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무라카미 하루키




시계 깨우기 / 배혜경



오렌지색 둥근 벽시계가 또 멈추었다. 시곗바늘이 12199초를 가리킨다. 오전일까, 오후일까. 시곗바늘을 피하다가 노려보다가 두어 달째 그러는 중이다.


꼼꼼한 아버지는 잘 보이는 벽마다 시계를 걸었다. 집 안 곳곳에서 시계가 우리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시곗바늘이 섰거나 정확하지 않으면 칼같이 맞춰 두었다. 어른이 되고 내 살림을 꾸리며 나도 시계를 늘려 갔다. 특히 앤티크 시계에 마음을 빼앗겨 사 모았다. 언젠가부터 시곗바늘이 자주 멈추었고 전지를 갈아주면 한동안 가다가 서길 반복하더니 아예 걸음을 멈추고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전지 가는 일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책장 위에서 두 번째 칸에 잠든 탁상시계 세 개를 나란히 올려 두었다. 가끔 쳐다보면 정물로 박인 시계가 나를 보는 건지 내가 시계를 보는 건지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정체한 삶의 테두리, 그 바깥의 세상마저 정지한 것 같았다.


시곗바늘이 멈춘 시계가 집에 있으면 좋은 운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오래도록 잠자는 시계 세 개를 모두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내어주었다. 총총걸음을 더 이상 놓지 않겠다고 버티는 시계와 때가 되었다는 듯 가뿐하게 헤어졌다. 다른 데 가서는 또 툭툭 털고 일어나 걸음을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별을 고한 그 시계의 바늘 중 하나는 105139, 또 하나는 72922, 다른 하나는 8932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따로 묶어 보관해 둔 것도 아닌데 나는 이 시간이 어쩌면 훗날의 안녕을 위해 유예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미래의 열매에 과즙이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믿었다. 시곗바늘들을 쳐다볼 때마다 시간을 상기했다. 하루하루 잊고 지내다가도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남아 달랑거리면 새삼 그 존재를 깨닫게 된다. 돌이켜보면 멈춰 선 그 시곗바늘은 나를 지켜보며 역설적으로 말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도도한 나를 좀 보란 말이야.


철도 녹슬게 하는 시간이라는 괴물은 생각보다 강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자비롭지도 않다. 시간의 정체를 나는 모른다. 무엇보다 영원한 미스터리인 시간이 이렇게나 스피드광인 줄 그땐 미처 몰랐다.


그 무렵 나는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고 안자이 미즈마루가 삽화를 그린 이 쿨한 에세이 시리즈는 서울-부산 고속철에서 읽기에 딱 좋은 책이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빠르게 스치는 창밖 풍경에 눈을 씻고 넋을 잃어도 다 읽기에 무리가 없는 두께다. 하루키의 개인적 에피소드마다 나도 하나둘 추억과 상념이 따라붙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묻혔던 기억에 잠시 빠졌다가 돌아와도 완독하기에 너끈한, 내용이 아니라 포장이 가벼운 책이다.


'시계의 조촐한 죽음' 편을 읽다가 "전지식 시계의 죽음에 차갑고 무거운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라는 글귀에 잠시 정차했다. 서른일곱 살 아는 여자의 죽음과 동시다발로 예전에 그 여자에게서 받은 시계가 새벽 두 시 십오 분에 정지해 있더라는 사연이다. 우연이었을 수도 있지만 삶의 정교한 암시를 등한시하지 않는 세심함이 마음에 들어왔다. 고양이 밥을 주고 커피를 끓이는 안온한 일상의 스케치에 이어서 이런 문장이 따라온다.


“ ... 그러고 보니 그 애도 이제 죽고 없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시계는 마치 삶의 여운에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딱 멈춰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해 2월에 본 박제된 시간의 원형이 떠올랐다.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에 있는 집필실 시계는 박경리가토지를 마무리한 새벽 두 시에 시곗바늘이 멈추었다. 깊은 잠에 빠진 오래된 그 시계는 목숨줄을 끊고 박제한 동물의 형상처럼 으스스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중성을 띠고 야릇한 인상을 풍겼다.


파릇한 시절의 나는 가난한 문학도에게서 약혼의 의미로 전지식 손목시계를 받았다. 그 시계는 우리의 첫 번째 분신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건네주었다. 전지식 시계는 우선 편리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전지를 교체하는 일이 꽤 성가시다. 전지 수명이 다된 시계는 유한성이라는 생의 한계를 냉정하게 빗대는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기계식 시계에 마음이 기운다. 기계식은 전지를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지만 태엽이 다 풀리면 발걸음을 멈춘다. 태엽이 풀리는 과정을 확대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궤도가 떠오른다. 태엽의 마지막 힘겨운 한 걸음까지 다 풀리면 삶의 여행자로서 우리의 지친 걸음도 쉬어가라는 듯 시계는 단잠에 빠진다. 언제든 다시 태엽만 감으면 잠에서 깨어나고 태엽이 서서히 풀리면서 시곗바늘을 생기발랄하게 되살려준다. 시간은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태도를 즉각 취하고 행동에 옮겨준다. 전지식이든 기계식이든 시계는 시간의 유한을 반복해 무한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든 시간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지난 일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삶은 없다. 과거를 다독여 현재와 미래로 나아간다. 삶은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어가는 것이다.


손목시계를 찰 때마다 태엽을 감고 시곗바늘을 맞춘다. 처음엔 번거롭더니 시나브로 이 작은 의식이 썩 마음에 든다. 태엽을 감고 시곗바늘을 2분 정도 앞서도록 맞추면 마음이 조금 느긋해진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기분에 빠진다. 백일몽 비슷한 기분이라 해도 잠자는 시계를 내 손으로 깨우고 시간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착각을 즐긴다. 잠자는 공주의 시간을 깨운 멋진 이웃 왕자가 되어...


잠자는 오렌지색 벽시계를 내려서 책장 아래 깊숙이 넣어 둔다. 태엽을 감는 기분으로 언제든 전지를 갈아주면 잠에서 깨어나리라.



- 월간 <수필과비평>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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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08 15: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너무 잘 어울리는 멋진 글이네요. 이 글을 <수필과 비평>에 실으셨군요~!! 완전 멋집입니다. 어느순간 스마트폰이랑 워치 때문에 벽시계를 안쓰게 되더라구요. 저도 이 글을 보니 기계식 ⏰ 가 가지고 싶네요 ㅋ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프레이야 2022-01-08 21:58   좋아요 3 | URL
한때 뻐꾸기 벽시계가 살림템이었죠.
오래된 벽시계 좋아합니다. 요샌 편리하게 뭐든 변해가는데 오히려 아날로그가 더 편할 때가 있더라구요. 연식이 드러나는 건지. ㅎ 고맙습니다 새파랑 님.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mini74 2022-01-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정에 있던 커다란 괘종시계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시계밥 준다하시면 막 구경했던. 봐도뵈도 질리지 않던 풍경입니다 그시계가 매년 어느 순간조금씩 느려지고 초침이 떨어지고ㅠㅠ우리도 그 시계도 그 집에서의 그 시간을 잡고싶었던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러고보니 전 첫번째 시계가 미키전자시계였습니다 ㅎㅎㅎ 그것도. 제가 커서 번 돈으로 처음 산. 어릴 적 너무 너무 갖고 싶었거든요

프레이야 2022-01-08 21:57   좋아요 2 | URL
시계 밥 준다고 말했었죠. ^^ 미니 님 아빠도 시계 밥 잘 주시던 부지런한 분이시군요. 미키시계 로망이었죠. 전 중학교 들어가서 아빠가 사 주신 카시오 전자시계가 첫 시계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멋 없는 시계였지만 그당시엔 나름 검소한 아빠의 시계사랑이 제게도 전해졌던 거 같아요. 미니 님은 내돈내산하셨군요. 야무지고 대단하세요.

stella.K 2022-01-08 2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전지식 시계는 편하긴한데 갈아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요.
지금은 시계점도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도 쉽지가 않은 것 같더군요.
그런 거 생각하면 기계식이 나은 것도 같은데 그건 하루에 한 번씩 태엽을 말아줘야하고.
예전에 그걸 두고 시계에 밥 준다고 하기도 했었죠.
어렸을 때 그 얘기 듣고 시계가 어떻게 밥을 먹는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가 어리둥절 하기도 했었다능.ㅋ

몇년 전 시계 라디오를 사서 쓰고 있는데 쭝국산이라 그런지
시간이 잘 안 맞더군요. 항상 앞서가요. 전기식인데 그것도 앞서가서 좀 벙쩠다능.
지금은 거의 제 시간에 맞쳐놓고 있는데 얼마 안 있으면 또 앞서갈 거예요.
2, 3분 앞서가면 마음이 좀 느긋하긴 하죠.^^

프레이야 2022-01-08 21:56   좋아요 4 | URL
우리집 시계는 모두 시곗바늘이 제각각이라 신경 안 쓰다가 불현듯 시계가 걸려 있다는 것만으로 그냥 무슨 의미인지 싶어서 벽시계를 좀 없앴어요. 건전지 갈아주는 것도 귀찮고 탁상시계도 마찬가지고요. 디지털시계가 정확하고 간편한 면이 있지만 어쩐지 시계는 저렇게 좀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거지 싶어요.
스텔라 님 시계도 좀 빠른 걸음이라 몇 분힉 앞서가나 봅니다. 그럼 그런대로요 ㅎㅎ 시계 밥은 제때 줘야 하지만 간헐적으로 줍니다 저는.
시간은 조금 밀고 당기고 그렇게 살자구요^^

2022-01-09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9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1-11 21: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들은 소설도 좋지만, 이전에 썼던 에세이도 좋았어요.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고요.
이제는 휴대전화를 많이 쓰지만, 그래도 벽시계가 없으면 답답한 걸 보면 정해진 공간에는 시계가, 달력이 있는 게 익숙한 생활 같기도 합니다. 얼마전 탁상시계가 고장이 났는데, 고치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보던 생각도 나고요.
프레이야님, 날씨가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22-01-11 22:22   좋아요 4 | URL
하루키 에세이 좋아하죠 대부분. ^^
시계를 좋아하는 건지 시곗바늘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전. 추워지네요 또. 감기 조심하시고요 굿나잇 ~

희선 2022-01-12 0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멈춘 시계가 집에 있는 것도 별로 안 좋군요 멈춘 벽시계는 없지만... 시간은 흘러가니 멈춰 있으면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습니다 소설 같은 데 그런 거 쓰였을 듯도 합니다 시계가 멈췄는데 그날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같은... 태엽을 감아주는 시계, 멋질 듯합니다 손목시계도... 지금은 거의 전지식이잖아요 멈춘 시계를 다시 깨울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01-12 01:15   좋아요 2 | URL
집에 걸렸거나 놓인 시계 갯수를 좀 줄였어요. 왠지 마음도 좀 느긋해지더군요. 여백이 생기니까요. 그게 2020년 봄에 대정리를 할 때였어요. 시간의 압박에서 놓여나도록 잘 조절해야겠지요. ^^
하루키의 태엽감는새, 생각납니다.
아 그리고 정리컨설턴트 말이 시계만 그런 게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모든 물건은 좋은 기의 흐름에 별로랍니다. 고장난 게 있으면 고쳐서 쓰거나 아니면 처분하거나 해서 미니멀하게요. 미니멀이 무조건 버리라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만 소유해서 충분히 잘 쓰는 것이라는 말이죠. 공감되었어요 이말이 제일. 막힘없이 잘 흐르고 통하게!! 시계든 뭐든 안 쓰고 쟁여둔 게 얼마나 많은지. 책도 그렇겠죠.

2022-01-12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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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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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손바닥소설



비굴

 


구룡포 시장 안으로 먼지 뒤집어쓴 승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방금 찬물로 아침세수를 한 개량시장에는 어제의 난장(亂場)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마른 몸에 두툼한 점퍼를 걸친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질퍽거리는 고인 물을 피해 드문드문 문이 열린 식당을 기웃거리더니 한 곳에서 일행에게 손짓한다.


손바닥만 한 식당에 아주머니 혼자 냉큼 난로를 켜고 보일러를 올리고 분주하다 금방 따뜻해질 겁니더.” 


방석 위로 냉기가 엉덩이에 착 올라붙는다.


기호도 취향도 모르는 사람들과 생글거리며 다니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라는 걸 순영은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 허난설헌을 모르다니... 역사가라도 되는 줄 안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순영은 어제 강릉에서의 일이 생각나 또 속으로 날이 선다.


땡초 좀 많이 넣을까예?” 


전라도 같기도 경상도 같기도 한 억양인데 둘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다


매운탕은 조금 맵싹해야지예.”


우럭매운탕이 끓는 동안 아주머니가 밑반찬과 밥을 내온다. 온장고에서 꺼내준 누런 밥은 사흘은 돼 보이고 그마저도 돌덩이다. 순영은 온도가 어정쩡한 국물로 까끌한 목구멍을 적신다. 점퍼를 벗은 종수는 어젯밤 일은 전혀 기억도 안 나는지 매운탕 한 그릇에 밥을 말아 잘도 넘긴다. 예민한 사람인데 아닌 척하는 건 둘이 똑같다. 숟가락을 그만 놓은 순영은 지난밤 일이 꿈만 같아 어깨를 웅크린다. 숨통이라도 틔우자는 생각에 종수도 순영도 무작정 사람들에 섞인 게 사흘째다.


아침은 늘 신기하기도 무섭기도 하다. 딜리트키를 눌러 어제 일은 싹 지우고 새로 시작하라고 세상을 눈앞에 떠다미는데, 그게 감사한 일이기도 하지만 때론 간이 안 맞는 국물 같이 역겹다. 사는 일이 원래 간이 잘 안 맞는 음식 같지 뭔가. 맛나게 만들려고 하면 간이 더 안 맞기 일쑤다. 순영은 이런 생각이 들자 오스스 어깨를 떨며 종수 손에 떠밀린 쇄골 부위를 손으로 문질러 본다.


갑자기 웬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시장 안을 찢는다.


아침부터 누가 저렇게 싸워요?” 


종수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말 걸기를 좋아한다. 어떨 땐 무심한데 어떨 땐 사정없이 정답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 곧이곧대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순영에게는 그게 매력으로 다가왔던 때가 있었다.


오죽하면 저라겠나? 남자가 깨끗하이 해 주고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든가 말든가. 이혼도 안 해주고 다른 여자캉 살고 생활비도 안 주고... 저랄 만도 하재. 쯧쯧.”


순영은 아주머니 말을 뜨거운 숭늉 한 모금으로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제야 바닥이 따뜻해져 온다.


일본가옥거리에 일본 사람들은 없던데요. 아베 한번 만날까 했더니 아베도 없고.”


그 사람들은 다 죽고 없지예. 집만 쪼매 남아 있지예.”


순영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어젯밤 일만 해도 일면식 없는 타인에게 마스크도 하지 않고 자꾸 말 거느라 벌어진 일이잖은가. 순영은 시장판에서 악다구니하던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밖으로 나간다.

여자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제 낮에 걸려 있던 세로로 반쪽 난 소머리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머릿속을 시장판에 내어 걸고 역시 텅 빈 회색 눈동자만 뜨고 있던 출구가 막힌 미로. 속을 보인다는 것도 속을 훤히 본다는 것도 고통 속을 통과하는 일이란 걸 순영은 안다. 늙은 엄마가 생에 마지막으로 위대장 내시경 시술을 받는 동안 모니터로 지켜본 속을 떠올린다. 수면 중인 엄마의 신음이 늘어진 괄약근에서처럼 무방비로 새어 나왔고 노쇠한 그 짐승 소리는 시퍼런 배설물이 고인 구불구불한 속과 함께 순영의 창자를 몹시도 흔들어댔다.


종수도 식당을 나와 담배 한 대를 물고 세상을 악다구니로 살던 때를 떠올린다. 비전이 보이지 않던 회사를 탈출해 바다를 찾아다니던 때 아내와 소원해지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이기적인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긴 쉽지 않고, 거리가 생기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내는 졸혼 비슷한 걸 선포했다. 종수는 억울했다. 세 아이들에겐 친구 같은 아빠로 아내에겐 마당쇠 같은 남편으로 산 게 얼만데... 이쯤에서 더 비굴해지고 싶진 않았다.


역마살이 맞춤이던 그해 봄, 놀이 멋진 서쪽 포구마을에서 동화책 삽화를 그리며 혼자 사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과거를 입에 올리지 않는 순영은 당차지만 여리고 물러설 줄 아는 구석도 있었다. 바람 따라 사는 종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이쁜 글씨로 편지를 자주 썼다. 여자가 좋아하는 걸 정확히 아는 남자다. 때때로 모르는 척할 뿐. 종수는 순영이 본 세상에서 두 번째로 복잡한 남자였고 순영은 종수가 본 세상에서 두 번째로 까칠한 여자였다. 서로 결핍이 무언지 잘 알았다. 순영은 가시를 능숙하게 숨기는 대범한 여자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았고,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엔 그게 잘 안 되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불평 한마디했기로 막무가내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질타 앞에서 순영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존심도 감추고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절벽 앞에 선 것 같았다.


왜 울어? 지금 우는 거 비굴한 거야. 너 그렇게 비굴한 여자였어?”


굴비도 아니고 비굴인데 순영은 그깟 단어가 뿜는 비린내에 구토가 나왔다.


집에 돌아온 순영은 서랍을 정리하다 잊고 있던 걸 발견했다. 쓰지 않은 장이 많이 남은 줄지 스프링 노트에 이십 대의 고민이 휘갈겨져 있다. ‘하나도 안 변했어.’ 제대로 한번 펀치도 날려보지 않고 무릎 꿇는 자신이 바이러스보다 암세포보다 마흔다섯 순영은 무서워졌다. 속이 또 울렁거렸다.



촌평 _

손바닥소설은 통상 엽편소설, 콩트라 지칭하지만 콩트는 프랑스어의 단편소설에 해당된다. 그래서 20매 안팎의 소설을 우리는 '손바닥소설'이라 편의상 지칭하고 작고 좋은 소설을 골라 게재하려 한다. 또한 크로스오버 시대에 대응하는 장르해체와 융합에 대한 실험과 새 지평을 열기 위한 코너임도 밝힌다. 


짧은 스토리로 원형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날카롭게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을 비판하는 소설, 소설 같은 소설을 계속 찾으려한다. 배혜경의 <비굴>은 이 맥락 상에 놓인 짧은 소설로, 결말 부분의 반전을 언어 트릭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굴비'와 '비굴'의 음운도치로 콩트적 기법을 살리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개성적인 소설문체이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명증한 관계양식을 보여주기 위한 소설문장에 대한 관심이 더했으면 한다.

 (손바닥소설 심사위원회)




- 계간 <인간과문학> 2021겨울호(제36호), 손바닥소설.




책에는 싣지 않은 창작노트 _ 

그해 겨울 한 해가 가기 열흘 전이었나. 구룡포 시장 바닥에서 두개골을 훤히 열고 가게 앞에 걸려 있는 소의 머리를 보았다. 14매, 손바닥소설은 거기서 출발했다. 시장 한복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시장에 가면 양가감정이 이는 어떤 원형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 곳에 마치 굴비가 걸리듯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세로로 쩍 갈라놓은 두개골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훤히 열리는 듯 바람이 슝하고 불었다. 토악질이 나려했지만 한편 시원했다. 비굴하게 살지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순응과 현실타협은 한끗 차이다. 순응과 타협의 속내가 다르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한 때는 용왕을 꿈꾸고/ 삼천정병을 이끌고 토끼를 잡으러 가고 싶었을 게다/ 속살까지 퍼렇게 물든 바다에서 혁명을 꿈꾸다/ 태어나 처음 공기를 맛보고/ 은빛 비늘이 벗겨지고/ 아가미에 소금이 뿌려진 채로/ 제 태어난 바다를 동공에 담고/ 나일론 끈에 효수당한 채로/ 석 달 열흘을 매달려 있다가/ 지폐 몇 장에 팔려/ 불빛 가난한 이의 밥상에 누웠다// 우르르 달려든 쇠꼬챙이에/ 몸뚱이는 산산이 부스러지고/ 앙상한 뼈와 헤진 내장을 드러낸 채 / 누웠다/ 두 눈 부릅뜨고 / 누웠다// 아버지가/ 누웠다. ― 박현 시 <굴비> 전문




_비굴의 시대

_비굴이 아니라 굴비옵니다

_굴비낚시






구룡포 적산가옥 카페, 가지야 & 까멜리아(배혜경 아이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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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22-01-06 13: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구룡포에도 적산가옥이 있나 봅니다.
적산가옥 찾아 군산이며 목포, 부산 등 찾아다녔었거든요. ^^

프레이야 2022-01-06 15:02   좋아요 5 | URL
브리즈 님, 부산이면 남부민동과 초량 쪽에 오셨군요.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한 곳 많더군요 요새. 구룡포 일본가옥거리 저곳에 여명의눈동자 촬영한 가옥도 있고 동백이 나오는 드라마도 이곳에서 촬영했어요.
예전 느낌은 안 살지만 그런대로 볼 만한 거 같아요 ^^

햇살과함께 2022-01-06 13: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지원 아니십니까?!

프레이야 2022-01-06 13:51   좋아요 5 | URL
원고 보낼 때 최대한 얼굴이 가려진 사진을 보냈는데 알아보시면 ㅋㅋ 농담이어요 돌 날아올라요. ㅎㅎ 한번 웃고 가세욤 햇살과함께 님.

얄라알라 2022-01-08 10:11   좋아요 1 | URL
같은 생각^^

다락방 2022-01-06 13: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지원인줄 알았어요!!

프레이야 2022-01-06 15:41   좋아요 4 | URL
아아니 락방 님꺼정 왜 이러세요. ㅎㅎ

청아 2022-01-06 13: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으앗~♡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사진보니 인사를 하고 싶어져요!!ㅎㅎ

프레이야 2022-01-06 15:19   좋아요 4 | URL
앗 귀여운 미미 님 안녕하세요 하이 👋 ㅎㅎ

책읽는나무 2022-01-06 14: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지원인 줄?? 프레야님만 세월을 거슬러 오라가고 계시군요? 어머 어쩜~^^
근데 이젠 소설도 쓰시는군요?? 좋은데요?^^

적산가옥이라 하니까 부산 아이유가 밤편지 촬영한 정란각이 생각 나네요^^ 이름이 생각 안나 금방 찾아봤더니 문화공감으로 바뀌었네요. 적산가옥도 일본가옥이라고 명칭이 바뀐 듯도 하고 그렇네요.
암튼 그곳 참 운치 있고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저곳도 그러하겠죠?^^

프레이야 2022-01-06 15:25   좋아요 6 | URL
우잉 책나무 님 ㅎㅎ 이게 사진 크기가 줄여지지 않네요. 어케 하는지. ㅠ 컴맹. 글, 틀에 박히지 않고 싶어서요. 말씀하신 정란각 그곳 문화공감 수정, 지금은 임시휴업 상태더군요. 안 그래도 대신 거기서 가까운 카페 초량1941, 내일 작은딸이랑 가보려구요. ^^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2-01-06 15: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하지원보다 멋지고 예뻐요.
에세이와 영화 평론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소설까지 집필하시는군요~~
넘사벽이란 이런 것인것 같아요.
구룡포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꼭 가봐야할것 같아요^^

프레이야 2022-01-06 18:40   좋아요 3 | URL
아휴 과찬에 몸둘바를요 ㅠㅠ
새로이 시도해 보았어요.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구룡포 가 보실 만해요. 과메기 덕장도 있고 바다랑 옛날집들 골목요. 조용한 저녁 누리세요 페넬로페 님^^

새파랑 2022-01-06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룡포는 과매기죠~!! 예전에 구룡포 놀러 많이 갔었는데 반갑네요~! 그리고 손바닥 소설 재미있어요~!!

프레이야님 혹시 작가겸 배우 이신가요? 미모에 깜짝 놀랐어요 ^^

프레이야 2022-01-06 18:43   좋아요 2 | URL
아아니 새파랑 님 ㅎㅎ 뽀샵이란 게 있잖여요. 재미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구룡포 과메기 좋아하시죠. 청어가 귀하대요. 전 많이 즐기진 않지만 훈련을 한 번 먹어줘야 하는데 올겨울은 지나갈 것 같아요.

stella.K 2022-01-06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위에서들 다 하셨고,
저도 첨에 굴비로 읽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자꾸 글자를 바꿔 읽게 되더러구요.
그래도 이 글은 바꿔 읽어도 그리 비굴하지 않아 좋네요.ㅋㅋ
대단하십니다!^^

프레이야 2022-01-06 18:45   좋아요 2 | URL
비굴하지 않게 장치하고 살아요 우리. ㅎㅎ 저도 요샌 눈도 침침하고 글자도 헷갈리고 어리버리 그럽니다. 고맙습니다 스텔라 님 ^^

키라키라 2022-01-06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재밌어 빠져 읽었습니다 ^^ 손바닥 2편도 궁금해지네요 ㅋ

프레이야 2022-01-06 18:46   좋아요 2 | URL
키라키라 님 재미나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2편도 다음에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온한 저녁 보내세요.

mini74 2022-01-06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넘 좋다. 굴비와 비굴이 이렇게 멋진 글로 ㅎㅎ이래서 작가님이신거죠 . 넘 좋아요 ~~작가님 예쁘기까지 하시군요.

프레이야 2022-01-06 18:48   좋아요 3 | URL
똘망이 엄마 미니 님 고맙습니다 ^^
언어에 예민한 거 같아요 우리 북플들은요.
어느 순간 딱 꽂히는 글자 하나에도 많은 게 칡넝쿨처럼요. 우리 기억이 없다면 얼마나 가난할까요. 저녁 맛나게 드세욤.

라로 2022-01-06 1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야님의 미모와 피부는 여전하군요!!!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요~~~!!^^

프레이야 2022-01-06 18:58   좋아요 1 | URL
아고 ㅎㅎ 옆지기 카메라라 그래 보이나 봐요. 그나저나 강릉 박이추 커피점이 상암동에도 있어요 서울 오면 가요 같이. 괜찮더라구요^^

여울 2022-01-06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이런 글 원했는데 님의 글인 걸 알고 더 깜짝. 잘 어울리네요^^

프레이야 2022-01-07 07:5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여울 님 ^^

서니데이 2022-01-06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 아니었군요. 북플로 보는데, 하지원님인줄 알았습니다.
프레이야님,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22-01-07 07:54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까지 ㅎㅎ 오늘도 좋은 날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

scott 2022-01-07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이 포스팅에 새겨진 사진

앵두 커버로 바꿔 버립시다!!

판매량이 전 보다 🤞배 뛰어서
랜선 독자 미팅을 열어 달라는 팬들의 요청이 쇄도 할 것 같습니다!!

2022년 새해 베스트 셀러 작가 이름에

프레이야님이 뙁!💓

프레이야 2022-01-07 15:39   좋아요 1 | URL
아아니 그런 트릭을요 ㅎㅎ
앵두홧팅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캇님
오늘 날이 따시해요.
남은 시간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 ^^

희선 2022-01-08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굴과 굴비 재미있네요 이런 손바닥소설도 쓰시다니 멋지고 사진도 멋집니다 시간은 가고 주말은 다가오다니... 프레이야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2-01-08 00:30   좋아요 0 | URL
희선 님 추운 겨울밤 조용한 시간 맞이하시고 내일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2-01-0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의 <비굴>은~~~~.???
와 멋져요!!!!!!!!!!!!!!! 프레이야 님은 너무 대단하신 분 같아요. 수필에 이어 소설에 이미 도전하신 건가요?
이미 뽑히시기까지 하신 건가요?
저도 손바닥 소설을 써 보겠다고 가와바타 야쓰나리의 책과 보르헤스의 책을 몇 년 전에 샀는데
결국 도전에 실패했다는 전설이 있어요.
하하하~~~ 저는 한 장르라도 잘 쓰고 싶을 뿐입니다. 이것도 맘대로 안 된다는...

님이 쓴 소설을 복사붙이기 해서 천천히 감상하겠습니다. 또 글 실리면 올려 주십시오...^^

프레이야 2022-01-09 18:56   좋아요 1 | URL
로망이었지만 한번 시도해 보았는데 뽑혔어요 ㅎㅎ 미숙하지만 해볼까 합니다. 먼저 많이 읽어야겠지요. 하지만 너무 많은 인풋이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 습작 오래도록 하고 있는 언니가 있는데 내년엔 짧은 이야기집 정도로 책을 내려고 하더군요. 저는 마구마구 응원했어요. 저도 공부를 좀 해야하겠지요. 페크님은 보르헤스와 야스나리를 선생님으로 모셨군요 이미. 전설이 실화가 되는 날이 있겠지요 페크 님 으샤!!
 

 












새해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눈 뜨면 북플을 훑어보는데 오늘 눈에 띈 책은 두 권이다. <끝낼 수 없는 대화>와 이 책 <빅터 프랭클>을 당장 구매한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옮긴 이시형 박사가 번역했다. 


나는 2013년 새해를 맞이하며 오리무중인 삶과 그 안에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해 1월 초, 내 갈급한 마음에 화답하듯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만나 단숨에 읽었다. 명료한 생각과 단호한 문장이 무척이나 힘이 되었고 저자의 정신력에 감탄하며 <이것이 인간인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의 선택은 다르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죽음의 수용소에서, 120쪽)"로 이어지는 프랭클 박사의 처방은 유효적절했다. 














우리의 현 상황이 마치 수용소의 수감자 같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이 한다. 비단 현 상황만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문제에 연루한다. 선택의 자유가 허용될 때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인간다움을 느낀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죽음의 수용소에서, 121쪽)". 그러면서 프랭클 박사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1-122쪽) 















회상록에서 훨씬 더 좋은 사유와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만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저 볼드체 문장!


결국 늙는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덧없음의 측면이다. 하지만 이 덧없음이 근본적으로 삶을 책임지게 하는 유일하게 큰 자극제이다.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임감에 대한 인식. ......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라. 첫 번째 인생을 잘못해서 모두 망쳤는데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도 지난번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라. 실제로 책임감은 그런 가상의 자서전을 거쳐 진짜 자신의 삶으로 옮겨 가게 된다. (193쪽)


우리 집 수족관에 사는 물고기들은 좁게 보이는 그 공간에서 수감자로 산다. 단지 우리가 보는 관점일 뿐, 물고기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느긋하게 쉬고 24시간이 바쁘다. 먹이가 주어지면 맛있게 먹고 또 움직인다. 한 달에 두 번 수족관 청소를 옆지기가 한다. 오래도록 관리를 맡겼는데 작년부터 우리 손으로 해보자 했다. 수초에 낀 때가 잘 빠지지 않아 며칠 후 확 다 뒤집어 갈아주고 수족관 안을 재배치할 것이다. 예전에 살았던 앵두플래티는 가고 없지만 삶이 그러저러하다 생각될 때면  '앵두'를 생각한다. 새해가 시작하면 새 마음을 먹고 덕담을 나누기는 그게 작심삼일이 된다해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작심삼일을 계속 이어가면 된다는 농담 아닌 진담. 


연초에 덕담을 나누다 어느 선생님이 내 글 '앵두를 찾아라'에서 한 문장을 피드백해 주셨다. 나는 그때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구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 "본능적인 욕구에 집착하지 않고 과욕하지 않기란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는 비결이다. 자유롭지 않음은 아직 버리지 않은 게 많다는 말이다." 그리고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선택을 다시 새긴다. 그 의미란 게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하는지 잘 살피는 양치기가 되자. 풀어헤치고 모으고 여유있게 지혜롭게 잘 건사하자. 작은딸이 곧 도착한다. 특강 시작하기 전에 며칠 마지막으로 쉬겠다고.^^  착한고양이 모꾸 목욕 한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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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03 10:5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지나온 사람들의 말은 항상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겠죠. 그래도 저런 고통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계속 되풀이되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죠. 원하는건 그저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일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네요. 새해에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기를 기원합니다.

프레이야 2022-01-03 11:02   좋아요 5 | URL
몸의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몸의 고통 앞에서 우리의 정신은 얼마나 나약한지요.
손끝만 조금 불편해도 힘든데 말이죠.
세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

새파랑 2022-01-03 11: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너무 공감가는 문장이네요 ㅜㅜ 역시 도선생님은 천재~!! 수용소 관련된 책을 읽으면 자유란게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됩니다 ㅋ

오늘이 작심삼일의 마지막 날이니까 새로운 다짐을 하나 해야할거 같아요 ^^

프레이야 2022-01-03 13:37   좋아요 4 | URL
전 사실 무슨 다짐을 잘 안하는 편인데 올해에 우연히 일주론을 알게 되어 좀 들었어요. 겸손과 조심조심을 다짐했답니다. 뭔가 순간순간 깨어있기가 중요한 것도 같구요. 고통을 승화한 도선생이나 플랭클의 말이 또 마음 안에 다시 들어오네요. 새파랑 님 오늘도 좋은 하루에요. ^^

stella.K 2022-01-03 15: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회상록은 또 언제 나왔다 절판된 걸까요?
더구나 중고샵에선 3만원에 거래되고 있으니 나원...
프랭클은 정말 멋있는 의사죠. 다시 한 번 읽는다고 하곤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ㅠ

프레이야 2022-01-03 17:08   좋아요 3 | URL
앗. 절판요 ㅠ 전 2013년 1월 2일에요. 회상록이 못지않게 좋던데요. 전기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개인의 몫으로 모든 걸 돌리면 부당하지만 그런 관점이라기보다 우리의 의지를 높이 산 강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mini74 2022-01-03 1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목욕잎에 착한 고양이는 없습니다 ㅎㅎㅎ 어제 울 똘망이 목간 시키는데 시간이 좀 길어지니 막 바둥거리며 나가겠다고 ㅎㅎ 저도 프레이야님처럼 잘 살피는 영치기가 되고 싶습니다. *^^* 언제나 좋은 글, 참 좋습니다 ~

프레이야 2022-01-03 23:37   좋아요 3 | URL
미니 님네 똘망이 바둥거리는 거 생각하니 막 귀여움이 돋네요. ㅎㅎ 목욕 아직 못 시키고 아무튼 작은딸 상경하기 전에 목욕하는 걸루요. 고맙습니다. ^^

희선 2022-01-04 0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에 놓여 있어도 잘 생각하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인 듯해요 수용소에서는 더 어렵겠습니다 거기에 있으면서 그날을 잘 살려고 한 사람은 살았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게 누구 이야기였는지 잊어버렸네요 빅터 프랭클일지도... 의사였다고 했으니 맞는 듯합니다 잠깐 다른 사람을 생각했네요 살아 있다는 걸 좋게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1-04 11:19   좋아요 3 | URL
프랭클 박사는 실제로도 장수했어요 타고난 정신력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무한존경심이 생겨요. 오래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한 적이 있고 지금도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선택이 우리의 의지도 밀고 나아가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은 특히 든답니다. 오늘 하루도 밝게 따뜻하게 보내세요 희선 님^^

거리의화가 2022-01-06 13: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아직 버리지 않은 게 많다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나를 구속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 결국 끌어안은 것들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요.
새해 빅터 프랭클의 책이 주는 메시지가 여러 모로 저를 일깨웁니다.

프레이야 2022-01-06 17:34   좋아요 3 | URL
거리의화가 님 공감 고맙습니다.
욕심이 사람을 옭아매는 경우를 주변에서 봅니다. 오늘 겨울햇살이 밝아요. 좋은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
 

밴드를 떼어 보니 살이 잘 붙었다. 


며칠 전 양파를 썰다가 왼쪽 중지 손톱 옆 살 속으로 중식칼이 쓱 들어갔다. 왼손으로 양파를 단단히 잡았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 미끄덩 양파 속껍질이 미끄러져 벗겨지며 칼이 엇방향으로 내리쳤다. 순간적으로 키친타올을 뜯어 꾹 눌러 지혈하고 밴드를 찾아 붙였다. 이럴 때 보면 순발력이 없진 않은 듯. 물 안 담그고 사흘을 그대로 두었더니 완전히 붙었다. 나는 한 해가 저무는 저녁에 암시처럼 이 일을 되새김질한다. 


어제는 나의 첫 분신이 태어난 날이다. 그해 12월 30일 아침 첫 수술이었다. 시간은 담당의사의 수술일정 대로 정해졌다. 사주의 시주는 그렇게 정해졌다. 세부적 운명이란 게 그러고보면 정말 우연의 결과다 싶다. 


그해 연말연시를 병원에서 일주일간 보내며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외로움을 거의 처음으로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분노보다 확실히 외로움에 가까웠다. 둘째를 낳은 5년 후에도 느낀 감정이었지만 조금은 면역이 되었던지 봄비 내리는 창밖 풍경이 위로가 되었던지 좀 나았던 기억이 난다. 어제 나와 띠동갑인 작은이모가 전화로 아빠 안부를 꺼내며 (늙고 병든다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옆지기는 그 말이 무척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미 그 무서움이란 걸 상상하고 있기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그 무서움은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도 덜어줄 수도 없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들 앞에서 때때로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몸이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에 비할 수는 없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아빠는 지금 몸의 감옥 안에서 버티고 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으니 얼마나 외로울까. 다리를 좀 주물러 드리고 또 올게요, 하고 방을 나설 때마다 마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눈빛에 눈물을 감추고 돌아선다. 며칠 전에는 백신패스를 확인해 달라는 말씀에 마음이 마냥 어룽거렸다. 걸어나가서 그놈의 백신패스 제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불과 구월 말에도 했던 일이라 아직도 꿈인가 싶다. 어제는 침상의 상체를 완전히 세우고 겨우 앉아 계신 옆으로 내가 무릎을 구부려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옆지기가 갖고 있던 라이카로 극사실적으로 찍었다. 환자치고는 낯빛이 좋고 피부가 좋아 보였다. 엄마도 같이 찍었다. 오늘 붙든 이 순간이 또 다음엔 귀한 순간이 될거라 믿는다. 


엄마는 어제 생전 안 먹던 치킨을 다 사오라고 하셨다. 왠일이냐고 하니까 허한지 그런 게 먹고 싶다고. 제발 육고기 좀 드시라고 해도 잘 안 먹는 분이라 반가웠다. 아무것도 못 드시는 아빠가 안방에 누워 계신데 우리는 식탁에서 치킨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냄새가 들어갈건데 어쩔 수 없었다. 며칠전에 엄마는 대바늘로 긴 바지를 뜨고 계시더니 어제는 어느새 다 떠서 입고 계셨다. 아이보리색 털실인데 당연히 재활용실이다. 무엇을 풀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엄마의 대바늘은 모두 오랜 세월 손에서 닳고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난다. 안경도 안 끼고 뜨길래 코가 잘 보이냐니까 바늘과 손의 감각으로 정확하다고... 엊그제는 당신한테 미안해,라고 아빠가 말씀하셨다며...


영일대해수욕장(2021.12.30)



어제 아빠한테 가기 전, 포항에 들렀다. 포항 중에서도 북쪽, 영일대해수욕장 바다는 바람이 불었지만 햇살이 또 따스했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찍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차로 10여 분, 박찬일 셰프가 극찬한 중국집 '길성관'에서 짜춘권과 삼선간짜장을 먹고 그곳에서 또 가까운 여울 님 전시회 중인 달팽이책방으로 향했다. (길성관 강추. 짜춘권은 단연 윈! 간짜장은 먹어본 중 제일인 듯)  달팽이책방은 한 시에 오픈하는 줄 알고 갔고 골목에 주차한 후 20여분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달팽이 책방, 마음에 드는 분위기였다. 사진도 찍고 여울 님의 그림도 보고 방명록을 적었다. 젊은 여성 주인장이 상자를 풀어 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는 동안 책장을 둘러보았다. 오래되었거나 핫한 여성주의 책들이 한 코너에 빼곡하고 독서관련 스터디와 모임 일정이 많이 적혀 있었다. 


달팽이책방에서 구매한 책_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데뷔작 <에이미와 이저벨> 



첫문장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시간과 감정의 격랑을 담아내는 강물이 등장한다.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처럼.

그 강물은 맑지 않고 생활과 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타운의 사람들은 익숙하고 딱히 거슬리지 않는 냄새라는 듯 산다. 우리네 삶의 진미가 그렇듯. 빛과 그림자도 슬픔과 기쁨도 한 물결에 흘러가는 것. 따로일 리가 없다.

전체를 이끌어갈 첫문장과 옮긴이의 예리하고 다감한 말을 적어둔다. 


로버트슨 선생이 타운을 떠난 그 여름은 몹시 무더웠고 강물은 한동안 죽은 듯 보였다. 강은 타운의 중심을 관통하며 죽은 뱀처럼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었고, 그 언저리에는 더러운 거품이 싯누렇게 부글거렸다. (11쪽)


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선들은 글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그리 잔잔하지는 않아서 내게, 혹은 내 주변에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하면 솟구치고 내려앉는 감정의 급물살을 탄 우리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렇듯 격랑에 휩쓸릴 때, 강물은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고 우리 자신은 죽어가는 듯 보일 때,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그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는 것 아닐까. 훌륭하게건, 그럭저럭이건, 간신히건, 죽을 뻔하다가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넘기는 것',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그런 '넘기는'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다. ..... 

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 하나는 그런 순간들의 이면을, 그 순간들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친밀하고 세심히 바라보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봄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 옮긴이의 말, 542-543쪽 



<== 19, 20세기 기대되는 여성작가 단편선


<== 좋아하는 배우 키키 키린의 말















달팽이책방 (2021. 12. 30)




"타오르는 신음들로 자라는 책들"

여울 님 전시 <쉬-어, 가:다> 달팽이책방 2021. 12. 30 




한 해 동안 책과 함께한 여러분과 

다정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 나누어 주신 여러분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합니다. 

새해 임인년에도 지긋이 바라보며 기쁨의 한자리 잃지 않고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Happy New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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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31 21:1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시간 전에 에이미와 이저벨 주문했는데...
2021년 마지막주문책, 2022년 첫 배송책이예요 ㅎㅎ

프레이야 2021-12-31 21:14   좋아요 5 | URL
통했네요.ㅎㅎ 저는 미루고 있다가 어제 책방에서 딱 저를 기다리고 있길래
덥석 안았어요. 요게 바로 인연이겠죠. 표지도 넘 이뻐요.

scott 2021-12-31 23:42   좋아요 5 | URL
오!두 분의 텔레파시!
새해 행운 주고 받음요 (*Ü*)ﻌﻌﻌ♥

서니데이 2021-12-31 22:2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아버님께서 조금 더 건강하시고, 가족들 곁에 오래 계셨으면 좋겠어요.
다친 손도 빨리 잘 나으시면 좋겠고요.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서,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엔 가정과 하시는 일에 좋은 일들 함께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21-12-31 22:27   좋아요 5 | URL
서니데이 님 늘 좋은 말씀 따스하게 건네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올해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한순간이네요.
아빠는 그런대로 괜찮으실 것 같기도 하고 힘들고 외롭겠지만
조금이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면 좋겠어요.
해피 뉴 이얼~~

거리의화가 2021-12-31 22: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손은 괜찮으세요? 마치 제가 아픈듯...ㅠㅠ
오늘 이 순간이 또 다음엔 귀한 순간이 된다는 말 지금보다 어릴 때는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제법 와닿는 것 같아요.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2022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프레이야 2021-12-31 22:25   좋아요 4 | URL
네, 손 완전 괜춘해요.
좀 깊이 베인 듯했는데 다행히 길이가 많이 길진 않아 잘 아물었어요.
물 들어가면 따가울까봐 세수도 사흘이나 안 했네요. ㅎㅎ
포항도 사실 세수 안 하고 다녀왔어요. 저 그러고 잘 다녀요 (비밀!)
거리의화가 님, 새해에도 이야기 많이 나누어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새파랑 2021-12-31 22: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다치신 손이 괜찮으셔서 다행이네요~!! 포항가면 길성관과 달팽이책방을 가봐야 겠어요. 프레이야님 22년 산뜻하게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21-12-31 22:31   좋아요 4 | URL
네, 괜춘해요, 잘 붙은 거 같아요.
상처는 시간 가면 희미해지겠지요.
포항 두 곳 거리도 서로 가까워서 묶어서 가기 좋을 거에요.
길성관 짜춘권 드시려면 예약하고 가야합니다 ㅎㅎ
2022년 산뜻하게 ~^^

니르바나 2021-12-31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장기하와 얼굴들 노래 가사가 마음에 듭니다.
˝달이 차오른다˝
아픔도 슬픔도 2021년 세모까지만 차오르고
프레이야님의 새해, 2022년에는 다시 기쁨과 행복이 차오르길 기원하겠습니다.^^

프레이야 2021-12-31 22:42   좋아요 4 | URL
니르바나 님, 장기하와 얼굴들 ㅎㅎ 좋아해요.
가사도 재미나구요.
유행가 가사처럼 달은 차오르기도 몰락하기도 하네요.
이제 한 시간 남짓이면 슬그머니 새해로 넘어가는군요.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수순처럼 자연스레 되는 것들!
늘 행복한 마음 잃지 않고 지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햇살과함께 2021-12-31 23: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달팽이책방, 가봐야지 하다 저도 올 봄에 처음 가봤는데, 제 취향 저격! 알고보니 언니네 집 근처^^ 프레이야님 아버님 모두 건강하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21-12-31 23:24   좋아요 5 | URL
햇살과함께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니네 근처면 자주 가셔도 좋겠어요. 맞은 편 튀김집에 줄서서 기다리던데
그날은 배가 불러 못 먹었어요. ㅎㅎ
건강이 최고! 고맙습니다. 님^^

초란공 2021-12-31 2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 가족분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많이 보내시기 바랍니다.

프레이야 2022-01-01 00:38   좋아요 3 | URL
네. 고맙습니다. 초란공 님도 새해 행복한 시간 엮으시길 바랍니다.

scott 2021-12-31 23: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회복 되시길 바라지만
옆에서 간호 하고 계신 어머님 몸과 마음 많이 상하실까봐 걱정 되기도 합니다
2022년 신년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프레이야님 아버님 회복 되시길 기도 할께요

어제 태어난 따님 오늘과 낼 엄마에게 효녀로 살것 같습니다 !ㅎㅎ

프레이야님 새해 福 마뉘!^^

프레이야 2022-01-01 00:45   좋아요 4 | URL
눈물나게 고마워요 ~
엄마도 새해 83세라 노인인데 마음은 아직도 소녀라 미안하고 그래요 ㅠ 조금이라도 자주 시간 가져야겠어요. 이제 더 미룰 시간이 없는데 말이죠.
큰딸은 ㅎㅎ 너무 맑아서 그저 짠하지요.

mini74 2022-01-01 00: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버지 가시고 저희 어머닌 홀가분하다하셨지만 지금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세요 60년 가까이를 함께하셨으니까요. 아버님이 나아자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님 손에 호~ 해드리며 ㅎㅎ 프레이야님깨 저도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 2022-01-01 00:51   좋아요 3 | URL
다정한 미니 님 호~ 고맙습니다.
물 안 들어가네요 벌어진 살에 트라우마 있는데ㅠ 60여 년을 함께하는 건 무얼 의미할까요. 어머니 우울증 에구 ㅠ 힘드시겠지만 힘내시길 바랍니다.

행복한책읽기 2022-01-01 0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다친 손 붙었다해서 안심했네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들 앞에서 때때로 외로움을 느낀다> 이 문장 읽다 먹먹해졌어요. 말씀처럼 누군들 그렇지 않겠어요. 아버님이 덜 아프시길 소망합니다. 프레이야님 가족이 이 순간을 거뜬히 통과하는 것도요.
새해에는 프레이야님을 더 자주 만나러 올게요. ^^

프레이야 2022-01-01 00:54   좋아요 2 | URL
네. ^^ 이 순간을 잘 넘기고 통과하도록 마음 단단히 먹고요. 힘이 되는 말씀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주 만나요 행복한책읽기 님. ^^

희선 2022-01-01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손 다치셨군요 베인 게 잘 붙어서 다행입니다 아직 아프시겠지만... 12월 30일은 뜻깊은 날이었네요 그날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할 듯합니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은 누구한테나 있겠네요 대신하지 못해서 마음 아플 때도 있고... 프레이야 님 아버님 좀 더 건강이 좋아지시기 바랍니다 지금을 잘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프레이야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2-01-01 07:41   좋아요 2 | URL
희선 님 이름처럼 마음도 곱고 이뻐서 넘 고맙습니다. 지금을 잘 건너고 의연히 또 다음도 받아들이고 그렇게요. 겸손한 마음 잃지 말자고 되새김합니다. 신기하게도 살이 붙으니 아프지 않아요. 희선 님고 새 날 새 마음으로 출발요!

러블리땡 2022-01-01 0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프레이야님 포함 주변분들이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아버님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22-01-01 07:43   좋아요 1 | URL
러블리님 참 고맙습니다.
우리가 덕담을 나누는 이 마음 잊지 말고 한 해 겸손하게 조심조심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겨울호랑이 2022-01-01 08: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지난 한 해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려요! ^^:)

프레이야 2022-01-01 10:06   좋아요 4 | URL
올해는 겨울호랑이 님의 해가 되겠어요 ㅎㅎ 상충하는 게 안 좋다는 말이 있지만 전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으샤으샤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책읽는나무 2022-01-01 09: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퇴원하셨나 보군요?
찾아뵙기가 조금은 수월하시겠습니다.오래 곁에 머물다 오실 수도 있을테고 어머님도 조금은 편하게 쉬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머님도 건강 챙기셔야 하실텐데~~
모쪼록 아버님 얼른 쾌차하시길요^^
‘당신에게 미안하다‘라는 말!! 가슴에 콕 박히네요...엄마도 아빠한테 마지막으로 그 말씀 하시고 가셨다더라구요.미안하다고,서운했던 거 있으면 잊어 달라고....저는 임종을 못지켰었거든요.나에게는 마지막 말씀을 어떻게 하셨을까? 뻔하게 알고 있는데도 무척 듣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은 평생 가네요.
그리고 내가 못다 한 말들도 그렇구요^^
모쪼록 아버님의 건강도 쾌차하시길 바라옵고,프레이야님과도 오랜 시간, 좋은 시간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힘 내시구요^^
가족분들 모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프레이야 2022-01-01 10:12   좋아요 4 | URL
님 임종 못 지키고 돌아가신 엄마가 그립겠어요. 에구 아빠가 팔순이시니 앞으로 좋은 시간 많이 가지시구요. 귀여운 둥이들이 외할부지한테고 잘하겠어요. 울아빠는 집에 오셔서 마음은 편해 보이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누워만 계시니 대소변 처리가 오롯이 엄마몫이네요. 병원침대를 수급했어요. 새 침대로 재가센터에서 친절하게 설치해 줘서 고마웠답니다. 님 올해도 기운차게 밝게 시작해요. 항상 고맙습니다 ^^

stella.K 2022-01-01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게 그렇더라구요. 아픈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산 사람은 살았다고 먹어야 하는 것.
그게 또한 삶이더라구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셔서 마음이 찡하네요.
달리 위로될 말씀도 못 드리겠고. 그저 힘 내시란 말 밖에...

여울님은 못 뵜나봐요.
달뱅이책방, 바다 다 가 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22-01-01 19:38   좋아요 4 | URL
넵 그게 살아가는 모두이지요. 아빠는 오늘 제가 주물러 드리니 너무 시원하다고 좋아하시네요. 일어서기만 하셔도 좋겠어요. 여울 님은 그날 오후 늦게 방명록을 보셨다고 하셨어요. 바다는 겨울바다! 책방은 달팽이. 요새 좋은 독립책방이 왜 이렇게 많죠. 곳곳에 없는 듯 딱 앉아 있어서 반가워요.
변함없이 고맙습니다 스텔라 님. ^^

꼬마요정 2022-01-0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어머님 프레이야님 모두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 간병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덜 불안하고 덜 지치고 더 좋은 추억 만들죠. 많이 드시고 건강 챙기시길 바랍니다!!

늘 좋은 글 써 주시고, 좋은 책 읽어주시고,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올 한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힘 내시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22-01-03 00:40   좋아요 1 | URL
살뜰히 챙겨주시는 말씀 참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님 올해도 행운 가득한 해가 되길 바라요. 늘 밝고 기운찬 에너지 품고 복 많이 받으세요 ^^
 

서방



말레이시아로 이민 간다던 친구가 갑자기 생각났다.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는 어제 통화한 듯 아무렇지 않게 이민은 못 갔다고 대답했다. 준비한 이민서류는 모두 통과되었는데 초유의 바이러스 사태로 그만 발이 묶였다고, 그동안 일이 많았다며 이야기보따리가 터졌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지금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왜 연락 안 했냐니까 식을 따로 올리지 않고 가족만 모여 간단히 식사하고 새 삶을 시작한 게 8개월 되었단다.


친구는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했다. 결혼에 종지부를 찍은 후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남자도 많이 만났다는 친구는 전문직 프리랜서로 잘산다. 나를 포함해 다른 동기들보다 당차고 야무진 사람이다. 15년 전에만 해도 나이는 먹어가고 자식은 없다면서 홀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아주 약간의 두려움 같은 걸 내비치면서도 결혼이라는 제도에 다시는 걸려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귀는 연하남은 있는데 결혼 제안을 받을 때마다 핑계를 대며 물리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던 친구가 이제는 오래 두고 본 그 남자와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며 공기 좋은 신도시에서 새소리 들으며 사는 게 참 평화롭다고 말했다.


우리의 대학 시절, 순정파 야수와 깍쟁이 미녀는 주변에서 다 아는 과커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첫 인연이었다. 졸업할 무렵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고 하던 어느 날, 순진한 내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꺼낸 단어에 나는 속으로 깜짝이야!’ 했다.


그 남자를 집에 초대했단다. 식구들 모두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친구 어머니가 한 서방!”이라고 부르며 사윗감으로 대우했고 나머지 식구들에게 이제부터 모두 한 서방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당부하더란다. 그러면서 친구는 나한테 우리 엄마가 한 서방!’ 그러니까 되게 듣기 좋은 거 있지. 헤헤. 그러니까...우리 한 서방이 어쩌구저쩌구...” 눈망울이 몽글몽글해지며 자랑이 늘어졌다.


, 너는 한 서방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이.”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울엄마가 다들 그렇게 불러야 된다던데...”

 

남편의 남동생을 부르는 말은 두 가지다. 미혼이면 도련님, 결혼하면 서방님으로 불러야 하는 걸로 안다. 하지만 나는 도련님은 불렀는데 서방님은 언감생심 부르질 못한다. 남편의 두 남동생은 모두 결혼 후부터는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 삼촌으로 불린다. 예법에 맞지 않는 호칭이지만 서방님은 어째 입에 올리기가 간질간질하다. 사극과 막장드라마 속 서방질한다는 대사 때문인지 아무튼 선입견이 부른 무슨 부작용인 것만은 확실하다.


친정 부모님에게는 박 서방이 둘이다. 큰사위, 작은사위 모두 박 씨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는 큰박 서방, 작은박 서방, 이렇게 부른다.


명절이면 그동안 일에 바빠 처가 나들이를 자주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박 서방들이 심히 힘들 때다. 여자들만 명절증후군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박 서방들(김 서방, 이 서방, 정 서방 모두)도 못지않게 마음 쓰이는 구석이 많다. 꽉 막히는 도로를 뚫고 안전운행해서 가야지, 섭섭지 않게 지갑도 풀어야지, 동서들끼리 모여앉으면 밀고 당기며 위신도 세워야지. 더군다나 문화가 다른 처가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놀아줘야지.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여기서 큰박 서방 자랑을 살짝 할까. 장인 장모에게 앞서서 마음 써주고 챙겨드리니 살갑지 못한 맏딸로서 고맙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면서 제일 원하는 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인데 무엇보다 큰박 서방은 그걸 잘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에게 이야기하기에는 공감을 얻지도 못할 것 같고 회한밖에 안 드는 슬픈 개인사를 어디에다 내뱉고 싶었을 것이다. “밖에 나가면 누가 뭐 내 얘길 구구절절 듣고 있으려고 하나? 난 이렇게 말만 할 수 있어도 한이 풀어지는 것 같다구.”


큰박 서방은 오래 듣고 앉아 있었다. 다음에 또 들을 요량으로 북쪽 고향 이야기를 남겨두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씨암탉도 한 번 못 잡아준 처가지만 그저 박 서방 고맙네.’ 그런 속말을 다 알 거라 믿으며.

 

서방은 순우리말이다. 옛날에 서방맞히다시집보내다의 뜻이고 지금도 함경도에서는 장가가다의 뜻으로 서방가다를 쓴다. ‘서방에 기어이 한자를 다는 호사가들은 서재를 뜻하는 서방書房과 사위를 서쪽에서 재웠다고 서방西房을 쓰는 예를 우리말에 잘못 가져다 단 것으로 보인다.


사전을 좀 더 찾아보면 서방는 사벌(상주), 서라벌(경주), 소부리(부여), 솔부리(송악), 쇠벌, 새벌(철원), , , , , 처럼 ㅅ계통의 말로 새롭다, 크다라는 뜻도 있다. ‘은 건설방(오입판 건달), 만무방(염치 없는 사람), 심방(만능무당), 짐방(싸전 짐꾼), 창방(농악의 양반 광대)에 쓰는 으로 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그러니 우리말의 서방은 書房이나 西房 아니고 새 사람, 큰 사람이라는 뜻으로 굳이 한자어를 달 필요가 없는 말이다.


일상도 감정도 슴슴해지는 나이에 오히려 신혼의 달달함을 구가하는 친구에게 남편을 어떻게 부르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친구가 남편 될 남자에게 모두 한 서방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우기던 얼굴이 귀엽게 떠오른다. 누구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어이, 서방.”, 아양을 떨어야 할 때는 우리 서방니임.”이라고 한다는데, 우습게도 나는 평생 불러보지 못한 호칭이다. ‘나의 새 사람, 나의 큰 사람이라고 불러준다고 그게 어디 낯간지러울 일이냐.



- 계간 동리목월 (2021겨울. 45)









 서정오 






서정오의 옛이야기 보따리를 좋아한다. 성인시각장애인 대상으로 우리 옛이야기 스토리텔링 수업을 할 때도 서정오 이야기를 주자료로 했다. 들려드리기에 좋은 입말로 씌어 있어 더욱 좋다. 누구는 잘나 보이고 싶은 욕심에 허위 사실도 아무렇지 않게 서류에 쓰고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욕심과 허영이 무엇에 다 소용이랴. 조금 모자란 듯 바보처럼 살면 어떠랴 싶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랜만에 셋이서 밥을 먹고 야경이 좋은 산 속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내 책을 본 아는 언니가 아이템을 잘 잡았다고 해서 속으로 놀랐다. 길게 말하기 싫어 그냥 좋아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아이템을 잘 잡고 안 잡고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이템이라니 ㅎㅎ 이런 내가 '멍'한 건지 몰라도 '똑'한 사람들은 워낙 많으니. 언니는 오래도록 소설습작을 하고 있다. 내년쯤에는 단편이야기집을 내라고 응원했다. 변함없는 분! 


검암도서관에서 독서반을 오래도록 하는 글벗이 아침에 전화와 한 시간을 통화했다. 15명이 잘 유지하고 있고 목포로 이사간 한 분이 안타까웠는데 코로나 이후 줌으로 만날 수 있어 오히려 장점도 있더라고. 방금은 서울친구랑 잠시 통화했다. 늘 간명한 영감을 주는 친구 왈 우리는 모두 각자의 트루먼쇼를 펼치며 사는데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자신만 모르는 형국은 아닐까, 빗대어 말했다. 공감! 트루먼쇼의 주관은 저 위의 높은 분이겠지만 그 또한 명확히 아는 바 없고 그저 오늘도 감사하며! 한때 지적허영에 빠져 책도 많이 사고 그랬지만 이제는 많이 버렸다고 말한 친구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독서토론을 하는 게 지적허영은 아니길 바라며 한 해가 저무는 무렵, 나 자신도 돌아본다.


서방,이라니 뜬금없이 생각난 사진.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아직은 2021년이다. 

모두 몸도 마음 따스한 날 보내세요^^




2017년 3월 18일 Bethlehem.  배혜경 아이폰 촬영


2017. 3. 18. 가시면류관도 상품화된 베들레헴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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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7 1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방에 저렇게 좋은 뜻이 담겨있군요. 서정오님 옛이야기 들려주기 좋아합니다 ~ 서방이라 부르면 저희 남편 좀 무서워할 듯 합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1-12-27 14:41   좋아요 3 | URL
아마도요 ㅎㅎ저희 집도 마찬가지에요.
한번도 입에 올려본 적 없는 단어라...
서정오 님 이야기 참 좋지요. 특히 입말이 재미나요.

책읽는나무 2021-12-27 15: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동생이 있어서 나중에 도련님을 서방님이라고 어떻게 부르지???? 엄청 걱정되던데...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진 서방님이라고 안불러도 되네요!!!ㅜㅜ
결혼하게 되면???하~~~
남편한테 서방님!!은 하~~~갑자기 공황장애가 올 것 같아요ㅋㅋㅋ
헌데...서방이란 단어가 참 좋은 뜻이었군요?
새 사람,큰 사람이 되란 말이군요!!!
남편한테 일러줘야 겠어요..새 사람! 큰 사람!!^^

프레이야 2021-12-27 15:15   좋아요 4 | URL
애들이 부르듯 삼촌~
헌사람 작은사람이 되는 것보단 나을까요 ㅎㅎ
님 먼저 해 보세요 공황장애 오는지 어떤지요 ㅋㅋ 생각만 해도 울렁증이.

얄라알라 2021-12-27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의 기억 속에서 친구분은 ˝한 서방~˝하는 사랑스런 모습으로 찰칵, 스냅샷!
작가분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기억하시는 방식과, 말을 기억하시는 능력이 정말 작가분들은 다르신 듯!^^

프레이야 2021-12-27 16:38   좋아요 2 | URL
친구라서 고맙습니다 얄라 님
연도 몇날 몇시까지 기억한다고 어떤 친구는 경기합니다 ㅎㅎ 요샌 무뎌져서 그마저 흐릿할 때가 많아요. 아 옛날이여~

persona 2021-12-2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댁과 같은 말이었군요. 우리말 재미있네요. ㅎㅎㅎ

프레이야 2021-12-27 17:25   좋아요 3 | URL
새댁 맞네요 ㅎㅎ 새 집이네요
역시 집은 여자가!!

서니데이 2021-12-27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들레헴에선 가시관 굿즈를 판매하는 건가요. 크리스마스 장식하려고 둔 소품인줄 알았어요. 프레이야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21-12-27 21:58   좋아요 2 | URL
오늘 지난 집행부 마지막 모임 다녀왔는데 진짜 춥네요. 소감 한마디씩 하면서 전 또 그만 울었네요. 요새 왜 이렇게 짠한지요. 다들 좋은 분들이라 3년간 한 팀으로 일하며 정이 많이 들었어요.
가시면류관은 베들레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는 골목 상점에 판매하더군요. 남은 올해 하루하루 편안하게 알차게 지내세요 ^^

기억의집 2021-12-27 1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요. 도련님은 부르겠는데… 서방님 소린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전 도련님 소리도 우리 세대나 멋모르고 했지 .. 아마 요즘 애들은도련 소리 절대 안하지 싶어요 호칭 참 어려워요~

프레이야 2021-12-27 22:03   좋아요 1 | URL
사실 도련님도 좀 그랬어요 ㅎㅎ 구시대 호칭 아닐까요. 진짜 이제 그런 호칭 안 쓰면 좋겠어요. ㅋ 근데 뭐라고 부르죠 그럼? 그것도 모르겠네요. 서양식으로 그냥 이름 부를 수도 없고 애매하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1-12-28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증후군이 있는 남편님들을 두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시작으로 퍼지면서 시대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거겠지요.
요즘 젊은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아예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 역할을 면제 받는 일도 있다고 들었어요. ^^

프레이야 2021-12-29 00:48   좋아요 0 | URL
요즘 며느리는 결혼식날 잡고 시엄니 피부관리 티켓 선물하더군요. 며느리 역할 면제받으려면 어떻게 했을까 싶은데 어찌보면 딸부모 입장에선 좋다싶기도 하고 갈팡질팡이네요.

희선 2021-12-29 0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는 말이 한국말인데 그걸 한자로 쓰기도 했군요 서방을 찾아보니 書房서방이 나오네요 좋은 말인데 안 좋은 말로 쓰기도 하다니... 반대로 안 좋은 걸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일도 있을 듯합니다 영화 보고 책 읽고 독서토론 하는 건 즐거운 일이죠

프레이야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1-12-29 07:54   좋아요 2 | URL
창밖으로 날이 밝았네요. 오늘은 또 저무는 한 해를 카운트다운하기 좋은 날이네요. 하루하루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근대어요. 뜻밖의 좋은일 그렇지 않은 일 있겠지만 평화와 사랑이 중심에 있길 바랍니다.

굳이 한자 달 필요 없이 한글 이름 이쁜데 어떨 땐 한자가 달리면 뜻이 명확해지기도 하고요. 서방은 우리말 ^^
희선 님도 오늘 따뜻하게 보내세요.

han22598 2021-12-30 0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네요 ^^ 재밌어요 ㅎㅎ

그리고...지적허영심..맞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게 있어야..독서도 하고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탐구하고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프레이야 2021-12-30 19:05   좋아요 0 | URL
넵. 허영이라 해도 착한 허영이면 좋겠습니다. 의도와 방향이 중요하겠어요^^ 한님 좋은 말씀 으샤으샤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1-12-3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부터 다시 날씨가 차가워지네요.
프레이야님,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1-12-30 22:0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하루 남은 한 해가 왠지 아쉽네요. 따스히 보내세요. ^^

처음처럼 2021-12-31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고 불러주시는 분은 계시지만 서방님이라고 불러주는 경우는 아직도 없어서 아쉽네요.ㅎㅎ

프레이야 2021-12-31 16:34   좋아요 0 | URL
ㅎㅎ 그분도 저랑 비슷하신가 봅니다.
불러주시는 어르신 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