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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 산다는 것 -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
박영택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휴가길 차 안에서 가며오며 두 권의 책을 읽었다.
내려갈 땐 '숨어 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 올라올 땐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휴가길에서 읽을 책으로 <나를 부르는 숲>을 부랴부랴 주문했는데
깜빡 빠트리고 챙기지 못했다.
--넘어야 할 벽, 깨어야 할 벽 앞에 /오늘도 그렇게 막막하게 서 있는 그는/
다시금 화폭 속으로 무모하게 덤벼들 것이다.
이 책을 엮은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박영택은 글머리 앞 여백 페이지에
이렇게 간단하고 함축적인 소회를 적어놓았다.
나는 한때 김영희의 종이인형 대작이랑, 최만린 교수의 소월 흉상이랑, 한쪽 벽면이 온통
백남준의 대형 설치작품인, 한마디로 예술작품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사무실에 다닌 적이 있다.
십몇 년 전 혼자서 워커힐미술관에 케테 콜비츠의 전시회를 보러 갔을 땐 내 속의 그 무엇과
이상한 허영심이 만나 엄청나게 고양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 실린 전국 산간 오지나 바닷가, 도심의 골방에서 혼자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화가들의 허름한 방을 보니 엉뚱하게도 15,6년 전 도예가임을 자처하며 나를 유인했던
어느 사기꾼의 삐까번쩍한 방이 생각났다.
잠시 소개하자면 아주 절친한 미대 출신의 한 친구와 지점토 책을 한 권 사서 몇 달 서로의 집을
교대로 드나들며 장난삼아 주무른 적이 있다.
처음엔 책을 보고 만들다가 나중엔 제법 아이디어를 내어 독창적인 것도 만들었으니 그 중 하나로,
손바닥만한 액자에 얇게 지점토를 펴바르고, 검정에 가까운 푸른색 물감으로 밤하늘을 색칠한 후
날개 달린 아기천사를 몇 개 지점토로 빚어 밤하늘 군데군데 자리잡아 준 소품이 있다.
마지막으로 점에 가까운 노란색 별을 밤하늘 가득 흩뿌리고 라커 칠을 하면 그걸로 끝!
이게 만들어 놓고 보면 꽤 그럴듯해서 펜팔 하던 우체국 친구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
선물로 주었으며 그 뒤 똑같은 걸 만들어 두어 번 더 선물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 '작품(!)'을 봤다며 자기는 공예가이며 김해에 큰 도요를 가지고 있는데
분위기도 있고 상품성이 있는 것 같으니 당장 만나 뭘 좀 의논해 보자고 어떤 남자가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온 게 아닌가!
전화를 받은 다음날 나는 함께 지점토를 만들고 놀던 친구를 대동하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내 아무리 외롭고 궁핍한 처지이기로서니 그런 미끼를 덥석 물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런데 만나보니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인간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 하여 친구의 손을 꼭 잡고 그의 숲 속 방(스스로 '집필실'이라고 칭했다)
에도, 도요에도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온갖 책을 사방에 짐짓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이며, 나무 밑둥을 잘라
두꺼운 유리판을 걸쳐놓고 책상 겸 다탁으로 쓰는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알고봤더니 그는 신문이나 잡지의 독자문예란에 투고하는 여성들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갖가지
달콤한 말로 유인한 뒤 자신의 작업실이나 도요로 가는 으슥한 길목에서 강제로 자빠트리는
그런 인간이었다.(내 연락처는 내 친구인 그 여성들 중 한 명에게서 훔침! 으시시하죠?
자세한 이야기는 페이퍼로 하나 따로 쓸 생각.)
진짜 예술가들은 예술가연하는 이런 놈들 때문에 아주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작업이 무엇에 소용될 것인가 하는 의문에 이르면 미치기 직전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비싼 값으로 팔려 부자들의 거실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인다 해도 그 마음이 편할 것인가?
그런데 이 책에 실린 화가들, 가족도 없이 혹은 가족을 떠나 깊은 산속이나 도심의 방 한 칸에서
혼자 자신의 예술과 씨름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라.
자신의 작품을 정당하게 세상에서 평가 받고 이름 또한 얻고 싶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화가도
물론 있을 것이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나를 제발 그냥 좀 내버려 두시오!' 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도인 같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든, 이루어 가는 과정이든, 아니면, 아무런 뜻이 없든... 아무튼 그들은 모두
예술가였다.
'갑판 위의 시인' 뱃사람 청도로만 알려져 있는 화가의 바다 그림은 실제 바다만큼이나 짙푸른 색감과
거친 물결로 나를 압도했으며, 목수 일로 최소한의 생계를 확보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김을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표지 그림을 그린 화가 김명숙의 고개 숙인 흑백사진을 보면 '체념'과 '치열함'이
공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된다.
--여수에 내려갈 때마다 나는 강종열의 작업실을 방문한다. 선착장 근처에서 벗어나 바다와 섬이
한눈에 들어들어오는 아담한 작업실 풍경이 그립다.(...) 이 풍경을 보면서 조용히 죽어가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마음들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글머리에)
이 책에 소개된 열 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업실은 대부분 '이 풍경을 보면서 조용히 죽어가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공간으로 내게 다가왔다.

김근태, 경주 작업실

박정애, 방배동 작업실

박정애의 작품 '길 가다 웃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