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선인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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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바다의 선인 카츠오를 선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 아늑한 집에서 하루 하루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그것보다 아름답고 평안한게 어디 있을까.

나는 하루 종일 집과 바닷가를 뒹구며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수영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상상만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건 나와는 거리가 멀기에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 같다는 선인. 카츠오도 복권이 당첨되기 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였을 것이다. 복권으로 인해 당분간 먹고 사는데는 문제가 없었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도시 사람들에겐 그가 무료해 보일지 몰라도 카츠오도 나도 만족할만한 상황이였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났으니. 덤으로 별 도움 안되는 신神 판타지까지.

 

옮긴이는 판타지의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판타지의 등장은 생뚱맞고 어색했다. 신이라는 생각은 전혀들지 않고 카츠오의 집에서처럼 식객이 더 어울리는 역할이였다. 대부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알고 있기도 하지만 카타리기처럼 판타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부분에 큰 의미부여를 둔 것은 아니지만 판타지는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무얼 해줄 수 없기에 신이 존재한다며 엉뚱한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고 전혀 신 같아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한 판타지는 카츠오, 카타리기, 카렌에게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카츠오가 가지고 있는 의문처럼 모두는 판타지를 자연스레 잊기도 하고 자연스레 받아 들이기도 한다.

카츠오가 시력을 잃은 후 바닷가에서 첼로를 켜고 있을때도 말이다. 카츠오에겐 판타지의 출현이 카린처럼 자연스럽다.

그녀가 떠나고, 그녀와 오랜시간 같이 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후에도 늘 기억 저편에 살아 있어 자연스레 꺼낼 수 있는 것처럼 판타지는 더 쉽다.

대화하기도. 그리고 기억하기도.

 

카츠오는 카린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의 티를 별로 내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속에 그녀, 그리고 그녀와의 추억을 깊이 담은 것 같다.

그 추억이 그의 전부가 되어 버린 첼로 속에 봉인 되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카타리기는 카츠오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전부터 카츠오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카츠오도 알기에 그녀에게 좋은 답을 말해줄 수 없지만 그녀는 오랜시간 마음의 방황뒤 카츠오를 보러 온다. 아마 그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그를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후 좋은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게 변화했을 뿐 새로운 그들의 변화는 충동적이지 않을 것이다.

 

판타지의 등장, 카츠오의 삶이 독특하게 다가왔지만 카린의 죽음 카타리기의 마음에 있는 카츠오를 향한 변치 않는 모습 등은 충분히 식상한 내용이였다.

여기 저기에서 접붙인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였다. 너무 뻔한 내용들에 익숙해져 있고 왠만한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약아버린 나일지 모르지만 식상함뒤에 오는 무의 감정은 뜨뜻미지근 했다.

그러나 카츠오의 생활은 부러웠다.

통장의 잔고가 아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아닌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사랑하고 자신을 새로 발견해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그렇기에 그의 용기를 부러워할뿐 '당신은 참 식상해'라고 말할 수 있는건 용기가 아닐 것이다.

나를 향한 자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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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 못할 일 -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59인이 말하는
도종환 외 지음 / 한국일보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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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59인이 말하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이라...

그와 비슷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01인의 가상 유언장이라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쓴 글을 엮은 것이였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적이 실망하고 말았다.

유언이라는 낯섬과 주제가 정해진 탓인지 가상이라는 제목이 있음에도 너무나 가상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 비슷한 59인의 이야기라.... 읽기도 전에 짜증이 났고 조금 읽어본 후에도 도저히 마음이 가질 않아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 시간이 흐른 후 힘없이 퇴근해 집에 돌아와 책상을 보니 읽을 책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마음이 쓸쓸하고 무기력감이 밀려온 탓일까. 억지로 밖에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짜증과 억지가 아닌 마음을 열어 놓고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나의 마음상태와 가장 잘 맞았기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연말에다 새해를 맞이해야하는 부담감으로 나는 계속 의욕을 잃은 상태에다 무기력에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날들의 연속을 마주 하고 있었다.

무엇으로도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가시는 늘어만 가고 그럴때마다 거칠게 불평을 내뿜는 나였다.

그러한 상황이였기에 그렇게 보기 싫어 하던 이 책을 꺼냈으리라.

그냥 읽고 해치울 생각에 집어든 책이였는데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감정이 격해 있었고 연속으로 마주한 마음찡한 사연들이라서 그랬겠거니 해도 '감동은 기적처럼 온다'에서 위험에 처한 회사를 위해 방패막이를 해야 하는 씁쓸함을 안고 있는 사장 앞에 직원들이 사재를 담은 통장을 내민 것이다. 평상시의 나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연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였을 텐데 나는 왜 눈물이 났던 것일까.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직원들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직원들이 보여준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나는 현재 내가 잃어버린 가장 큰 것이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믿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나를 찔러 오는 가시에 저항하고만 있는 나를 한발짝 벗어나 바라 보게 됐기 때문이다.

 

59인이 전하는 사연은 다양하고 다른 느낌을 안고 있지만 그들이 그 일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다.

상대방이 내게 보여준 신뢰때문이다. 가족이나 낯선 사람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 마주하게 된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발견했을때 그들은 마음 속에 그 일을 각인시킨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많아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이 신뢰에 대한 마음을 대신 품어 버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다짐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그러나 어렵고 힘겨운 시절을 바탕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라 괜한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빵빵한 학력과 이력을 살펴보건데 이런 사람들의 잊지 못할 일만이 감동을 주는것일까. 그들은 나같은 사람과 달라서 내가 무심히 지나쳐 버린 일들을 보며 깨달아 성공한 것일까라며 억지떼를 써보아도 나의 거부감은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내가 느꼈던 신뢰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어느새 이렇게 약아빠진 마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나는 아직 신뢰를 줄지도 받을지도 모른다.

신뢰는 주고 받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며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의 신뢰는 너무나 얇고 얕다.

내가 흘렸던 한방울의 눈물은 얇은 나의 마음을 적셔 단단하게 해주는 시초라고 생각하고 싶다.

 

59인의 잊지 못할 일들이 과연 평생이란 말을 집어 넣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함인가, 대단함인가를 논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내가 건진 이 마음자세와 다짐을 굳건히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마음속에 있는 불신을 깨트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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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네야 테르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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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10대들의 모습을 다룬 소설을 보면 왜 내가 10대때는 이러한 소설을 많이 접하지 못해 자극을 받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10대때의 나의 독서를 살펴보면 그냥 닥치는대로 읽었고 그나마 자각하고 골라 본 것은 10대 후반에 읽은 문학 조금이 전부다.

대부분 크게 공감이 가지 않고 내 수준에 맞지 않는 독서였다는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10대의 독서를 운운하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 가브리엘 때문이다.

 

17살의 나이에 갑자기 비워진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고통의 과정의 겪으며 자신의 내면에 가까워지는 가브리엘이 나는 부러웠다.

아빠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그가 부럽다는 말이 얼핏 잔인하게 들리 수도 있으나 아빠를 잃고 아빠가 어떠한 떠남을 강행했든 어떠한 과정이 있었기에 아빠를 원망했든 결국은 아빠를 소중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 마음이 기특해서이다.

자신도 의아해하는 엄마와 아빠의 바닥을 드러내면서도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을 봤으면서도 가브리엘 자신도 그렇게 아빠를 사랑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자살을 한 아빠에게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고 또한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편지를 쓰기로 한 가브리엘.

여기에는 아빠에게 쓴 편지와 자신의 일기들로 채워져 있지만 17살의 가브리엘이 가질만한 성숙을 뛰어 넘는 내면이였다.

때론 유치할때도 있었지만 쉼 없이 고뇌하고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는 그의 내면은 무르익음의 농도가 짙었다.

 

아빠에 대한 수 많은 의문들과 엄마에 대한 짜증, 그리고 현실적인 사랑과 모순적인 사랑의 경험 속에서 똑부러지게 나아기진 않지만 깊은 늪 속에서 서서히 뭍으로 올라오듯 그 과정은 적나라하다.

그의 사고와 마음의 드러남은 일기와 편지를 통해 거짓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자신도 아빠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듯이 그의 행동도 서서히 자신이 이끄는 진실을 향해 가고 있다.

 

엄마에게 아빠의 죽음의 전반상황을 듣게 되고 엄마, 아빠에 대한 고통과 분노의 감정 속에서도 이젠 엄마와 더 가까워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동안 아빠와 너무 다정해서 엄마가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으니 이젠 그러한 아빠가 없고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져도 결국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빠니 엄마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닌 스스로의 생각으로.

늘 일에 찌들려 아빠와 가브리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 해 주지 못하고 아빠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던 엄마도 가브리엘 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와 가깝게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둘에겐 미래가 있잖니. 안그래?" - p.208

 

아빠의 죽음으로 엄마도 가브리엘도 커다란 고통과 혼란스러움 가운데에서 헤메였지만 이젠 각자의 미래이면서도 공동의 미래이기도 한 그들의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 혹은 자책감에서 나오는 혼돈 속에서 삐뚤어 질 수도 있었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늘 곁에 있어주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는 알레한드라의 품으로 안착하려는 마음이 애닯게 다가왔다.

책을 읽는 도중에는 이러한 느낌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가브리엘의 토로를 보고 있자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일 정도로 내면의 혼란을 다 끌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끌어 냈다면 힘들다, 살 맛이 안난다로 끝내 버렸을 그 무언가를 혼란스러움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는 10대 때 그런적이 있었던가. 20대인 지금의 나는 나를 더 감추고 살고 있진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 가브리엘의 혼란을 부러워하며 그의 안착됨을 기특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10대의 나의 혼란은 철저히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었고 20대인 지금의 나는 태연히 마음을 드러내지 않음에 능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모습을 찾아야 하는건 가브리엘이 아니라 가브리엘을 통한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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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연애는 왜 그 모양이니?
로리 고틀립 외 지음, 윤정숙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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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며 잠시 나마 '나의 연애는 왜 이 모양일까' 라고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논할만한 연애담이 없다는 것이 참담하게 다가왔다.

연애를 안한지가 근 3년이 되어가고 그나마 3년전의 경험도 내 인생에서 한번뿐인 연애였으니 갑자기 이 책을 마주하기가 고약스러워진다.

한심하고 못된 나를 만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 혹은 스스로 위로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연함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이 책을 마주하기 전부터 나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첫 대면부터 이렇게 책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주관적인 생각을 덕지 덕지 붙여 책을 펴들고 보니 위험했다.

이 책의 저자의 문체가 지극히 자조적이였기 때문이다.

he said, she said로 남,녀의 상황 대조를 실어 놓았지만 내가 책을 읽기 전부터 빠져들었던 자괴감의 늪으로 끌고가기 충분할 정도로 씁쓸함이 많았다.

거기다 정서의 낯섬이라니...

솔직담백한 고백 속에서도 그들의유머, 그들의 생각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를 쉴새없이 되뇌이게 되는 동떨어진 느낌은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무조건 동조하기에는 무리가 갔다.

오히려 당신들의 연애는 왜 그 모양이냐고 진실됨을 찾아 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의 진실을 찾는단 말인가. 사랑의 진실? 그들이 계산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거짓을 향해 갔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다.

단지 나는 현실 속으로 뛰어 들지 못했고 그들은 뛰어 들어 부딪혔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

그래서 그들의 부딪힘을 지켜보며 혀를 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경험담과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아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연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이라도 품고 싶다고 이렇게 다 드러내는 건 싫다고 말이다.

이런 나의 모습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애의 쓴맛을 잊은 후에 품은 환상이 너무나 달콤한 것을...

 

이 책에서 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사귀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의 많은 부분들 속에서 분명 연애의 환상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연애를 자꾸 실패했기에 그러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완벽한 소울 메이트는 없다는 것을 보고도 난 왜 이들의 말을 믿고 싶지 않고 당신들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직은 너무나 개방적인 그들의 사고방식과 연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리라. 당신들과 같은 솔로이지만 그렇게 재고 빼고 더하는 복잡함보다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당신들의 연애는 머가 그리 복잡하냐고 짜증만 내고 있는 것이리라.

 

자조적인 서술도 싫고 정서의 낯섬에서 나오는 유머도 어색하고 무엇 보다 환상을 갖지 못하는 드러남이 거북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솔로일 수 밖에 없다고 비난을 던져와도 조금은 위로를 기대했던 나는 심하게 풀이 죽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해야 한다면 연애와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이런 연애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좀 더 유쾌하게 써내려가지 못한 그들의 연애, 좀 더 아기자기하게 꾸미지 못한 책의 구성등이 조금은 아쉽게 다가왔다.

그 아쉬움이 왜 너의 연애는 그 모양이냐고 경종을 울려주는 자극일 수도 있는데 그 자극을 그들의 연애담으로만 돌려 버려서 민망하기 그지 없지만 내게는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고 당신들처럼 계산적인 건 싫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조건주의자가 되어버려 그 조건 속에서 연애의 환상을 품고 있는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사랑만을 지향하면서 어느새 사람이 아닌 조건으로 판단하는 속물근성을 가져버린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정작 중요한 나는 제대로 갖추어 놓은 것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조건이 필요없는 불꽃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르면서도 현실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나를 거둬들이지 못한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빛깔 없는 사랑을 꿈꾸었던 것일까.

책에 대한 수 많은 푸념을 쏟아 놓았지만 분명 이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씁쓸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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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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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을 읽고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는 신간이다.
'그 남자네 집'은 소설이였지만 '호미'는 산문집이라서 조금은 더 관심이 가면서도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남자네 집'에서 자자의 솔직함을 보며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이렇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란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솔직함에 묻어 나오는 투덜거림이 조금은 진부해서 잠시 주춤거렸는지도 모른다.
 
이번의 책은 어떤 느낌일까 라는 설레임과 혹시 이번에도 푸념거리가 많은건 아닐까하는 걱정 가운데 마주한 '호미'는 우선 깔끔했다.
책 크기가 다른 책들에 비해 조금은 아담해서 손에 잡기도 편했고 어디에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책에 빠지다보니 읽은 시간은 적었지만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어서 추억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버스 안에서 읽고, 병원 대기길 복도에서 읽고, 혼자서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그 시끄러운 던킨 도너츠에서도 읽고, 버스정류장에서 철퍼덕 거리고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렇듯 책 속의 이야기와 나의 추억이 겹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듯 자잘한 일상 속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특히 1장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는 마침 명절이라 시골집으로 향하는 내게 가장 찬란한 예찬이 되고 있었다. 분명 시골에서 자라서 저자의 전원생활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도 수 많은 불편들을 감수하며 나는 과연 살 수 있을까란 생각들을 하며 그렇게 사색에 빠졌다.
내가 늘 스쳐 버렸던 것들, 밟고 지나쳤던 것들에게 말을 걸고 친해지는 모습이 잠시나마 나를 정화시켜 주었다고나 할까.
분명 자연속에서 친화력을 갖으면서 그런 여유를 느끼지만 어느새 시멘트 건물이 그득한 도심으로 돌아오면 나의 마음은 시멘트 보다 더 굳게 닫혀 버리고 만다.
그 마음을 계속 지킬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확실히 산문집 속의 저자의 글에서는 세월의 향이 묻어났다.
자연예찬뿐만이 아니라 표현력과 몰입하게 되는 끌림까지 언어의 구사는 담백했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과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함의 조화라고나 할까.
때로는 아이같고 때로는 노인 같고 때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내 한몸 아끼지 않는 불굴의 청년으로도 보이는 저자의 이면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허우적대며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현실이 돌아오고 들은 적이 있는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고 다른 시각으로 보는 또 다른 추억은 서서히 '그 남자네 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꼿꼿하고 칼칼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복되는 이야기 속의 푸념을 잔소리로만 인식해버리는 굳어버린 귀와 내 마음 때문이리라.
어쩜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왔을때에 현실감을 잊고자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펴든 내 마음을 들켜버린 후 그래 주지 못했다고 이렇게 모순된 푸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자연속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첫 시작의 울림을 피할 수 없는 나의 삶으로의 회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무조건 현실도피만 하고 싶다는 나의 마음은 정당하지 못하리라.
 
평범하고 자잘하다고 생각하는 일생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취할 수 없듯이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것, 긍정적인 아픔을 품는 것, 혹은 중립을 취하더라도 나의 일상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늘 똑같은 일상의 패턴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 나를 제대로 내려다보고 내 자신에 솔직해져 간다면 현실도피를 일삼는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나 같은 젊은이의 생각이 이러할진대 문학과 함께 하였다지만 이젠 할머니의 소리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는 작가 박완서님은 어떠할까.
일흔이 넘은 노인이라고 말하지만 글 속에서 늙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할머니라 칭하는 것은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요 나의 부끄러운 잔상을 말하는 것일뿐 고리타분함이라든가 세대갈등을 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나이를 뛰어넘는 저력에 대한 자그마한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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