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돼지, 늑대를 잡아먹다
찰즈 베이츠 지음 / 그린비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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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도 없이 많이 변형되고 살이 깎인 채로 시중에 나와 돌아다니는 <아기돼지 삼형제>는 불량식품이었다. 함량미달의 불합격 제품이었다. 그 이야기 안에 이렇게 많은 '인간정신의 은유'를 함축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공정거래에 저촉되는 행위인지, 독자를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 무책임한 태도인지 각성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한 구절 한 구절 따라내려가며 나의 발가벗겨진 내면 깊숙한 곳의 얼룩을 발견하게 되었다. 소위 내면의 성장을 겪어오면서 만났던 두려움. 그 앞에서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고스란히 잡아먹혔던 나. 내가 타인에게서 혐오하는 부분이라고 비판하는 바로 그 부분이 내가 정작 무의식의 자리에서 바라는 것이라는 신랄한 지적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시시각각 여러가지 얼굴로 나의 내면을 드리우는 '의식의 그늘'이 바로 늑대의 모습이다. 미성숙한 인식의 범주안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반쪽 자아인 늑대'는 늘 우리의 덜 익은 의식을 한입에 삼켜버릴 것이다. 늑대는 우리가 진정 통합하여 배우고 승화시켜야 할 삶의 과제이자 스승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불구덩이 속, 바로 그 곳에 진정 우리가 체득해야할 보다 완전한 진리가 숨어있다.

미성숙한 의식을 대변하는 두 돼지와는 달리, 세째 돼지는 '개인적, 문화적 습관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획득한 지식과 반성에 기초하여 자아의 구조물', 즉 벽돌집을 세운다. 이 벽돌집의 안팎에서 늑대를 속이고 스스로 전술을 짜고 터득하면서, 결국 승리한다. '어둠을 흡수했고 각성된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곳곳에 숨어있는 은유와 심리의 원형들을 좇아가며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되짚어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었다. 현재 나의 삶에서 나를 강박하고 있는 두려움이 오히려 역설적인 것으로 작용한다면, 나의 인식과 더불어 나의 삶이 보다 풍성한 것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무리 잘 지은 벽돌집이라 해도 그 안에서는 결코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른 사람은 늑대일 수 있다. 그들을, 무슨 이유에서든, 피하기만 한다면 나를 비춰주는 참거울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의 늑대들과 부단히 악수 나누며 그들에게서 순간순간 배우고 하나되어, 마침내 그들에게서 초연해지는 나를 그려본다.

<아기돼지, 늑대를 잡아먹다>는 이런 개인적인 인식의 지평뿐만아니라, 지적, 종교적, 나아가 범세계적 관점에서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길을 일러준다. 개인의 문제는 결국 사회적, 국가적 문제를 초래하고, 한 사회의 모순은 원초적으로 개인의 모순은 간과하고는 치유될 수 없는 지도 모른다.

광범위한 의미의 모든 어둠의 그늘을 똑바로 보고 그것과 손잡고 그것 위에 우뚝 설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자아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벽돌집을 지었다고 '교만'의 우를 범하지 말고 '탐욕'의 덫에 걸려 스스로를 죽이는 꼴도 되지 말라는 지은이의 충고가, 빛나는 은유의 해석들과 함께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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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와 어린동생 내 친구는 그림책
쓰쓰이 요리코 글, 하야시 아키코 그림 / 한림출판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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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읽는 어른'에서 마련한 행사에 다녀왔다. 다소 어수선하고 미흡했지만, 아이들에게 즐거운 그림책의 세상을 보여주고 들려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아름다왔다. 오늘의 주제는 '하야시 아키코의 작품세계로'였다. 아키코의 그림을 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포근함과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오늘 행사에서 슬라이드를 통해 배경음악과 함께 보니, 더 진하게 밀려왔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서 그러하듯이, <순이와 어린동생>은 사람의 가슴이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울림과 감동이 어른과 아이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인다.

탄탄한 기승전결의 구조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의 편안하면서도 섬세한 그림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꼭 붙들어 매어 놓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키코의 그림이 우리의 정서와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힘은, 그녀가 바라보고 그리는 '아이'가 정말 우리의 아이들 혹은 어릴 적 우리 어른들의 모습과 거의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적 개구장이 막내동생을 찾아 동네를 헤매고 다닌 기억이 나만의 특별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아주 사소하다싶은 것 부터가 모두 대사건이고 생활의 큰 전환점일 수 있는 아이들의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때 부터 가벼운 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는 아이까지, 그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보자. 작은 일에 울고 웃는 아이들의 눈물과 웃음, 놀라움, 부끄러움, 두려움 그리고 뿌듯함 같은 감정의 물결을 몸으로 느껴보자.

아키코의 작품은 우리 어른들이 잊고 있었거나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무신경하게 지나친 아이들의 보석같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려주는 재미를 준다. 그 재미에는 진한 감동이 묻어있고 가슴 한 구석 '사랑'으로 사람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정을 준다.

<순이와 어린동생>을 보면서 두 딸아이가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 지. 언제 말다툼했냐는듯이 '우리 언니, 우리 동생' 하면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 얼마나 뛰어다녔던지 양볼이 빨간 순이가 어린동생을 찾아 아무말 않고 꼬옥 안아주는 모습을 보게 되는, 엄마라면 흐뭇한 웃음과 함께 왠지 모를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살아라.' 이런 말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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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에서
진 크레이그 헤드 조지 지음, 김원구 옮김 / 비룡소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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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꿈을 꾸면 그림자처럼 따라오곤 하던 풍광들을 떠올린다. 이름 모를 광활한 대지 혹은 숲, 눈아래로 도도히 삼킬 듯 흐르는 물살을 내려다보며 두 팔을 힘껏 날개짓하였다. 내 몸이 야생매의 그것처럼 부드러운 듯 힘찬 획을 그으며 비상하면, 온세상이 내 세상이다.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란 없다. 바람도 물살도 날개짓까지도.

<나의 산에서>는 지금 두 아이가 되어서도 한번씩 꾸는 '벗어나기'의 꿈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대신 꾸어준다. '샘 그리블리'라는 지혜롭고 용감한 소년을 통해, 꾸는 것으로만 머물러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꿈을 현실적으로 실현시켜주는 셈이다.

아이에게 '집'이란 자신을 보호해주는 안락한 공간이자, 의식과 문화를 책임지고 -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 길들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다소 폐쇄적이며 일방적인 공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질 때, 아이는 진정한 성장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려움! 일탈에 대한 두려움이 벗어나고 싶다는 꿈보다 나를 더 강하게 옥죄이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그렇게 더디게 다가오고, 아직도 미성숙한 인간성을 어쩔 수 없어 잠못 이루기도 한다.

<나의 산에서>는 한편의 영화처럼, 바람의 생생함과 날짐승의 피같은 비릿함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살아서 두 눈을 부릅뜨고 발톱을 세우는 온갖 동물과 있는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날씨까지도, 샘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신과의 싸움에 백기를 들게 할 수 없다.

성장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은 타인과의 의미있는 관계를 필요로 한다. 도시에서 숲으로 달아난 샘은 자신이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집으로 다시 이끌려갈까봐 사람을 피한다. 그러다 한 사람씩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타인'을 만나게 된다. 집으로 대변되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 맺게되는 수많은 타인과의 인연을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나를 아는 사람 하나없는 낯선 곳에서 아무런 선입견없는 관계를 독립적으로 맺어보고 싶다는 것도 단지 꿈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은가.

샘의 짧지 않은 숲의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히? 집을 나가겠다고 할 때 선선히 고개를 끄득여주었던 것처럼, 샘의 부모님은 당신들의 아들을 다시 품어줄 때도 선선하다. 아무 거리낌도 책망도 없이, 샘의 집나무 옆에 집을 짓는다. 열한 명의 식구가 살 집이다. 이제는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성숙해가는 아들과 함께 '땅에 뿌리를 내린다'. 땅을 사랑하는 피는 모계 쪽에서 온 것이었다. '네 어머니는 너에게 좋은 집을 주겠다고 하셨다. 어머니 관점에서는, 좋은 집이란 지붕과 문이 있는 거야.'

'돌아오기'... 작가는 내리기 쉬운 결론을 빗겨가, 감동적인 라스트신을 연출한다. '벗어나기'의 경험을 배부르게 한 후의 '돌아오기'란 갖가지 영양소로 건강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사람이면 평생을 되풀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거기에 있는지 알고 있단다.'
'아버지!'
샘은 자신을 찾아 숲으로 온 아버지의 부름에 답한다. 이제는 '산 열매만 따 먹고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자신이 붙었는데도.

마음 속에 영원히 살 '샘 그리블리'... 집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고 싶을 때면 샘을 따라가 숲의 집나무에서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손발을 묶어두는 두려움을 훌훌 벗어버리고 사슴가죽 옷을 입고 모카신을 신고 버들피리를 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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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으로 넘어온 선물 비룡소의 그림동화 58
고미 타로 글 그림, 이종화 옮김 / 비룡소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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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잠자고 있으면 산타할아버지가 몰래 와서 머리맡에 선물을 두고 간다고 믿고 있는 두 아이. 아직 그렇게 믿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아이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꼭 갖고 싶었던 걸 선물로 주신다고 생각하지요. 만약 산타할아버지가 <창문으로 넘어온 선물>에서 처럼 덜렁이라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네요. 이웃의 친구들과 서로 선물이 바뀐다거나 전혀 뜻밖의 기발한 선물이 온다거나 말이죠.

이 그림책은 '구멍으로 엿보기' 장치를 만들어 호기심을 한껏 유발하게 합니다. 창문으로만 보이는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상상해보게 하지요. 그 창문을 열면 드러나는 너무 기발한 그림들이 절로 웃음짓게 합니다. 먼저 아이에게 '뭘까?' 물어보고 스스로 창문을 열어보게 하면 참 재미있어 합니다.

쌍둥이네집으로 착각한 산타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두개 받은 친구는, 커다란 곰에게 하나를 나누어 줍니다. 욕심부리지 않는 착한 마음이 더 예쁘네요. 시커먼 곰의 몸만 본 산타할아버지가 아무도 없는 집으로 착각한 거였거든요. 뾰족한 등에 뾰족모자를 쓰고 있는 악어, 꼬리에 작은 리본을 매고 가슴에 고양이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돼지, 얼룩말무늬 목도리를 함께 목에 감고 있는 세마리 두루미, 제대로 받은(?) 장화를 신고 있는 생쥐. 엉뚱한 선물을 받고도 모두모두 즐거운 얼굴입니다.

그런데 토끼형제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커다란 악어로 잘못 생각한 산타할아버지 때문에 지금 여덟마리 토끼형제들은 난리가 났네요. 커다란 스웨터에 함께 들어가 낑낑대고 있으니 말이죠. 한바탕 웃음이 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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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꾸러기 사냥꾼 삼총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5
에드윈 워 글, 랜돌프 칼데콧 그림, 이종인 옮김 / 시공주니어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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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그림책작가상, 칼데콧상. 칼데콧은 어떤 그림책을 만들었기에 그를 기려 상을 제정했을까? 19세기 영국 그림책의 황금기라 불리는 시대의 대표 작가의 그림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겉표지의 색부터가 중간톤이라 눈이 편안하다. 책장을 넘기면 누르스럼한 종이가 오히려 깨끗하다. 흑백의 스케치와 번갈아 등장하는 사냥꾼 삼총사와 서민들의 모습도 볼거리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하다. 당시 영국 서민의 옷과 마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사냥꾼 삼총사는 우선 배부르게 먹고 마시며 사냥을 떠날 준비를 한다. 사냥도구는 아예 챙기지도 않는다. 소리지르고 나팔을 부는 것이 사냥하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바닥을 잘 보고 고른 땅만 밟는 것과 바람 냄새도 잘 맡'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으면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맑아지는 거야'

삼총사가 지금부터 사냥을 할 대상은 짐승의 몸이 아니라, 자연과 그곳에 사는 온갖 것들이다. 그것들을 보는 시각은 어린 아이와도 같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불어넣어 생각한다. 들판의 허수아비는 길을 잃어버린 농부다. 그들을 쫒아오는 허수아비를 뒤로 하고 신나게 말을 달린다. 다음 볼거리를 찾아서. 누군가 버려놓은 삐걱거리는 맷돌은 딱딱하게 굳은 치즈란다. 무엇을 가지고도 금방 자신만의 놀이감으로 써서 재미있는 놀이를 할 줄 아는 아이들같다.

살찐 돼지는 옷을 도둑맞은 읍장같이 보인다. 서민들 편에 서서, 편하기만 한 관리들을 골려주는 말이다. 오솔길을 산책하고 있는 젊은 연인은 얼이 빠져 나돌아다니는 미치광이들이라고 부른다. 어른들의 감정이란 것이 그리 믿을 만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삼총사는 장난을 걸며 히히낙낙 즐겁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에 대해 하는 말을 보면 작가가 어린이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그건 작은 천사들이야. 그러니 저희들 마음대로 놀게 내버려 두세.'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 모자를 벗어 삼총사에게 흔들어대고 삼총사는 뒤돌아보며 답례한다. 모르긴해도, 아이들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삼총사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고 유쾌하다. 악의가 없다.

'오늘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어. 그렇지만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보냈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도, 오늘날 우리의 어린이들이 겪는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쉴새없이 무언가 하라고 몰아대는 어른들과 이리 저리 어른들의 지시대로 끌려다니는 아이들. 무언가를 손으로 잡지는 못해도,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보내'며 땅을 밟고 바람 냄새를 맡고 사람을 보면, '마음도 그만큼 맑아지는' 거라고 타이르고 있다. 목가적인 풍경이, 반복되는 말귀들과 어우러져 익살꾸러기 삼총사의 어린이다운 상상을 한층 돋구며, 때묻지 않은 깨끗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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