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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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로 세상에 태어난다또 가족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고 마침내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살아가다보면 일이란 생기게 마련이고 각각의 가족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로서 그러한 경험을 함께 하며 더 단단해진다거기서 오는 안정감이야말로 가족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가족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말이다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서로 기대어또 종종 두 배로 기뻐하며 삶의 굴곡을 함께 헤쳐간다. 가족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혼인혈연입양 등으로 이루어지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우주를 삼킨 소년>을 읽으며 나는 전통적 의미의 가족의 개념을 사라지고, 원자화된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 가족을 형성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저자 약력을 보면 트렌드 돌턴은 수차례에 걸쳐 우수 기자상과 올해의 기자상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데뷔작인 본 작품 한 편으로 그해의 문학상과 올해의 책을 석권하며 전 세계 34개국을 사로잡았다. <우주를 삼킨 소년>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소설로,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가정환경 속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12살 소년 엘리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엘리의 엄마 '프랜시스'는 변호사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바람과는 달리 마약에 빠져 인생이 꼬였다. 새아빠 '라일'은 엄마가 마약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이었다. '오거스트'는 여섯 살 이후로 입을 닫아 버렸다. 또 두 소년을 보살피는 시터인 '아서 슬림' 할아버지는 살인자로서 또 전설의 탈옥수로서 악명이 높은 범죄자다. 이들이 12살 소년 엘리의 가족 구성원들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간략한 프로필만 보더라도 정상적인 가족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엘리는 이러한 가정 환경 속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에요?”

슬림 할아버지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건 왜 물어?”

내 눈에 눈물이 차올라 관자놀이로 흘러내린다.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나는 할아버지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병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푸른 하늘과 구름.

난 좋은 사람이야.”

슬림 할아버지가 말한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 누구나 다 그래, 꼬마야. 우리 안에 좋은 면도 나쁜 면도 조금씩 있거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지.” (p. 23)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한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동반자와 나누는 몇 마디 대화로 울적함이나 불안은 어느 순간 털어버릴 수 있고, 사랑스런 아이의 미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정적 감정을 떨쳐낼 수 있다집 안 어디엔가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니꼭 집 안에 있을 필요도 없고누군가 집으로 항상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안을 얻는다.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상적인 가족상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형태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듯이 이상적인 가족은 획일화된 답지가 아닌 개개인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른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 각각은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우리 각각이 이루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완전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의 삶은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더 나아진 삶"으로 이끈다.

 

 

그날 병원에서 네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에 대해 물었지 엘리. 나도 그 생각을 해봤다. 아주 많이. 그저 선택의 문제라고, 그때 말해줬어야 하는데. 네 과거도, 엄마도, 아빠도, 네 출신도 상관없어. 그저 선택일 뿐이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말이다. 그게 다야.” (p. 351)

 

 

<우주를 삼킨 소년>"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성장 소설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어 삶을 구속하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힘든 현실의 일렁임을 극복할 때 한층 더 성숙한 삶, 사랑이 충만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걸 우리는 엘리의 가족을 보며 깨닫는다. 굴곡진 삶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지켜봐 주고 지지해 줄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조언 아닐까세월의 일렁임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조각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왜 그랬어, ?” “뭐가?” “왜 말을 안 했느냐고.”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더 안전하니까. 그러면 아무도 안 다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 형은 달 웅덩이를 내려다보고 빙긋 웃는다. “네가 다칠까 봐 그래, 엘리. 우리가 다칠까 봐.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엘리, 내가 말하면 사람들이 겁먹을 거야.” “그게 뭔데?” “중요한 일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들, 내가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일들. 그다음엔 우리를 오해할 거야, 엘리. 그러다가 사람들이 나를 잡아갈 텐데 그럼 누가 널 돌봐줘.” (p.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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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2 -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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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가 돌아왔네요. 따스한 위로가 절실한 바로 이 시기에...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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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2 -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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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일생이란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개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그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순간 순간의 누적에 지나지 않는다. 한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한다....아니, 순간의 만남에 정성을 다해 대하려는 다도(茶道)의 마음이야 말로 인생 그 자체를 충실하게 하는 진실을 말해준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27<낙뢰> p. 139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난세에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태어나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입지전적인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을 읽을 때, 전국시대를 수놓았던 수많은 명장들과 영웅들 속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인생에 대해 읊조리듯 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에 관한 아포리즘이었다.

 


"인생은 순간의 누적이다.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진실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이 넋두리를 늘어놓듯 한 이 말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삶 앞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진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삶의 순간, 순간이 켜켜이 쌓여 종국에는 일생이라는 기적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인생은 순간의 누적이다."는 내 좌우명이 되었다.

 


"지금의 기분. 정말로 지금, 이때의 기분. 수첩을 펼쳐 지금의 기분을 적었습니다. 문득 여유가 생기면 이렇게 지금을 적습니다." - <오늘의 인생> p. 53 -

 


4년전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을 처음 접했을 때, 받았던 놀라움과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 지금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이지만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 그 소중함은 빛이 바래간다. 하지만, 마스다 미리는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논하며 인생이란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개인의 행복. 다른 사람은 모른다. 그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지는 그 사람만 안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의 행복을 가볍게 보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오늘의 인생." - <오늘의 인생> p. 197 -

 


지금은 한국에서도 하나의 장르이자 신드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고정팬들이 많은 마스다 미리이지만 내가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가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던 건 <오늘의 인생>이란 작품 때문이었다. 그 후로 내 방 서가의 한 켠에는 마스다 미리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 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연하게 펼쳐지는 것인 줄 알았던 평범한 일상이 정말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 코로나 사태가 일어났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 마스크가 필수가 되는 나날들을 보내면서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답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바로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2>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이다. 마스다 미리가 돌아왔다. 자신의 옆을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코로나가 앗아간 일상에 관한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순간의 단상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하고, 고향집에서 엄마와 둘이서 스키야끼를 먹으며 일상의 행복을 논하는 그 마스다 미리 말이다. 여전할 뿐만 아니라 한 층 더 감수성이 풍부해진 느낌이다.

 


"전철에서 아빠와 아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아빠 어깨에 바싹 머리를 얹고, 마음 푹 놓은 오늘을, 이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무언가는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 오늘의 인생." - <오늘의 인생2> P. 81 -

 




마스다 미리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마치 우리가 경험했던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시절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서 삶의 소중함과 일상의 즐거움을 상기시켜준다. 마스다 미리가 돌아왔다. 따스한 위로가 절실한 바로 이 시기에...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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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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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보일드'"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형용사이지만, 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셜록홈즈를 창조한 코넌 도일 류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의 거의 대부분을 창조한 작가라면 흔히 레이먼드 챈들러가 거론된다.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에서 탈피하여 피와 땀으로 점철된 어두운 뒷골목, 정의가 아닌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작가이다. 51세의 늦은 나이에 빅슬립 (Big Sleep)으로 데뷔한 챈들러는 평생 미완성작 한 편을 포함해 단 8편의 소설만 남겼다. 석유회사의 간부 (부사장까지 승진했다)로 일하다가 알콜중독으로 해고를 당한 챈들러는 직장에서의 은퇴 이후 생활고를 겪다가 아내의 격려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소설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영미권 하드 보일드 문학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라 료가 있다. 일본의 추리소설은 영미권과 함께 양대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하라 료는 데뷔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통해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 비견되며 이후 작가의 분신이 되는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창조해내었다. 이후 하라 료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물인 <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기수로 떠올랐다. 하라 료는 여러 면에서 챈들러와 유사하다.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가 40대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다는 점, 하드 보일드의 거장으로 불리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대표적인 과작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 소설도 04년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시즌 2를 알린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이후 무려 14년 만에 출간되었다. 오랜 팬으로서 작가 하라 료와 사와자키의 귀환이 너무나 반가웠다.

 


 

"니시신주쿠 변두리 쇠락한 거리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찾아오는 건 의뢰인만이 아니었다. 낡은 문을 노크만 하면, 기억을 잃은 사격 선수도, 성전환 수술을 받은 대필 작가도, 탐정을 지망하는 불량소년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1억 엔을 빼앗긴 폭력단 조직원도,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악덕 경찰도 나타났다." (p. 9)

 


 

여전히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를 지키고 있는 사와자키에게 어느 날 한 신사가 찾아와 사건의뢰를 한다. 그는 자신이 저축은행의 지점장임을 밝히며, 대출이 예정되어 있는 요정집 여주인의 뒷조사를 부탁한다. 하지만, 사와자키는 조사에 착수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주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리고자 의뢰인을 찾지만, 의뢰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에 사와자키는 그가 일한다는 저축은행을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폐점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은행에 갑자기 복면을 쓴 2인조 강도가 난입하며, 사와자키는 복잡한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 <지금부터의 내일>은 큰 두 개의 에피소드를 큰 축으로 복잡한 사건들이 뒤엉키며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그 하나는 앞서 소개한 탐정사무소를 찾아온 신사가 의뢰한 이미 죽은 여인의 뒷조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의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와자키가 겪게되는 은행강도 사건이다. 그 일련의 사건을 겪는 동안 사와자키의 오랜 팬들이라면 익숙한 형사와 야쿠자들이 등장도 참 반갑다. 하라 료의 '하드 보일드''사와자키'를 통해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사건에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와자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더라면, 그 아무리 빛나는 웰메이드 스토리가 있었다 한들 시리즈의 성공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와자키는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탐정이다. 물론 탐정이라는 직업과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의 특성상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탐정 일을 삼십 년 가까이 해왔지만, 의뢰인이 친구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일이 끝난 뒤 내 일처리에 만족하지 않은 의뢰인은 별로 없었으리라. 친구 삼고 싶은 의뢰인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뢰인이 친구가 된 적은 없었다. 탐정 일이란 그런 것이다.“ (P. 17)라는 사와자키의 말을 통해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뢰 받은 사건을 제외하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완전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하는 모순된 매력과 친근감을 가진 캐릭터다. 이는 사와자키가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점에서 냉혈한처럼 보이는 그가 실상은 온기를 가진 존재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험에 빈번히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p.423)

 


또한 그가 구시대적인 (Old Fashioned) 인물이라는 점도 사와자키에게 고유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휴대폰도 없이 전화 서비스를 이용해 메모를 받아 일을 진행하고, 여전히 낡은 블루버드를 타고 돌아 다닌다. (이번 작품에서는 좀 달라졌지만) 최첨단을 달리는 디지털 시대지만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추억과 향수를 불러온다. 시대와 기술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명반처럼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히어로가 등장하고 대중은 이제 다시 LP판을 찾는다. 누군가가 종이책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만, 이북은 아직 종이책 시장을 넘보지 못한다. 구시대적인 습관과 방식을 고수하지만, 탐정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이토록 깊은 감성을 가진 탐정이라니... 독자들은 이러한 사와자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탐정의 업무란 참으로 애잔한 것으로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나 이외에 누구도 모른다. 흥신소에 소속된 탐정이라면 개략적인 사항을 보고서로 작성할지 모르지만,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서는 어디를 찾아도 보고서 한 장 발견할 수 없다. 내가 관여한 조사의 의뢰인이나 관계자들은 나의 일을 기억할까? 기억한다 해도 대개 하루빨리 잊고 싶은 불쾌한 기억이리라. 불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런 탐정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P. 354)

 

 


<지금부터의 내일>'소설의 진정한 재미, 그것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썼다. 그 밖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작가 하라 료의 자신감 있는 표현에 걸 맞는 작품이다. 14년이라는 현실의 시간이 흐른 만큼 소설 속 시간도 흘러 이제 사와자키도 50대의 중년이 되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신주쿠의 어두운 뒷골목을 조용히 비춘다. 오랜 시간 고단한 현실을 겪으며 그를 기다려온 독자는 그의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사와자키도 우리처럼 낡은 사무실에서 고단한 현실을 이겨내며 탐정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알고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와자키처럼 독자들도 자신만의 아포리즘을 지키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과거와 미래 보다는 바로 지금’, 현재를 딛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는 사와자키를 바라보며, 독자들은 현실을 헤쳐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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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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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50대가 된 사와자키... 속절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는 여전히 신주쿠의 어두운 뒷골목을 조용히 비춘다. 그의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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