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때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읽고 비둘기를 읽었다.

그 당시 나의 독서 수준으로는 쥐스킨트 작품속 주인공들이 충분히 괴장쩍이여서 거기서 쥐스킨트 작품 행보는 멈췄다. 그러다 20대 초반에 제목에 이끌려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또 멈춰버리고 향수를 읽고서야 쥐스킨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향수'라는 작품의 강렬함도 있었겠지만 그 동안 어떻게든 쥐스킨트의 작품을 읽어오면서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쥐스킨트식의 결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다시 쥐스킨트의 작품을 뒤적거리게 되었고 늘상 찜해두던 콘트라베이스를 이제 읽게 된 것이다.

 

예전에 드럼레슨을 받으러 갔다가 레슨 선생님의 음반중에 독특한 음반을 발견한적이 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6명이 낸 음반인데 특이하게도 콘트라베이스로 여러가지 소리를 내며 콘트라베이스로만 연주를 한다.

무척 궁금해서 그 음반을 기억했다가 몇년뒤에 그 음반을 샀는데 프랑스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이루어진 그룹 'L'orchestre de Contrebasses(로케스트르 드 콩트러바쓰)의 'Bass,Bass,Bass,Bass,Bass and Bass.'란 제목의 음반이였다.(오.. 놀라운 사실은 독후감을 쓰면서 이 음반을 들으며 쓰려고 앨범자켓을 열어보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의 구절이 들어 있는게 아닌가... 오옷! 놀랍도다!)

그 당시에는 이런 장르는 듣지 않아 따분해서 처박아 두고 말았는데 요즘 꺼내서 들어보니 괜찮았다.(나이가 들면 식성뿐만 아니라 음감도 변한 다는걸 느끼며 산다..^^)

여튼 콘트라베이스를 읽기 전에 이 음반을 통해 조금은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에 대해 생각이 열려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데 장황스러워졌다.

 

그러나 모노 드라마 형식의 글로 마주한 콘트라베이스는 또다른 느낌이였다. 이 책에 나오는 국립오케스트라 연주자인 예술가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콘트라베이스는 그의 내면, 삶에 대한 조화를 훌륭히 그려내고 있다. (오히려 고등학교때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콘트라베이스에 대한 예술성과 취약성을 감춤없이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자신과 얽혀있는 콘트라베이스 이야기며 성악가 세라를 사랑하는 이야기도 서슴치 않고 뱉어낸다. 콘트라베이스를 얘기하자면 음악 얘기가 빠지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오페라 얘기가 많이 나온 부분은 재미나게 읽었다. 작년에 오페라에 관심이 가서 오페라에 대한 정보를 캐내면서 음반도 사보고 인터넷으로감상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조금 알아뒀던 정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도움이 되었다.(당연히 그 오페라들로 인해 콘트라베이스를 이해한다는 사실과는 먼 것들이지만...) 그래서 그런 예술적인 부분들만 나온다 생각했는데 자신의 직업, 인생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에게 어떻게 콘트라베이스 이야기만 있겠는가..

자신의 사생활이며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놓을 때는 더더욱 친근감이 느껴졌다. 세라를 사랑하는 마음. 그러나 자신은 눈에 띄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라는 사실안에서 용기가 있으면 공연중에 세라 이름을 부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번역가의 말마따나 이야기 소재거리로는 참으로 소박한 주제를 이렇듯 떡하니 읽을거리고 만들어내는 쥐스킨트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어느새 그 안에 빠져들어 온통 콘트라베이스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는 또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것 또한 놀라웠다.

콘트라베이스를 잘 아는 듯... 연주는 못해도 콘트라베이스를 만나게 되면 '콘트라베이스다'라고 한마디 밖에 외치지 못할지언정 어느새 친굿함이 배어나와 버렸다.

 

또한 예술가이자 한 남자의 방에서 펼쳐지는 작으면서도 큰 공간안에서의 그의 존재는 그다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조차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더 평범하고 비활동적으로 살아가는 나라는 가까운 보기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를 통해 나의 존재가 더 작아지거나 소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갖게 되었다.

비오는 토요일 오후의 쓸씀함도 콘트라베이스 음악과 콘트라베이스의 책 한권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자유가 느껴진다.

삶의 방식이 모두 다르듯 만족감 또한 다르다.

그 만족감을 책과 음악이라는 데에서 찾아가고 있지만 콘트라베이스라는 또다른 매개체에서 오는 개별적인 만족감도 상당히 진취적이다.

그럭저럭 잘 꾸려오지 않았냐는 평소와는 반대되는 개념속의 나를  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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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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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환상이든 늪이든 깊숙한 곳에서 쑤욱 빠져나온 느낌이다. 그 헤어나옴은 순간적으로 이루여졌다.

과부들만이 살고 있는 마리키타 마을이 나의 또 다른 거쳐라도 되는 듯한 익숙함으로 몸부림 치고 있을 때 갑작스런 이탈은 그렇게 찾아왔다.

마리키타 마을에 미국인 기자 고든이 찾아 오면서부터 나의 시각은 마리키타 마을 안에서가 아니라 고든의 시각으로 그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껏 이런 시선이 아니였는데 왜 갑가지 마리키타의 과부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까. 마치 시각효과를 즐기다 빠져나온 후의 멍함.

마리키타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들이 사라진 마을. 분명 이런 화제는 약간의 환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남자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걸 온전히 받아 들이지 않는 의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게릴라들이 의해서 남자들이 다 끌려간 후에도 마리키타 마을에서 그녀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고립되어 버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들이 사라진 후 그녀들의 힘으로 살아가려다 더욱 더 궁핍함에 몰린 후 치안판사 로살로를 중심으로 그녀들만의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에 따라 그들은 과거로 내려간다.

그 과거는 전쟁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게릴라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굶주림도 신식문명의 발전도 없는 그녀들만의 독자적인 낙원으로 변해간다.

그런 터전을 만들어 가기까지는 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마을의 이야기도 있었으며 시간은 서서히 그들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을에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을의 유일한 남자 라파엘 신부(남자로 보기 힘든 훌리아와 산티아고는 빼고)가 대를 잇기 위해 명분까지 버리며 마을의 과부들과 동침을 했지만 신부의 욕정만 채웠을 뿐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결국 마을의 유일한 남자인 소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고 라파엘 신부가 떠남으로써 완벅한 여자들만 존재하는 마을이 된다.

그녀들은 이제 남자들을 포기하고 위기를 발판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간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도 아니고 동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적나라하고 거침이 없다.

저자가 신문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듯이 콜롬비아의 내전은 그녀들을 거칠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얼핏 마리키타 마을을 보면 내전으로 얼룩진 상처들로 인해 삶이 문란하고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욕정에 찬 여자들은 가난으로 안해 앙칼져가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녀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더더군다나 마을 밖에서 그 어떠한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더이상 이럴 수는 없겠다 싶어 공동체 생활을 꾸려 가면서 그녀들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풍요로움과 안정을 되찾는다. 그렇게 남자들이 사라지고 16년의 세월이 지난 후 네명의 남자가 마리키타에 돌아온다. 그들은 변해버린 마을 여자들에 놀라지만 한 명을 제외한 세명의 남자들은 마을 근처에 가정을 꾸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렇게 갈망한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나며 책은 끝을 맺는다.

 

독특한 경험이였다. 과부마을이라는 것에 혹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몇년을 더 산 느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이 주는 아픔이다. 책의 단락이 끝날때마다 게릴라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그들의 증언은 끔찍하지만 거짓이 아니다.

그들의 증언 속의 사람들은 마리키타 마을을 떠난 남자들이기도 했고 그들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과부마을이 품고 있었던 것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였다.

남자들이 떠난 마을이라는 자극적인 묘사가 남긴 이면에는 여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진지하면서도 기특해 보였지만 그녀들의 상처는 그녀들이 함께 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남자들을 수용하는 모습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어느 것에 구속되지도 귀결 되지도 않는다. 그녀들만의 낙원 마리키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문명 스스로가 들어오기를 거부했듯이 그녀들은 과거로 내려가면서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녀들의 머뭄은 고립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간다.

그녀들은 자유를 향해 내려가고 있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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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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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슴이 저릿 저릿 아파온다.

꼭꼭 숨겨두었던 상처를 후벼낸듯 아프다.

그리고 멍하다. 내게 천국을 알려준 그 간단함 앞에....

내 자신과의 화해가 이루어 졌을때 그 곳이 천국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간단한 보이는 화해는 상당히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의 주인공 에디처럼 나 자신과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피하고 거리끼던 모든 것들을 끄집어 내고 일일이 마주 해야 한다.

내게 과연 그런 용기가 있는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거대한 여운 앞에 다시 나타난 저자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왠지 읽기가 꺼려졌다. 전작에 못미칠 것 같은 불안함... 그리고 모리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용케도 잘 피하고 있었는데 형부의 차안에서 만나버리고 말았다. 평부회사 동료가 반납좀 시켜달라는 회사도서 네권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세권이였다. 평상시에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더라도 읽지 않은 책이 내 손에 들어오면 쉽게 놔주지 않는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인 법! 그렇게 쥔 책속에 이 책이 들어 있었다.

그래 읽어보자 까지껏! 이라며 가볍게 시작한 책을 몇시간만에 다 읽어 버리고 나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삶의 아픈 부분인 상처를 후벼내다 못해 그 절절함이 나에게 느껴지도록 만들어 버린 책은 어두웠지만 암울하지 않았고 슬펐지만 불행은 아니였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울상이 되어버렸대도 깊은 심연속의 우울은 아니였지만 나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게 있었다. 내 자신과의 화해...

과연 할 수 있을까....

 

평생 루비가든에서 놀이기구를 고치며 살아온 에디는 자신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다고 믿지 않았다. 군대에서 다리를 다친 후 절음발이가 되었고 늘 가난했고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있었지만 너무 일찍 떠나버렸고 아내의 불임으로 자식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루비가든에서 일을하며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노후를 보냈는데 놀이기구의 추락으로 어린아이를 구하고 목숨을 잃고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통해 자신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믿는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사람들 중에는 아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돌아보게 되는 자기의 삶의 잔상은 아프고 서럽고 후회스럽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사실들과 또 나로 인한 타인과의 연결성을 통해 에디의 깊은 상처를 공유하고 위로 받게 된다.

나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 또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람, 그리고 아버지와의 오해속에서 비롯된 상처들도 이해를 통해 오해를 풀게 된다. 자신이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삶의 고리를 통해 에디는 진정한 천국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 이렇듯 천국을 우리가 상상하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인듯 그렇게 마음속의 응어리를 다 풀어버린다. 그럴때에 진정으로 천국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은 에디뿐만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준다. 에디가 품고 있던 상처의 세세한면을 들췄을때 떠오른 사실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또한 자신이 모르고 있던 타인에게 준 상처와 불행했던 우연한 일상들도 그들의 몫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그들처럼 타인의 삶에 연결고리를 끼워주고 삶을 마감한다.

 

그 연결성...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요소가 되어버리는 그 연결성 앞에 '당신과 나의 삶은 하나입니다'라는 메인 문구를 이해하게 된다.

늘 느끼게 되는 고독감 속에는 나와 연결된 다른 삶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막연하게 연상될 수 밖에 없는 또다른 삶을 생각하게 된다. 그 삶의 생각에서부터 천국을 만나기 위한 과제(?)가 시작된 것이다.

타인과의 화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 자신과의 화해라는 사실부터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의 자만이고 기만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 이해한다는 위선을 저질렀을까...

그 위선을 하나 하나 걷어내고 싶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 준 상처를 위로해주기 전에 알면서도 위로해 주지 못한 상처부터 치료해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건 선뜻 하기가 힘이 들고 많은 상처를 들춰야 하기에 벌써부터 뒷걸음질 치고 싶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진정한 천국을 만나기 전에 내 안에 천국을 만들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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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1
홍석중 지음 / 대훈닷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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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창 인기 있었던 '황진이'인줄 알았다.

그 황진이가 북한 작가의 것이라니... 생소하고 놀라웠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황진이를 검색해 보니 내가 알고 있던 황진이는 전경린 작품이였고 내가 놀랬던 만큼이나 북한 작가의 작품 황진이였다. 그 유명한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손자라니...

모든것이 생소했다. 그러나 거리낌없던 한가지 반가움은 북한소설을 읽는다는 것이였다. 북한과 남한의 관계를 생각할때 이런 소설 자체가 얼마나 반갑고 신기한지 또 문학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기쁜지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 속에서 첫번째 장벽은 언어였다. 방송에서 우스갯 소리로나 접할 수 있는 북한 언어처럼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언어 쓰임새와 표기법처럼 황진이의 언어는 낯설었다.

16세기의 배경인데다 북한작가의 글이니 1권의 읽힘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한시간을 낑낑대고 읽어도 겨우 40페이지 정도 였고 모르는 말뜻이며 낯선 언어들을 건너뛰어도 여전히 그작 저작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2권에서는 1권에서의 막힘없이 술술 읽혀졌는데 1권에서나 2권에서나 저자의 역량을 볼 수 있었던건 이런 낯섬의 앞에서도 글의 흐름은 막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모르는 언어.. 알 수 없는 비유인데도 읽기의 막힘이였지 흐름의 막힘은 아니였다.

 

또한 황진이라는 소설 자체 부터가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북한에서 이런 소설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속에 이런 작품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무참히 깨트려준 증거였다. 특히 노골적인 성묘사나 음담패설 그리고 양반과 관리들을 비꼬는 의미부여가 놀라웠다. 내가 북한의 문학을 너무 경시하고 있었지만(읽은적이 없으니.. 그리고 나만의 잣대로 그어 버렸으니..) 이번 계기로 무지함을 깨트려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황진이 하면 벽계수 서경덕과의 일화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런 일화도 내게는 희미해서 이 책에서는 에피소드로만 끝나 버렸을때야 비중은 서경덕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을 정도였다. 우리가 보통 아는 것과는 다르게 놈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추가해 놈이와의 사랑의 중점에 황진이의 삶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초반에 놈이와의 어린시절.. 그리고 황진이가 기생으로 나서면서 놈이에게 처녀를 주었을때도 그들이 중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황진이가 깊이 사랑할 그와 문학적,예술적 깊이가 통하는 누군가가 나올거라는 기대를 했었고 황진이의 화려한 기생의 삶이 부각 될거라며 상상했다.

그러나 결말은 식상했다. 황진이가 놈이의 사랑을 진심으로 깨닫고 사랑하게 되었을때 놈이는 목숨을 잃어버린다.

이런 스토리의 뻔함에도 이 책을 가볍게 여기며 무시할 수 없는게 책 속의 또하나의 문학적 소재였다.

언어는 걸쭉했고 단아하면서도 깔끔한 시조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시조들을 통해 또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를 경험한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사투리의 뜻풀이가 나와 있었지만 그런 뜻은 읽으면서 일일이 찾을 수도 없었고(찾다보면 흐름도 깨지고..) 오로지 상상에 의해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상상의 나래속에 날개를 달아준게 시조였다. 고리타분하다 느꼈던 시조가 그리 정갈할 수 없었다. 시에 대한 깨어 있음이 많은 도움을 준거라 생각하지만 여튼 황진이를 읽는 내내 일반 소설에서 느꼈던 가벼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시대속의 사람이 될수 있게 인도해 준 작가의 문체며 창작성에 빠져들었고 여운이 오래 남았던 것이다.

 

이렇게 북한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자체가 읽는 내내 반갑고 신기했고 기뻤다. 또한 끝없이 북한과의 문학적 교류를 시도하는 무리가 있다는 데에 놀랐고 그 열정앞에 부끄러워 졌다.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북한의 문학을 읽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멀리한채 공상의 문학만.. 편리한 문학만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단과 함게 단절된 것이 어디 문학뿐이랴..

그러나 그 단절의 연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영원한 단절은 없을 듯 하다.

접하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북한문학을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소설에서 새롭게 만난 황진이와 북한 문학의 만남은 즐거웠다라고 말하고 싶다.

역시 문학은 즐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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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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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랑은 무엇 일까요?' 라는 질문에 배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그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배려하는 사랑이야 말로 평형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뿐만이 아닌 모든면에서 배려를 하면 적어도 상대방에서 상처를 주지 않을거라 자신있어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모습은?

그런 희미한 기억력을 지닌채 한없이 휩쓸리며 살아가고 있다.

뚜렷한 확신과 주관도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되는대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또 마주치고 말았군'이라는 생각이 들자 당황스러웠다.

주인공 '위'가 행했던 언행과 행동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참 이기적인 사람이였구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껏 숱하게 그런 언행을 내 뱉어 왔지만 '위'의 경험앞에 왠지 그런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위'보다 더 큰 만행을 저질러온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나.. 나.. 나... 나의 모습이다.. 나의 모습이야' 라는 말이 계속 머리속에 맴돌았다.

 

'위'앞만 보며 달려온 사람이였다. 고속승진을 하게 되었고 그 승진 안에는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짓밟은 티가 역력했다. 자신을 정당하게 자신의 할일을 통해 승진을 했고 그런 행진은 당연한 결과물이다 라는 생각앞에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새로운 승진과 함께 발령받은 곳은 내부의 압력에 의해 구조조정을 시키려는 팀이였다. 자신의 상사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자연스레 빠져 나오면 자신의 자리는 유지 시켜준다는 조건을 받지만 '위'는 왠지 그게 꺼림직했다.

구조조정에 의해 해체될 팀안에서의 자신의 활약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순간 위의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꿈틀댄다. 양심이였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아는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양심의 소리가 꿈틀댔던 것이다. 전혀 '위'답지 않은 모습이였다. 그런 마음의 변화속에는 회사내에서 인도자라 불리우는 퇴직한 중직자의 만남이 있었다. 그러한 만남과 모두 괴상하고 안일하다고 생각되는 팀원들 속에서 부인과의 갈등 그리고 구조조정 시키려는 무리 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서서히 양심을 넘어선 배려를 배우게 된다. 현장에서 뛰면서 세상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되고 욕심만 채우려는 무리속에서 얼마나 소박하고 열심인 사람들이 그 희생양이 되어 가는지 혼란과  깨달음 속에서 '위'는 값진 것들을 얻어간다.

부인과의 갈등해소 속에서 그 동안 무관심 했던 것들을 깨달아 가고 자신이 갖는 일이며 그 외 여러가지 면.. 아니 자신의 삶의 많은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 과정은 인간적이였다. 감정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게 쉽게 고쳐지지 않음을 알기에 더 인상깊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적자생존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기가 더 쉬운 일터에서 맛보지 못한 끈끈함의 주역이 내가 되고 그걸 만들어 가는 과정속의 끈끈함은 사회생활의 삭막함을 몰아내줬다.

팀원 하나 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찾는 동시에 새로운 삶의 변화를 마련하는 것.... 인간의 욕구의 높은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이제 중요한건 나의 변화다.

그런 도전을 받았다면 과감히 나를 깨트려야 한다.

일터에서의 나의 소망을 생각해 보았다.

즐겁게 일하기, 보람 느끼기, 원만한 인간관계, 친절 등등...

지금껏 포기해버렸던 나의 소망들이 하나 하나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저것들을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앞선다.

아니 그 두려움 앞에 귀찮음과 포기가 앞선다. 그러나 지금 내게 당면해 있는 문제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언제까지 시간만 죽이며 끔찍한 일터를 외면하고 살텐가.. 내게 주어진 시간 내게 주어진 조건 내게 주어진 삶인데 그것들을 더이상 포기해버리고 싶지 않다. 완벽한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현재 나의 일안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끌어 올리고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만족감이 만들어 내는 뿌듯함을 이젠 정말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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