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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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티처럼 감기기운을 달래주는 따뜻함이나,
청귤에이드처럼 적당히 신맛의 청량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라면, 당연히 그 반대의 어떤 고통들로
독자를 이끌 걸 눈치챘어야 하는데
제목과 표지의 기운에 취해 선입견이 생겼다.

작가의 말은 지나치게 솔직하여, 어렵지 않게 여섯편의 이야기에
작가 본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요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니
글을 쓰는 사이사이 마라톤 같은 운동을 하거나,
쓰는 일로 강단에 서는 작가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작가의 글에서는 요가자세의 유연함과 경건함이
배어나올 것만 같다. 이 또한 선입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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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래끼 햇살어린이 56
성주희 지음, 김국향 그림 / 현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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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기한을 지키려는듯 서둘러 마무리를 지은 뒷부분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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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눈으로 대강 살피면 잘못 읽고 넘어갈 제목이다. 아니면 빌렸던 도서관에 다시 돌려주고 나서 얼마후에 제목을 이렇게 기억할 것만 같다. ‘가만히 혼자 울고 싶은 오후‘. 웃다와 울다는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얼추 상반된 표정인데, 책을 덮으면 자꾸 웃고 있다는 장석주 작가가 시골집 툇마루나 마당에 내어놓은 평상에 앉아 울고 있을 것만 같다.

비슷한 문체의 글이지만, 다른 작가의 글인줄 알았다. 올 봄에 낸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당신을 만나≫를 두어달 전에 구입해서 읽었던 적이 있고, 이 책은 작년 봄에 출판되었다. ˝가만히 오후˝를 삼분의 이쯤 읽고는 ‘어라 이상하다‘싶어 책장을 뒤져보았더랬다. 이게 다 부족한 독서력과 주먹구구식 읽기의 부작용이리라. 어쨌든, 꽤 다작이신 작가의 근작 두편중에는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에 더 끌리더라.

일본에서 번역되어 들어온 책 중에 그런 책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다며 가구고 세간이고 거의 들여다 놓지 않고 있던 물건도 내다팔고 심지어 수건도 한 장으로 사는. 어딘가 찾아보면 우리집 책장에도 그런 책이 한권은 꽂혀 있을 건데... (찾아내서 ‘상품넣기‘에 추가해 놓음)그런 책 수십권보다, 이 책에 언뜻언뜻 비치는 작가의 삶과 문장이 훨씬 소박하게 느껴지고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다. 실용서적보다는 문학을 읽자.

지금부터는 몇군데 접어둔 글들

1)

젊고 미숙한 내영혼을 키운 것은 도서관에서 읽은 무수한 책들이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단테, 셰익스피어, 노자, 장자, 붓다, 혜능, 굴원, 도연명, 부처, 예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코트 니어링, 월트 휘트먼, 니체, 하이데거, 휠덜린,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사르트르, 카뮈, T.S. 엘리엇, 바슐라르, 도스토옙스키, 헤르만 헤세, 카프카, 보르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 막스 피카르트, 바슐라르, 파울 첼란, 콜린 윌슨,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등 위대한 연혼들이 내사 만난 스승들이다 그들은 무지와 결핍으로 메마른 대지와 같은 내 영혼을 적시고 자라게 했다. 나는 이십대 초를 주로 시립도서관에서 잡다한 책들을 읽으며 보내며, 갓난아기가 젖을 빨 듯 책과 문장을 탐독하며 빨아들여 피를 만들고 뼈대를 키우는 일에 몰두했다. 그 ‘스승‘들의 가르침 없이 무른 본싱이 시키는 대로 내달렸다면 나는 건달이나 사기꾼, 혹은 이런저런 중독자가 되어 물색, 성색, 주색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테다. 내가 하찮은 인간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않은 것은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158~159쪽)

2)

1961년 태어나 마흔한 해 만에 홀연 생을 등지고 떠난 한 무명시인의 시집도 내 도서목록에 들어 있다. 그는 단 한 권의 유고 시집만을 남겼다.

나중에 나중에
고요한 시절이 오면
잘생긴 아들을 낳으리라
아들이 자라
착실한 소년이 되면
함께 목욕탕에 가리라
싫다는 아들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하리라
할 수 없어서 나의 등을 밀었어도
아들은 내게 제 등을 맡기지 않으리니
나중에 나중에
내가 늙고 아들이 장성하면
다시 목욕탕에 가리라
싫다는 나에게
아들은 등을 돌리라고 하리라
할 수 없어서 나의 등을 맡겼어도
아들은 내게 제 등을 밀게 하지 않으리니
나중에 나중에
고요한 시절이 오면

윤택수(1961~2002), <찬가>(204~205쪽)

3)

올해도 이른봄 지리산 산수유꽃들은 피어날 테고, 여의도 윤중로 벚꽃들은 눈부시게 흐드러졌다가 분분한 낙화를 하겠지요. 우리가 꽃이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당신의 까만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처럼 점점이 내려앉은 하얀 꽃잎들, 가을에는 순천만의 갈대들이 저문 빛 속에서 사각거리겠지요. 연인들이 헤어졌다고 오던 계절이 안 오거나 흐르던 시간이 멈추는 경우는 없어요. 부디 잘 살아요, 당신. 울 일이 있을 때 조금만 덜 울고, 웃을 일이 있을땐 조금 더 크게 웃어주세요. 당신은 웃는 모습이 예쁘니까요. 나는 날마다 청송 사과 하나씩을 깨물어 먹고, 만 보씩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야 세상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는가를 궁구하며 살겠어요.

잘 있어요, 당신(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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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8-12-2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와 제목이 참 잘어울리는 책이네요. 수목원 안의 온실 느낌^^

봄날의 언어 2018-12-27 23:44   좋아요 0 | URL
저는 오히려 표지를 보고는 자연실로 찾아갈 뻔 했어요~ ^^;
 
전두환 타서전 역사하는 신문 1
정일영.황동하 엮음 / 그림씨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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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보도지침에 따라 권력자의 구미에 맞도록 편집되어 신문이 되나니.
가짜뉴스는 위풍당당 했습니다.

자국민의 심장에 총부리를 겨누어 살상을 서슴지 않았던
군인출신의 대통령이 있었고, 그가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도 이 나라는
병영문화가 곧 사회문화인 국가였습니다.
강압적인 언론통제 아래에서

국민의 화합과 선진국이라는 미래로 나아가는 길에 반대로 일관하는!
폭력시위로 일관하는 대학생들, 좌경용공 세력들, 배후의 재야인사들
폭도 대접받은 광주시민들은.
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뿌리 뽑아야할 암적인 존재
눈엣가시들이었겠죠.

이 책은 100% 신문기사의 스크랩으로만 이루어져있는데도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한 느낌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썼다는 회고록을 읽어볼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타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합니다.

29만원이 재산의 전부인 채로
몇년을 연명했죠? 29만원이라고 불리운 지도 꽤 된 거 같은데
하여튼, 이 타서전을 보면
29만원님이 최고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신문기사마저도 영웅신화입니다. 그 신화가 깨진 시대에 서서 읽는대도
아이언맨, 캡틴 코리아나가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 당시 대중들 중에는 깜빡 속아넘어간 사람들이 많았겠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법정에 서서 그의 친구 노태우와
꼭쥔 두손을 보면 ‘측은지심‘을 느껴서는 안되겠죠.
논픽션 ‘전두환 타서전‘에서 우리가 세겨야할 말은
‘권선징악‘이어야 합니다. 못된 놈들!

근데 참, 나쁜 짓 한 놈들은 벽에 똥칠할 때 까지
오래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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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이명원 지음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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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이라는 평론가를 처음 알게 된 책은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였다.
개정판으로도 검색되는 걸 보니, 읽은 지 한참된 게 분명하다.
문학평론에 대해 아는 바 없지만,
그가 등장해서 문단의 문학권력 논쟁에 불을 지피고,
주례사 비평이라던지, 평론가의 표절 문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는 위의 ≪마음이 소금밭...≫이 독서에세이인데 비해
주로 이명박 정권 시절의 사회비평에 가까운 글들이다.
이제 와서 엠비정권을 되돌아보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용산참사와 같은 일들을 잊지 않고,
이제는 일상이 된 신자유주의의 어제를 복습하는 차원에서 읽어둘 만 하다.

모두가 다 알고있다시피
사대강과 BBK의 각하께서는 감옥에 가 계신다.
가끔 그분의 먹방이 그립다.



자유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내 가슴은 고동친다. 부자유가 가져다줄 비만보다 나는 자유를 찾음으로써 얻게 되는 강골의 마른몸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 역시 좋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제의 가장 소중한 덕목이 표현의 자유 아닌가. 그러나 김수영이 어떤 시에서 쓴 것처럼 자유에는 얼마간 피 냄새가 섞여 있다.
 그러나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를 진정으로 염려해주었던 분들이 자주 내게 들려주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웬만하면 눈 질끈 감고 살아라." 이 말 속에는 오랜 세월 세속적 처세를 통해 근근이 눈치 보며 살 수밖에없었던 생활인들의 통계학적 지혜(?)가 잘 담겨 있다. (106쪽)

신문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캄캄해진다.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지만, 간명한 보도기사의 이면에서 절규하는 인간들의 신음소리가 들기 때문이다. 보도기사의 어조는 건조하다. 죽음조차도 담백하게 기술하는 냉담한 언어를 자꾸 들여다보다 보면, 마음조차 냉담해지는 것 같다. 어제의 보도기사에는 증권시장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이 있었다. 시장은 인간이 아닌데, 그것을 의인화해 ‘인격권을 부여하고 있는 듯한 표현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의 뉘앙스 역시 동일하다. 사람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모욕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사람들 그 자신이 염려하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경제‘라는 유사 생물이다.
이에 반해, 사람에 대한 세상의 태도는 무슨 ‘소모품‘ 바라보듯 냉담하고 경멸적이다. 노동자의 대칭어는 ‘사용자‘다. 그런데 사용자라는 이 용어 속에서 노동자의 ‘인격권‘을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용어는 물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가상각비를 증가시키면 페기되듯, 노동자 역시 물건처럼 폐기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경제용어의 싸늘한 언어체계에서 ‘인간의 얼굴‘은 숨쉴 곳이 없다. 한 때 이 땅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말이 유행한 바 있었지만, 물건 취급도 못 받는 오늘의 인간에게 ‘얼굴‘이 있을 리 없다. ‘얼굴 없는 자본주의‘는 야만이다. 인격에 대한 모욕을 당연시하는 추상적인 ‘경제‘를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가(175~176쪽)

최근 중국국가발전위원회는 2020년까지 중국의 식량자급률을
95%로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중국의 식량자급률은 92%인데, 이것으로는 미래의 식량 안보가 걱정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다. 오늘날 선진국의 지표는 공산품을 통한 무역 이익이 아니라 식량자급률이다. 실제로 일본을 제외한 서방 선진국들은 모두 식량자급률 100%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은 정반대다. 현재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8%수준이지만, 주식인 쌀을 제외하면 겨우 5% 수준이다. ‘식량 안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거의 ‘붕괴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벼농사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정부의 농업 무시탓에 논농사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1년에평균 2헥타르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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