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해피엔딩
크리스틴 해밀 지음, 윤영 옮김 / 리듬문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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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필립 라이트.

장래 코미디언이 되는 게 꿈.

현재에도 꾸준히 개그 감각을 높이려 애쓰고 있음.

나쁜 일들이 차례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워낙 사소했기 때문이다.

 

 

이 개그감으로 충만한 소년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설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로세로 180cm인 에디를 만나는 것?

허영스럽지만 예쁘고, 필립의 개그를 받아 쳐주던 엄마가 이상해진 것?

짝사랑 루시가 눈길도 안 주는 것?

단짝 친구 앙이 그를 거들떠도 안 보고 루시와 사랑에 빠진 것?

애정 하는 코미디언 해리 힐에게 무한정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을 하나도 못 받은 것?

이 소년의 이야기는 마치 버석거리는 사막에 내린 단비 같다.

언제 젖는지도 모르게 촉촉하게 적시는 감동의 단비.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웃음을 주려 하는 모습이 어떨 땐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 때 좌절하는 모습은 귀엽고도 슬프다.

그래도 필립을 통해서 나는 다른 감정 하나를 알게 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비관하고, 자신을 괴롭히거나 타인을 향해 분노를 내뿜는 사람이 있다면

필립처럼 그 상황을 유머로서 모면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는걸.

특히나 어른도 아닌 아이로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나 현실을 농담 한 마디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건

어른의 눈높이에서 볼 때 어이가 없거나, 애들은 어쩔 수 없다거나, 쯧쯧 거림으로 넘어가곤 하는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

아이의 엉뚱한 말이나 행동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걸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이 어리고, 철없고, 연약해 보이는 소년 필립은

누구보다 강단 있고, 따스하며, 유쾌한 아이다.

그리고 굉장히 어른스러운 감동적인 아이다.

속절없이 어느 순간 터지는 울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슬프고, 아프고, 애처로워서가 아니라

그 너머의 필립의 마음이 헤아려져서 터진 눈물이었다.

미다스(Midas)의 철자를 재배열하면 '난 슬퍼'(I'm sad)가 된다는 걸 아는가? 정말 기이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슬퍼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이상해진 이유가 암에 걸렸기 때문이라면 식상한 이야기가 될 테지만

누가 뭐래도 해피엔딩엔 식상한 이야기가 없다.

식상한 걸 특별하게 만드는 필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가 엄마 베개에서 발견한 건 조그맣고 복슬복슬한 동물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잘못 보았음을 깨달았다. 그건 조그맣고 복슬복슬한 동물이 아니라 엄마의 머리카락이었다. 엄마는 남은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 막아 보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웃기면서 동시에 정말 슬펐다.

 

 

필립은 집에만 틀어박혀서 밖을 나서지 않는 엄마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

열두 살 소년이 생각할 법한.

아니. 그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일을 감행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어른스러워서

그리고 그다음의 행동이 너무 아이스러워서 가슴이 절절해졌다.

제목처럼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누가 뭐래도.

청소년 소설인데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 같다.

아이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

우리가 아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아이의 생각과 마음은

이미 어른들을 넘어서서 어른보다 더한 어른일 수 있다는 이야기.

비슷한 나이의 조카들을 이제부터 다른 시선으로 보아야겠다.

그 아이들에게도 열두 살의 인생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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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묻다 시와서 산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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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처럼 단아한 산문집이다.

일본 근, 현대 작가들의 수필집으로 스물일곱 명의 작가들에게서 추려낸 30편의 글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소설과 달리 수필은 작가의 꾸미지 않은 모습이 담겨 있어 뭔가 더 친근한 느낌이다.

 

글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해도 좋다. 하지만 글을 사는 쪽은 장사꾼이다. 일일이 주문하는 대로 떠맡다가는 배겨 낼 수가 없다. 가난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삼가야 할 것은 글을 함부로 많이 쓰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한 말이다.

이 산문집엔 소세키의 글도 담겼지만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글도 여러 편 담겨 있다.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하는 후배 겸 제자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는 소세키의 말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새겨야 하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강진이 또 일어나 나는 굴러 넘어지듯이 계단을 내려가 다시 문기둥을 잡았다. 그게 그치자, 시간을 좀 두고 세 번째, 네 번째 여진이 이어졌다. A씨 집 지붕 기와가 와르르 흔들리며 무너졌다.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당구장의 높은 지붕에서 쉴 새 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와의 검은 그림자가 까마귀가 나는 듯 어지럽게 보였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오카모토 기도의 글은 간토 대지진이 났을 때 자신이 살던 마을이 전부 불타 버리는 경험을 썼다. 먼 곳에서 불꽃이 퍼지고 있었지만 바람의 방향이 이쪽에서 불어 가는 거라 괜찮을 거라 안심하던 마을 사람들이 얼마 안 되어 피난 짐을 싸게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대지진 이후 불필요한 물건은 절대 사지 않았다 하니 미니멀 생활의 선구자였던 거 같다.

다자이 오사무의 술의 추억은 청주에 대한 오사무의 절절한 경험담을 알게 된다.

오사무의 글은 이 수필로 처음 '맛'을 보았는데 뭔가 술 취한 가운데 생경하게 정신이 말짱해지는 그런 상태에서 쓴 글 같은 느낌이 든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던 거 같다.

암튼 그의 술 부족을 적절하게 어루만져 준 마루야마라는 배우의 배려심에 더 눈길이 가는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은 지루함에서 일어난 것이니, 이것이 사회의 안녕에 가장 위험을 초래한다. 그래서 정치가는 사람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내각을 경질하고, 문화를 퍼뜨리고, 여러 스포츠를 장려하고, 오락장이나 유곽, 공중 목욕탕을 설계한다.

 

 

병이 들어서야 지루함이 없어졌다 말하는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생각이 참 참신하다.

투병 중에 모든 관심사가 사라지고, 오로지 현재, 지금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것들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을 이야기했다.

평소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이 아프면서 사무치게 다가오는 느낌을 적었다.

작가는 아픈 와중에도 종이에 쓰지 못하면 마음에 글을 쓰는 거 같다.

병상에서조차도 뭔가를 깨달아야 하니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의 글 보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글은

시마지키 도손의 세 명의 방문객이다.

겨울

가난

늙음

이 세 명의 방문객에 대한 도손의 글은 자꾸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문밖에서 서성이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방문객 '죽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마 '죽음' 또한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김사량.

이 산문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재일 조선인 문학의 선구적 존재로 여겨진다.

글에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고 있다.

남의 나라에서 고국의 하늘을 그리는 마음은 어떤 걸까?

 

 

 

 

조선의 하늘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할 만큼, 푸르고 활짝 개어 있다. 어서 그 아래를 걷고 싶은 마음이 요즘 들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립다. 이렇게 나는 언제나 조선과 일본 사이를 철새처럼 왔다갔다하겠지.

 

꽃을 묻다.

제목과 같은 제목의 수필이 처음에 실려있다.

꽃 무덤과는 다른 꽃을 묻는 놀이.

이렇게 창의적으로 놀 줄 알았던 그들의 삶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해 본다.

MSG가 빠진 음식은 처음엔 아무 맛을 못 느끼지만 자꾸 먹다 보면 본연의 '맛'을 알게 된다.

화려하고, 속도감 있고, 몰입감 있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이야기들만 읽다가 담백한 맛을 읽게 되니 머리가 청아해지는 느낌이다.

욕심 없는 글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단아한 글들이 생각을 정리케하고

소소한 글들이 미소를 짓게 한다.

작지만 큰 책이다.

전부 모르는 작가들이었고, 전부 처음 읽는 글들이었다.

이름만 알았던 작가들의 글을 만나게 되어서 좋았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지어냈던 이제 나는 그들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꽃을 묻듯이 그들의 이야기도 함께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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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생 그림책 Dear 그림책
하이케 팔러 지음,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김서정 옮김 / 사계절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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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부터 99

그 사이들

인생의 이야기가 그림 속 장면으로

짧은 글로 담겼다.

꼬물꼬물한 조카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떠 올렸을 감정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내 아이를 낳으면 온갖 상념이 흐르겠지만

갓 태어난 조카를 보며 떠오르는 상념에는 다른 시각이 흐른다.

같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와는 다른 행복과 걱정과 사랑이 흐른다.

좀 더 객관적인.

그래서 이 이야기가 조금은 더 다가온다.

작가가 느낀 느낌이 어떤 건지 알고 있음으로.

첫 조카를 마주한 순간은 끝없는 신기함이었다.

 

 

 

 

 

 

 

 

 

 

그래서 이 그림책은 누군가에게 말해주듯 보아진다.

가장 아끼는 누군가에게

살짝 뒤에 서서

그렇단다.

그런 거지.

그럴 거야.

그렇겠지.

그럴 테지.

그런단다.

 

 

 

잠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오래전

나를 보던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소리 없는 눈 맞춤으로

조근조근 해주었던 얘기를 듣는 느낌이다.

이 책의 절반쯤에 와 있는 내가

앞으로의 나에게 미리 귀띔해주고픈 말이기도 하다.

텍스트에 지루해질 쯤

쌓여 있는 책들 사이에서 버거운 시간에도

서점으로 향하는 마음을 멈추지 못하고

래핑 되어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집에 와서 슥슥슥 넘겨 보는 마음이

느긋해진다.

100

지나온 날과 살아갈 날을 그리며

고요해진 마음이 마냥 즐겁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비밀을

알아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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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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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씬해서 부러운 몸매가 아니라 가난해서 비쩍 마른 몸이다. 잘 씻어도 얼굴이 어딘가 지저분해 보이고, 여름에 반바지와 러닝셔츠를 입고 대자로 뻗어 낮잠을 자는 모습은 꼭 밭에서 방금 파낸 흙 묻은 우엉 같다.

좀 더 편한 일도 있을 텐데 엄마는 자기를 괴롭히듯이 일한다.

 

 

 

 

하나의 엄마는 홀로 하나를 키운다.

그녀의 직업은 막노동. 남자들 틈에서 홀로 일하는 강단 있는 엄마다.

개처럼 먹어대지만 절대 살이 찌지 않는다.

늘 반값 딱지가 붙은 음식들만 사 먹지만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하나는 엄마에게 유도 질문을 해보지만 절대 알 수 없다.

어쩜 흉악한 범죄자라 어딘가에 갇혀있거나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엄마와 함께

부족하지만 부족하지 않게.

외롭지만 외롭지 않게.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게.

힘들지만 힘들지 않게.

즐겁게, 유쾌하게,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14살 소녀의 첫 소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사실 이 책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그저 눈물 빼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14살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 그저 미화되었을 거라는 나쁜 편견이 나에게 있었다.

별 기대 없이 읽게 된 이야기.

슬슬 읽어가다 이 두 모녀의 진가가 나타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안녕. 다나카.

나와는 너무나 먼 사람,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같은 수준이나 계급인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법이다.

 

안녕. 다나카는 하루의 짝이 된 신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하루와 엄마의 이야기가 이어지다 갑자기 신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조금 엉뚱했으나 이것이 진정한 고수의 엉뚱함이었다는 건 다 읽고 나야 느끼게 된다.

신야는 의도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졸지에 변태가 되어 학교 여학생들의 악다구니에 시달리는데 그 위기에서 신야를 구해준 건 바로 하나다.

6학년의 되어 하나와 같은 반 짝이 되었지만 신야는 여전히 하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채 끙끙댄다.

신야는 사립 중학교에 가기 위해 시험을 보지만 모두 떨어지고 신야의 엄마는 그런 자식이 창피하다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엄마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존재라는 이유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신야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하나 모녀 덕분에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게 된다.

앞 부분 하나의 이야기의 백미를 장식하는 게 바로 신야의 이야기다.

남의 시선에 비친 하나 모녀의 모습은 가난하지만 즐겁고, 모든 면에서 긍정적이며, 언제나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런 엄마 품에서 자란 하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당당하다.

그런 모습이 신야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독자들은 잘 참고 읽어 오다 신야의 이야기에서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살아있다. 엄마의 경계선은 늘 거기다. 아무리 크게 실패해도 살아 있다. 수치스럽지만 살아 있다. 죽을뻔했지만 살아 있다.

하지만 기준이 그거라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이 다 오케이이지 않을까?

 

14살 소녀의 시선은 어른들의 꾸며진 시선 보다 훨씬 담백하다.

그래서 그 담백 미가 책을 읽고 난 뒤에서 계속 은은하게 일렁인다.

어째서 천재소녀인지

어째서 사람들이 그녀를 그리 치켜세우는지 읽어 보지 않으면 모를 뻔했다.

꾸밈없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맑은 울림.

세련되지 않은 거 같지만 너무 세련된 표현들이 이 책을 잡으면 놓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썼는데도 이렇게 딱 떨어질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슬플 때는 배가 고프면 더 슬퍼져. 괴로워지지. 그럴 때는 밥을 먹어. 혹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일단 밥을 먹으렴. 한 끼를 먹었으면 그 한 끼만큼 살아. 또 배가 고파지면 또 한 끼를 먹고 그 한 끼만큼 사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견디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야.

 

 

삶의 연륜이 쌓인 사람만이.

배를 골아 본 사람만이.

죽기를 되뇌이며 살기를 각오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

이 단순할 거 같은 삶의 의미를 이미 깨친 소녀 작가의 글은 다 큰 어른을 부끄럽게 한다.

하나는 결국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다.

엄마의 과거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엄마의 말에서 그녀의 삶이 너무도 고독하고, 뼈저리게 고달팠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젓하게 바라보는 하나의 모습을 보듬어주고 싶었다.

삶이 고달플지라도

그걸 알아주는 하나 같은 딸이 있어

엄마의 고단함이 훨씬 수고로움으로 남을 거 같다.

그래서 홀로 떠나간 신야가 안타까우면서도 안심된다.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공간에 있게 되었으므로.

스즈키 루리카.

그녀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화려한 수식어 없이도 담백하게 쓰여진 이야기의 묘미.

요란한 감정 표현 없이도 담담하게 쓰여진 이야기의 깊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스함.

앞으로가 더욱 기다려지는 작가를 만났다.

기존의 일본 작가에 대한 나의 편견을 씻겨준 작가이다.

루리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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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제본사
브리짓 콜린스 지음, 공민희 옮김 / 청미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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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 에밋.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가져와서 제본하는 거야. 사람들이 담고 있을 수 없는 것들.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 말이지. 우리는 그 기억을 가져와서 더는 해를 끼치지 못하는 곳에 둔단다. 그게 책이란다.

 

 

기억을 제본하는 제본사.

제목만으로 나는 판타지를 상상했다. 뻔하게도.

누군가의 읽어서는 안되는 기억을 읽어버려서 생겨나는 온갖 문제들을 가열차게 해결해가는.

 

에밋 파머.

건강하던 그가 이유 없이 아프고 병이 나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된다.

부모는 에밋을 근처의 제본사의 도제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에밋은 가기 싫었지만 자신의 허약한 몸이, 그리고 제본사가 될 운명이라는 부모님의 말에 숲속의 마녀로 불리는 제본사 세레디스의 도제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세레디스는 아직 때가 안되었다는 말만 하고, 간단한 일들만 시킬 뿐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정신을 이끌고 간단한 작업만을 하던 어느 날.

젊은 남자가 그곳을 찾아온다.

그를 보는 순간 섬뜩하면서도 알 수 없는 증오심과 두려움과 짜릿함이 에밋을 당황하게 만든다.

본적 없지만 왠지 아는 거 같은 그 남자.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는 어느 지점에서 뒤통수를 맞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하지 않다.

신비롭고, 아름답고, 아련하며,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에 대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해했다.

 

 

제본사의 열병. 악몽과 질환. 드 하빌랜드는 그것이 제본에서 비롯되는 병이라고 했다.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제본을 당해서 아팠던 것이다. 세레디스가 나를 제본했을 때 완전히 낫지 않았고 그래서 반쯤 미쳤던 것이다.

 

 

자신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했던 에밋은 어느 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발견한다.

제본사의 열병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병이 사실은 제본을 당해서 생긴 병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제본을 당했을까?

도대체 어떤 기억을 잊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미치게 만들었을까?

 

 

이 이야기는 3부작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시점이 바뀐다.

에밋과 루시안의 시점으로.

 

 

청소년 소설을 주로 써왔던 작가의 첫 번째 성인 소설이다.

문체가 상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보통의 내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제본당한 소년들.

제본당한 하녀들.

제본당한 사람들.

그들의 기억이 담겨 있는 책들을 사고파는 사람들.

제본한 책은 은밀히 보관되어야 하지만 그 은밀한 기억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권력을 쥐고, 재력을 가진.

겉으로는 신사의 모습으로 우아하고 근엄한 자태를 지니지만 그 겉모습 안엔 천박하고, 잔인하고, 욕망으로 가득 찬 짐승 같은 군상들이 있다.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드 하빌랜드 같은 제본사가 있고,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약속을 지키는 세레디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를 알지 못했던 시골 청년 에밋과 그 세계에서의 천박함에 치를 떨었던 루시안.

이 둘에게 벌어졌던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제본당하게 만들었을까?

 

 

책을 읽어감에도, 책을 끝내고도, 특별한 책을 만났다는 생각으로 설렜다.

사람의 기억 속에서 고통스럽고, 잊고 싶은 기억들을 제본해서 책으로 만든다는 설정도 새로웠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욕망의 민낯들도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독한 사랑도.

 

 

아름다운 표지만큼 이야기도 아름다웠다.

 

 

비릿한 사랑의 내음과 차가운 열정.

비뚤어진 욕망을 제본으로 지워버리고 계속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구역질 나는 신사도.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사랑으로 포장시킨 욕심.

금지된 사랑에 대한 용기.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질투.

용납할 수 없었던 것들...

 

 

복합적인 이야기를 다뤘음에도 전혀 군더더기가 없다.

시점이 바뀌고 배경이 달라져도 어색함이 없다.

압도적이지 않은 문체인데 압도 당하게 된다.

 

 

아마도 올해 내가 읽은 책들과 읽을 책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만고만한 이야기에 지친 당신

색다른 이야기를 찾는 당신

푹 빠져서 읽을 무언가를 찾는 당신

그리고 열려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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