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쥐의 깜짝 마술 - 꿈꾸는 나무 12
줄리 비바스 그림, 멤 폭스 글, 강현희 옮김 / 삼성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주머니쥐의 깜짝 마술>은 읽기 컨설턴트로 유명한 호주 출신의 Mem Fox가 글을 쓴 첫번째 그림책이라 하여 얼른 손이 갔다. 책 읽어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가 쓴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잠자리에 들어 입말로 들려주면 좋은 정도의 분량으로 되어있다. 이야기의 전개는 옛날,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로 시작하여 길지 않지만, 어떤 놀라운 사건이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우연히도 해결책을 찾게 되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처지에서 마음을 헤아릴줄도 알게 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스토리를 들으며 집중할 수 있는 힘도 생길 수 있겠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깊은 숲 속에 사는 주머니쥐, 허시는 포스 할머니와 함께 산다. 포스 할머니는 신기한 마술을 부려 허시를 재미있게 해 준다. 어느 날, 할머니는 허시를 투명쥐로 만드는데, 이 장면의 그림이 최고로 예쁘다. 할머니가 양손으로 흩뿌리는 색색의 마술가루는 별모양으로 떨어지다가 가루로 바스러지며 내린다. 그 가루를 맞는 허시는 점점 투명쥐로 변해간다. 위험한 동물들을 쉽게 피할 수 있게 하려고 할머니는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싶은 허시는 할머니에게 부탁을 하고, 허시의 모습을 되돌리는 방법을 미처 알아놓지 않은 할머니는 무척 슬퍼보인다. 여기서, 실망감을 감추고 할머니를 오히려 위로하는 허시가 기특하다.

문득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할머니는 허시를 등에 태우고 자전거 음식여행을 떠난다. 할머니 주머니쥐가 신고 있는 하얀 스니커즈가 노란 자전거의 맵시 못지않게 날렵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이것저것 먹으며 허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일곱 번째 도시에서는 초콜릿 케이크를 먹는다. 드디어 성공! 너무 신나 다음날 아침까지 둘은 춤을 춘다. 주머니 쥐 두마리의 털북숭이 꼬리가 아주 율동적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간은 일 년이 흘러 허시의 생일날이다. 할머니가 허시와 친구들을 위해 마련한 선물은 다름아닌, 바로 그 음식들이다. 허시의 모습을 제대로 찾아준 그 음식들, 샌드위치, 생크림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 모습에서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과 아이를 생각하는 자상한 마음이 느껴져, 아이는 충만감과 안정감을 그대로 가지고 꿈나라로 갈 수 있겠다. 게다가 자기를 그렇게 끔찍히 아끼고 위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핵가족이라 조부모님과 함께 살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할머니가 오시는 날이나, 할머니 댁에 가는 날이면 참 좋아한다. 엄마나 아빠보다 허용적이고 넉넉하게 포용해주시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면 정서적으로도 푸근함을 맛본다. 평일에는 두 분 할머니와 전화로 자주 이야기한다. 종알종알 엮어내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는 참 기뻐하신다. 그런 관계를 지켜보는 난 한 발 물러서며 흐뭇해한다. 사실 아이는 할머니와의 이런저런 대화로(사실 아이가 주로 말하지만) 말을 빨리, 잘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역시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은 달콤한 맛인가 보다.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이 기분을 얼마나 좋게하는지! 그래서 난 가끔 초콜릿이 듬뿍 묻은 케이크나 도넛이 먹고 싶다. <주머니쥐의 깜짝마술>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할머니, 사랑스럽고 귀엽게 그린 동물들, 마술 그리고 달콤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등장시켜, 아이뿐 아니라 어른의 구미도 한껏 끌어당긴다.

이 조그마한 그림책에 매료되는 이유는 사실 글보다 그림이다. 하얀 바탕에 맑게 그린 수채화의 색감이 퍽 맑고 곱다. 혀를 날름거리는 뱀까지도 이리 고운 색을 하고 있으니...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화사하고 세밀하게 묻어나는 색이다. 포인트는 할머니 주머니쥐가 입고 있는 별무늬의 보라색 앞치마다. 신비스런 분위기를 주는 보라색은 마술 앞치마의 색깔로 적절한 것 같다.

마술 앞치마가 있다면 아이는 무얼 해 보고 싶을까?
아이가 지금 원하는 게 뭘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함께 세어 보아요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12
안노 미츠마사 지음 / 마루벌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첫 장을 펼치면 아기자기한 모양의 창틀 같은 것이 보인다. 가로로 퍼진 직사각형에 네 각을 안으로 둥글게 살짝 깎아놓은 창문이다. 우리는 이 창문을 통해 밖에 있는 마을 풍경을 한눈에 본다. 숫자 0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엔 백지위에 연한 하늘색이 펼쳐지고 작은 강물이 마을을 세로로 가로질러 구불렁구불렁 흐르고 있다. 그 다음부턴 1에서 12까지 일년 열두 달의 마을 풍경이 차례로 펼쳐진다. 이 그림책은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달마다 나눌 수 있는 가지가지 이야기를 그림 속에 담고 있다. 단지 숫자나 사물을 세는 여러가지 종류의 단위들만 인지시키기보다, 아이들이 담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풀어내게 하면 활용범위가 넓은 그림책이 되겠다.

1월엔 하늘에 해님 하나, 눈 덮힌 전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조각, 앙상한 가지의 나무 한 그루, 눈길을 밟고 작은 다리를 건너온 이웃 마을의 강아지 한 마리, 눈사람 하나, '1'이라는 숫자가 적힌 깃발 하나, 집 한 채가 있는 마을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창문 틀 왼편에는 정육면체의 블럭을 하나씩 쌓아올리며 수의 양적인 개념을 자연스럽게 시각화한다.

2월엔 눈옷을 벗은 전나무 두 그루, 토끼 두 마리, 아직 다 녹지 않은 눈밭을 뛰노는 아이 두 명, 트럭 두 대, 그 위에 실은 짐도 두 개씩이다. 예배당 시계탑의 시계바늘은 두시를 가리키고 있다. 3월엔 완연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 보드랍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나비 세 마리, 갖가지 꽃도 세 송이씩, 배도 세 척이 더해진다. 4월엔 기찻길을 놓는 일을 하는 어른 두명에 돼지 먹이기, 과일 나르기를 하는 어른 두 명을 합쳐 즐겁게 노동하는 어른이 네 명이고, 강가에서 네 마리의 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도 네 명이 더해진다. 시계바늘은 예상대로 4시를 가리키고 있다.

5월엔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기찻길은 완성되어 강을 가로질러 화물차가 다닌다. 6월엔 싱그러운 풀을 밟으며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 여섯 명과 오리 여섯 마리가 더해지고 집과 전나무는 모두 당연히 여섯씩이다. 7월엔 무지개를 볼 수 있다. 일곱가지 색깔의 고운 무지개가 압권이다. 빨래줄에 널려있는 하얀 빨래 일곱 개와 풀을 뜯는 젖소 일곱 마리가 한가로운 여름 풍경을 자아낸다. 8월엔 강 위에 다리가 하나 더 생겨 이웃마을 사람들과 서로 다니기 좋아진다. 강에서 물놀이하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있고, 하지만 시계는 8시를 가리킨다. 아마도 한낮일텐데... 숫자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큰 책이니 조금 눈 감아줘야겠다.

9월엔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 아홉 마리, 노란 색 옷을 입은 나무 아홉 그루가 더해진다. 10월엔 단풍 든 나무가 열 그루, 마을을 빙 둘러 울타리를 치고 있는 사람들까지 열 명, 누렇게 익은 들판에서 놀이에 여념없는 아이들도 열 명이다. 11월엔 따뜻한 나라를 찾아 먼 길 떠나는 철새 열한 마리, 다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열한 그루, 푸르른 전나무 열한 그루가 있다. 굴렁쇠를 돌리고, 강을 가로질러 실로 꿴 전화로 얘기 나누고,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 열한 명이 있다. 열한 명의 어른들은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다.

12월! 창밖은 온세상이 눈바다! 그 위로 지금도 눈꽃송이가 폴폴 내려오고 있다. 열두 마리 루돌프가 끄는 마차를 타고 오는 산타할아버지는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계는 열두 시를 가리키고 예배당으로 오고 있는 어른도 열두 명, 아이들도 열두 명이다. 그런데 눈옷 입은 전나무가 열한 그루밖에 보이지 않아 갸우뚱하다가 예배당 앞에 화사한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하여 서 있는 전나무 한 그루를 찾았다. 전나무를 세어 보라고 했더니 당연히 열두 그루지, 라고 말한 아이가 제 예상을 엎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발견하곤 기뻐서 소리친다.

'엄마, 우리도 크리스마스트리 얼른 불 켜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갑 - 우크라이나 민화 내 친구는 그림책
에우게니 M.라쵸프 그림, 배은경 옮김 / 한림출판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이면 꼭 한번 더 보고 싶은 그림책이 <장갑>이다. 우크라이나의 민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이 그림책은 얇은 두께에, 다소 옛스러운 꽃문양으로 둘러싸인 이상한 장갑부터 책표지에서 볼 수 있다. 무슨 장갑 안에 동물들이 들어앉아 있고 사다리에 기둥받침까지, 마치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연상하게 한다. 그 아래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보기만 해도 아주 추운 날씨란 걸 짐작하게 한다.

세계 그림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라초프의 <장갑>은 그림책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을 고루 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일로 꼽고 싶은 것은 매력적인 그림이다. 손목 부분에 털이 달려있는 가죽장갑(아마도) 한 짝이 이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마치 이 장갑 한 짝은 목숨있는 생물인 것처럼 조금씩 탈바꿈을 하며 자란다. 숲 속 눈길 위에 홀로 떨어진 장갑 한 짝은 어린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숲 속에서>나 <또 다시 숲속으로> 또는 <숲 속의 요술물감>에서 처럼 숲에 홀로 들어온 아이는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멋진 판타지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모두 감당하진 못하는 자신의 능력이며 관심이며 소망이다.

아이들은 눈이 오면 강아지마냥 팔짝거리며 좋아한다. 추운 겨울 흰 눈이 쌓인 숲 길에 남은 아이는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겨울 숲 속에서 생쥐나 개구리를 만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아이의 상상이 미치는 범위는 그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먹보 생쥐, 팔짝팔짝 개구리, 빠른 발 토끼, 멋쟁이 여우, 잿빛 늑대, 송곳니 멧돼지 그리고 느림보 곰까지... 갈수록 덩치 큰 동물들이 차례로 장갑 안으로 들어온다. 그 때마다 변해가는 장갑은 탄복할 정도다. 널판지로 장갑의 입구를 넓히고, 창문을 만들고 출입문에 종을 달고, 나중에 생쥐는 지붕(?) 위에 올라가기까지 하며 다른 동물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준다. 따스한 장갑과 동물들의 마음이 닮았다.

<장갑>의 그림은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착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그럼직한 상상을 유도하고 있다. 전혀 거부감이 일지 않고 자연스럽게 매료된다. 멧돼지가 들어가고부턴 장갑의 실밥이 터지고 있다. 꽉 찼다고 엄살을 떨면서도 덩치 큰 곰을 한쪽 구석으로 들어오게 하는, 동물들은 아이의 마음을 꼭 닮아있다.

곰이 들어가 장갑이 터졌을까? 라초프는 여기서 장갑의 변신을 멈추고, 원래의 장갑 한 짝으로 불현듯 돌아간다.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는 장갑을 보고 할아버지보다 앞장 서서 달려온 강아지가 멍멍멍 짖고, 동물들은 장갑을 빠져 나와 숲 속으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짖는 소리는 판타지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종소리같다. 재치있게 끝내는 마지막 장이, 판타지의 달콤함과 자유로움을 못내 아쉬워하게 만들어, 자꾸 <장갑>을 보고 싶게한다. 날마다 자라는 오동통하고 인정 많은 그 아이를 자꾸 보고 싶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앙리 파브르 - 늦깎이 위인전시리즈 03
박진아 지음 / 세이북스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고정욱 선생이 기획, 감수한 늦깎이 위인전 시리즈는 참 밝은 인상을 준다. 표지에서부터 귀염성이 있고 부담이 없다. 저학년 위인전은 어딘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책이 많았는데, 이 위인전은 초등 저학년이 인물이야기에 다가가기에 마춤이다. 글의 분량이 많지 않고 행간도 넓고 여백이 많아 눈이 시원하다. 책이라면 우선 문자의 양에 질려버리기 쉬운 저학년들에게 접근하기 쉬울 것 같다. 수채삽화도 그 차지하는 몫을 적지 않게 하여 내용전개를 따라가기 쉽게 해두었고 삽화 자체의 인상도 꽤 맑다.

늦깎이 위인전 시리즈의 기획 의도가 말하고 있듯이, 그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평범과 비범 사이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인 것으로 이끄는 길이, 이 책에는 간결한 내용의 글로 들어있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원한다면 실망할 수 있는 작은 책이지만, 이 책은 한 위대한 늦깎이 위인에 대해 아이들이 가지는 호기심의 가지를 충분히 벋어나가게 할 만하다. 평범하달 수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발견하여 키워나가는 과정과 자신의 삶을 비범한 것으로 만드는 집중력과 끈기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결실은 늦게, 아주 늦게 맺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눈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인생의 기다란 줄기를 꼭 붙잡고 열심을 다 하면 기회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 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앙리 파브르>를 잘 읽히게 하는 장점은 동화구연을 하듯 다정한 입말로 쓰인 문체에 있다. 옛이야기 들려주는 할머니같은 입말과는 다른 것이, 어린이 청중을 앞에 두고 차근차근 약간은 예의를 갖추어(거리를 두어) 또박또박 들려주는 어조에 있다. 파브르의 어린시절에서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중학교 시절, 이런 식으로 인물의 성장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조금 더 작은 글씨로 들려주는 한 덩어리의 글이 또 장점이다. 집중하는 시간이 길지 못한 저학년 아이들에게 이 글은 간간이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용을 잠시 정리하는 시간과 그 다음에 펼쳐질 인물의 이야기에 한껏 집중하게 만든다. 그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이 그 역할을 단단히 맡는다.

거의 한 쪽 걸러 한 장면씩 나오는 화사한 색감의 삽화는 무대 뒷면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슬라이드 영화 같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선선하다. 지루한 설명이나 지식보다는 인물의 일화를 중심으로 엮고 있어, 군더더기는 없이 글의 전개가 빠르고 재미있게 읽힌다. 군데군데 파브르가 관찰하고 연구한 곤충 중 몇 가지와 가루받이, 간단한 과학실험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에 대한 설명을 쪽지처럼 곁들여 부족한 부분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 책을 다 보고 나면, 헤어나지 못한 가난과 사람들의 질시, 당시 사회적인 편견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이란 슬픔을 견디며 무려 30여년에 걸쳐 쓴 <곤충기>를 읽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를 만날 수 있다. <곤충기> 제1권은 '율리우스'라고 이름 붙인 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율리우스는 악성 빈혈로 열다섯 살에 세상을 뜬 아들의 별명이다. 파브르는 <곤충기>를 시작하는 말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름다운 벌들에게 네 이름이 붙여져 언제나 이 책 속에 남아 있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간 나무 풀빛 그림 아이 15
숀 탠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숀 탠이란 호주그림책 작가는 <잃어버린 것>에서 먼저 만났다. 낯설고 기이한 그림의 마력에 몸을 떨며 그의 다른 작품을 찾다가 <빨간 나무>를 구입한 건 작년이다. 난 보랏빛을 좋아한다. <빨간 나무>의 표지는 그런 보랏빛이다. 종이배 위에 우울한 얼굴을 내밀고 앉아있는 여자아이는 물 위에 떠있는 빨간 나뭇잎 한 장을 바라만 보고 있다. 아니, 발견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빨간 나뭇잎은 처음부터 아이의 방에, 침대 머리맡 액자 속에 들어있다. 아직은 그걸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아이는 실컷 앓고 나서 그걸 찾는 눈을 뜨는 걸까! 빨간 나무는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라고 작가는 그림의 복선을 깔고 있다.

이 그림책을 여섯 살 작은 아이랑 함께 보고 읽었다. 아이와 내가 다른 세대의 눈으로 보는 이 한 권의 그림책은 나이를 초월한, 인간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어쩔 수 없는 열병과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증명해주었다. 다 보고 난 뒤, '빨간 나무는 뭘까?' 나의 이런 물음에, 아이의 고 조그만 입에서 희망이란 말이 서스름없이 튀어나오는 걸 보고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기뻤다. 어른의 잣대는 녹슬고 우그러져있는 지도 모르겠다. 투명하고 반듯한 아이의 눈은 어둠과 몰이해와 절망과 그 모든 낙담 속에서도 언제나처럼 빨간 빛을 발하고 있는 나뭇잎 한 장을 어렵지않게 발견하는 것 같다.

도시의 우울한 시멘트빛, 귀머거리 기계 같은 세상, 불운은 한꺼번에 터지고, 후회라는 자물쇠로 나를 걸어잠그고 그냥 지나쳐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바보같은 나, 내가 누군지, 내가 있는 곳은 어딘지도 모르는 채, 희망의 조각 하나 줍지 못하고 하루가 끝나가는 날... 그때 문득 바로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바로바로 빨간 나무. 마지막 장면에서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으로' 크게 자라있는 빨간 나무는 만지면 빨간색이 손에 그대로 묻어날 것처럼 광채가 난다. 시종 일관 펼쳐진 채도가 낮은 글과 그림들 속에 있어 그 빛이 더욱 눈부신다.

이 그림책은 나의 고정관념 중의 하나를 뒤집어준 책이다. 그림책이라면 떠올리는 그림과 색채, 내용과 주제까지, 대담하고 깊은 내면의 그림들이랄 수 있다. 스쳐지나가는 무의식의 단상들, 존재함이란 이유만으로 가지는 내면의 모호한 이미지들을 <빨간 나무>는 손에 잡힐 듯 그리고 있다. 신문을 오려붙이기도 하고, 크고 작은 액자그림에, 글은 아주 적다. 글자의 크기나 배열도 그림의 힘을 더 살려준다.

그림책의 주제로 맞을까?, 하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난 어른이고 아이고 밝게만 보이는 사람을 믿지않는다. 사유의 깊이도 내면의 솔직함도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밝게 살려고 노력하고 남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는 건 미덕 중에서도 미덕이지만, 자신을 속이기까지 하는 밝음보다는, 차라리 고민하고 앓고 내 보이고 치유받는 것이 솔직한 모습이라 생각된다. 아이들도 우울하고 절망하고 소외감을 느낀다. 그런 아이들에게 희망이란 빨간 나무는 늘 그랬던 것처럼 바로 너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하고 진정으로 기쁘게 해 주고 싶다. 그리고 그 빨간 나무를 광채가 나게 크게 키워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빛을 발하며 우뚝 서게 하는 건 자신의 몫이란 걸 느끼면 좋겠다. 그렇게 깊은 눈빛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는 사람이면 좋겠다.

어쩌면 이 그림책은 인생을 먼저 살고 있지만 어떨 땐 아이보다 소심하고 좁은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는 어른에게 더 권하고 싶다. 절망이란 주관적이고 때론 사소함에서도 대책 없이 온다. 그래서 난 그림책이 좋다. 0세에서 100세까지 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보며 웃고 울고 종알대다 문득 탁 치고 들어오는 무언가를 감지하는 순간의 희열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