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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뜸의 거리
코노 후미요 지음, 홍성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어젯밤, 책을 받아들고 나서 솔직히 얇은 두께에 적잖이 실망하였다.
"뭐야, 정가가 7천 원인데 이렇게 가볍고 얇아도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볼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나흘 전, 메일을 체크하던 중 이 만화를 발견한 나는 제목에 사정없이 끌려 검색하고,
표지와 줄거리를 확인하고 난 후 2분도 망설이지 않고 주문장을 접수했다.
보관함에 책을 넣어놓고 한두 달을 대기해야 겨우 장바구니로 이동할까 말까 하는 처지의
많은 책들이 볼 땐 억울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간에 책이 예쁘긴 하지만 이렇게 얇다니!
하지만 첫눈에 끌린 이성처럼 이 책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취침 전 나의 책으로 또다시 간택이 되었으니까.
(리뷰보다 사설이 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로부터 10년,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랑했던 도시 전체가,
사람들 모두가 생각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날로 질질 끌려간다.
네가 살 세계는 여기가 아니야,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25쪽)
그날이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던 1945년 어느 여름날을 말한다.
작은 건축연구소의 사무원인 미나미는 원폭으로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살아남았는데
구두가 닳는 것이 아까워 동네에 들어서면 맨발로 걷고, 사무실 맞은편 양장점 윈도우에 걸린
원피스를 제법 비슷하게 바느질하여 만들 줄도 아는 손끝이 야무진 소녀이다.
같은 사무소의 우치코시와의 사이엔 바야흐로 이상한 감정의 기류가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10년 전 넋이 나간 것 같았던 어머니도 많이 회복되어,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가요 게임'을 빨리 가서 들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꽤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데 개천이 흐르는 동네 초입에만 들어서면 그녀의 입에선 알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죽은 줄 알았어요, 오토미상... 살아 있었다고는 부처님이라도 몰랐을 걸요, 오토미상?
그녀는 그 개울에 자신도 잘 아는 수많은 얼굴이 시체로 둥둥 떠있던 그날의 참혹한 정경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945년이나, 미나미의 일상을 그리는 그로부터 10년 후나, 또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후
그녀의 조카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세 편의 이 연작 만화에는 전쟁이나 원폭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언급이나 묘사는 없다.
맡은 일을 하며 순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맑고 연한 된장국이 끓을 때
나는 냄새와 훈김으로 맡아질 뿐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한 어떤 일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이 만화는 정말 섬뜩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운좋게 100년을 살아봐도 인생에는 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느 집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는 맑고 연한 된장국 냄새를 맡으며
좋아하는 방송 프로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순간,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이 만화는 말하는 듯하다.

일상의 소중함! 진부한 말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