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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올리브에게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한바탕 눈물이 났다. 저자의 새로운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음에도 전작 <긴긴밤>의 여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설렘과 기대와 슬픔이 가득한 마음을 웅켜쥐고 있다 결국은 눈물을 터트렸다. 전쟁터에 나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기다렸던 나나. 그리고 나나의 딸 파티마의 남편도 징집되어 결국 돌아오지 못했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집을 떠나지도 못하고, 문을 닫을 수도 없었던 나나. 전쟁이라는 무모함 속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갔을 남자들과 할 수 있는게 기다림 밖에 없었던 나나와 그 집에 머물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먹먹했다.
약 7년 전쯤, 친정집 가다 30년 전 학교에서 집을 오가던 길을 차로 가 본 적이 있었다. 굉장히 멀고, 큰길이었던 나의 통학로는 너무 작은 오솔길이었고, 여전히 길이 매끄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30년이나 지난 뒤에 그 길을 다시 가봤다는 것 자체에 깊은 추억에 잠겼다. 그 길 위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이 나를 스치듯 지나갔고, 중년이 되어버린 내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 길 위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가 볼 수 있었던 통학로였는데, 매끄럽지 않다는 이유로 그 길을 돌아서 편안한 길로 친정집에 가곤 했다. 그리고 그 길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리스도 우연히 막내의 그림을 보고 올리브 나무를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 때 발판이 되어준 ‘나나 올리브’를 잊고 있었고, 그렇게 30년 만에 찾아간 집에서 나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만약에’라는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코흘리개’가 수없이 반복한 ‘만약에’를 나도 대입해 본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나는 사랑하는 가족과 올리브나무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다. 내가 굳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만나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평범하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상처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상처를 회복할 일도 없었을 테고, 나나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삶을 따라 살려는 ‘코흘리개’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나나는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정작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어버리지만, 그녀는 항상 열려있는 문으로 사람들을 맞이했고,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내 집’이라는 이유로 아무 곳에도 갈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을 과연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그녀가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집에서 따뜻한 추억이 많았고, 그 추억을 30년이 지난 뒤에라도 찾아와서 기억하는 이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치 나나가 올리브나무의 기둥처럼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올리브나무 집에 찾아온 이들이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나나가 받아들인 삶에 대해서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게 된 삶에 대해서도. 숨을 들이켜듯이 받아들이고, 다시 내쉬듯이 체념해 버린 우리의 삶을요. 보고 싶어요, 할머니. 52쪽
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그 슬픔과 절망감이 과연 괜찮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체념 속에서 제발 한순간이라도 그녀가 괜찮았던 순간이 있었길 빌고 빌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가 괜찮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흘려보낸 ‘사랑’이 결코 올리브나무 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다. 나나의 사랑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다. ‘코흘리개’를 살렸고, 월터와 다리스, 카릴라와 메이를 살렸다. 그리고 개 조로와 배트맨은 그 사람들을 모두 올리브나무 집으로 인도했다. 올리브나무 집을 스쳐 간 사람들은 모두 쉼을 얻고 각자 가야 할 길로 갔다. 수많은 이별과 아쉬움 속에서 조로는 끝까지 나나와 올리브나무 집을 지켰다. 조로의 마지막을 ‘코흘리개’가 지켜서 다행이었고, 그 끝에서 다시 배트맨을 만난 게 다행이었다. 헤어짐 뒤에는 무언가가 꼭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우리를 붙드는 건 언제나 남아 있는 것들이지. 그렇지? 193쪽
올리브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옛날 옛날에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마주쳐 사랑에 빠진 연인이’ 집을 지었고, 남자는 돌아오지 못했고, 그 집에 남아 있던 여자와 딸과 손녀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문을 열어 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올리브나무 집이 입에 오르내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도 가장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브나무 집은 사람들이 잠깐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했지만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적인 곳이기도 했다. 폭격으로 올리브나무는 휘어졌고, 집은 망가졌지만 그곳을 스쳐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힘을 얻고 떠나갔다. 오로지 나나와 조로가 지키고 있는 집이었지만 그 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이어주는, 기억이라는 게 존재했기에 그 집은 사라지지 않았다.
책의 말미에 잎이 풍성해 햇볕이 잔뜩 내리쬐는 올리브나무 그림은 이 집을 스쳐간 모든 사람들 같았다. 휘어진 가지가 모두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여전히 변함없이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줄 것 같았다. 사람들의 희망이 틔어 올린 이파리가 결국 올리브나무를 살리게 한 것 같았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모든 가족은 아니지만 올리브나무 아래 나나의 가족이 함께 있기에 더이상 올리브나무는 슬퍼 보이지 않았다.
저 반짝이는 것들은 하늘의 난 작은 구멍들이라고 나나가 그랬죠. 지상에서의 시간이 다하면 그 영혼이 저 구멍을 메꾸러 가는 거라고요. 69쪽
나나의 가족은 하늘의 난 작은 구멍을 메꾸면서 올리브나무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집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에 분명 뿌듯해 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남아 있는 것들을 붙들면서 사라지는 것에 아쉬움을 더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