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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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극이다보니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뒤루아도 야심만만했고 포레스티에나 왈테르 역시 야비했다. 마들렌은 지적이었고 마렐 부인은 사랑스러웠다. 책과는 달리 뒤루아의 승진은 포레스티에의 죽음 이후가 아닌 그가 신문사에서 쫓겨나고(이것도 책과는 다른 설정) 왈테르 부인을 접견하자마자로 빨리 처리했다. 인물들은 펄떡펄떡 살아 있었으나 책에서 주는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내가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느낀 인물은 뒤루아도 마렐 부인도 마들렌도 아니었다. 르베를 드 바렌. 그가 뒤루아와 걸으며 나눈 대화는 작가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웠다.  그런 그가 영화 속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직접적이라 그랬나?

 

"------인생이란 산길과 같소. 올라가는 동안은 꼭대기가 보이니까 행복을 느끼지요. 그러나 다 올라가면 갑자기 내리막길이 눈앞에 나타나고, 더욱이 그 끝은 죽음이오. 올라갈 때에는 천천히 올라가지만 내려갈 때에는 빠르단 말이오. 당신 나이에는 즐거운 일만 많아서 여러 가지 희망을, 결코 실현하지 못하는 희망도 가슴에 품지만 내 나이가 되면 이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그저 죽음이 있을 뿐이오."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시험 삼아 빠져나와 보시오. 살아 있으면서 당신의 육체나 이익이나 사상이나 또 온갖 인간성에서 벗어난다는, 저 초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거기서 밖을 바라보시오. 그러면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와의 다툼이라든가, 예산 논의 같은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알게 될 거요."

(184~187쪽)

 

  하지만 욕망에 찬 사람들이 늘 그렇듯 뒤루아 역시 이 대화를 애써 무시한다. 자신이 하는 일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야비한 일인줄 알면서도 계속해 나아가는 것, 오직 그것만이 자신이 살 길인양 행한다.  그러하기에 인간이란 욕망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물론, 일면 그가 처한 상황과 당시 심각한 사회불균형을 생각해보면 그런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진실로 사랑하는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 그 여인의 사랑도 마음껏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뒤루아의 성공에 대한 욕망, 왈테르와 라로슈 마티외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 마들렌의 지적 욕망, 왈테르 부인의 몸의 욕망, 마렐 부인의 사랑에 대한 욕망 등 이 책에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당시 사회 배경과 얽혀 잘 드러나있다. 이 책이 1885년에 나왔다고 하는데 꽤나 파격적이다. 더욱이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삼는 인물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점이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이다.  더구나 이 책의 결말이 권선징악적이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

 

   영화에서는 로버트 패터슨이 벨아미의 역할을 맡았는데 잘 어울렸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든다. 그의 미소가 벨아미와 어울렸다는 정도 외에는 몰입이 잘 안되었다. 다만, 마렐 부인 역의 크리스티나 리치는 내가 예전에 <페넬로페>에서 보던 그 소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책 중 인물의 역할 그 이상을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마들렌 역의 우마 서먼은 그에 비해 너무 나이 들어 보였고, 왈테르 부인 역의 크리스티나 스콧 리치는 입이 딱 벌어졌다. 특히 뒤루아가 질색하는 그 교태 연기는 나의 상상을 넘었다.

 

   이야기의 초반, 사랑스러운 마렐 부인이 식탁에서 말한다.

"그래요. 세상에서 즐거운 것은 연애뿐이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가당치 않은 조건 때문에 그것을 망쳐 버리는 일이 많아요."

  그 말에 마들렌이 덧붙인다.

"그래요......정말이에요....... 사랑을 받는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 진심으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그 기쁨을 막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읽으며 어쩔 수 없이생각난 책>

위험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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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인자 유재석 (체험판)
김영주 / 자음과모음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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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이윤석, 송창의, 김영주

이 네 사람의 책을 읽었다. 이들은 방송인이다. 정혜윤과 송창의는 PD이고 이윤석은 개그맨, 김영주는 방송작가이다. 정혜윤PD를 제외하고 세 사람은 예능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세 사람은 글 속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심지어 <웃음의 과학>이라는 대중적 교양서에서조차 말이다.

 

일인자 유재석

작가
김영주
출판
이지북
발매
201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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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방송작가는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가 유재석과 특별한 교류를 가지고 있는건가, 싶었지만 그도 아니었다. 그는 그와 함께 일을 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유재석을 그저 관찰하고 동경하고 급기야 존경하는 그런 같은 업종 종사자였다.

 

그런 그가 왜, 자신과 함께 일한 수많은 개그맨들을 제치고 유재석을 썼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자타공인 일인자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도 직접적이지 않은가 <일인자 유재석>이라고.

 

어제 저녁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정말 재밌어서 잠을 이겨가며 읽다가 오늘 아침 깨어서 마저 다 읽었다. 가독성이 좋다. 예능방송작가답게 지루할 틈이 없게 구성했다. 목차도 일목요연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감동과 정보가 적절하다. 그 사이사이 에피소드들을 통한 강조와 감동까지! 그 힘이 이 책을  손에 잡으면 놓치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지난 번 송창의 pd 책보다 더 단숨에 읽은 것 같다. 

 

작가는 몇달간 유재석을 직접 만나가며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에 담긴 유재석의 품성으로 봤을 때 얼마나 협조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지 그런 점에서 작가는 여타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협조적인 취재원을 두었으니 복도 많다. 자신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유재석은 또 얼마나 수줍어했을까. 그래도 그에겐 야망이 느껴진다. 아마 무척 기뻤을 것이다.

 

이 책의 잠정독자는 나처럼 일반인일수도 있고 연예인일수도 있고, 연예인지망생일수도 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꼭 예능에 접목 시키지 않더라도 그를 통해서 우린 보편적 내용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유재석의 7가지 습관이나 유재석 따라하기의 경우에는 일상 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내가 내 직업에 따라 취할 수 있다. 내게도 리액션은 중요하니까!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은 수다스러운 방송작가(?)라 그런지 같은 에피소드들을 여러 번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령, "그 사람 말한 거 대본에 있는거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92쪽, 121쪽(인용이긴 하지만), 237쪽에 걸쳐 세 번 나온다.(어쩌면 더 있을 수도) 많은 이야기들의 집합체인 책이지만 독자는 이런 흡입력 강한 이야기는 단숨에 읽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면 더 좋겠다. 읽는 데에 크게 문제가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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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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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를 읽고 나서 시작한 르클레지오의 두 번째 책이다. 소설이었기에 사건의 진행에 따라 읽기에 편했고, 그 사건들은 독자의 눈길을 붙들어놓았다. 어느 날 납치된 소녀, 그 소녀를 데리고 사는 랄라 아스마 할머니의 사랑, 그와는 상반된 그의 아들과 며느리인 아벨과 조라의 폭력에서 시작되는 라일라의 이야기, 우리는 작가가 펼쳐놓는 그 다양한 장소와 인물과 사건들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흑인 소녀인 라일라는 자신의 이름이 '밤'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 외에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자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그녀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고 느끼기까지 246페이지라는 긴 이야기가들어있다. 이 책이 초반에는 읽기가 편했지만 중반 무렵 굉장히 읽기가 어려웠는데 그녀가 자신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 무척 복잡했고 나쁜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었다. 그 여정들을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렵고 되려 기억에서 떨쳐내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다.

 

  아벨과 조라에게 벗어나기 위해 매춘녀들인 공주님들과 함께 지낸 일, 들라예 부부의 집에서 지낸 일, 결혼을 피해 도망친 일, 후리야와 프랑스로 떠난 일, 노노를 만나고그들을 떠나고 프로메제아의 부인에게 추행을 당한 일, 노노를 따라 자블로 거리로 온 일, 하킴과 엘 하즈 할아버지를 만난 일, 시몬과 주아외를 만난 일, 베아트리스 부부를 만나고 그들에게 마그다(조안나)를 입양하도록 도운 일, 후리야가 떠나고 주아니코와 떠난 일, 구제소에서의 생활 속에서 새라를 만났고 미국 보스턴으로 그녀를 찾아간 일, 결국 저프의 추행으로 그곳도 떠나야했고 장 빌랑을 만나고 샤베즈를 만나고 르로이를 다시 만나 니스 페스티벌에 가기 되게까지의 무척 많은 일들이 바로 그 일들이다.(물론 여기에 적지 않은 이만큼의 일들이 더)

 

  그녀는 배경 없이 떠도는 가녀린 그리고 귀먹은 흑인 여자(절대적 약자)였으므로 그녀에게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은 종종 그에게 性的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그 때마다 그들에게서 도망쳐야 했다.그 과정이 많이도 반복된다는 점이 화가 났다. 떠나는 그녀의 발길을 붙드는 곳은 이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음악'이 있는 곳이 되었다. 특히 새라를 만나던 순간, 허름한 소녀인 라일라와 새라의 눈길이 마주치며 행복했던 그 순간 아마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한 쪽 귀를 잃은 그녀에게 음악은 학습이 아닌 본능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음악을 본능적으로 표현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끊임없고 막막하고 낮고 깊은 울림, 파도가 육지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 한없이 이어지는 철로 위에서 열차가 달리는 소리,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뇌우의 간단없는 우르릉 소리였다. 또한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한숨소리, 혹은 그 낯선 이가 웅얼거리는 소리, 밤중에 깨어나 혼자임을 절감할 때 내 동맥 속으로 피가 흐르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연주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246쪽)

 

  그녀가 그녀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음악, 더 정확히 소리였고 그 소리를 표현하면서 그녀는 불안에서 벗어났다. 그 오랜 시간, 그 많은 사건들을 빠져나오며 그녀를 빛나게 해주는 단 한가지를 발견했을 때의 쾌감은 얼마나 짜릿했을까. 그동안 그녀를 따라다닌 고통의 그림자들조차도 고통스럽지 않지 않았을까. 그녀는 떠난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누구인지를 좀더 가까이 알기 위해서. 그녀를 이끄는 무언가에 따라 그녀가 다다른 곳은 결국 그녀가 태어나 버려지기 직전까지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회귀. 작가는 우리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한다. 그것을 알기 위해 개인의 역사를 돌아가다보면 결국 답은 탄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는 모두 같은 건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그렇다'라고 답한다. 개인의 겪어야하는 수많은 문제들, 고통들, 시련들, 아픔들을 끌어안고 우리는 모두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것을, 우리는 왜 다른 이들에게 그토록 가혹한가 말이다. 우리는 왜 이들을 학대한 자들보다 학대당한 자들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대자들과 공유하는 삶을 피학대자들과 사는 삶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우리는 대체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인가?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황금물고기인 라일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운오리새끼의 백조이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인간의 보편적 존재 가치를 말하고픈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와 한국의 미숙이와 힐랄부족의 라일라까지 우리는 모두가 빛나는 황금물고기요, 아름다운 백조라고. 아울러 한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스스로 견디는 모든 과정이 아름답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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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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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겠지만 밀란쿤데라의 책은 처음이다. 그런 사람이 아직 여기에 있다. 아마 어렵다는 편견 때문에 쉽게 시도하지 않았을 것으로 합리화 해 본다. 처음 <향수>책 몇 챕터를 읽었을 때 좀 어려웠다. 어원을 풀이하는 거며, 체코의 역사를 알려주는 거며 둘 다 내가 무지한 이야기들이라 집중해서 읽었어야했지만 결국 이해는 포기하고 약간의 기억만 가지고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간을 두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물론 처음엔 이레나와 구스타프의 알랭 드 보통식의 그런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자고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레나와 체코의 사랑이야기라고도 읽으려고 했다. 어쩌면 이 쪽에 더 치중해서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집중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느긋하게 글자들을 따라가다보니 나는 어느 새 체코에 와 있었다.

 

  기억이란 얼마나 조악한 것인지. 22번 째 챕터와 35번 째 챕터에 가면 기억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 그것에 의존하는 우리들이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돌아가고자 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욕구는 그녀에게 과거의 존재, 과거의 힘, 그녀의 과거의 힘을 단번에 드러냈다. 그녀 인생의 집에, 뒤를 향해, 자신이 겪어 온 것을 향해 열린 창문들이 나타났다. 그 후로 이러한 창문들이 없다면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83쪽)

 

  향수병이다. 작가는 이러한 향수병이 젊은 날(특히 더 어린 날일수록)에는 운명이나 사랑과 깊이 관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련한 기억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더더욱 남은 인생이 얼마 없을 경우에 느껴지는 감동이란 커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인생 말년에 떠올릴 유년의 기억, 사랑의 기억, 그리고 떠나온 조국에 대한 기억들이 얼마나 고귀하게 다가올지.

 

그런 점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인 조제프나 이레나의 귀향은 자신들에게 그리 큰 감동을 가져주지 못하는 것 같다. 도리어 그들은 그들이 떠난 이십 년의 기간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모른 척 하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하여 화가 난다. 그들에게 고국은 아름다움이자 동시에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 뿐이라는 점에도. 

 

그녀가 외국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여자들은 그녀에게서 이십 년간의 삶을 잘라 내었다. 그리고 이제 질문 공세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꿰매려고 했다. 마치 그녀의 팔뚝을 잘라 내고는 손을 막바로 팔꿈치에 갖다 붙이려는 듯이. 마치 그녀의 장딴지를 잘라 내고 발을 무릎에 붙이려는 듯이. (47쪽)

 

  이러한 외과적 수술로는 그들의 향수병 결핍 증상을 고칠 수 없다. 조제프처럼 나 역시 일종의 '향수병 결핍' 혹은 '기억의 피학증적 왜곡'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크게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보기엔 그리워할 일들이 많을테지만, 물론 나 역시도 때때로 추억에 젖어 웃음짓곤 하지만 지금이 더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유년 시절의 집으로 귀향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조제프처럼 그 때의 기억은 나에 대한 힘을 잃었다.

 

  이레나가 말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유일한 때'와도 관련이 있다. 이레나와 조제프는 망명을 통해 자신들의 자유를 얻고, 의지와 일치된 자아를 갖게 되었다. 체코를 잊은 채로. 나 역시 그렇다. 부모의 그들에서 벗어나고 학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가정에 포함되기 전까지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돌아가고픈 고향이다.

 

  이레나와 조제프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체코에서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나는 내 유년 시절의 장소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이레나가 다시 가족 체제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나역시 종종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때로 돌아가고프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저런 물음들을 조용히 머금으며 책이 끝났다. 작가의 큰 이름과는 달리 이야기가 매우 감각적으로 펼쳐져서 신선했다. 프랑스나 동유럽의 영화 한 편을 보고난 느낌도 들었다. 관찰 대상이 수시로 바뀌며 짧은 이야기들이 연결고리를 맺으며 교차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밀라다와 구스타프와 장모에 대한 이야기가 내겐 남아있지만 그들은 그들을 닮은 사람들에게 맡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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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 - 보이지 않는 대륙에 가까이 다가가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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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늘 그렇게 같은 별자리를 그려두고 땅을 바라보건만 땅은 언제나 제 모습을 바꿔 하늘을 마주한다. 인간에게 날개가 있고 하늘을 소유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하늘도 무차별적으로 그 모습을 훼손당했으리라.

 

라가, 작가 르 클레지오가 가까이 가고 싶었던 바누아투의 작은 섬. 많은 나라와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학대당한 약한 섬. 고통에 저항하며 여전히 아름다운 섬. 평화를 가장한 불안의 섬. 그러하기에 작가는 그 섬에 조용히 스며들어 그들의 영혼을 끄집어낸다.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영혼이 있는 그 섬의 주인은 그 섬과 그 섬에 사는 자유롭고 강인한 그들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 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그저 손님의 자세로 그들의 모든 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곳의 삶이 우리가 보기엔 미개하고 열악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모든 폭력과 오만한 태도 보다는 그들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비열한 전염병을 가져간 과거를 절대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프랑수아 플라스의 그림책 <마지막 거인>의 마지막 말은 그 책을 읽은지 한참이 되어도, 내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하더라도 한없이 깊은 미안함이 생겨 떠올릴 때마다 속이 아리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모든 행위는 폭력이다. 그들을 문명의 세계로 이끌어주겠다는 오만도, 그들의 여권을 신장시키겠다는 몰이해도 모두 폭력이다. 로버트 제임스 플레처와 폴 고갱도 그들의 행위가 그 섬에 대해 가하는 최악의 선택 중 하나가 될 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라가를 외부에 알렸다는 자아도취감에 빠져 살았으리라. 우리 역시 여전히 우리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 밤도 하늘의 별은 빛날 것이고 늘 그렇듯 우리에게 같은 아름다움을 펼쳐주고 있을 것이다. 하늘에 대한 소유욕을 낭만적 상상으로만 만족하듯 땅에 대한 소유욕도 낭만적 상상으로만 선물하면 안될까? 

-저 멀리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작은 섬 하나를 너에게 갖다 줄거야.

라는 그런 사탕발림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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