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현대 자유주의의 공공철학


  샌델은 현대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동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 미국의 공공철학인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치관에 대해 중립적이어야한다는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이미지가 이런 상실감의 원인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고 미국의 역사 또한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확대해온 역사로서 해석된다.


  그러나 샌델이 보기에 미국의 역사에서 공존했던 두 가지 유형의 공공철학이 있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다. 공화주의는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과 인간상이 정해져있으며, 이 지향점을 향해 공동체가 움직이고 구성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바람직한 공동체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공화주의 공공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치(self-government)”다. 이런 견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으로부터 유래했으며, 미국 건국 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샌델이 자신의 이론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견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제시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은 덕(도덕적 탁월성, arete, virtue)를 갖춘 인간이다. 여기에서 덕은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행위들과 그 너머에 있는 행위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성향 또는 성격을 뜻한다. 덕 개념의 도덕철학적 함축은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 판단의 다면성, 그리고 평가의 다면성이다.


  반대로 칸트, 밀,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 전통은 개인이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는 권리를 중심으로 정치행위를 사고한다. 권리는 인간이 가진 자유, 즉 선택할 능력으로부터 생겨난다. 국가 또는 공동체는 개인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개인의 선택할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되며, 가치관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런 견해는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 미국의 이해를 대변한다.


  칸트주의적 방식은 칸트의 논증에 대한 롤즈의 해석에서 비롯한다. 칸트의 도덕철학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계의 구체적 사실로부터 비롯한 모든 “경향성”을 제거하고 이성을 통해서 파악가능한 “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 기초』에서 그는 이 작업을 물리학에 비유한다. 즉, 다양한 결과값을 산출해낸 모든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 자연철학의 방식이듯, 구체적 개인이 보여주는 모든 도덕적 판단과 행위로부터 도덕성의 일반원칙을 찾아내는 것이 도덕철학의 목표라는 것이다. 롤즈는 이 해석을 이어받아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즉, 구체성이 모두 배제된 개인들이 도출해낼 원칙은 결국 각자의 가능성 즉 권리의 평등한 할당에 베팅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 추정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주장하는 국가의 중립성을 정당화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상대주의적 방식, 공리주의적 방식, 칸트주의적 방식. 상대주의적 방식은 어떤 것이 “실제로” 더 좋은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국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적 방식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을 때 가장 행복하며, 그러므로 그 때에 “행복의 총합”도 가장 크다고 주장한다. 칸트주의적 방식은 좋음에 대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 논증, 즉 인간의 본래적 능력에 의해 발현되는 몇몇 권리들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받아서는 안된다고 논증한다. 현대적 방식의 자유주의는 이 칸트주의적 논증에 많이 의지한다. 칸트주의적 정당화는 자유와 평등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매력이 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능력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공동체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요구하는 근거로서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주의적 방식은 우리가 삶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의무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에 부딪힌다. 칸트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하기로 약속한 것만 의무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라는 이름 아래 수행하는 것 대부분은 자발적 동의 이상의 어떤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의무들이 우리의 도덕적 삶의 상당한 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구체적” 인간으로서 가진 다양한 정체성에 따른 의무를 지는데, 우리가 도덕적 갈등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이런 의무들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특정한 정책을 – 주로 평등주의적인 – 시행하려 할 때 내적인 모순에 부딪히는데,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름 아래 시행하는 많은 정책들이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지정해주는 특정한 가치관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칸트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입장을 약간 변경한다. 이 변경된 입장을 최소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다원주의적인 현실 속에서는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입장을 공공생활에서 표명해서는 안된다. 어떤 입장도 상당한 수의 동의를 얻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생활을 결정할 정책, 즉 정의나 권리에 관해서 논의할 때에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유보하는 것만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존을 도모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최소주의적 자유주의조차도,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하는 목표여야 하는지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어떤 실천적 관심은 공동체의 존속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도 하며,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때로 어떤 중요한 도덕적 갈등들은 괄호를 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도덕적 갈등은 그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치관들 중 어떤 것이 실제로 참인지 논쟁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에서 가치관들에 괄호를 친다는 것은 의도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특정한 가치관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만약 이렇게 괄호를 친 상황에서 국가의 중립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타협에 이를 경우,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신념에 큰 타격을 입는다. 그것이 국가로부터 지지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가치관에 반하는 특정한 정책들이 입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주의적이든 최소주의적이든 자유주의는 좋은 “공공철학”이 아니라는 것이 샌델의 결론이다. 그의 입장에서 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철회이고, 자신의 가치관을 퍼뜨리고 동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접으라는 지시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귀결은 “도덕적 진공상태”다. 이 상태가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이 공화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되는, 편협한 태도와 불관용의 정책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을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실제로 그 이념이 의도했던 바, 즉 특정한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2장: 권리와 중립적 국가


  샌델에 따르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공공철학은 두 가지 점에서 대조된다. 하나는 옳음과 좋음의 우선관계다. 자유주의는 옳음을 우선시하는 반면, 공화주의는 좋음을 우선시한다. 공화주의에서의 좋음은 인격의 특정한 형태를 뜻하기 때문에, 공화주의에서 공동체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또는 구성원 전부)이 이런 특정한 인격을 갖추게끔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목표와 개인의 가치관 사이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며, 이것 때문에 개인들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공공생활에 참여한다.


  다른 하나는 자유(liberty/freedom)와 자치(self-government)의 관계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된 불가침의 기본권을 의미하며, 이것이 개인의 삶의 토대를 이룬다. 반면 공화주의에서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공동체의 여러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도 공동체의 모습에 영향을 주는 형태의 “자치”가 개인의 삶의 토대를 이룬다. 자치를 통해 개인은 공동체의 가치관을 습득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공동체에 관철시키는, 공동체와의 상보적 관계를 구축한다.


  이 두 공공철학에는 뚜렷한 강점과 약점이 있다. 공화주의는 고대인들의 견해를 대변하고 공적 활동에 대한 참여를 촉진시키지만, 다수의 압제에 취약하다.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의 이런 약점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으며, 미국의 역사에서 헌법해석의 경향에 점점 더 강한 영향을 끼쳐왔다. 자유주의에서의 기본권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인이 다수의 경향에 반대할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 미국에서의 “자유” 개념은 자기지배의 범위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지, 기본권을 의미하진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건국 초기의 공화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샌델은 현재 미국을 구성하는 “절차적 공화정”의 구성 요소를 세 가지로 분석한다. 개인의 우선권, 국가의 중립성, 선택의 능력이 있는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시민. 이 중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 개념과 함께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한다. 즉, 법 자체로부터 그 법이 지키고자 의도하는 어떤 것들을 분리해내고, 그것들을 수호하는 상위법으로서의 “헌법”이라는 개념을 꺼내면서 그 대상이 된 것이 개인의 우선권이다. 따라서 헌법은 개인의 우선권을 수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 특히 정부의 구조를 선언하고, 한 공동체 안에서 최고의 원칙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헌법과 별개로 만들어진 권리장전이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지, 즉 자연권으로서의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지에 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특히 이것은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갈등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논쟁의 초기에는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에서의 정부의 구조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지 여부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즉, 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연방을 약화시킨다면 개인의 권리는 자연스럽게 보장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매디슨이 권리장전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이러한 해석이 실제 판결로 반영되는 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후 남북전쟁을 지나 로크너 시대에 이르면, 개인의 우선권에서 연장된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가치관이 헌법재판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특히 산업의 독점권을 허용하는 주법들, 노동과 관계된 여러 보호장치를 규정한 주법들에 대한 헌법재판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요소가 갈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것은 주에 대한 연방의 우위를 표명한 것임과 동시에, 연방헌법과 연방헌법재판관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의 중립성을 동원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판단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홈즈 등의 판사에 의해서 국가의 중립성이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로크너 시대와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유지상주의에 부합했던 로크너 시대의 자유 개념과 대비되어, 1900년대 이후의 재판관들이 인용하는 자유 개념은 매우 폭넓게 쓰인 것이다. 홈즈는 미국의 헌법이 특정한 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단지 헌법 정신이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 자체에 대한 사법적 존중을 표현한다고 이해했다. 로크너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자유 개념 이해에서 시작한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모든 가치관에 대한 괄호치기로 그 이해의 방식이 변형됨으로써 개인의 우선성, 국가의 중립성, 그리고 선택의 능력을 가진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이해가 결합된 절차적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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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까지 샌델은 연방대법원의 판례와 판결문을 통해서,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헌법의 해석에 영향을 끼쳐온 역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유주의 공공철학은 법해석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담론의 지형에도 똑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정부의 각종 정책, 특히 경제정책에 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사항은 번영과 공정성이다. 즉, 그 정책이 얼마나 성장과 분배의 적절성에 기여하는지에 따라 도입 여부가 판가름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우리의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잡은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미국의 건국 초기의 정치경제학 담론에서 경제정책의 목적은 번영이나 공정성이 아닌,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었다. 특정한 산업의 육성이나 새로운 정책의 도입이 공공선, 공익, 명예, 권력에 대한 열망 등을 시민들의 마음 속에 북돋울 수 있는지 여부가 정책 도입의 찬성 또는 반대의 핵심적인 논거였다. 건국 이전에 제퍼슨은 시민적 덕성의 함양에 반대가 된다는 이유로 제조업 육성에 반대했으며, 몇몇 논자들은 무역항의 개수를 제한하는 항구법이 대형 상업도시를 키움으로써 사람들을 타락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같은 논의선상에서, 미국의 독립 또한 영국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끔 미국 시민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 쟁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 이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시민적 덕은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즉, 입안자들이 헌법을 기본법으로서 시민들의 덕성 함양에 기여해야하는 장치로 간주한 것이다. 한 편으로 시민적 덕성을 교육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입할 것을 명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헌법을 통해서 시민적 덕에 의한 통치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해밀턴, 매디슨 등). 특히 매디슨은 시민적 덕을 통치의 주요원리로 작동시키기 위해 헌법에 정부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논리를 삽입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것을 이익집단 다원주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시민적 덕의 함양이라는 매디슨의 명확한 목적을 고려했을 때, 이런 해석은 틀렸다. 또한 민주정과 공화정의 대립이라는 당시의 정치이념적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시민적 덕을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구성하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해밀턴이 제안한 중앙집중적 재정정책에 관한 논란도 시민적 덕성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해밀턴은 각 주의 부채와 연방정부의 부채를 통합하고 이 통합된 부채를 관리할 기관을 만든 뒤에 이 부채를 시민들에게 판매하고 수익을 보장함으로써, 이익을 매개로 한 국가와 주, 시민의 통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반대에 부딪힌다. 이렇게 이익을 매개로 맺어질 경우, 국가가 이익집단화된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이익이 걸려있는 사람들 또는 많은 채권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편향된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또한 이런 편향된 결정은 불공정한 자원분배를 낳고,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을 낳을 것이라고 반대자들은 주장했다.


  국가의 주요산업에 대한 논쟁에서도 시민적 덕성이 주요한 쟁점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해밀턴은 상공업 중심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로 제퍼슨과 매디슨은 농업이야말로 미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산업이라고 믿었다. 해밀턴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상공업이 진흥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수입의 증가와 이에 맞물린 사치풍조가 사람들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제퍼슨과 매디슨의 주장은, 상업사회는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하게 땀흘려 일한 댓가가 돌아오는” 농업이야말로 시민적 덕의 함양에 어울리는 사업이다. 따라서 해밀턴은 서부와 남부로 뻗어나가는 영토확장이 무의미하며 낭비적인 사업이라고 간주한 반면, 매디슨과 제퍼슨의 옹호자들은 이런 개척이 시민들의 도덕적 고양을 도와주는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에 관한 찬반논쟁도 마찬가지로 시민적 덕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즉, 어떤 사람은 제조업이 시민의 육성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제조업이 시민들의 인격적 상태를 나쁘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다. 옹호자들은 제조업이 번성할수록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 대한 무역 분야에서의 예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역 분야의 예속은 수입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사치 풍조를 조장하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계급간 격차를 심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해치기 때문에, 예속을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각자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농업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통치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이런 입장은, 제조업의 육성을 옹호하더라도 고도화된 분업이 이뤄지는 공장제 생산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반면 제조업의 육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의 육성은 필연적으로 분업과 공장제 생산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장제 생산은 생산품에 대한 예속, 임금에 대한 예속, 생산수단을 소유한 고용주(자본가)에 대한 예속을 낳는다. 이런 예속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제대로 된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은 사치와 낭비에 따른 도덕적 타락은, 생산이 충분히 고도화된다면 국내제조물품들만으로도 충분히 촉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웰 공장은 이런 제조업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어떤 발전을 겪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로웰 공장은 도시가 아닌 농촌의 주변에 지어졌고, 주변의 농민들과 순환근무를 하는 체계를 갖췄으며, 강한 규율과 노동자 교육을 통해 근검절약정신을 전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시간이 가면서 붕괴하고 말았다. 우선,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관계가 문자 그대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로 변화하고 말았다. 또한 강한 규율과 교육에 대한 반발로 파업이 빈번했다. 주변의 농민들과 순환근무를 함으로써 공장근무를 하면서도 시민적 덕을 쌓을 기회를 준다는 계획은, 이민자들을 점점 더 상시채용함으로써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공장은 이주했고, 로웰과 같은 공장들이 한 곳에 모여들면서 시민적 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대도시가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잭슨 대통령의 시기가 되었을 때, 산업이 제조업과 상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 논의는 민주당과 잭슨의 옹호자들 대 휘그당의 잭슨 반대파의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들의 논의는 표면적으로 번영과 공정성을 축으로 삼는 현대의 경제정책논쟁과 유사해보이지만, 정책패키지는 정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번영을 목표로 하는 휘그당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했고, 반대로 분배의 공정성을 옹호하는 민주당은 정부의 불간섭을 주장했다.


  민주당은 엘리트로 구성된 정부에는 내재적인 불공정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즉, 정부를 구성하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정부의 정책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개입은 분배정의의 붕괴를 의미한다. 따라서 분배정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을 탈집중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시민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민주당은 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정책에 반대했는데,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이러한 기관은 반드시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또한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결정권에 접근하고 은행권발행의 조작을 통해 “땀흘리지 않고 돈을 버는” 문화가 조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반대로 휘그당의 인사들은 탈집중화된 경제가 행정부의 상대적 비대화를 부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적은 돈은 제대로 분배해봐야 가치가 없다는 고전적인 논증을 통해 성장을 옹호했으며, 이런 성장을 위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경제성장에는 반드시 상업화에 따르는 타락만이 있는 것이 아닌데,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통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히려 국가와 시민간의 일체감 증진, 즉 국민통합의 발판이 된다. 물론 상업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강력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휘그당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편적 덕성함양교육을 내놓았다. 즉, 국가적인 차원의 공동체 의식 고양을 통해 상업사회에서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상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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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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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페스트』는 흑사병이 닥쳐온 어떤 폐쇄된 소도시의 1년을 응시한 결과물이다. 물론 카뮈의 글은 소설이다. 그럼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것은, 아마 불과 얼마 전에 우리 사회 또한 비슷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메르스, 혹은 그 이전에 사스, 그리고 (훨씬 증세가 가볍지만) 몇몇 여름에 찾아오는 유행성 눈병 등등. 카뮈가 묘사한 여러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로 접했다. 게다가 어딘가 허술해보이지만 어쨌든 체계적으로 흑사병을 처리해내는 오랑 사람들의 모습에서, 카뮈를 읽는 한반도의 거주자라면 묘한 동시대성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주변을 서술하는 우리의 언론과 카뮈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욕설과 클릭수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인터넷 기사와는 다르게, 카뮈는 그려낼 뿐 판단하지 않는다. 보고하는 사람인 리유의 이런 태도 때문에, 나는 누구라도 욕할법한 코타르에 집중했다. 그는 보통의 삶을 견디기 힘들었던 자살미수범에서 폐쇄된 도시의 유일한 승리자인 밀수업자로 거듭났다가, 페스트가 종식되자 난동을 부려 경찰에게 끌려간다. 질병과 공포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의 행복은 그를 착란으로 몰아넣었다. 내 독해가 꼼꼼하지 못했던 탓인지 적어도 소설 내에서 그 원인을 직접 추적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내 상상에 맡겼다. 해수쟁이 영감의 말처럼 “페스트가 인생”이라면, 까닭도 전례도 없이 창궐한 쥐처럼 사람들의 삶 사이로 스며드는 운명이라면, 코타르와 같은 대응방식도 결국 인간에게 열려있는 선택지 중 어떤 것이 아닐까? 비정상성 속에서 누군가는 무감각한 관료가 되어 적응하고, 누군가는 낯설음에 당황하여 허둥거리지만, 결국 운명을 깨닫고 저항하는 방식의 핵심은 지속가능성이 아닐까? 누군가는 도덕적 무책임을 선동한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어쨌든 코타르는 – 설령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명령에 의해 이뤄졌다 하더라도 – 처벌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페스트』는 그런 비난에서 비껴있다. 또 각 개인들이 운명에 저항하는 각각의 방식을 보여주기에, 우리는 『페스트』에서 여러 열린 선택의 과정과 결말을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다. 그 끝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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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강동구 당원협의회 독서소모임 "산책" 발표준비용>


7장 금융


1. 두 가지 금융제도 유형: 영미식/ 독일-일본식

- 거래지속성과 경영개입: 일회성, 개입안함/ 지속성, 개입함
- 금융업분화: 세분화(애널리스트, 투자사, 주식시장)/ 통일됨
- 제재방식: 사후 제재(돈 내놔, 벌 받아)/ 사전 조정(이렇게 저렇게 해)


2. 한국의 경우

- 기업에 집중된 금융자원
- GDP대비 기업부채비율이 높다(110%)
- 전체 부채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50%)
- 기관투자자들이 기업경영에 유의미한 만큼의 주식을 안갖고 있다(10%)
- 매도도 단기에 한다(과잉수수료+불안정성 증대+기업통제 안함)
- 관피아 척결!


3. 금산분리

- 금산분리는 세계적 경향 but 명시적 제도 때문만은 아니다.
- 미국: 은행 BIS비율 감독, 보험 특수거래허가제, 증권 거래내역공개+부정행위 엄벌
- 한국의 정책방향: PEF의 은행소유 금지, 금융사 주식분산, 제2금융권진출 방지(최근 증가추세), 중간금융지주회사제


4. 공적자금

- 최소비용+공평부담 원칙이 중요
- 한국의 문제: 너무 협소한 정의(사기업 워크아웃 비용은 산정안됨), 구제원칙이 불투명
- 관료의 자의적 개입 가능성이 매우 높다
- 공적자금1: 원칙없는 지원 절차와 낮은 회수율(계산방식도 이상함)
- 공적자금2: 여전히 정의가 너무 좁다, 선제적 조정이라는 꼼수로 원칙을 비켜감
- 대안: 평시감독-부실관리-위기대응 기관의 분리, 견제, 협조 필요. 한국은행의 권한 강화



8장 노동


1. 한국 노동시장의 문제

- 고용률 낮고(구직기회가 없음) 노동시간은 길고(OECD 평균+1000시간) 고용의 질도 낮다(상당수의 자영업자, 저임금-임시직 노동자, 비임금 노동자)
- 노동시장의 4대 문제: 비경활, 이중시장, 근로빈곤, 저숙련


2. 비경활문제

- 실업률과 고용률이 동시에 낮은 이상한 상황
- 취준생, 여성유리천장(여성-중소기업 임금은 남성-대기업 임금의 40%)


3. 이중시장문제

- 중심-내부/주변-외부로 분화
- 성과 학력에서 기업규모와 고용형태로 요인이 변화함
- 노동권보장도 안되고 고용형태도 불안한 비정규직
- 한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연계가 강하기 때문에, 이중시장문제 해결을 위해선 하도급문제 개선이 시급하다.


4. 근로빈곤문제

- 정규직의 절반도 못버는 비정규직. 상당수가 저소득(중위소득의 2/3).
- 사회보험 미가입 문제
- 근로감독 강화
- 영세자영업자문제: 비율이 너무 높다, 위기가 닥치면 문을 닫고 비경제활동인구에 편입된다, 생계곤란은 덤.
- 잘버는 20%, 근근히 먹고사는 60%, 엄빠 가게에서 일하는 20%.
- 사회보험적용이 시급하고, 이를 위한 소득파악이 우선. 간이과세제도 폐지 필요(but 현재 4800에서 6000으로 상향조정 논의중)


5. 저숙련

- 기업이 간접관리로 저숙련노동자의 증가를 조장한다
- 노동시장용 교육투자가 전무. OECD 꼴찌 -> 주변시장에서 중심시장으로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
- 최초진입위치가 노동자 개인의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결정.


6. 외국모델
- 스웨덴: 높은 노조조직률 -> 사회경제적 압력 ->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조직된 힘의 대립균형 -> 사회적 대타협. 렌-마이드너 모델(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연대임금으로 임금인상 억제)
- 노조 조직률, 고용창출분야가 한국과 다르다.
- 덴마크: 유연안정성(유연한 노동시장+관대한 실업급여+적극적 노동시장정책)
- 노동시장이중구조의 정도가 한국과 다르다(덴마크는 차이 거의 없음, 한국은 차이 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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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탑〉: 세상의 끝과 순환, 허무, 우주의 구조


〈이해〉: 강화된-획장된 마음, 인공언어프로젝트, 완결된 체계로서의 이미지, 신들의 싸움이자 해커들간의 싸움, 이해해? 이해는 왜 그레코의 파괴를 불러오는가, 언어와는 무슨 관계인가, 두 가지 태도의 융합


〈영으로 나누면〉: 공리계에 관한 이야기로 둘러싸인 사랑, 상대에 대한 이해의 무경계에 관한 이야기, 수학기초론의 역사


〈당신 인생의 이야기〉: 신적 관점, 영원한 현재, 기계론과 목적론, 사피어-워프 가설, 가바가이!, 운명론!?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 한자, 水와 氷, 비선형적 체계, 결국 본인이 보고 들을 것 들었던 것 듣게 될 것으로 한계가 구체화됨


〈일흔 두 글자〉: 신의 직분으로서의 이름짓기와 기계를 만드는 기계라는 아이디어의 결합, 막판에 인종통제 사회문제로 건너뛰는 부분은 썩 매끄럽지 않으나 제기된 문제 자체는 타당, 오히려 그 이전에 인공지능으로 인한 직장 파괴 부분은 잘 녹아들어가 있음


〈인류 과학의 진화〉: 메타인류는 실제로는 과학자에 대한 은유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두 집단 사이의 관계설정에 대한 직설비유


〈지옥의 신의 부재〉: 각기 다른 불신의 이유로 모인 셋, 닐의 불행의 이유, 재니스의 치유의 이유, 에단의 사건의 발생의 이유, 세계의 설계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그냥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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