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빛과 실(한강. 문학과지성사. 2025. 172쪽)
: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작품. 시, 일기, 에세이 등이 주를 이루고,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도 포함되어 있다. 책의 구성이나 분량 때문에 여러 말이 나오는 거 같은데, 난 만족한다. 이보다 못한 글과 문장으로 이보다 훨씬 비싸게 받아먹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출판사가 급하게 책을 낸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예전부터 소설가 한강보다 시인 한강을 더 좋아했던 난 작가의 정원일기와 미발표 시들을 읽을 수 있어서, 그리고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인쇄물로 소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제목이 된 작가 어린 시절의 싯구도 사랑스러웠고.
2. 나의 폴라 일지(김금희. 한겨레출판. 2025. 320쪽)
: 저자의 남극 세종 기지 방문기. 한 달 동안 취재기자 자격으로 머물렀던 이야기인데, 남극 자체의 이야기도 물론 있었지만 인상깊었던 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작가는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겸양의 마음으로 기지의 사람들과 주변 환경 - 자연 뿐 아니라 - 을 관찰하고 연구를 돕는다. 단순히 생활의 이야기만도 아니었고 또 그렇다고 그들의 연구 활동 리포트인 것만도 아닌 두 시각이 조화롭게 서술되어 있어서 좋았다. 물론 작가가 묘사하는 남극의 풍광들과 동식물들의 모습도.
사실 난 남극 주변의 관광 상품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다. 인간들이 발을 딛는 곳마다 자연은 파괴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소한으로 움직이고 호기심은 최대한으로 죽이며 자연의 눈치를 좀 보고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이런 에세이들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 지구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들은 꼭 가야만 하는 사람들만 가고 그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3. 위싱 머신(소피 쿠슨스, 김나연 역. 모모. 2025. 524쪽)
: 방송 제작사에서 일하는 스물 여섯 루시.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업계에 취직했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는커녕 상사가 시키는 허드렛일이나 하며 물새는 방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술 마시고 의미 없는 만남 후에 집으로 향하던 중 구멍가게에서 이상한 할머니와 대화를 하게 되고, 위싱 머신이라는 기계에 소원을 빈다. 다음날 숙취로 눈을 뜬 루시는 잘 생긴 남자가 자신과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남편이며 자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16년을 건너뛴 루시.
난 대체 이걸 왜 읽었을까? 저자가 후기에 언급한 영화들에서 나온 설정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심지어 아들의 '외계인' 발언까지! 내용 전개도 다르지 않다. 디테일한 설정 한두개 뻬고는 뻔하게 흘러간다. 심지어 결말까지도. 그래도 조금은 다를 거라고 기대한 과거의 나를 말리고 싶다.
4. 하우스메이드(프리다 맥파든, 김은영 역. 북플라자. 2023. 388쪽)
: 전과가 있는 밀리. 일하던 바에서도 쫓겨나고 집세도 없어서 차에서 생활하고 있다. 윈체스터 가의 입주가정부 자리는 마지막 희망이다. 자신을 잘 꾸며 취직에 성공한 밀리. 창문이 열리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잠금장치도 바깥에 되어 있는 다락방에 머물 수 밖에 없지만 감지덕지다. 그런데 윈체스터 부인 니나가 좀 이상하다. 면점 때의 정상적이고 우아한 모습은 어디가고 수시로 말을 바꿀 뿐 아니라 집을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만큼 난장판으로 만들어 두기까지 한다. 동네에서 니나가 정신병이 있어서 딸을 죽이려 했던 일이 있다는 소문까지 들은 밀리. 그 와중에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정원사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내뱉는데...
익숙한 설정에도 반전은 예상 못하고 읽었다. 읽고 나니 아, 그래서 이런 장치를... 하고 이해했다. 작가가 영리하게 잘 썼다. 무엇보다 캐릭터의 묘사가 1부와 2부에서 확실히 달라서 재밌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1부보단 2부를 더 흥미진진하게, 집중해서 읽었다. 후속편이 나온 거 같던데, 궁금하다.
5. 오래된 신들이 섬에 내려오시니(황모과, 전혜진 외. 들녘. 2021. 352쪽)
: 제주 설화를 코스믹 호러의 소재로 한 앤솔러지. 전혜진의 <단지>가 가장 맘에 들었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환기시켜 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속을 시원하게 해줬다. 황모과는 슬펐다. 굳이 제주여야 할 이유는 없는 내용일지라도 저자가 늘 얘기해왔던 소외된 여성의 이야기이며 나아가 여성들의, 약자들의 연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섬인 제주 관련 앤솔러지에 실린 것이 의미있다 할 수 있다. 반면 사마란은 제주의 영등 할망을 소재로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싶게 기시감 드는 뻔한 이야기여서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처음 두어 쪽 읽고 설마 이런 얘긴 아니겠지 했던 딱 그대로 흘러가서 별로였다. 게다가 문장도 채 정돈되지 않아 읽기 불편했다.
6. 제 7의 천국(제임스 패터슨,맥신 패트로, 이영아 역. RHK. 2012. 432쪽)
: 우먼스 머더 클럽 7권. 전직 주지사의 아들이자 샌프란시스코의 셀럽 마이클 캠피언이 실종됐다. 어릴 때부터 심장병을 앓은 이 잘생긴 도련님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 온 터인데 감쪽같이 사라지자 상부에서는 압박이 들어오고, 린지가 이 사건에 투입된다. 그러던 중 마이클이 윤락여성 주니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난다. 한편 호크와 피지라는 두 젊은 남자가 중년의 부부를 살해하고 라틴어로 메시지를 남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순 강도로 보였던 이 사건은 곧 연쇄살인임이 드러나고, 린지는 다시 이 사건을 맡는다. 그리고 유키가 사고사한 마이클의 시신을 처리했다고 자백한 주니의 재판에 들어간다.
(강스포)
사건의 진실은 있지만 악의 처단은 없다. 연쇄살인범이 법의 심판을 받지도 않고 마이클 사건의 결말도 별로다. 그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마이클의 여생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산다고 행복할 지... 계속 재판에서 패하는 유키가 안됐을 뿐이다.
7. A군의 인생 대미지 보고서(강석희, 박서련 외. 창비교육. 2022. 212쪽)
: 학교 폭력 소재의 앤솔러지. 다양한 케이스와 다양한 성격의 학생들 이야기. 성장 소설답게 주인공들은 크든 작든 인생의 진리에 눈을 뜨지만 그렇다고 덜 아픈 것도,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작품들은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문제를 제기할 뿐. 중심 사건의 결말을 얘기하지 않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문학이 해야할 일은 한 거 같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이 이 작품들을 읽고 무엇이 폭력인지, 어떤 상황이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강석희.
8. 9번의 심판(제임스 패터슨, 맥신 패트로, 원은주 역. RHK. 2013. 400쪽)
: 유명 배우 마커스 다울링의 집에서 저녁 모임이 한창이던 때, 2층에는 도둑이 침입한다. 별 생각없이 열어둔 금고에서 귀중품을 훔친 이 도둑은 헬로 키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도둑. 주로 상류층들이 파티를 여는 동안 보안에 허술한 틈을 노린다. 마커스의 집에서 지체한 탓에 마커스와 부인에게 들킨 키티는 창문을 넘어 도망가지만, 마커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한다. 키티는 다음날, 마커스의 부인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고 놀란다. 한편 쇼핑몰 주차장에서 유모차에 탄 아기와 엄마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은 뜻을 알 수 없는 메시지를 피해자의 피로 차창에 남긴다.
키티 사건이 그렇게 처리될 줄은 몰랐다. 뭐, 역시나 악의 처단은 속이 시원한 정도는 아니지만 키티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점점 시리즈가 린지를 비롯한 우먼스 머더 클럽 멤버들만의 특별함을 잃어가는 거 같다. 꼭 이 멤버여야 할 이유도 없는 거 같고, 그냥 작가가 자신이 상상한 범죄를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9. 10번째 기념일(제임스 패터슨,맥신 패트로, 원은주 역. RHK. 2015. 436쪽)
: 열 다섯 살 소녀가 알몸에 비닐 우비 하나만 걸친 채로 피를 흘리며 길가를 헤매다 구조된다. 린지는 임신한 소녀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속아 아기를 빼앗겼다고 보고 소녀의 주변을 수사하는데, 상류층 사립기숙학교에 다니는 소녀와 친구들을 수사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한편 유키는 남편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의사 캔디스 마틴을 상대로 한 재판에 투입된다.
철없는 10대 소녀 때문에 내내 짜증났다. 거기에 낭비되는 경찰 인력에 대해서도.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 린지가 유키의 재판에 대해 한 일도 짜증났다. 린지는 왜 그렇게 사방을 다 헤집고 다니는 거야? 구세주 컴플렉스 뭐 그런 건가?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는 걸 감안해도 현실에선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하겠지. 아님 방법을 달리 하든가.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마지막 챕터에서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만 맘에 들었다.
10. 웃음을 선물할게(윤성희, 김이설, 김중미 외. 창비. 2019. 192쪽)
: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 - 짝사랑, 친구와의 관계 단절, 따돌림, 성적 문제 등과 가족에 일어난 비극까지 - 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앤솔러지. 김중미의 작품 속, 농성 중이던 장애인 유족들 중 민수 오빠가 한 "너도 웃어. 그래야 버텨"(171쪽)가 이 책의 주제이다. 삶은 힘들다. 어쩌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날보다 울고 싶은 날들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처럼 웃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되면 남 눈치보지 말고 웃어야 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
11. 내가 내일 죽는다면(마르가레타 망누손, 황소연 역. 시공사. 2017. 192쪽)
: 내가 죽은 뒤에 남은 물건들은 누군가가 정리를 해야 한다. 유족이든 아니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 데스클리닝이란 이런 관점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하는 정리 작업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많은 물건들에 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메모가 붙어 있는 걸 발견한다. 심지어 박물관에 기증할 물건에는 담당자 전화번호까지 있는 경우도. 이를 계기로 저자는 데스클리닝을 진행하는데 이 책은 저자도 나이가 먹어 자신의 데스클리닝을 진행하며, 그간의 노하우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기본적으로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무조건 없애라거나 빨리 처분하라고 하지 않는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자신만의 속도로 현재의 삶을 흔들지 않으면서 사후에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덜 힘들게 하라는 것.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중에는 우리나라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방법들은 꽤 유용하다. 특히 인상깊었던 건, 남에겐 쓸모가 없지만 내게는 큰 가치가 있는 건 - 연애 편지나 추억의 팜플렛 등 - '버릴 물건'이라고 쓰인 상자에 넣는다는 것.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간직하다가 죽은 뒤엔 버려지는 게 마땅하다는 사고방식이 맘에 들었다. 그게 맞는 거지.
늘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손대기가 귀찮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한 서랍, 상자, 창고방 등이 누구나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도 서너 개 된다. 이 책을 계기로, 빠른 시간 안에 그걸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 일도 모르는 일개 인간이라면, 늘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12. 칠면조가 숨어 있어(위수정. 위즈덤하우스. 2024. 96쪽)
: 유미는 선호의 직장 상사였다. 완벽한 일처리와 빈틈없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유미 뒤에서 그녀를 흉보았지만, 선호는 그녀와 사귀었고 결국 결혼도 했다. 이제 1년, 유미는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써보겠다 한다. 그리고 선호는 점점 자신과의 접점이 없어지는 유미의 생활과 유미가 절대 보여주지 않는 습작에 신경이 쓰인다.
선호가 너무 찌질해서 계속 코웃음치면서 읽었다. 아휴, 진짜 쪼잔해. 아내가 글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아내의 노트북을 몰래 뒤지는 거며, 복수심(?)에 지혼자 아내가 봤으면 하는 일기를 쓰고 개운해 하는 거며. 근데 어쩌면 이게 결혼 생활인가 싶기도 하다. 난 해본 적 없어 모르지만 배우자라고 해서, 한 집에서 산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어. 이런 사람인 줄 모르고 함께 살게 되었고 이런 사람이라도 참을 만 하면, 괜찮으면 계속 함께 사는 거겠지. 난 공감 못하지만. 삶의 다양한 면 중 하나를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남 얘기니까, 하는 맘으로 재밌게 읽었다.
13. 작가의 말(천희란. 위즈덤하우스. 2024. 100쪽)
: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경계를 잘 타는 소설. 난 완전히 소설로 읽었고, 물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안 들어갔다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다 픽션이겠거니 생각했다. 소설 속 화자는 작가로, 전원 주택으로 이사오지만 복층 서향집의 햇살은 화자의 우울에도, 글쓰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느날 이끌리듯 자살을 시도한 화자.
좋아하는 작가이고, 전작을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작가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 늘 공감했다. 이번 작품도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페이지에 도그지어를 만들었다. 그래. 이건 소설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인생을 그대로 보여줄까. 어느 인생이건 이 소설 속 그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한번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14.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이혜린. 풀빛. 2024. 216쪽)
: 담이의 부모님은 어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부모님과 함께 사고를 당했던 담이는 그 이후로 약간이라도 친밀한 관계인 사람들의 남은 생의 날 수를 볼 수 있다. 사람들 머리 위에 초록색으로 떠 있는 숫자들. 뭣 모르던 어린 시절, 친구 머리 위의 숫자가 1인 걸 본 후 어떻게든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한 담이는 이젠 누구와도 친분을 맺지 않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여전히 혼자만의 세계를 지키려는 담이에게 반장 미소가 다가온다.
청소년 소설이니만큼 해피엔딩일 거라 믿고 읽긴 했지만, 읽는 내내 계속 생각을 하게 했다. 나로 말하자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쪽이라서. 다만 대강의 시기 정도는 알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 다가와서 당장 몇 개월 혹은 며칠 남았다고 알려준들 뭘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사실 그런 맥락에서 결말 부분의 담이와 아저씨의 향후 계획(?)은 좀 아닌 거 같긴 하다. 난 또, 사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입장이어서. 어쩄든 전개도 빠르고 문장도 나쁘지 않아서 재밌게 읽었다.
15. 데이지 존스 앤 더 식스(테일러 젠킨스 리드, 최세희 역. 다산책방. 2023. 548쪽)
: 1970년대, 인기 절정이었던 록밴드의 갑작스런 해체 이야기. 마치 다큐멘터리를 녹취한 듯한 형식으로 당대의 아이콘이었던 데이지 존스와 밴드 더 식스의 흥망을 이야기한다. 예술가 부모의 방치 하에 그루피에서 시작해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가수가 된 데이지 존스. 빌리와 그레이엄의 '던 브라더스'에서 시작되어 드러머 워런, 베이시스트 피트, 리듬 기타 척을 영입하여 '더 파이브'가 되었다가 척이 베트남전에서 사망하고 대신 에디와 키보디스트 캐런까지 여섯 명이 된 밴드 '더 식스'. 데이지의 첫번째 앨범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지만 더 식스는 빌리가 '인생의 사랑'인 아내 커밀라와의 이야기를 노래로 써서 점점 인지도를 올리고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던 중 프로듀서 테디는 빌리가 쓴 사랑 노래는 여성 싱어와의 듀엣이 좋겠다고 빌리를 설득하고, 데이지와 함께 다음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빌리와 데이지는 함께 곡 작업을 하지만 끊임없이 충돌한다.
정말 당대의 실존 밴드의 이야기인양 몰입해서 읽었다. 난 당시의 락신에 대해서는 지식이 거의 없지만 이 책의 형식이 앞에서도 말했듯 다큐멘터리의 자막을 그대로 출간한 듯 했고, 장면마저 상상이 되었다. 데이지의 자유분방함과 한번의 실족을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가정을 지키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격한 빌리의 생활이 부딪치는 지점도 너무나 이해가 됐고, 그 둘 모두에게 공감이 갔으며, 심지어는 주변의 워런이나 피트, 캐런과 그레이엄의 이야기에도 모두 공감이 갔다. 그만큼 이 작가가 그린 캐릭터는 입체적이었고 실존적이었으며, 당대의 연예계 묘사는 생생했다. 여성으로서, 락커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던 데이지. '누군가의 뮤즈'이기보다는 그 '누군가'이길 바랐던 데이지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비록 그녀가 선택한 사랑에는 반대하지만. 무난하길 바랐던 워런과 열등감에 괴로워했던 피트, 역시 여성으로서 그리고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캐런과 어쩌면 전형적일지 모르지만 많은 남자들에게는 공감을 샀을 그레이엄의 이야기도 단순 재미를 넘어 그 자체로 내 몰입을 불렀다. 페이지가 정말 빨리 넘어갔고 그 와중에도 쉽지 않은 시대에 여성으로서 산다는 어려움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했다. 전작에 이어 이제는 정말 이 작가의 작품은 믿고 읽게 됐다.
16. 외계인 게임(오음. 팩토리나인. 2021. 312쪽)
: 교사인 김설은 애인과의 결별을 예감하고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 작고 평화로운 마을 훈자에 머문다. 그곳엔 32세 번역가 하나, 40세 소설가 최낙현, 22세 대학생 전나은, 29세 남자 오후가 머물고 있고, 이들과 어울리며 김설은 서울에 두고온 고민을 잊는다. 게다가 후에게 끌리는 마음. 어느날 후는 모두 모인 자리에서 외계인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이 게임은 일종의 밸런스 게임으로 곤란하거나 고민되는 상황 중 하나를 선택하고 소수인 쪽이 외계인이 되는 게임이다.
(강스포)
김설 캐릭터가 너무 후져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자기 가슴 계속 쳐다보는 남자가 별로라는 말에 '그럼 언니가 노브라로 다니지 않으면 되잖아요'라고 생각하는 여성 교사라니p.51 그 뒤의 남하나 캐릭터도 너무 별로다. '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별로 감사한 줄 모르는 풍만한 가슴까지 있지 않은가'p.78라는 문장을 읽고 이 작가가 남자임을 확신했고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서 끝까지 읽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다 철없고 생각없이 사는 걸로 그린다. 남자 캐릭터들에게 작가가 더 공감하는 게 보이고 심지어는 성희롱에 정당성까지 부여한다 - 감기약 때문에 아내로 착각했단다. 거기에 더해 성희롱 가해자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피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용서하는 걸로 그리다니, 아주 네 로망인가봐? 바람둥이같았던 오후마저도 사실은 순애보 끝장이었는데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 때문인 걸로... 와, 어릴 때 읽은 HR 생각나네? 암튼 별로였고, 왜 리뷰들의 별점이 높은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문장마저 별로.
17. 해독일기(프랑수아즈 사강, 백수린 역. 안온북스. 2023. 96쪽)
: 저자는 교통사고 후 치료를 받던 중 모르핀계 진통제에 중독된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전문의료기관에 입원한 저자의 일기. 일기 내용은 어쩌면 기존 작품들에 비해 강렬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만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이 더해지자 텍스트마저 강렬해졌다. 불안과 불쾌 사이, 쉼과 마비 사이 저자의 예민한 감수성이 잘 드러난다. 문학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애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고 쓰고 싶었던 마음. 원래도 이 작가를 좋아하지만 작가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본 것 같아서 더 좋아졌다. 사실 이날 들고 나왔던 책이 이미 읽은 거여서 당황스러워 하다 부랴부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책이었는데, 퇴근길이 아주 충만했다.
18. 마법 지팡이 너머의 세계(톰 펠턴,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4. 416쪽)
: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말포이 역을 맡았던 톰 펠턴의 에세이. 해리 포터 이야기가 분량이 많긴 하지만 아역배우로서의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관한 이야기도 비중이 높다. 해리 포터 팬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을 수 있다는 면에서 흥미진진할테고 해리 포터 팬이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꽤 공감될 만한 부분들이 있다. 저자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합류하기 전부터 아역 모델과 배우로 활동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오디션에 응시할 때까지만 해도 원작 소설을 좋아하기는커녕 읽지도 않았던 그는 오디션장에서 마주친 엠마 왓슨에게 퉁명스럽고 거만하게 대하고, 그 태도 덕분에 루시우스 말포이 역에 캐스팅된다. 그리고 시리즈 촬영 현장에서 엠마 왓슨과 대니얼 래드클리프, 그리고 슬리데린 삼총사 역을 맡았던 배우들과 함께하며 우정을 쌓는다. 그러나 마냥 아름답고 교훈적인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저자의 어마어마한 장난기에 촬영장이 엉망이 되고 아역 배우들의 샤프롱들이 기피하는 1순위 배우가 된 사연이나, 엠마의 힘을 얕잡아 보았다가 한방 먹은 이야기 등은 저자의 유머 감각과 함께 당시 현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 이건 저자보다는 당시 스텝들 입장에서 -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장난을 치거나 우정만 나눈 건 아니다. 성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며 배운 점들, 그들 각자의 뛰어난 점과 화면 밖 모습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서술되어 미소지으면서 읽게 되었고, 이후 유명세를 누리며 잠깐이나마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빠졌던 모습까지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사실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물론 해리 포터 촬영장의 비하인드 스토리이지만 저자가 엠마를 비롯한 배우들과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흐뭇했고 무엇보다 매우 균형잡힌 시각으로 할리우드를 비롯한 연예계의 비합리적인 관습들 특히 젠더 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낸 부분이 특히 좋았다.
영화를 볼 땐 그저 그 배역으로만 보았던 배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19. 스톤 매트리스(마거릿 애트우드, 양미래 역. 황금가지. 2024. 396쪽)
: 단편집. 앞의 서너 편은 연작이라 할 수도 있는데, '알핀랜드'라는 판타지 세계를 무대로 한 소설로 성공한 콘스탄스와 그녀가 처음 이 소설 시리즈를 썼을 때의 애인이자 개망나니 호색한 시인이었던 개빈, 그리고 그와 얽혔던 여성들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이 딱히 사이다라고 할 수는 없어서 읽는 속도가 좀 더뎠는데, 표제작에서 그런 기분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표제작은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야기. 늘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속담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그렇지 못하다'는 건 완전히 틀렸다. 떄린 놈은 지가 떄린 게 잘못인 줄도 모른다. 이 소설집 속의 많은 남성들이 심지어는 지가 때린 줄도 모르고, 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크개 개의치 않는다. 가해자의 논리란 정말이지 역겹기만 하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게 표제작. 젠더 문제 외에도 저자는 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언급하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이런 균형잡힌 시각들이 좋았고, 마냥 아름답지만은 현실에 대한 솔직한 시각도 좋았다.
20. 누의 자리(이주혜. 자음과모음. 2023. 132쪽)
: 3편의 단편과 1편의 에세이. 표제작이 많이 인상깊었다. '누'는 '누구'의 옛말. 누구라고도 지칭되어지지 못한, 이름없는 누를 위한 자리. 비록 작중 화자가 택한 자리가 내 맘에는 들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묵묵히 자리를 잡는 누가 견뎌야 할 몫일테지. 가장 좋았던 건 <골목의 근태>. 결말이 어쩌면 생뚱맞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런 따뜻한 연대는 늘 환영이다.
21. 창문(정보라. 위즈덤하우스. 2024. 96쪽)
: 정부는 인공지능의 학습을 위해 인간의 뇌를 통째로 업로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갈 데 없는 나는 그 프로젝트에 지원하여 산속 학습센터에 입주한다. 하루 8시간의 업로드, 요가 등의 프로그램에 적응하던 중, 갑자기 이웃이라며 접근하는 915호 사람. 나는 그와 엮이기 싫지만 그는 점점 튀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늘 그랬듯 이 작가의 작품은 설정은 미래적이지만 일어나는 일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나의 일상에 균열을 가하는 미친 인간의 등장.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사이다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걸 박수치며 바라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해자의 서사를 마냥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는 없겠지만. 결국 이렇게 되기까지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데... 삶은 소설 속에서도, 밖에서도 어렵기만 하다.
22. 아빠 소설(이연숙. 위즈덤하우스. 2025. 104쪽)
: 주로 온라인 상에서 비평을 해왔던 화자는 출판사의 청탁을 받자 이제는 아빠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감이 다가올수록 이걸 소설로 써야할 지 혹은 에세이로 풀어야 할 지 모르겠다. 계속 감을 못 잡고 허우적대는 화자는 한가지 기억을 떠올린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미워한다는 건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지 않을까? 이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사랑할 때가. 하지만 쉽지 않다. 내 안에 아직 덜 자란 아이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워야 할 지 몰라서인지도 모르고. 그래서 '가짜'라도 만들어서 때려눕히고 싶은데 그것마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화자는 명확하게 결말을 맺지 못하지만 독자인 나는 그게 답답하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그게 평생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져야 할 숙제라는 걸 알기에.
23. 스파이 코스트(테스 게리첸, 박지민 역. 미래지향. 2024. 460쪽)
: 메인 주 작은 시골 마을. 매기는 농장을 구입하여 닭을 키우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기관'에서 온 듯한 비앙카라는 여성이 나타나 16년 전 매기의 은퇴 전 마지막 임무에 대해 묻는다. 그 작전에서 함께 일했던 다이애나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다이애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매기는 그녀를 찾는데 도움을 줄 생각은 없으나 당시 작전에 관한 문서가 유출됐다는 말에는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다음날, 매기의 농장 진입로에 비앙카의 시체가 놓여있다. 매기와 한마을에 사는 전직 동료들 4명 - 잉그리드, 로이드, 벤, 데클란 - 은 이 일을 조용히 수사하려 하지만 지역 경찰서정 대리인 조 티보듀는 이들의 행적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그냥 살인사건 수사하는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정말 스파이 이야기였을 줄이야. 게다가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까지. 왜 소설 속에서도 좋은 남자들은 다 죽어버리는 걸까. 이러니 책 속이든 현실이든 좋은 남자들이 씨가 말랐지. 그래도 아직은 좋은 사람들이 살아 있으니. 범인은 전혀 짐작 못했고, 사실 작가가 범인을 짐작할 만한 틈을 주지도 않았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서술 방식은 흔하지만 이렇게 효과적으로 쪼이는 건 오랜만. 게다가 마티니 클럽 다섯 명과 조 티보듀까지 등장인물들이 다 흥미로워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24. 사랑과 연합 0장(한정현. 위즈덤하우스. 2024. 116쪽)
: 인간 외 종족에 대해 알려진 후, 인간은 그들과 '교배'를 통해 하프 엘프, 하프 드래곤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에 대한 차별 또한 생겨났다. 이제는 인간만큼은커녕 혐오의 대상이 되어 특정 지역에 격리 수용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 하프 엘프 루비는 그저 조용히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며 살고 싶다.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감추며 살고 있는 루비의 민박집에서 어느 손님이 남긴 쪽지가 발견되고, 거기서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던 할머니의 이름을 발견한 루비는 당황한다.
역시나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한국사의 아픈 기억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의 혐오와 차별의 이야기도. 저자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판타지적인 인물을 내세운 건 처음인 거 같아서 이게 긴 이야기의 서막이라는 저자의 인터뷰가 정말 반가웠다. 그리고 이 와중에 비소의 행적이 벌써 안타까웠고 - 그가 당했을 배신과 버림이 - 앞으로의 여정이 궁금했다.
25. 싸구려 행복(가브리엘 루아, 이세진 역. 이상북스. 2010. 592쪽)
: 2차 대전이 막 시작된 시기 몬트리올 근교. 열 일곱 플로랑틴은 '15센트'라는 이름의 저렴한 음식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아닌 듯 애매한 태도의 장 레베스크를 만나는데, 야심차고 성실한 장은 플로랑틴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데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됨을 잘 알고 있다. 플로랑틴의 집은 매우 가난한데, 목수였던 아버지 이자리우스는 건설 경기 불황으로 실업자 신세가 되어 지금은 임시로 택시를 운전하지만 늘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이런저런 주장을 떠벌리는 데에만 몰두하고, 엄마 로즈 안나는 가난한 살림에 플로랑틴 밑으로 줄줄이 낳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늘 지쳐있다. 이 와중에 플로랑틴은 장의 친구 에마뉘엘과도 알게 되는데, 군인이자 중산층 가정의 장남인 에마뉘엘은 플로랑틴에게 순수한 애정을 보이고, 로즈 안나는 또 임신한다.
누구도 감쌀 수 없지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지만 누구도 응원할 수 없는, 그렇다고 전혀 공감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플로랑틴이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봐 조마조마해 하며 읽었다. 그런 사회상에서 그런 가정이라면, 누구나 실족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결말이 다행이었다. 가장 가여운 건 다니엘, 그리고 로즈 안나. 하지만 모든 인물들이 다 조금씩은 안타까웠다. 그만큼 작가는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배치하여 누구라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출간된 이 저자의 작품들은 다 읽었는데, 그중 가장 좋았다.
26. 돈 안 쓰면 죽는 병(이두온. 위즈덤하우스. 2025. 96쪽)
: 화자는 중고거래앱에서 명품 원피스가 싸게 나온 걸 보고 직거래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원피스를 갖고 나온 남자는 화자를 보고 안 팔겠다며 도망가고, 화자는 악착같이 쫓아가지만 남자는 화자를 모욕한다. 사실 화자가 이렇게 꼭 소비를 해야 하는 이유는 플람마 바이러스 때문이다. 머리에 어느 순간 혹이 나고, 이 혹이 점점 자라나 갑자기 폭발해 버리는 병. 이 병의 진도를 늦출 방법은 소비를 통한 도파민 방출 뿐. 그나마 생필품이나 식품이 아닌 사치품 소비만 해당된다.
제목만 보고 재밌을 거 같아서 집어들었는데, 소설 속 세상은 처절하기만 하다. 사치품 소비만이 도파민을 만들어 내고 그 도파민에 의존해서 생을 연장해야 한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누구나 소비를 좋아하는 것도 아닐텐데, 또 누구나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을텐데. 물론 작가가 꼬집고자 하는 게 비틀린 자본주의와 말초적인 쾌락이라는 거 모르지는 않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 어느 누구도 - 심지어는 스스로 생의 연장을 포기했던 사람들마저도 공감은커녕 안쓰럽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 이런 세상에서 예술품의 가치는 또 어떻게 산정되는지, 예술가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결말마저 힘들었던 소설.
27. 시간의 계곡(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김보람 역. 다산책방. 2025. 468쪽)
: 오딜이 살고 있는 마을의 양쪽은 철책으로 막혀 있다. 이 밸리의 양쪽에는 산이 있고 동쪽 산을 넘으면 20년 후의 미래의 마을로, 서쪽 산을 넘으면 20년 전의 과거를 살고 있는 마을로 갈 수 있다. 이 밸리들은 다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고, 평상시에는 전혀 왕래할 수 없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자문단의 허가를 받아 헌병대 동행 하에 얼굴을 검은 마스크로 가리고 '참관'을 할 수 있다. 직업 선택을 위한 견학이 시작되던 어느날, 오딜은 우연히 다른 밸리에서 온 참관인들을 목격하는데, 그들이 같은 반 에드메의 부모님인 걸 알고 당황한다. 한편 오딜은 시청 지하에서 서류 정리라는 단순 작업을 하며 딸을 키우는 엄마의 강력한 소망에 자문관이 되기 위해 에세이를 제출하고, 우여곡절 끝에 심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그에게 미리 경고를 해야 할까? 그리고, 미쳐 작별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게 과거의 모습이고 나를 드러낼 수 없다 해도 그 기회를 잡아야 하는 걸까? 솔직히 난 오딜의 처음 의견에 동의한다. 어느쪽이든 굳이 가야만 하는 걸까? 내 머릿속, 내 마음속 모습만으로 - 설사 그게 나의 바람이 덧칠된 모습일지라도 - 만족하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오딜의 생각은 여러 사건을 거치며 바뀌고, 이 작은 마을에서조차 오딜의 운명은 힘들게 흘러간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오딜이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그러지 말라고 부르짖었지만 오딜의 길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스스로를 구원하지만, 난 그게 진짜 구원인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오딜도 그녀 자신이었으니.
세계관이 폐쇄적이고 굳이 따지고 들자면 논리적 모순이 없지는 않지만 과거와 미래, 선택과 운명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바뀌지 않았다. 개입할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들여다본들 내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될지.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것도 사랑의 과정이다.
28. 술꾼들의 모국어(권여선, 한겨레출판. 2024. 236쪽)
: 술 좋아하는 작가의 안주 에세이. 계절별로 작가가 사랑해마지않는 식재료들과 음식들의 이야기가 풍부하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은근히 까다로운 입맛을 갖고 연약하게 태어났으나 자라면서 입맛이 틔였고 특히 대학생이 되어 술과 함께하면서 안주로서의 음식들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작가가 소개하는 음식들은 그리고 에피소드들은 다 맛깔스러워서 읽는 내내 낄낄거렸다. 나도 한 식탐 하는지라 책을 집어들기 전에는 이거 읽었다가 입 트이는 거 아냐? 했지만 다행히도 내 게으름이 식욕을 이기기는 했다. 물론 작가는 먹는 얘기만 하지는 않는다. 음식이야기를 하면서 삶을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난, 삶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한끼 잘 먹고 나면 그 일을 헤쳐나갈 힘이 생긴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또 힘을 얻는다.
29.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헤르만 헤세, 황승환 역. 민음사. 2009. 128쪽)
: 화가 클링조어는 스페인의 한 지방에 여름내 머물기로 한다. 여러 지인과의 만남, 이웃 농가의 소녀 지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마침내 다시 붓을 드 그가 그린 자화상.
줄거리를 특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문장도 어지러웠다. 아마도 이 작품을 쓸 당시 저자의 마음이 그러해서일 듯. 난 늘 헤세의 성격은 좀 안정적일 거라고 근거없이 짐작하곤 했는데 이 작품을 쓸 당시 작가의 개인사가 그렇게 힘들었고 작가 자신도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 해설을 읽으며 내가 정말 무지했구나 반성했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인생 살풀이였던 듯 하다. 마지 추상화에서 원색의 두터운 물감 자국을 보는 듯한 이야기. 클링조어가 끊임없이 의식하고 또 예감하는 그의 죽음이 저자를 그리고 독자를 구원했다.
30. 네버 라이(프리다 맥파든, 이민희 역. 밝은세상. 2025. 340쪽)
: 신혼 부부 트리샤와 이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데도 매물로 나온 집을 보러 간다. 길을 헤맨 끝에 간신히 도착한 외딴 집은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까운, 웅장하고도 멋진 집이었다. 하지만 중개사 주디는 보이지 않고, 트리샤는 2층 창문 한 곳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목격하지만 이선은 보지 못한다. 계속되는 눈보라에 길이 끊기자 이선과 트리샤는 할 수 없이 하룻밤을 이 집에서 보내게 되는데, 트리샤는 읽을 책을 찾다가 비밀 공간을 발견한다. 사실 이 집은 오래전 실종된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엔 헤일 박사의 집이었고 그 비밀 공간엔 박사가 상담 치료하던 환자들의 녹음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다. 트리샤는 이선 몰래 그 테이프들을 들어본다.
처음엔 이선이 정말 의심스러웠는데,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다만 결말이 찝찝하다. 악의 확실한 처단 따위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PL과 함꼐 별장에 있던 메이든, 그리고 박사의 남친 루크가 너무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