심했어야지. 이 화상아.. 
"(...)나에게 안락의자 따윈 필요없어! 당신한테 여러번 얘기했잖아! 나는 곰스크로 갈 거라고, 이 빌어먹을 촌구석을 떠나서 곰스크로 갈 거라고 말이야." - 37쪽
"그러면 당신은 여기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당신에게는 내가 있었잖아요! 당신은 오직 곰스크만을, 우리가 함께 살아온 이곳에서 등을 돌리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지 않았나요?"  - 40, 41쪽 
곰스크가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면서, 그는 지금 여기는 '빌어먹을 촌구석'이고 곰스크는 멋진 곳일 거라고 여긴다. 지금 이곳을 언제든 떠나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그와 달리, 그녀는 완전히 이곳에 정을 붙이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라는 결정타가 이들을 이곳에 정착시킨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곰스크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한구석에는 떠나고 싶은 열망이 있고 그 열망이 그를 고독하게 한다. 
이게 참 전형적인 남성 서사 느낌이긴 한데(게다가 번역은 왜 남편은 반말하고 아내는 존대하는지?), 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고민이다.
'곰스크'로 표상되는 어떤 이상, 꿈, 그런 것들을 남편만 가지고 있고 아내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아내는 자기만의 곰스크를 이곳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곳, 현실의 가까운 곳에서 행복과 의미를 찾는 것- 나는 아내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현재에 대한 불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무조건, 지금 이곳, 현실의 가까운 곳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 남편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 얘기를 듣고 꿈꾸어 온 이상을 찾아 떠나는 것은 좋다. 
근데 그럴 거면 똑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만나든지 일단 곰스크에 가서 배우자를 찾든지 했어야 할 것 아니야? 
마치 아내와 아이가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시골에 주저앉게 만든 것처럼 여기며, 기적소리가 들릴 때마다 다락방으로 올라간다는 이 남편의 모습은 내게 하등 가여워 보이지 않는다. 

애들 키우는 아내 입장에 이입하여 화난 리뷰를 쓰긴 했지만 ㅋㅋ 이 소설이 좋지 않은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이상을 꿈꾸며 현실에 머무르는 인간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우화처럼 잘 보여준다. 지금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이것은 결국 내가 선택한 운명이라는, 선생의 입을 통해 지혜를 들려줘도 여전히 곰스크를 놓지 못하는 미련까지 말이다. 
나머지 단편들은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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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1 0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여기서도 새우깡 논쟁을 하고 있어요 ㅋㅋㅋ 왜 ㅋㅋㅋ 사실 f 냐 t냐가 논란의 중심인데 ㅋㅋㅋㅋㅋ 새우깡이냐 이상이냐도 ㅋㅋㅋㅋ 인간 실존의 진한 논쟁이 될 것 같아여 ㅋㅋㅋ 저는 n ㅋㅋㅋㅋ 내 친구들은 sㅋㅋㅋㅋㅋ 다행임 ㅋㅋㅋ

그런데 저번부터 남편 ㅋㅋ 진짜 아오 ㅋㅋㅋ 딱밤 좀 ㅋㅋㅋ

독서괭 2022-06-13 12:03   좋아요 1 | URL
아 f냐 t냐가 논란의 중심이예요? t는 머리로 이해가 되어야 공감을 하는 유형이라던데 ㅎㅎ 저는 f입니다. 쟝쟝님 t죠? ㅋㅋ 전 저 갈매기 새우깡 만화에 꽂혀서 S랑 N이 재밌더라구요 ㅋㅋ N끼리만 모여 있으면 밥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것 같아요 ㅋㅋ S 친구들 잘 두셨습니다!

- 2022-06-14 17:14   좋아요 1 | URL
네 ㅋㅋㅋ T가 공감을 잘 못한다고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하시는 데 말이죠? 제가 말입니다.. 공감을 원한다고 먼저 말해주시면 공감능력 동기화가 되는 그런 훌륭한 티입니다. 근데 버튼 안눌러주시면 계속 팩폭 들어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저의 S 친구들은 제가 흥분해서 푸코나 아렌트 따위를 떠들고 있으면, 그 와중에 고기 구워서 입에 넣어주고, 누룽지 시켜주고 그러더라고요.... 제 이야기를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S는 멀티가 되는 종족이 아닌가.... (멀티 안되는 사람 ㅋㅋㅋ)

다락방 2022-06-14 17:27   좋아요 2 | URL
새우깡이 중요하다니까!!

- 2022-06-14 17: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먹어 ㅋㅋㅋ먹고 말해 ㅋㅋㅋ 먹어 ㅋㅋ 쟝님 좀 먹어요 ㅋㅋㅋㅋ ㅋㅋㅋ 아 ㅋㅋㅋ 귀에 쟁쟁해 ㅋㅋㅋㅋ ㅠㅡㅠ

다락방 2022-06-14 17:33   좋아요 1 | URL
쟝님은 새우깡보다 저 너머를 궁금해하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2-06-14 17:36   좋아요 1 | URL
저는 떨어진 새우깡 앞에서 쉬운 선택을 하는 갈매기 존재의 생겨먹음이 궁금합니다. 예속과 억압을 끊어내고 자신의 몫의 새우를 스스로 사냥하는 갈매기의 자립적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그 구조를 가늠하는 언어…(그만해…) 잠이나 자야겟다 쿨쿨

독서괭 2022-06-14 17:3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쟝쟝님 철학하다 먹는 거 까먹어서 굶을 판.. 옆에서 입에 고기 넣어주는 다락방님과 계속 친하게 지내세요, 꼭 ㅋㅋ

독서괭 2022-06-14 17:42   좋아요 1 | URL
쟝쟝님, 제 N인 친구 하나도 새우깡 만화 보고 새우깡 갈매기는 그냥 개그인 줄 알았대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ㅋㅋㅋㅋ <갈매기의 꿈> 얘기를 하는데, 그 책 저도 10대 때 좋아했거든요? 조나단이 N이라는데,, 맞아, 그렇지, 근데 나 조나단 좋아해 - 지금 깨달았어요. N은 아니지만 N을 좋아할 수는 있다는 것을 ㅋㅋ

- 2022-06-14 17:45   좋아요 0 | URL
저는 주변에 s없었으면 맨발의 소크라테스가 되어서 (참)이슬먹고 살다가 굶어죽었을 거예요. 제게 청약통장도 존엄사 적금도 (그거 아냐;;;;) 현생의 쾌락도 알려주는 모든 s들에게… 이자리를 빌어 감사를….

다락방 2022-06-14 17:47   좋아요 0 | URL
나르치스…

청아 2022-06-11 09: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재독하면 기존에 못보던 다른것들이 보일때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의 목표는 소장가치있는 100권만 남겨서 재독하기인데 지금 읽는 속도와 사모으는 빛의속도를 봤을때 기약이 없네요ㅋㅋㅋㅋ
갈매기 만화 다시봐도 재밌어요ㅋ

독서괭 2022-06-13 12:04   좋아요 2 | URL
미미님, 소장가치 있는 100권만 남겨서 재독하기- 멋진 목표인걸요?? 하지만 실현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소장가치있는 책이라는 게 또 계속 나오지 않겠어요? ㅠㅠ 그냥 원없이 많이 보자구요 ㅎㅎ
갈매기 만화 저 너무 꽂혀서 계속 새우깡 얘기를..;;

새파랑 2022-06-11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확실히 N이 맞는거 같아요 ㅋ 새우깡 이야기 다시봐도 재미있네요 ^^ 그런데 책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N일거 같아요 ㅋ

역시 소설 읽을때는 감정이입이 중요한거 같아요 ^^

독서괭 2022-06-13 12:05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새우깡 글에 댓글 보시면 은근히 S도 많습니다 ㅋㅋ 저는 애 낳아 키우면서 점점더 S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나(보코프)교수님은 감정이입 하지 말라셨다던데, 전 역시 감정이입을 하게 되더라구요. 이번에 아내에게 너무 감정이입이 빡 되어 버렸습니다 ㅋㅋ

다락방 2022-06-14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단편집 너무 좋아하는데요, 니가 곰스크에 가고 싶어하지만 지금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너의 선택이다, 너가 선택해서 지금 이 삶을 살고 있는거다, 라고 동네 선생님이 말해주는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합니다. 아무렴요.

독서괭 2022-06-14 15:39   좋아요 0 | URL
제가 다락방님 책에서 이책 쓰신 부분 찾아봐야지 생각했다가 잊고 있었는데, 이 댓글 보고 방금 찾아봤습니다(준비된 독자)! 목차 보고 짚었는데 한번에 맞췄어요 ㅋ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저도 이 책이 주려는 메시지는 좋아요, 좋은데,, 자꾸 읽으며 아내에게 이입을 해버려서 ㅋㅋㅋ 아기 안고 남자 발목 잡아 주저앉히는 고런 느낌 ㅠㅠ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메타포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미 이입이 돼서 어쩔 수가 없네요 흑흑. 다락방님이 좋다 하셨던 마지막 단편 ‘럼주차‘만 남겨놓은 상태인데, 요거 잘 읽어보겠습니다^^

다락방 2022-06-14 15:54   좋아요 2 | URL
저도 읽은지 벌써 십년이 된 단편이라 지금 읽으면 완전히 다른 감상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ㅎㅎ
저는 <럼주차> 되게 좋아했어요. ㅎㅎ

독서괭 2022-06-14 17:37   좋아요 0 | URL
다시 읽으시면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해요^^
 

얼마전 알코올 기운을 두르고 늦은 밤길을 걸어오는데, 나의 해방일지ost를 들어서 그런지 센치한 기분에 젖어

메모를 했더랬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에 열어보니 없는 게 아닌가. 저장을 누르지 않고 닫았나 보다. 

별로 취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은 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아주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 아주 중요한 회의를 하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친 후 

나의 해방일지ost를 들으며 돌아오는 길, 

문득 나 자신이 너무 하찮게 느껴지고, 

모든 것은 결국 시간 속에 사라질 일, 

이렇게 열심히 계획하고 이렇게 열심히 다투고 이렇게 열심히 도모하며 

그런데도 누구도 자신있게 행복하지 못하고... 


새우깡 찾는 S답지 않지만 가끔은 S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는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며 집에 들어와 자고 있는 아이들 얼굴을 보니 

아침의 둘째 모습이 떠올랐다. 


아침,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내 곁에 온 둘째가 수줍게 말한다.
"어린이집에 가면, 다른 애들은 잘 노는데," 
응, 그런데? 하니 베란다 문 뒤에 가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이런다.
"나는 엄마 생각만 해."
크흡- (마음 속 비명) 
"엄마 회사 가서 내 생각 많이 해~"
하고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갈 듯 하더니, 준비하다가 결국 눈물이 터진다.
예전에 울 때 손수건을 주면서 비비면 아프니까 톡톡 두드려 닦으라고 했더니, 그 이후로는 눈물이 나면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서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흑흑 운다. 무슨 비운의 주인공인냥.. 그 모습이 또 너무 귀여워서 웃고 만다. 
저녁에 집에 오니 "엄마 하늘만큼 땅만큼 보고 싶었어요." 해서
"엄마도 하늘만큼 땅만큼 보고 싶었어." 했더니
"아니 나는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보고 싶었어요!"
크흡- (마음 속 비명2) 

너 나 추앙하니? 


물론 아이들과 이런 다정한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내 목청을 시험당할 때가 있다.. 

하지만 역시, 이게 다 무슨 의미일꼬..? 하는 순간에 나를 일으켜주는 건 사랑-

아이들이 양육자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원시적으로 순수한 것이어서 때로 무겁다. 

온 몸의 무게를 실어 내게 안겨들 때처럼 마음도 그렇게 온 존재를 실어서 준다. 

부모의 사랑은 가이 없다며 늘 칭송하지만, 과연 아이가 주는 사랑보다 양육자가 주는 사랑이 더 클까? 

양육자의 사랑도 처음에는 대체로 순수하다. 하지만 아이에게 점점 자기 의사가 생기면서 그 사랑에 조건이 붙어간다.

아이 역시 자랄수록 양육자에 대한 사랑의 순수함을 잃어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쁜 아기를 많이 사랑해주기 위해 아기를 낳아 키운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아기를 낳는 게 아닐까? 

조건이 덕지덕지 붙어가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 사랑받는 기분을 누려야겠다. 



대상항상성이 생긴 뒤에는 엄마의 이미지가 내면에 새겨져 잠시 혼자 있더라도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위안의 내재화soothing introject’라고 하며, 성인의 정서조절 능력의 밑바탕이 된다. 92/388(전자책 기준)
대상항상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애착대상이 관계 속에서 보여준 수많은 위로와 지지, 포옹과 애무의 느낌, 따뜻한 미소와 눈 맞춤, 같이 놀았던 경험 등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기억의 퇴적물이다. 눈앞의 현실과 손에 잡히는 감각만 존재하던 유아의 삶에 이제 기억이 자리잡고 과거라는 시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는 대상항상성을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고 있으며,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다. 93/388

문요한 작가의 <관계를 읽는 시간>은 밑줄을 엄청 그으며 읽은지 한참 됐는데, 갑자기 생각나 메모를 열어보니 참 육아에 와닿는 글들이 많다. 내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애착은 손상시키지 않는 것보다 회복이 중요하다고. 오히려 좌절은 꼭 필요한 요소라고. 

애착형성이 중요하다는 말이 많은 양육자들, 특히 엄마들을 옭아매고 죄책감을 주는데, 우리는 절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 


‘안정적 애착이란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양육자가 제아무리 애착손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해도 아이에게 애착욕구를 좌절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초보 엄마일수록 더욱 그렇다.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애착손상을 주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착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애착은 한번 깨지면 붙일 수 없는 유리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오히려 더욱더 단단해지는 인간의 몸과 같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 인간에 가까운 휴머노이드가 개발되더라도 인간의 굳은살을 흉내 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재의 회복력이 좋으면 원형 복구까지는 되겠지만, 인간의 손발처럼 다치고 찢어지는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질 수는 없을 테니까.
애착은 그런 것이다. 한 번도 손상되지 않았기에 애착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깨지면서도 이를 다시 복구하고 연결시키기 때문에 단단해지는 것이다.  104-105/388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는 ‘적절한 애착손상’이 필요하다.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애착손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애착손상이 심각한 것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절한 애착욕구의 좌절’은 세상을 헤쳐나갈 독립심을 주고,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 상호적인 관계를 맺어갈 기초가 되고, 대상의 좋은 면과 안 좋은 면을 바라보고 통합할 수 있는 시야를 준다. 좌절은 발달의 중요한 요소다. 107/388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는 것보다 관계의 상처를 잘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108/388
부모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들의 헌신으로 지금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가? 아니면 나중에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주체로서 성장하고 있는가? 만일 아니라는 대답이 떠오른다면 즉시 자녀와 자신의 바운더리를 살펴보고 조절해야 한다. 부모의 생각과 달리 아이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부모에게 달려 있지 않다. 질병이 치유되는 본질적인 힘은 약물이나 의술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치유력인 것과 같다. 의술이나 약물은 그 힘을 도울 뿐이다. 부모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아이를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일 따름이다.  17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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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6-10 16: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아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엄마를 추앙하죠!!*^^* 괭님도 나의 해방일지ost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요즘 계속 즐겨들어요. ‘일종의 고백‘은 여성보컬 버젼도 좋아요 헨(Hen)이 부른거요

독서괭 2022-06-10 16:51   좋아요 3 | URL
미미님, 전 ost 들을 생각은 못하다가 누가 좋다고 해서 들어봤는데, 좋더라구요. 선선한 밤공기에 참 좋았어요. 찔끔찔끔 보는 중이라 아직도 끝을 못 봤지만요 ㅎㅎ 매 회 명대사가 나오네요. 일종의 고백 여성보컬 버젼도 들어볼게요^^

페넬로페 2022-06-10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왕
독서괭님의 귀여운 둘째의 추앙!
넘 귀엽고 애틋하고 따뜻해요
제 마음이 뭉클해질 만큼요~~
대학생인 된 딸아이와 저는 요즘 대놓고
우리는 주고 받는 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엔 추앙의 맘이 깔려 있어요 ㅎㅎ
저에게 다시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갈 기회를 준다면 저는 딸아이 어렸을 때 였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좋지만 그래도 그때도 좋았어요^^

독서괭 2022-06-10 17:43   좋아요 4 | URL
로페님, 둘째가 한창 떼부리고 난장 피우다가 그 시기가 지나니 너무 사랑스럽습니다..ㅎㅎ
대학생이 된 따님과 추앙의 맘이 깔려 있다고 하시는 말씀도 뭉클하네요^^
저도 애들이 커가며 제게서 떨어져나가는 건 당연한 과정이지만, 그 안에 그런 맘이 깔려 있으면 좋겠어요.
애들 좀 빨리 커서 혼자/혹은 부부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때 되면 지금이 그립겠다 싶습니다.
지금 예쁜 시절을 잘 누려야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6-10 17: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부모님께 원시적인 순수함을 보였을 때가 있었겠죠^^; 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오래되서인지 떠오르지가 않네요-_-; 둘째의 그런 표현에 엄마로서 많은 감정이 드셨을 것 같아요~^^

독서괭 2022-06-10 17:46   좋아요 4 | URL
화가님, 주양육자에 대한 애착은 생존의 문제라 원시적이고 더 강렬한 것 같아요~ 위험한 상황에서 주양육자에게 다가가려는 게 본능이기 때문에 바로 그 주양육자가 나를 학대하더라도, 오히려 더 주양육자에게 의존한대요ㅠ 그 말 들으니 넘 슬펐어요. 가끔 이 사랑이 권력으로 느껴지거든요.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려고 애쓰려고요. ^^

잠자냥 2022-06-10 17: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둘째 말에 왜 제가 눈물 나죠? 주책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6-10 17:48   좋아요 4 | URL
오 자냥님, 감동 받으셨다~~^^

레삭매냐 2022-06-10 17: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기운을 두르고...

왜 이리 정겨운지요.

저도 낼 알코올 기운
두르러 간만에 출격합니다.

독서괭 2022-06-10 23:01   좋아요 1 | URL
취하는 정도보다 알코올 기운을 두른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습니다^^
매냐님 내일 한잔 하러 가시는군요.
알코올 기운 따스히 두르며 즐건 시간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06-10 18: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왕 둘째 넘나 사랑스럽네요
아이가 엄마를 추앙해 줄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ㅎㅎ 크면서는 엄마가 지들을 추앙해줘서 다 컸잖아요. 진심 연애하면 추앙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때가 좋았는데 말이죵 ㅎㅎ

독서괭 2022-06-10 23:03   좋아요 4 | URL
프레이야님, 둘째가.. 애교가.. 아휴.. 말도 못합니다 ㅋㅋ
엄마랑 아빠가 세상 최고고 모르는 게 없고 뭐 그렇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ㅎㅎ 이 시기를 누려야겠어요.
짝사랑하고, 연애 초기에는 추앙하는 것 같아요 ㅋㅋ 콩깍지..ㅋㅋ

새파랑 2022-06-10 1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은 너무 사랑받으셔서 안센치하셔도 될거 같지만 쓰신 메모는 너무 좋네요 ^^ 사랑받는 엄마 너무 멋지십니다~!!

독서괭 2022-06-10 23:0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술과 밤과 음악이 섞이니 아무리 저라도 센치함이 몰려오더라구요! 인생 허무함은 애들 사랑으로 물리쳤습니다^^

햇살과함께 2022-06-10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둘째 넘 귀엽^^ 저희집 둘째도 어릴 때 저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나? 생각한 적 많아요 ㅋㅋ 첫째는 저 닮아서 무뚝뚝한데 말이죠~

독서괭 2022-06-13 11:59   좋아요 2 | URL
햇살님도 둘째에게 많이 사랑받으셨군요! 둘째들이 대체로 첫째에 비해 애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내가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나 싶을 때가 많아요^^

- 2022-06-11 09: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인간이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때는 바로 그때 주양육자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ㅋ (저는 기억나요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ㅋㅋ) 모든 성인 인간은 그런 담대한 사랑을 이미 해본 것이죠 ㅋㅋ 그리고 독립하여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데… 고것이.. (눈물이 맺혀있다)

독서괭 2022-06-13 11:59   좋아요 2 | URL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 나시는군요! 저는 그때의 마음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ㅎ 울 엄마는 애교를 부려도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었... ㅠ ‘독립하여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데..‘ ㅋㅋㅋ 아니 왜요, 쟝쟝님 넘 잘하고 있는데!

mini74 2022-06-11 2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쁘고 설레요. 울 애도 그럴때가 있었지하며 아련한 ㅎㅎㅎ지금을 즐기십시오 ㅎㅎㅎ

독서괭 2022-06-13 12:00   좋아요 2 | URL
ㅎㅎㅎ 미니님, 그 시절 그리우실 때가 있죠? 지금을 즐기려 노력하겠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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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전환이 아무 예고 없이 이루어져서 처음에 좀 혼란스럽지만, 곧 적응되고 점점 흥미로워진다. 아드리아의 사랑없는 유년기도 비알에 얽힌 역사도 다 무거운데, 역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싶은 생각들과 툭툭 던져지는 유머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음 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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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04 23: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ㅎㅎ 독서괭님 별도 다섯개 *^^*

독서괭 2022-06-05 22:28   좋아요 2 | URL
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라구요~^^

새파랑 2022-06-05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구매해 놓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겠어요~!!

독서괭 2022-06-05 22:28   좋아요 2 | URL
ㅎㅎ 어서 찾아 읽어보세요! 이번 여름휴가 때 읽으셔도 좋을 듯요^^

scott 2022-06-06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편의 고비를 넘으시면
괭님 유월은 나는,나는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여기, 알라딘 서재방에서

┻┳|
┳┻|__∧
┻┳|•﹃ •)
┳┻|⊂ノ
┻┳|J

독서괭 2022-06-07 12:02   좋아요 2 | URL
으앗, 뭔가 고백해야 하는 건가요? ㅎㅎㅎ
담벼락 고양이 넘나 귀엽습니다♥

단발머리 2022-06-07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면 전환 때마다 저도 무릎을 치고는 했어요. 절묘하기 그지 없습니다!! ㅎㅎㅎㅎ

독서괭 2022-06-10 10:35   좋아요 0 | URL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헷갈리기도 하더라구요. 2권 초반부는 많이 헷갈리던데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겠습니다 ㅎㅎ
 
[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친코>의 중심은 선자다. 

선자는 파친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역사를 겪어내며 살아나간 인물. 작가는 선자를 큰 줄기로 해서 여러 인물들의 삶을 가지로 뻗어 보여준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은 100여년을 관통해가는 이 소설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 듯하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는 자각, "그래도 상관없다"는 의지. 


역사는 어떻게 선자와 그 주변 인물들을 망쳐놓았는가. 

선자의 부모 훈이와 양진의 이야기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역사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간다. 혹은 태생적인 운명에 의해, 혹은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선택에 의해. 

부산 근처 영도라는 작은 섬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는 선자는 어느날 장에 다녀오던 길에 일본인 남자애들에게 추행을 당한다. 그때 고한수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고한수가 없었다면 그놈들에게 더 몹쓸 짓을 당하여 그들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 게다가 아버지의 장애 때문에 혼인에 어려움이 있는 선자는 솔직한 호감을 보이는 고한수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 선자는 일본에 아내와 딸들이 있어 결혼은 할 수 없지만 너와 아이를 잘 돌봐주겠다는 고한수의 제안을 거절한다. 고한수가 선자가 자신이 유부남인 걸 알아도 관계를 가질 거라고 믿었다면, 선자가 아이를 가질 때까지 그 사실을 숨겼을 리가 없다. 진짜 써글놈이다. 


선자의 하숙집에 머물고 있던 목사 백이삭이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되고, 결혼하여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청한다. 이때 백이삭을 따라간 것이 선자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일본에서 백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와 함께 지내면서, 선자는 무사히 노아를 낳는다. 몇 년 후, 백이삭과 사이에서 생긴 아들 모자수도 낳는다. 그러나 백이삭은 그의 교회에서 일하는 소년이 일본 신사에서 천황을 위한 뭔가를 외우지 않았음이 발각되는 바람에 투옥되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다. 


이 모습을 처음으로 본 노아, 희미한 기억 속에 그리워했던 아버지가 고문으로 엉망이 된 모습으로 돌아온 걸 본 노아는 어땠을까? 원래도 영리한 노아였지만, 아마 이때부터 그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어 멸시당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을 것 같다. 이 작은 노아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결국엔 선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마는 노아.. 그건 저 뒤의 일이지만.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선자와 경희는 김치장사를 시작하고, 그러던 중 큰 고깃집에서 전속으로 김치를 담가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전쟁이 터지고, 요셉이 크게 다치고, 고한수가 나타나고, 그의 도움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고, 노아는 일하며 열심히 공부해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고, 모자수는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파친코. 드디어 나오네? 당시 일본인들이 보통의 직장에서는 조선인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파친코 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와세다대학에 들어갔던 노아도 결국은 객지에서 파친코 직원이 되고,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콜롬비아대학에 가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결국에는 일본에 돌아와 파친코에.. 참으로 씁쓸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제약을 뛰어넘고자 그저 열심히 달렸지만, 일본과 조선의 역사가 이들을 좌절시켰다. 


한국에 가면 일본인이라고 욕을 먹고, 일본에서는 아무리 일본에서 나고 자랐어도 3년마다 등록증을 받아 목에 걸어야 하며 조선인에 대한 혐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이들. '디아스포라'라고 일컫는 그 정서는 인종혐오, 정치적박해, 빈곤 등 다양한 이유로 모국을 떠나 자리를 잡아야만 했던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린 모양이다. 


내게 가장 마음 아팠던 장면은 선자가 노아를 생각하며, 노아가 그렇게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면 상황이 바뀔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됐던 게 아닐까, 후회하던 거였다. 그 믿음이 무너지고,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거짓된 삶조차도 무너질 위험에 처하자 노아는 목숨을 끊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었겠는가. 아직 어린 아이에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아이에게,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는 여기가 한계라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노아가 밉고 불쌍하다. 노아가 조선인임을 속이고 일본인인 척 하며 결혼한 일본인 여성은 그 아버지(?)가 자살했기 때문에 안 좋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남편마저 자살해버린 후 그녀가 아이들과 꾸려나갔어야 했을 삶은 얼마나 팍팍했을지. 고한수와 관계했다는 이유로 엄마를 비난한 노아는, 결국 그 결과물인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자는 남편 백이삭의 무덤에 간다. 일본경찰의 고문에 죽어간 백이삭의 무덤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일본에서 자리를 잡아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잊지 말자는 작가의 외침일까.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는 것을 잊지 않은 채,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앞을 바라봐야 한다고.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선자와 서로 의지하고 살아온 가족 경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선자의 모습에는, 꿋꿋하게 세월을 견뎌내온 소나무 같은 기상이 있다.  


리뷰의 제목을 고민하다 문득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떠올랐다. 

부당한 상황에서 개인의 믿음으로 뚫고 지나가라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세상의 흐름에 휘둘리는 작은 인간에게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삶이 나를 속일 때 마음껏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겠다. 그러고 나면 지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최선 옮김, 민음사, 1997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의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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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6-03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는데 독서괭님 리뷰 읽으니 여러 장면들이 겹쳐져서 참 좋네요. 전 이번에 3년에 한 번씩 재일한국인이 일본정부에 등록하는 일(지금은 어쩐지 모르겠네요)에 대해 읽으면서, 그렇게 생김새가 비슷한데도 심지어 일본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그런데도 ‘구별‘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마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한편으로는 우리도 외국에서 온 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이 맘 속 깊이 있는건 아닌가, 아니 대놓고 무시하고 임금을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참 그렇더라구요. 집 떠나면 우리 모두 나그네인데 말입니다.

마지막 시도 참 좋네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독서괭 2022-06-03 12:56   좋아요 2 | URL
네 ‘구별‘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마음.. 우리도 똑같은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ㅠㅠ 차라리 외국인이라고 다 똑같이 차별하면 나은데, 외국도 외국 나름으로 차등을 두어 대우하니까요.. 말만 글로벌 시대지 마음이 열리는 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 둘째 연은 낯설던데, 단발님이 좋다 하신 그 다음 행,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가 맘에 와닿아요^^
단발님 댓글에 좋아요 누르려다가 잘못 해서 제 글에 좋아요를 눌렀더니 ˝자신의 글을 좋아요 할 수 없습니다˝라는 알림이 떠서 부끄러웠네요 ㅋㅋ

단발머리 2022-06-03 13:05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좋아요,는 저한테 맡기세요 ㅋㅋㅋㅋㅋ 독서괭님 댓글도 좋으니까요!!

거리의화가 2022-06-03 13: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노아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또 한번 가슴이 무너지고 마네요. 괭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푸쉬킨의 시와 파친코의 내용이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별과 억압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쳇바퀴처럼 돌아오고 만 여러 조선인들을 생각하게 만드네요~ㅜㅜ

독서괭 2022-06-03 22:35   좋아요 1 | URL
노아의 마지막에 읽다가 소리내서 헉! 했어요 ㅠㅠ 선자 얼마나 괴로웠을지..
결국 쳇바퀴처럼 돌아오고 말았다는 말씀이 딱 맞네요. 이 책이 그분들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을까요?

scott 2022-06-03 15: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이니치들은 여전히 일본 주류 사회 진입이 어렵습니다 요식업-유흥업-연예계로 진출하는 것 이외에는 좋은 학교를 나와도 일본에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해놨어요 현재도 일본 파친계는 자이니치들이 꽉 잡고 있다고 ,,,

독서괭 2022-06-03 22:3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지금도 그렇군요 ㅠㅠ 일본 상황도 잘 아시는 스콧님!👍 파친코를 잡고 부유해졌지만 끊임없이 차별을 받는 것이.. 갑자기 유대인이 떠오르네요. ㅠ

새파랑 2022-06-03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푸쉬킨과 연결되는 파친코네요~!! 전 개정판 나오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별 다섯이니 완전 기대되네요 ㅋ

독서괭 2022-06-03 22:37   좋아요 1 | URL
개정판 8월에 나온다니 얼마 안 남았네요! 8월엔 18권 읽으실 듯한데 그중 2권은 파친코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