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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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유시민을 읽는다. 원치 않는 이유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은게 벌써 몇 년 전인지. 유시민을 읽으면서 항상 생각한다. 항소이유서를 썼을 때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했을 때나, 정치인에서 지식인이자 문필가로서 다시 돌아온 현재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편안하면서 날카롭다.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계속 자신의 글을 갈고 닦으면서, 항상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 같다. 무협만화의 성실한 절정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유시민이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역사서를 썼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우선 아주 넓은 분야에 걸쳐서 잊어서는 안되는 사건을 빠짐없이 언급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물론 큰 목차는 경제-정치사의 주요한 사건을 언급하는 기존의 역사서술의 틀을 따르고 있지만, 그 사건이 가져다준 사회-문화적 파급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⅓ 정도는 아는 내용이었고, ⅓ 정도는 타임라인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헷갈리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⅓ 정도는 잊고 있었거나 모르는 내용이었다. 유시민이 정리한 현대사를 보며, 나도 나름대로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재정리-환기할 수 있었다.


역사서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이 책에 나름의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내 눈에 그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의 현대사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자신의 기억을 중간중간에 삽입시킨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먼 사건이나 풍경일 때 그의 서술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만 같다. 그가 겪었던 것은 곧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은 사건이기도 하다. 물론 교사의 아들이며 인문계 학교에 진학해 중고생 시절 내내 전교 수위권을 놓치지 않았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생이자 독일 유학파인 유시민과, 소규모 자영농의 아들-딸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로 생계에 뛰어든 부모님의 사고의 구조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에선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동감을 부여하는 다른 한 가지 방식은,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실명 언급이다. 2장의 서두에 인용된 말마따나, “300년을 30년에 압축해서 경험한”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기술하는데는 아주 많은 지면이 필요하며, 따라서 현대사 책의 저자라면 효율적 기술을 위해 지면을 아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특정한 사건을 설명하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연루된 인물을 일일이 거론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그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즉,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인물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몇몇 이름들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현대(2010년대!!!) 한국 정치계의 주요 인물들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역대 대통령과 국무총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직업정치인의 주류로 간주되는 이른바 “386” 친구들(심재철, 우상호, 이인영, 송영길 등)과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운동권 시절 친구 심상정 등. 심지어 아프리카TV 사장 문용식의 이름도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이름을 하나하나 부름으로써, 이 책은 현대사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현재라는 사실을 계속 환기시킨다.


이렇게 생동감을 부여하는 그의 전략에서, 나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라는 유시민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라는 하나의 단어에는, 사건의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인간 사회의 반복되는 실수를 경계하게 만들고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후자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역사적 사건은 과거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로”(에필로그)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실험실의 비교대조군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무턱대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건조한 기술과 해석의 관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수적 연구자들의 저서도 (다소나마)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예를 들어, 이승만을 언급하는 책의 초반부에 그가 유영익의 책을 인용한 것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유영익은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이승만 무조건 찬양론자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인 북한 문제와 복지정책의 확대에 관한 서술에서도, 자신이 보수적인 학자들의 연구도 참고했다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유시민의 한국현대사는, 최근의 정치-사회적 후퇴에 대해 민중이 반성하고 맞서게 만들어주는 도구로서의 이야기다. 우리는 1992년 서해 훼리 사건을 겪었으면서 2014년에 세월호를 또 겪는다.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통치는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에 부활했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이기에 우리는 과거의 저항과 무기력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물론 무엇을 배울지는 유시민이 정리한 한국현대사를 읽는 독자 각자의 몫일테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확고한 관점이 있고, 자신이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이 기분의 원천은, 결국 민주정부 10년 특히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내 박한 평가다. 그래서 이 걸리적거림이 유시민의 역사서술이 실제로 가진 한계인지, 아니면 유시민에 대한 내 편견이 반영된 것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마음 한 켠의 찜찜함만 묻어둔다면, 참으로 간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59년생으로 유시민과 동갑인 내 어머니와 이 책을 같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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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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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향연』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이 짧은 말은 『향연』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면서도, 동시에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수도, 누군가에겐 지루할 수도, 누군가에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향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관해 논한다. 파이드로스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행위의 원천으로서 사랑을 말한다. 파우나시아스는 사랑의 대상에 따라 세속적 사랑과 고귀한 사랑은 나누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조화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달을 닮은 인간의 원형에 대한 설화를 죽 늘어놓으며, 하나됨(충만함)을 향한 욕구를 사랑과 동일시한다. 아가톤은 그 자체로 칭찬할만한 것으로서 사랑의 여러 측면들을 밝히고,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을 디오티마에게 들은 양 아가톤을 논박한다. 그 와중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얼마나 사랑하며, 또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사랑받을만한 사람인지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듯, 그들이 사랑을 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향연』이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설명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선 도입부터, 전해들은 것을 전해들었다고 전해줌으로써 이 이야기에는 논리적 연결고리 따위는 뭉텅이로 빠져있을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한다.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가도, 한 페이지 뒤에선 사랑의 상징인 에로스 신에 관해 떠들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껍데기만 같을 뿐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의미를 구겨넣기도 한다. 등장인물들과 우리 사이의 시공간적 차이와 함께, 이런 중구난방식 논의는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가리는 “거대한 문화적 맥락의 숲”(독일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표현)을 조심스럽게 헤쳐나가는 것이 고전읽기의 묘미인 것 같다.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나는 지금껏 결핍을 채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간주해왔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사실상 착취해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착취는 사랑에 대한 나의 잘못된 관념과, 사랑“한다”는 내 생각을 드러낼 때 내가 보여준 수많은 잘못들로 설명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사랑은 앞으로 어때야할까.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며, 그럴만한 자격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낯선 표현방식이지만, 그래서 난 사랑에 관한 많은 고민과 그에 대한 단편적인 대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디오티마 부분부터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납득할 수 없어서, 한 문장을 두 세 번씩 되풀이하며 두 번이나 읽어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특히, 모든 성질이나 대상에 그에 대응하는 형상이 존재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발상은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담벼락같은 어려움을 피하거나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


PS. 명색이 철학으로 석사"씩이나" 한 자로서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이 책을 한 번 완독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학교 다닐 때 읽었던 플라톤의 작품들(에우튀프론이 묶여있는 박종현 번역본)에 관해서 내가 갖고 있던 인상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았고, 독해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철학사에서 유명한 그리고 매우 어려운 작품을 하나 클리어한 것이 뿌듯하다.


PS2. 번역이나 다른 판본들과의 비교 같은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어쨌든 번역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미주와 각주를 동시에 쓴 이 책의 방침인데, 한꺼번에 미주로 처리하거나 한꺼번에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학술적인 내용+문화적 맥락에 대한 설명인 것은 별 차이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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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푸어 -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
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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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두 번째 읽는다. 처음 읽었을 때 정말 좋았고, 그래서 트레바리 24에서도 같이 읽어보고자 추천했다. 다행히도 읽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다른 두 가지 책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정치학자 에스핑앤더슨의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 모임에서 두 달 전에 읽었던 “출퇴근의 역사”.


에스핑앤더슨은 국가 단위의 복지정책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한다. 미국식 자유주의형, 독일식 보수주의형, 그리고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형. 이 관점에서 보면, "타임푸어"는 자유주의형 복지국가의 워킹맘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 모델의 단점을 분석한 뒤에 그 대안으로서 사민주의 유형을 살펴보고,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책이다.


세 유형 중에 저자인 슐트가 살고 있는 자유주의 복지국가는, 다른 두 유형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 반면 사영기업이 복지서비스를 전담하기 때문에 구매비용이 높고, 복지에 대한 투자와 개인적 실패의 부담을 전적으로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다양한 정체성(언론인, 두 아이의 엄마, 동네 공동체의 일원 등등)이 요구하는 행위를 모두 수행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압박감, 즉 이상적인 엄마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노동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 결과가 '오염된 시간'이다.


반면 슐트가 대안으로서 탐구하는 덴마크는, 사민주의형 복지국가다. 개인의 복지에 요구되는 요소의 상당부분을 국가가 부담한다. 워킹맘에게 필요한 탄력근무에 대한 지원, 실업급여, 육아휴가와 수당 등등. 또한 국가가 다양한 가족공동체를 지원함으로써 이상적인 XX에 대한 모델도 흐릿하다. 이런 측면에서 덴마크 모델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핑앤더슨은 사민주의 유형에 장점만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유형의 가장 큰 단점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성별분화다.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강하게 보장되는 공공영역에 여성들이 많이 취직하는 반면, 사영기업은 대부분 남자로 채워진다. 이후 서로의 조건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사민주의형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교직 등 여성이 많이 진출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몇몇 (찌질한) 논쟁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타임푸어"는 이런 정책적 제언 외에도, 개인의 마음을 다소 풀어놓음으로써 행복을 향해 가는 길도 제시한다. 하지만 정책의 수정과 태도의 변화 어느 한 쪽만으로는 여성(과 사회구성원 전체)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문화적 차원 모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다. 이런 내용을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재미있으며 의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모임에서 읽었던 “출퇴근의 역사”와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이 책은 출퇴근이 우리가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비약적으로 늘려놓았으며, 앞으로 한동안 출퇴근이라는 문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출근을 해서 일터에 고정되어 업무를 처리한 뒤에 퇴근을 해서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모델이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반대로, 슐트는 워킹맘에게 탄력근무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여러 방식의 재택근무 또한, 어느 정도나마 워킹맘들의 요구사항을 채워주기도 한다. 경력을 단절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사람구실 할 정도로 키우려 한다면, 이런 근무형태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최근 화두로 떠오른 워크-라이프 밸런스, 이른바 워라밸(!!!)의 문제와 연결된다. 과연 이 균형을 맞추려면 어떤 유형의 근무가 더 알맞을까? 각각의 형태에서 균형이 무너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출퇴근에서는 출퇴근 이동 자체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의견이 제시될 수 있지만, 재택근무의 경우에는 일터와 쉼터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으로 인한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각 유형의 장점과 단점에 관한 각자의 가치관에 달린 일인 것도 같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두 책이 제시하는 주장이 분명히 다르며, 이 두 가지는 모순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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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화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두 가지 비판이 있다. 하나는 공화주의가 과거회귀적이며,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현대사회에서는 실현불가능한 이념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공화주의 공공철학의 이념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일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공화주의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배제와 억압의 정치학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배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나, 현대사회의 특징 덕분에 공화주의적 이념이 억압으로 작동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억압적 공화주의자인 루소와 열린 공화주의자인 토크빌의 차이에 주목해보면, 공화주의가 반드시 억압을 동반하는 것만도 아니다. 즉, 공화주의 공동체란 동질성이 강한 시민권자격자들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적 참여에 대한 강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진 연대체다.


  절차적 공화정은 우연적인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징후(결과)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절차적 공화정이 회피한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이상한 해답을 유도해내는 잘못된 도덕주의를 향한 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을 둘러싼 도덕 공동체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지배(자기-지배)의 상실이다. 공화주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들의 경우 복지프로그램을 축소시키면서 시민적 노선에 속하는 이유를 들었다. 즉, 공짜로 주어지는 복지프로그램이 수혜자들의 근로의욕을 감소시키고 노력 없는 댓가에 길들임으로써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의거한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언어와 논증은 1990년대에 이르러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까지 옮겨갔다.


  반면 진보주의자들 또한 시민적 노선에 서서 불평등을 비판했다. 이전의 불평등 비판은 권리와 자유의 축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최근의 불평등 비판은 가난이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극심한 불평등은 계층 사이의 공간적-시간적 분리 또한 가속화시키는데, 이런 경향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익혀야 할 현대사회에서의 시민적 덕의 학습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간다. 이런 분리는 사람들을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으며, 공적인 것에 대한 고려 또는 상상의 능력을 지워버린다. 이런 주장은 약간은 역설적이게도 90년대 중반 민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라이히에게서 나왔다.


  정부 주요 각료들의 담론 이외에도 공화주의적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지역개발조합의 재조명, 20세기 초반에 사라졌던 반체인법을 연상시키는 스프롤 버스터 기업형 슈퍼마켓 반대운동, 공공성을 띈 기관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조직하는 신도시기획운동, 종교공동체나 마을회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삼은 지역사회 공공부조조직인 산업지역재단의 발흥이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운동의 동기와 활동방식은, 자기지배를 학습하는 시민화 프로그램으로서의 소규모 공동체라는 미국 건국시기의 이상을 닮아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의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라는 사회 모델이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이미 형성된 현대사회에도 유효할까? 이 질문은 특히 국민국가 단위로 조직된 정치체에 비해 너무나도 비대해져버린 초국적 경제권력의 전횡에 시민적 노선이 유효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현재 EU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난항으로부터, 그리고 193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경제구조 조직 논쟁으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대응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대응으로서 등장한 것이 세계시민윤리라는 노선이다. 이 노선의 옹호자들은, 마치 경제규모에 대항해서 정치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말하듯이 전지구적 거대 경제조직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의 인격적 기반은 세계시민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발주의적 자유주의의 절차적 공화정에서 추상적 인간의 모델이 윤리의 기반으로서 실패하듯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세계시민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란, 자유주의자들이 머리에 그렸던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시민 정체성으로서의 윤리보다는 지역공동체성을 살리는 것이 오히려 이 시대에 더 요청된다. 세계시민적 태도보다는 정치에 대한 통제의 경험이 훨씬 더 참여와 변화에 대한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 증가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고양시킨다. 미국은 연방주의 논쟁의 과정에서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공동체들과 주권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숙고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하부의 소규모 공동체들로 주권을 일부 이양하면서 공동체적 경험과 잘 조직된 연방정부를 동시에 만들고자 노력했던 역사를 지닌 것이다. 또한 흑인민권운동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단순히 권리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문화적 변혁과 영적 고양을 목표로 삼은 운동이었다는 것은,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여러 코멘트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우려와 달리, 그래서 공화주의적 공동체 또한 다중적인 정체성을 묵과하지 않는다. 특정한 공동체 내부와 외부에 수많은 정체성들을 놓고 고민하고 토의하며 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의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의 공화주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잠재적 요소가 있다. 하나는 다중성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나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부유하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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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델의 관점에서, 절차적 공화정은 한 가지 역설을 품고 있다. 독립된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와 그에 해당하는 권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실제로는 개인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구조에 대한 종속이 더욱 심화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시민적 덕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시민적 덕성이 강조하는 공동체의 자치에 대한 참여의 덕목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의 확대와 공동체의 확대의 구별, 의존의 심화와 공동체성의 강화의 구별을 내세운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규모를 점점 키우고, 고도의 분업이 사람들의 사이의 의존을 심화시켰지만, 이것이 공동체 의식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개인의 한계상황만 심화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공공적인 것”에 관한 관념과 인식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하는 담론의 역사를 추적해봄으로써, 절차적 공화정을 향한 전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대규모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적 관리법, 전문가주의를 도입해서 이런 대규모 조직들에 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진영을 막론하고 시민적 덕성의 담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응하기 위한 두 가지 노선을 살펴보면 이런 점이 드러난다.


  첫째는 대규모 기업집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를 탈집중화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규모 회사의 운영자들이 확보한 대규모의 금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했다. 또한 소속 피고용자(노동자)들을 회사에 묶어놓아서 이들이 시민적 덕성을 고양시킬 기회를 박탈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산업민주주의라는 담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기업을 고용주와 피고용자 모두의 통제범위 안에 놓으려는 발상이다. 이것은 피고용자로 있다가 기술을 배워 자영업자로 독립하는, 자유노동의 이상에 충실한 아이디어였다.


  반대로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모를 키워야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이런 생각은 기업집단의 대규모화가 역진불가능한 현상이라는 진단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규모의 경제라는 발상과 달리, 이들은 대규모화에 따른 시민적 공동체의 대규모화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역공동체성이 아닌 국가정체성을 매개로 시민들을 규합하고, 이들의 열망을 대규모화된 정부에 집중시키자는 발상이었다.


  반면 이런 대규모 기업집단이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을 꺼내들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더 이상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공동체는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기업집단과 그들의 판로가 커질수록, 그 기업집단의 생산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느 시대보다도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사회 또한 소비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생산자 기반 가치 중심의 사회관에서 소비자 기반 만족 중심 사회관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 사회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옹호되었다. 한계효용의 법칙에 따라, 소비로 인한 생산과 분배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방식과, 소비생활이 더 이상 도덕적 명령에 구속받지 않고 완전히 자발성을 확립한다는 자발주의적 방식이 그것이다. 이들에게 모든 사회적 조직의 목표는 “가장 광범위”하고 완전한 “경제적 만족”이었다.


  이런 변화를 추적해보기 위해서는, 경제와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의 서로 다른 운명을 살펴보면 된다.


  첫번째는 체인점 숫자가 늘어날수록 점포당 세율이 누진되는 세법인 반체인법이다. 19세기 말 반체인법이 처음 시행될 때, 옹호자들은 체인점이 지역 공동체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데, 반면에 소상공인들은 이웃의 사정에 밝고 공동체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런 소규모 공동체들은 시민적 덕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경제체제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반체인법은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반면 반대자들은, 상점의 목적은 최고의 제품을 최저가에 공급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소비자주의적 논증에 기대고 있었다. 이 주장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힘을 얻었고, 반체인법은 1930년대 폐지된 이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두번째는 기업간의 연합이나 개별 기업의 규모, 독점을 제한하는 반트러스트법이다. 19세기 말 이 법이 처음 생길 때, 이 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을 펼쳤다. 즉, 큰 기업은 정치를 침범하고 시민들의 연합을 고용-피고용 관계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나쁘다. 이렇듯 반트러스트법은 가격과 무관한 이슈로 등장했다. 오히려 이 법의 최초의 반대자로 기록된 노동운동가 건턴은, 소비자주의와 유사한 논증으로 반트러스트법을 반대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생산품의 가격이 내려가고, 노동자에게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을 보장할 것이다. 물론 건턴 또한, 이런 환경이 시민적 덕성의 육성에 더욱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도 동시에 내놓았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효율성과 시민적 덕성에 각각 의거한 논증을 통해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우선, 대규모 기업집단은 규모의 경제보단 경직성이 훨씬 더 부각된다. 또한 그들의 성공은 효율성보단 독점을 이용한 가격조정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기업집단의 대규모화는 규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노력에 따라 성공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민적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증도 내세웠다. 브랜다이스의 이런 입장은 가격 고정정책에 대한 그의 옹호에서 잘 드러난다. 생산품 가격을 고정시키는 것은, 폭탄할인을 쏟아내는 대형 할인매장으로부터 소규모 상점들을 지켜내서 “경쟁을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반면 루스벨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보수적인 법학 교수인 아놀드는, 반트러스트법을 구닥다리라고 매도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정부에서 반트러스트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까지 유명무실하던 반트러스트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두가지 모습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샌델이 볼 때 그의 논리는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할 때도, 책임자로서 이 법을 활용할 때도 가격 지표와 효율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즉, 기업의 규모는 더 이상 반트러스트법의 압박대상이 아닌 것이다. 반면 독점으로 인해 기업이 시장가격 이상으로 판매할 때에는, 지체없이 반트러스트법의 기소대상이 되었다.


  물론 루스벨트 시대 이후 1950, 60년대까지도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은 간간이 살아남았다. 이런 입장을 기반으로 의회에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업집단이 점점 커져가는 것, 즉 경제력의 집중은, 실제로 특정한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대도시의 탐욕스런 경영자와 투자자들이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집중의 정도와 권력의 크기는 비례하므로, 기업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 이런 논증은 담론지형에서 소수로 전락한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후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에서의 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이건 정부 시기의 보크는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 향상을 위해서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전에 이슈가 되었던 가격고정에 대해서도, 시장 참여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면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에 반대했다. 반면 진보주의자인 네이더는, 독점은 필연적으로 비최적분배상태를 야기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또한 유통채널의 장난으로 인한 비효율가격의 출현을 막기 위해 가격고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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