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씨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인지 미국에서 투병중인 그에 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글 잘 쓰는 우리나라의 화가들 하면 요절한 화가 최욱경, 그리고 김원숙, 김점선, 황주리
등의 면면이 떠오르지만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된 글 잘 쓰는 화가는 천경자 씨가 처음이었다.
오래 전 그의 글을 엄청 낄낄거리며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을 썩 좋아하지 않은 건
그에게서 보이는 너무 심한, 에고이스트랄까, 부르주아풍이랄까 뭐 그런 면모들로 인해서였다.
카리스마는 또 어떻고!
그의 그림 속 여인들에게서 맡아지는 고독의 냄새는 내가 사는 세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 감탄하며 보고는 그만이었다.
내게는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10년도 더 전, 동숭동의 식당 낙산가든에 갔더니 시인 구상과 천경자 여사가 막 들어와
우리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두 분은 막역한 친구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자친구가 바바리 벗는 것을 도와주고
의자에 먼저 앉기를 기다리는 노시인은 거동이 조금 불편한 상태였지만 그날 그 식당을 찾은 손님들 중
최고로 멋진 신사였다.
자연스레 틀어올린 머리에 목에 두른 스카프 한 장까지 예사롭지 않았던 화가는
그때 이미 칠순에 가까운 나이였을 텐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성의 향기를 팍팍 풍겼다.
서울에 오니 저렇게 유명한 예술가들의 옆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구나, 하고
흐뭇하여 친구와 잠시 속닥였던 기억이 난다.
저 나이에 저렇게 멋진 이성친구와 한결같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부러웠던가!
구상 시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방송으로 듣고 낙산가든에서 뵈었던 그 멋진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화가가 느꼈을 슬픔에도 잠시 생각이 미쳤다.
언젠가 청담동 김동리 선생 댁에 원고를 받으러 갔다가 잠시 차를 한잔 얻어 마시며
다음 코스는 사당동 서정주 시인 댁이라고 했더니 그분의 입가에 떠오르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글마(그 녀석의 경상도 사투리)한테 안부 전해줘!"
서정주 시인에게 그 말을 그대로 전했더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멋진 미소를 보여주셨지.
그때는 두 분 다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소설가 최정희 선생님이 정릉 댁에서 투병중이실 때 김동리 선생님이 문병을 가셨다.
둘도 없는 화투 친구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새 양복에 빨간색인가 자주색 나비넥타이까지 꺼내어 매셨는데.
백발을 길게 풀고 누워 계셨던 최정희 선생님은 멋을 잔뜩 부리고 나타난 남자친구를 보고
환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분들은 지금 모두 세상에 안 계신다.
스쳐 지나가며 봤든, 아주 가까이서 뵈었든,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든,
투병중이라든지 돌아가셨다든지 하는 원로예술가들의 소식을 접하면
마음 한켠이 저릿저릿해진다.
(**제목은 소설가 서영은 선생의 글 제목에서......)